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연나라 강역도’와 조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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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연나라 땅이라고 우기는 中역사서 | ||||||||||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 5군을 두어 오랑캐를 방어하였다.”(사기 흉노열전 · 연소공세가) 요새에 성을 쌓았다.”(사기 조선열전)
랴오닝성 박물관에 붙어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강역도를 보자. 그 경계가 랴오둥(遼東)은 물론 한반도 서북부까지 이른다. 화가 치밀어올라도 어쩔 수 없다. 잘못 대들었다가는 일패도지(一敗塗地)할 수밖에…. 사료를 반박할 그럴듯한 근거를 대라 하면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만한 사료도 갖추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 중국 측 자료는 어차피 중국의 역사를 쓴 것이고, 주변국의 역사는 자기 역사를 치장하기 위한 양념일 뿐이다. 따라서 소략하게 취급하거나 폄훼하거나, 왜곡하기 일쑤다. 우리는 이쯤해서 마음을 다잡고 중국 측 사료에 담겨 있는 구절을 일일이 따져보고, 그것이 품고 있는 함의에서 진실을 찾을 참이다. 하지만 책장에서만, 그것도 숨은 뜻을 찾고자 하면 그 또한 자기 위주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기에 중국학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고학적인 뒷받침, 곧 증거를 댈 참이다. 최근 지린대(吉林大) 역사교과서인 ‘동북사’는 “주나라 초기의 기자국(箕子國)은 고조선 땅에 있었는데, 지금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周初的箕子國位于古朝鮮地 也就是在今朝鮮大同江流域)”이라고 해놓았다.
즉 기자가 은(상)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 본향, 즉 은(상)나라의 옛 고향인 랴오닝성 서부지역으로 간 뒤 곧바로 한반도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箕子首先遷到今天的遼寧省西部地區 而後又從這里遷往朝鮮半島) 그러면서 교과서는 랴오닝성 카줘(喀佐) 등에서 나온 ‘기후(箕侯)명’ 청동기 등 각종 은(상)의 청동예기들을 그 증거로 들었다. 청동기 명문인 ‘기후(箕侯)=기자(箕子)’임을 논증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대신 기자가 정착한 다링허(大凌河) 일대에서는 BC 9세기 무렵부터 기자 일행이 기존의 고조선 세력과 함께 만든 문화, 즉 발해연안식 청동단검(비파형 동검)을 중심으로 한 난산건(南山根) 문화가 성행했다. 또 춘추전국시대 중원의 북방, 즉 중산국과 고조선 등 동이의 나라들과 국경을 맞댄 연나라의 역사를 보면 몇가지 이상한 점을 느낄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상)을 멸한 뒤(BC 1046년쯤)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했다.
그런데 소공이 연나라 땅에 분봉을 받았음에도 주나라의 도읍지 풍(豊·지금의 펑이 : 豊邑) 주변을 맴돌며, 결국은 섬(陝·지금의 허난성 산셴 : 陝縣)의 서쪽 지방을 관할하는 지위에 오른다는 것이 두고두고 이상한 일이다. 더욱이 주나라 초에는 은(상) 유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다. 주 무왕의 동생들인 관숙과 채숙이 은나라 유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성왕이 즉위한 뒤에야 겨우 산둥성(山東省)에 살던 동이족들을 정벌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동이족 계열인 은(상)의 반발이 거셌다는 얘기다. 성왕 초기에도 동쪽인 산둥성에서 헤매고 있었거든…. 은(상)의 항거가 워낙 거셌던 탓에….” (이형구 교수) 그리고 성왕 이후에 지금의 베이징 서남쪽인 팡산셴(房山縣) 부근으로 둥지를 옮겼을 겁니다. 역사서에는 연의 도읍지를 지셴(계縣 · 上都)과 이셴(易縣 · 下都)이라고 했거든. 어쨌던 류리허(琉璃河)에서 확인된 연나라 왕의 무덤이 그 단서가 될 것 같아요. 류리허에서 서주 초에 축조된 연나라 성터와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거든.” 이 류리허 유적의 북쪽, 즉 옌산(燕山) 이북에서는 전형적인 춘추시대 연나라 유적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전형적’이라 하면 하나의 세트, 하나의 패턴을 갖춘 유적과 유물의 조합을 뜻한다. BC 334년 소진은 합종을 위해 연나라로 가서 “연 · 제 · 위 · 한 · 조 · 초 등 6국이 합종하지 않으면 강대한 진(秦)나라를 이길 수 없다”고 설파한다.
그러면서 앞세운 말. 즉 조선→요동 순으로 차례차례 말했다고 보는 게 상식이 아닐까. 그러니까 조선은 요동(랴오둥)의 서쪽, 즉 랴오시(遼西)에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또 하나 소진의 말에서 또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면 이 시기, 즉 BC 334년에는 최소한 조선과 랴오둥은 연나라의 영역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즉 연의 강역이 동으로 랴오둥을 넘어 한반도까지 이른다는 기록은 어찌된 것인가.
지금 ‘사기’ 연소공세가와 조선열전, 흉노열전 등에 나오는 연나라의 강역은 전국시대 중기~말기, 즉 연나라 전성기의 기록이다. 안으로는 제(齊)와 진(晉) 등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느라 국력이 가장 약했고, 망할 뻔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800~900년간 사직을 보존했으며~.” 하기야 그랬을 것이다. 이 때를 틈타 제나라와 중산국이 손을 잡고 연나라를 쳤다.(경향신문 4월26일자 참조) 이때 중산국에 땅 500리와 성 10곳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고(314년), 나라는 거의 망국에 이른다. 이 때 등장한 이가 바로 연나라의 중흥군주 소왕(昭王·재위 BC 311~BC 279년)이다. 군사전략가인 악의(樂毅 · BC 406년 중산국을 멸한 위나라 악양의 후손)가 위(魏)에서, 음양오행에 해박한 추연(趨衍)이 제나라에서, 힘이 장사인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일제히 달려왔다. 다섯 나라 중 유일하게 연나라 군사만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까지 진입, 제나라의 궁묘와 종묘를 불살라 버렸다. 제나라 성 가운데는 즉묵(卽墨 · 산동성 핑두셴 : 平度縣) 등 3성만이 남았고 나머지는 모두 연나라에 속했다. 이번에는 반대로 제나라가 6년간 멸망 일보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군대를 이끌고 동호(東胡)를 습격, 패주시켰다. 동호는 1000여리나 후퇴했다. 진개는 훗날 자객인 형가(荊軻)를 수행해서, 진왕(秦王 · 훗날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秦舞陽)의 할아버지이다. 연나라는 조양, 양평에 이르는 장성을 쌓고~.” 기록에는 나오지 않지만 유명한 ‘형가의 진시황 암살미수 사건’에서 추론할 수 있다. 형가 사건이 일어난 것이 BC 227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형가를 수행한 진무양의 할아버지인 진개는 연 소왕의 전성기, 즉 BC 283~BC 279년 사이에 활약했던 장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연나라 망명인인 위만(衛滿)이 공격하여 (기자조선을) 빼앗았다.”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장황하게 인용한다. 전체적인 내용과 풀이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하고 연나라의 강역 부분만 인용해보면….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리를 취하였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한조에서 진수가 인용한 ‘위략’ 에서 부분 발췌) 연나라가 소왕 때, 즉 BC 300~BC 280년 사이 북방으로는 1000리, 동쪽으로는 2000리를 공격, 강토를 넓혔다는 얘기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다시 증거물, 즉 고고학적 자료와 역사서가 품고 있는 숨은 뜻을 찾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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