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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연평도 풍어제 1박2일의 기록

Gijuzzang Dream 2008. 3. 26. 17:30

 연평도 풍어제 1박 2일의 기록: 황해도식 풍어제의 원형

 

뱃고사를 지낸 뒤, 띠배를 실은 모선이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고 있다.

 

풍어제를 하루 앞둔 연평도는 무척 조용하고, 심심하기까지 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 뒤 곧바로 나는 충민사로 향했다. 이번 연평도 풍어제에는 문화재청에서도 8명의 인원이 파견돼 기록을 위한 스틸과 영상작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었는데, 충민사에도 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연평도 풍어제의 가장 큰 의미는 이 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원형이 제대로 남은 황해도식 풍어제라는 것이다. 때마침 만신(임명자, 62)과 보조무녀, 장구할머니는 이미 섬에 도착해 임경업 장군당(충민사)에 장군님을 뵈러 왔다 고하고 당집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저녁에 다시 만신이 묵고 있는 민박집을 찾아가자 방안에서는 한창 굿거리에 쓸 서리화며 지화를 만들고 있었다. 서리화(대에다 종이가지를 감고 그 위에 종이꽃을 만들어 붙인다)는 장군당에 바치는 시루떡에 꽂는 꽃대를 말하며, 가지 끝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지화(종이꽃)를 만들어 단다.

 


연평도 풍어제는 임경업 장군을 모신 충민사에 올라 굿거리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실 연평도 풍어제의 시작은 첫날 밤 만신과 보조무녀, 장구할매가 당에 올라 선원 축원 및 굿거리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만신이 당에 오르기 전 풍어제를 준비해온 어민회 부회장(이진구) 댁에서는 마을 아낙들이 모여 무나물을 비롯해 삼색나물(무나물, 도라지, 고사리)을 삶아내고 무치고, 조기와 가오리찜, 삼색과일(배, 사과, 곶감)도 준비하고, 사내들은 밖에서 돼지고기를 삶아낸다. 저녁 11시. 하늘에는 별이 총총한데, 만신 일행은 임장군당에 올라 선주축원, 마을축원과 더불어 고사상을 차려놓고 굿거리를 펼치기 시작한다. 당 밖에서는 선주들이 하나 둘 뱃기를 들고 올라와 당 앞에 꽂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먼저 뱃기를 꽂는 선원이 장원한다(가장 먼저 만선한다)고 하여 뱃기 꽂기 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굿은 여러 판을 거듭하며 3시간이나 계속되었다. 신이 내린 상태에서 만신은 이런저런 사설을 쉴새없이 늘어놓고, 선주들과 주변 사람들의 신점을 치기도 한다.

 

배치기 노래와 사슬 세우기 


날이 밝으면 본격적인 풍어제가 시작된다. 10시가 넘자 어민회 부회장댁에 풍물패가 모여 풍물을 치며 풍어제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는 어민회 깃발을 뽑아들고 임경업 장군당에 오른다. 당에 이르면 무당은 장군 앞에 상을 차리고 제석신에게 복을 빌고, 선주들을 위해 축원고사를 지낸다. 이어 연평도 어민회를 비롯한 여러 선주들이 돌아가며 장군에게 술과 향을 올리고 절을 하며 풍어와 안녕을 빈다. 당 안에서의 제례가 다 끝나면 당 앞의 마당에는 따로 고사상을 차려놓고 풍물패가 풍어를 비는 고사를 지낸다. 그리고는 풍물을 치며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에-에헤야 에헤 에-에헤 에-에헤 에헤 에헤 어하요(후렴)/연평바다에 널린 조기/양주만 냉기고 다 잡아 들이자”로 시작하는 배치기 노래와 함께 춤을 춘다.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도 흥에 겨워 하나 둘 춤판에 뛰어든다.

 


사슬세우기. 만신이 삼지창에 돼지살을 꽂고 신을 불러 사슬을 세우는 굿거리를 말한다.

