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서울이야기] 종로, 전차

Gijuzzang Dream 2008. 3. 24. 20:11

 

 

 종로, 전차 (1)  



 

아차산 능선 위에 있는 경계 표지판.

산 능선은 그나마 가시적인 구분선 구실을 하지만 평지에서는 작은 골목 하나가 경계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빠르게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는 표지판을 보는 것 말고는 도시의 경계를 구분할 방법이 없다.

 

전근대의 도시는 본래가 “농촌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이었다.

이 섬의 경계인 해안선 - 도시의 성벽 - 은 누구나 명료히 인지할 수 있었고,

아무나 함부로 건널 수 없었다. 그러나 제어할 수 없는 확장 동력을 내장한 근대 도시는

자신의 경계 = 성곽을 스스로 허물면서 커 나갔다.

 

오늘날 도시는 더 이상 ‘작은 섬’이 아니며, 그 경계 역시 해안선처럼 명료하지 않다.

현대의 거대도시는 농촌에 둘러 싸인 공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가진 도시에 포위된 공간이다.

한 도시를 벗어나면 곧바로 다른 도시가 나타나는 ‘연담도시’에서

공간 구조나 가로 경관만으로 도시의 경계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대머리인 사람의 이마와 머리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 서울을 벗어났음을 알려 주는 시각 정보는

“안녕히 가십시오. 또 오십시오. 서울특별시”라고 쓰인 표지판과

그 건너편에 “어서오십시오. 여기서부터 경기도입니다”라고 쓰인 표지판 뿐이다.


1974년 서울시 종합계획도.

이른바 심핵도시 구상과 관련하여 종로, 중구 일대의 구도심과 여의도, 영등포 일대

그리고 영동지구를 역점지구로 설정하였다.

 

도시의 구분선 자체가 모호한 마당에 도시 내부의 경계가 명료할 수는 없다. 특히 오랫동안 도시 내부를 구획하는 기준점 구실을 해 왔던 도심(都心)은 이제 더 이상 객관적 실체가 아니다. 오늘날의 거대도시에서 교통의 결절점이면서 행정, 산업, 문화의 중추기능이 모두 모여 있는 ‘단일 장소’를 찾거나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의 거대도시는 본래가  ‘다핵도시(多核都市)’이다.

1974년 구자춘(具滋春) 시장을 만난 홍익대 교수 김형만(金炯萬)이 서울을 “철학이 있는 다핵도시(多核都市)”로 만들자는 의견을 내지 않았더라도 서울은 다핵도시, 다심도시(多心都市)가 되었을 터이다. 이 때의 ‘철학이 있는 다핵도시’ 주장은 도시의 다핵화 자체를 낳은 것이 아니라 세종로에 행정부, 여의도에 입법부, 영동(永東) - 오늘날의 강남구, 서초구 일대는 한동안 영등포의 동쪽지역이라는 뜻에서 영동지구라는 몰개성한 이름으로 불리웠다 - 에 사법부 하는 식으로 다소 우스꽝스러운 권력 거점의 공간적 분기를 낳았을 뿐이다.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

2004년 12월 현재 충무로 1가 24-2 명동빌딩 스타벅스 커피점 자리는 1평당 1억 3851만원을

기록했다. 최고 지가(地價)의 땅이 명동에서 충무로쪽으로 이동한 것은

최근의 재개발 탓이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 내내 충무로= 본정(本町)이 1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여기에서도 ‘탈환’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듯 하다.

 

현대 서울 사람들은 각개인의 경험과 처지에 따라 도심을 달리 설정한다.

도시공간을 거리나 면적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도심은 용산이나 한남동이고,

땅값 - 같은 도시 내에서라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토지의 가격은 주택지의 가격보다 비싸게 마련이다.

