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중산국의 위대한 문명 | |||||||||||||
전쟁 뿐 아니라 문화도 찬란했던 ‘강소국’ 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나 나는 호복(胡服)으로 갈아 입고서라도 그들을 치고자 합니다.”(사기 조세가) 주나라의 제후국인 조나라가 오랑캐 옷을 입고 뭘 어찌하겠다는 건가? 대신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아우성친다. 그러자 무령왕이 설득에 나선다.
무슨 잔말이 많소? 옛날 순임금은 묘인(苗人)들 앞에서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옷을 벗고 나국(裸國)에 들어갔었소. 그분들은 덕정을 선양하기 위해 그러셨소. 설사 세상의 비웃음을 받더라도 난 반드시 오랑캐 땅, 중산을 반드시 차지할 것이오.” (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강조한다. 각설하고 무령왕은 기어코 호복을 입었으나 왕족들까지도 왕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나보다. 무령왕은 숙부인 공자 성(成)을 직접 찾아가 ‘호복기사’ 정책의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한다. 백성들을 약탈하고 물을 끌어내 호 ()성을 포위했습니다.(引水圍) 사직의 신령이 지켜주지 않았다면 호성(城)을 지킬 수 없었을 겁니다. 선왕께서 이를 수치스럽게 여겼지만 아직 복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호복을 입고 기병과 사수(射手)로 방비하면 나라를 지킬 수 있으며 ~중산국의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의 전말이다. 조나라가 예법을 찾는다며 치렁치렁한 옷을 입고 다녔던 구태에서 벗어나 간편한 옷(바지형태)을 입고 말을 타서 활을 쏘는 이른바 기병작전을 펼친 것이다. 그런데 기록에서 나타났듯 무령왕의 ‘호복기사’ 정책 배경에 중산국이 있었다. 전국시대 때 세치 혀로 6국의 재상이 된 소진(蘇秦)의 발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남쪽 장자(長子 · 산시성 진양·晋陽) 땅에서는 조나라를 패배시키고, 북으로는 연나라를 패배시켜 그 장수를 죽였습니다. 중산국은 겨우 천승(千乘)의 나라였는데, 두 만승(萬乘)의 나라(조나라와 연나라를 지칭)를 이겼습니다. ~”(전국책 ‘제책 · 齊策’) 해마다 중산국을 정벌한다. 선우국이던 춘추시대 때는 진(晉)의 침략으로 고난의 나날을 걸었고, 그 후 위나라의 침략에 급기야 나라를 잃고 식민지가 됐으며(BC 406년) 20여 년 만에 나라를 회복한(BC 380년쯤) 중산국. 그 중산국은 다시 조나라의 내침을 받아 끝내 멸망하고 만다.(BC 296년)
결국 두 번이나 멸망했지만 대책 없는 약소국은 아니었다.
“70~80년간, 즉 위나라로부터 해방된 때(BC 380년)부터 최종 조나라에 멸망(BC 296년)할 때까지 강대국 조나라와 연나라를 괴롭히면서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강소국’이었지. 오죽했으면 조 무령왕이 이를 갈며 오랑캐의 옷까지 입고 ‘타도 중산국!’의 기치를 올렸을까.”(이형구 교수) 이 유적에서는 3기의 왕릉을 포함, 30여 기의 무덤과 1만9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졌다. ‘강소국’ 중산의 역사를 한 눈에 짐작할 수 있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에 어린 왕을 보좌한 (중산국) 재상 사마주가 삼군지중(三軍之衆), 즉 군대를 이끌고 연나라를 토벌, 500리 땅과 성 10곳을 빼앗았다.” 이 명문 내용과 기존의 사서를 토대로 당대의 역사를 복원해보자. 중산국이 만든 방호(사각항아리 형태의 예기). “(당시) 연왕 쾌는 재상 자지를 너무도 신임한 나머지 300석 이상의 봉록을 받는 고관의 임용권을 자지에게 주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지는 마침내 국왕의 직권을 행사한다. 자지가 왕권을 차지한 지 3년이 되는 해(BC 314년) 태자와 신하들이 변란을 일으켰고, 연나라는 수개월간 혼란에 빠진다. 이때 맹자가 제나라 왕에게 ‘연나라를 빨리 치라’고 간언한다.” (사기 연소공세가) 즉시 5도의 군사와 북지지중(北地之衆 · 북방의 군사)들을 이끌고 연나라를 공격, 대승을 거둔다. 이때 연왕 쾌와 만 2년간 왕위에 올랐던 자지가 죽는다. 중산왕릉 명문에 나온 삼군지중과 사기의 북지지중이 일맥상통합니다.”(이형구 교수) 연과 조는 이때 거의 멸망의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한다. 