 

어느 정도 흥이 돋우면 만신은 마당으로 나와 사슬세우기를 한다. 사슬세우기란 삼지창 양쪽에 각각 돼지 갈빗살을 꽂고 가운데 돼지머리를 꽂은 뒤 신을 불러 사슬을 세우는 굿거리를 말하는데, 이 때 삼지창 밑바닥에는 소금그릇을 받친다. 사슬이 균형을 이뤄 잘 서야 그 해의 풍어운도 좋은 것이다. 바람이 조금씩 부는 날임에도 이날의 사슬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이 순간은 모든 구경꾼이 숨을 죽이고 지켜본다. 이어 장군당 문앞에 세워두었던 어민회 깃발을 내려 당안으로 들이밀고, 만신은 이 깃발에 풍어운이 깃들도록 축원을 한다. 그런 다음 깃발을 당 밖으로 내어 더북과 장애발을 꽂는다. 다섯 군데(다섯 봉아리)에 꽂는 더북은 솔가지를 꽂는 것을 일컬으며, 세 군데에 매는 장애발(장군발)은 흰 띠줄이나 백지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말한다. 이제 풍물패는 더북과 장애발을 묶은 이 깃발을 들고 마을로 내려간다. 이 때 선주들도 모두 당 밖에 세워두었던 뱃기를 뽑아 내려가 집 앞에 건다. 본래 행선하는 날에는 이 깃발을 배에 꽂게 되는 것이다. 풍물패는 어민회 깃발을 앞세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돌며 지신밟기를 하는데, 주로 뱃기가 걸린 집들을 차례차례 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풍물패는 포구로 깃발을 앞세우고 나간다. 미리 만들어놓은 띠배도 포구로 향한다.

 


모선에 올라탄 무녀들과 풍물패가 뱃고사를 준비하고 있다.

 

띠배를 배에 옮겨싣고 그 배에 무녀들과 풍물패가 올라타면, 뱃고사를 지낸다. 배 앞머리에 용왕신에게 바치는 음식을 차려놓고 풍어와 해상의 안전을 비는 것이다. 뱃고사를 지내는 동안 배는 포구를 떠나 바다로 나아간다. 선주들과 풍물패는 파도에도 아랑곳없이 배 위에서 신명난 놀이판을 펼친다. 드디어 흥이 절정에 이를 때쯤 둥그렇게 만든 띠배를 띄운다. 띠배를 띄울 때는 먼저 작은 삿대처럼 만든 불쏘시개에 불을 붙여 배를 한 바퀴 돈다. 배 위의 부정한 기운을 태우는 것이다. 그런 다음 띠배를 바다에 내려 돛대처럼 솟은 띠배 위에 뱃고사 음식을 싣고 술을 따른 뒤, 불쏘시개로 불을 붙여 바다에 띄워보낸다. 이제 바다에는 불 타는 띠배 한 척이 출렁출렁 파도에 실려가고, 띠배를 띄워보낸 배 위에는 풍어를 비는 배치기 노래가 찰랑찰랑 울려퍼진다.

 


뱃고사를 지낸 모선이 둥그렇게 생긴 띠배를 싣고 바다로 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풍물패의 배치기 노래가 이어진다.

 

풍어제는 여기서 다 끝나지만, 연평도에서는 또 하나의 의식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연평도와 연평도 바다를 지켜주는 해군 전함을 방문해 뱃고사 음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고사를 지낸 배는 몇 해 전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참수리호에 다가가 시루떡이며 백설기, 과일과 고기 등을 내려놓는다. 바다에 떠 있는 해병의 수에 비하면 음식이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연평도 어부의 정성이고 마음인 것이다. 이제 배는 모든 의식을 끝내고 포구로 돌아간다. 붉고 노란 저녁 노을은 해주쪽 하늘에 걸려서 등대 너머로 눈부신 하늘빛이 펼쳐져 있다. 노을에 물든 갈매기떼도 저녁 하늘을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날은 춥고, 해풍도 심했지만, 포구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아직도 흥에 겨워 춤을 추고 배치기 노래를 부른다.  

 

60년대 한달씩 굿판을 펼친 대동굿

 

조기파시가 한창이었던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평도의 풍어제는 한달씩 굿판을 펼치는 대동굿을 열 정도로 큰 판이었다. 그 때는 소도 몇 마리씩 잡고, 소연평, 대연평 주민들이 모두 참여해 장군당에 올라 풍어를 빌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의 풍어제는 약식으로 지내는 셈이다. 연평도는 1968년까지 우리나라 최대의 조기파시가 열리던 ‘파시의 수도’나 다름없었다. 당시 연평도에는 조기를 �는 어부들과 어부를 �는 객주와 색시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왁자하고 발 들일 틈 없이 성대한 파시를 이루었다. 그 때는 대연평뿐만 소연평 앞바다까지 배가 빼곡하게 떠서 배 위로만 걸어 소연평까지 걸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의 조기 잡던 어부들도 연평도를 흔히 서울 다음이라 했다. 그만큼 연평도가 번창했고, 조기파시가 성황을 이루었다는 얘기다.

