[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12. 박경리선생이 그리워 한 '의인 이중하'

Gijuzzang Dream 2008. 5. 17. 03:07

 

 

 

 

 

[간도오딧세이] 박경리 선생이 그리워한 ‘의인 이중하’

 

 

 

한국 문단의 큰 별이 떨어졌다. ‘토지’의 작가인 박경리 선생이 5월 5일 우리 곁을 떠나간 것이다.

1995년 12월 10일 박경리 선생은 동아일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독립운동 전개한 간도의 투사들

박경리 선생

 

“그때 북방 간도땅에서는 또 변발과 호복을 마다하고

청국에 귀화하는 것을 한사코 불응하는 조선족 유민 때문에

일어난 국경분쟁이 있었다.

 

귀화하든지, 아니면 두만강 너머로 철수하라는 청국 요구에

10만 유민을 두고 진퇴양난에 처한 조선 정부는

종성사람 김우식을 시켜서 백두산을 답하게 하여 정계비를 찾아내었다.

 

그러고는 정계비에 명시된 토문강은

북류하여 송화강에 이르는 것으로서 토문강 밖의 유민은 철수하되

도문강 밖, 즉 간도땅의 거주자는 조선 영토인 만큼 철수할 이유가 없다는 방침을 정했다.

 

조선 정부는 청국과 3차에 걸쳐 담판을 했는데,

그때 이중하는 ‘차라리 내목을 쳐라!

그러나 국경선은 결코 축소할 수 없노라’고 극렬하게 주장하며 물러서지 아니했다.

 

결국 일제시대에 와선 만주 침략의 발판이 될 철도부설권을 얻어내려고

일본은 청국과 간도협약이라는 것을 체결했고, 국경선은 두만강 쪽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한일합방이 무효라면 간도협약도 무효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하더라도 이치가 그렇다는 얘기다.”

박경리 선생은 이 글에서 이중하를 ‘의인’이라고 칭했다.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라는

찬사까지 덧붙였다. 그가 의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더 있다.

 

‘일제 36년 그 동안에도 저 연해주의 눈보라를 헤치며 만주벌판 빙하를 행군하던 독립전사들’이

의인이었고, ‘어느 산야에서 까마귀 밥이 될지 기약도 없이 보상의 그날까지 물시한 채 사라져간 사람들’이 의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간도에서 독립운동을 한 투사였다.

 


토지 2부의 주요 무대인 간도는 ‘꿈의 땅’

토문감계사 이중하

 

박경리 선생이 이중하라는 인물을 주목하고,

간도에서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을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소설 ‘토지’를 읽어보면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토지 1부의 주요 무대는 경남 하동 평사리지만,

2부의 주요 무대는 간도의 용정이다.

 

‘토지’의 주인공인 서희는 빼앗긴 토지를 찾기 위해 간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나선다.

1911년에서 1917년에 이르는 6~7년의 세월이 토지의 2부를 장식한다.

당시 간도는 새로운 꿈을 이룰 수 있는 ‘신세계’였고, 독립운동가로서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는 ‘꿈의 땅’이었다.

비록 1909년 일본과 청의 간도협약 체결로, 그 땅이 청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지만 유민들은 그때까지도 청의 영토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땅이 우리나라 땅이라 생각했다.

서희가 그랬고, 서희의 남편인 길상이도 그러했다.

길상이는 서희가 다시 하동으로 돌아간 후에도 간도에 남아 독립운동을 했다.

박경리 선생은 ‘토지’를 집필하면서, 그동안 역사 속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이중하란 인물을 주목했다.

그가 있었기에 흉년으로 굶주린 주민들은 새로운 꿈을 안고 간도땅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는 이중하를 ‘의인’으로 칭하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원주의 새벽하늘을 보며 박경리 선생이 이중하를 의인으로 그리워했듯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슬픔과 한을 올올이 엮어낸 그의 비단 같은 작품을 보며

우리 시대의 ‘의인’인 그와, 그가 ‘의인’으로 칭한 이중하를 그리워할 것이다.
- 2008 05/27, 경향 뉴스메이커 776호

- 윤호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