중산왕릉에서 출토된 명문제기들은 연나라를 격파하고 의기양양해진 중산왕 착(錯)이 “연나라에서 빼앗은 구리(銅)를 택해 제기(대정)를 만들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산왕릉 출토품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착왕의 묘에서는 천자를 뜻하는 구정(九鼎), 즉 정(鼎)이 아홉개나 나왔지. 주례(周禮)의 규정에 따르면 천자는 9정, 제후는 7정, 대부는 5정, 사(士)는 3정을 갖도록 규정해놓았거든. 이를 ‘열정(列鼎)’제도라고 하는데, BC 323년 중산국이 조 · 위 · 한 · 연과 더불어 왕(천자)을 칭했음을 방증해주는 결정적인 자료지. 또 다리는 철제로, 몸통은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놀라운 주조기법도 특기할 만해요.”(이형구 교수) 양, 돼지, 개 등의 고기를 삶은 결정체가 나온 것이다. 중국학계는 “아마도 제사용 고기를 삶은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하고 있다. 또 있다. 출토품 가운데 밀폐된 술병들이 다수 나왔고, 그 안에서는 액체가 출렁거렸다. 그런데 두 개의 병을 열자 야릇한 술냄새가 나지 않은가. 성분 분석을 해보니 2개의 병에는 알코올 성분이 있었는데, 곡주(穀酒)일 가능성이 많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2300년 된 술이 처음 발견된 것이어서 흥미를 끌었다. 특히 ‘중산주(中山酒)’는 “한번 마시면 3년 동안 죽은 듯 무덤에 묻혀 있다가 깨어날 정도이며, 3년 후 깨어난 사람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그 술냄새에 3개월간이나 취할 정도”라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냥에 동원된 마차가 2~3대 확인됐다는 점. 그런데 금·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찬 목에 찬 개 2마리의 뼈가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되었다. 중원에서도 중산의 북견을 수입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출토된 편경(編磬)과 편종(編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예약제도를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전국 12웅에 들 만큼 강국이었고 조와 연나라를 떨게 했던 중산국이었던 만큼 그에 걸맞은 무기들이 쏟아졌다. 청동검과 청동도끼, 청동꺾창, 노기(弩機·화살을 연발로 쏘는 장치), 철촉은 물론 천승의 나라에 걸맞은 전차가 8량, 그리고 24필의 말이 부장됐다. 무엇보다 철과 동을 접합하는 기술, 그리고 다양한 방법의 주조·용접·금은상감기법 등이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작품들이 즐비해요. 전국시대 최고의 예술과 주조기술을 갖춘 강국입니다. ”(이형구 교수)
4마리 용과 4마리 봉황을 금은으로 상감한 책상(金銀象嵌龍鳳方案)과 잔 15개를 차례로 장식한 촛대(十五連盞燭臺), 요즘으로 치면 연예인 격인 중산국의 창우(倡優)를 표현한 촛대, 그리고 사슴을 잡아먹는 호랑이를 표현한 병풍꽂이 등은 그 아름다움과 정교한 솜씨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옥석(玉石)제품은 또 어떻고. 옥으로 만든 구슬과 옥결(귀고리), 황(璜·반원형의 패옥) 등을 합쳐 3000여 점이나 쏟아졌어요. 옥은 예로부터 불멸의 상징이잖아요. 옥제품도 인물·용·봉황·뱀·거북이·호랑이·누에·달팽이 등 얼마나 다양한지….”(이교수) 포박자(抱朴子 · 신선방약과 불로장수의 비법을 서술한 도교서적)에 따르면 “금옥(金玉)이 9개 구멍에 있으면 죽은 자는 썩지 않는다”고 했다. 중산 왕릉과 그 배장묘에 출토된 옥기의 경우 ‘시신의 구멍(규·竅)’, 즉 눈(2)·귀(2)·코(2)·입(1) 음양(2) 등에 집어넣어 죽은 자의 기운을 보호했다. 중산국과 그 문화가 아무리 휘황찬란하다 한들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제부터 중산국과 그 문화, 그리고 우리 역사와의 관계를 본격적으로 더듬어보자. 30여 년 전, 타이완 유학 시절(국립타이완대) 이형구 교수가 풀기 시작했던 중산국의 미스터리이기도 하다. - 경향, 2008년 04월 25일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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