 


한 풍물패가 불쏘시개에 불을 띠배에 옮기고 있다. 

 

‘똥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도 연평도에서 나왔다. “하이고, 그 때는 왜 뱃사람들이 해변에 내리잖아, 그래 급할 때는 해변에서 똥을 누는데, 종이는 없고 대신 돈으로 뒤를 닦고 버렸거든. 그러니 여기 개들이 그 돈을 물고 다닌거야. 그 때는 남한 일대 조깃배는 다 왔어요. 오죽하면 조금사흘 벌어서 1년 먹고 산다는 말도 있었어. 그 때 보면 수협 앞에 돈을 넣은 마대자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 사람들이 그 때는 순진해서 그게 돈자루인지도 몰랐지. 그러니 집에다 엮어놓은 조기 두름은 훔쳐가는데, 마대자루는 온전했지 뭐. 50~60년대만 해도 여기에 술집 색시가 1000명 정도 들어왔어. 집은 다 초가집인데, 색시는 한 집에 다섯 명, 열 명 짝 깔렸었어. 그러니 조기 잡는 어부들은 여기를 작은 서울이라 불렀지. 조기 파시 시절 조기 어망이 떠오를 때 보면 온통 황금빛이야. 줄을 잡아 올리면 금이 반짝반짝 하는 것처럼 조기비늘에서 금빛이 났으니까.”  인천에서 시집와 40년 넘게 연평도에서 살았다는 이기숙 씨(66)의 말이다.


과거에는 연평도 조기를 조기 중의 최고로 꼽았다. 연평도 조기 중에서도 3~4월 첫 행선 때 잡은 조기를 ‘오사리’ 조기라 하여 최고로 쳤다. 이 오사리 조기는 맛도 맛이지만, 제사 때만 올리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과거 조기잡이는 빠를 때는 2월 말, 대개 3월쯤에 행선을 하여 달포쯤 파시를 이루었다. 어장은 칠산바다에서부터 연평도 안목까지 이어졌다. 일찍 행선한 배는 칠산바다에서부터 조기를 따라 곡우 무렵인 4월에는 연평도로 올라왔다. 하여 연평도에서의 조기 파시는 4~5월에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조기잡이배는 돛대를 단 풍선배였는데, 큰배는 100동(1동에 1천 마리)까지도 잡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씨알이 많던 조기도 조깃배가 많아지고 저인망 어선이 생겨나 조기가 올라오는 길목에서 싹쓸이를 해대면서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더더욱 중국배들까지 우리 바다를 침범하면서 그렇게 많던 조기가 이제는 연평도에서조차 희귀한 어종이 되고 만 것이다.

 


띠배를 불에 붙여 띄어보낸 모선이 노을 속을 헤쳐 연평도 항구로 돌아가고 있다.

 

연평도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도 한다. 소연평에 높이 솟은 소연평산에는 오랜 옛날부터 신기한 구름과 실안개가 늘 감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몇 십년 전 티타늄 광석을 캐어내기 위해 산을 깎고 허물면서 연평도의 고기잡이와 운세도 더불어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연평산은 연평도 사람들에게는 신령한 산으로 통했다. 그 옛날 소연평산의 우뚝 솟은 봉우리는 만선으로 부푼 조깃배의 우뚝한 돛대나 다름없었다. 산을 깎음으로써 그 돛대가 꺾였다고 여기는 것이다.


애당초 연평도에서의 조기잡이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1636)이 일어난 뒤 임경업 장군(1594~1646, 충주 출생)은 배를 타고 청나라로 향하던 중 연평도에 들르게 되었다. 식량이 모자라던 차에 장군은 연평도 안목에 이르러 가시나무를 바다에 죽 꽂아(어살법) 조기를 잡아올렸는데,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 임 장군이 선보인 어살법에 의한 조기잡이는 1960년대까지도 안목에서 성행하였고, 오랜 동안 많은 조기를 잡았다고 한다. 연평도의 충민사는 바로 그런 임경업 장군을 기리고 오래오래 숭배하고자 조선 후기에 세운 사당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장군당은 소실되고 말았고, 6.25가 끝난 뒤 1954년에 연평도 주민들은 새로 당을 지어 임 장군을 모신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구름을 유목하는 옴팔로스:: http://gurum.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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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구름과연어혹은우기의여인숙
글쓴이 : dall-le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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