상업용지가 집중한 중심업무지구(CBD = Central Bussinss District ; 소매상업과 사적 이익을 위한 다양한 사무소 활동이 지배적인 지구)의 지가(地價)는 다른 지역보다 훨신 높은데, 이 개념은 대개 도심부와 큰 차이 없이 사용된다 - 을 기준으로 도시공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명동을 도심으로 생각한다.

 

또 물질의 소비보다 욕망의 소비를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청담동이나 대치동이 도심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설정한 도심을 기준으로 자기 동네와 자기 자신의 위치 - 어느 곳에 살고 어느 자리에 서는지가 사람의 등급을 표현하는 것이니, 지위(地位)라는 말은 참으로 절묘하다 - 를 판단한다.

 

서울의 도심은 분명 여러 곳이다.

도시계획 전문가들이 도심부를 특정(特定)하고 부심(副心)을 설정하는 등의 행위들과는 별도로

사람들은 자기 자리와 눈높이에서 도심(都心)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노인(老人)들의 도심, 기억 속의 도심, 그래서 역사적인 도심(都心)은 단 한 곳뿐이다.

종로(鍾路).


탑골공원 팔각정에 앉아 있는 노인들.

탑골공원 성역화 사업은 한편으로 노인들의 탑골공원 입장을 제한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공원 안의 노인 밀도는 줄었지만, 공원 밖에서 노인이 점거한 공간은 오히려 확장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은 ‘노인의 공간’이며,

이 두 지점을 잇는 길은 ‘노인의 거리’가 되어 있다.

 

노인들이 탑골공원을 거점화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말부터였다.

1988년의 탑골공원 무료화가 일차적인 계기가 되었고,

1994년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한 전철 무임승차제 도입도 지하철 1, 3, 5호선이 통과하는 종로 3가역의 노인 인구 흡인력을 배가시켰다. 노인들이 이 곳을 거점으로 삼자 노인을 상대로 하는 각종 영업 - 자선활동과 무료봉사를 포함하여 - 도 이 주변에서 활기를 띠었다. 교통의 편리성과 무료 휴식공간,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의 영업적비영업적 활동이 노인들을 이 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뿐일까. 서울시가 노인들을 탑골공원에서 몰아내기 위해 새 쉴 자리 - 경운동 서울노인복지센터 - 를 만들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은 그 곳으로 잘 가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편, 종묘 쪽으로 이동하여 노인의 공간을 확장시켰다. 노인들이 탑골공원 주변을 찾는 것은 이곳이 단순히 ‘접근이 용이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 곳’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 일대에 그들의 ‘왕년(往年)’이 함께 머물러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종묘 앞의 노인들.

탑골공원 성역화 이후 종묘 부근이 노인들의 새로운 거점으로 등장하였다.



구도심(舊都心) 종로는 쇠락해 있고 더 쇠락해 가고 있는 도심(都心)이다.

그래서 그 역시 노쇠해 있고 더 노쇠해 가고 있는 노인들에게 이 장소는 그들 자신의 처지와 오버랩되는 ‘이미지의 공간’이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도 종로가 쇠락하고 있다는 불만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도 보신각 주위의 ‘종로 네거리’는 한국은행 앞 광장과 더불어 당당한 양대 도심이었다.

그러나 근래의 종로는 중심업무지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지 오래이다. 삼성 종로타워(1999년 완공)가 당당한 강북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는 있지만, 상업가로(商業街路)로서는 아무래도 을지로나 남대문로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1960년대 말 이후 종로는 지속적으로 쇠락하였다.

 

1966년 광화문 지하도 건설 현장.

이 지하도를 건설하면서 세종로의 전차 궤도가 철거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시내 전차 전노선의 철거로 이어졌다.


1966년 10월 세종로쪽 전차 궤도가,

이어 1968년 11월 전차 궤도 전부가 철거된 것은 종로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0년대부터는 정부의 강남 개발 촉진책이 본격화하면서 종로를 떠받치고 있던 인적, 물적 요소들이 강남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에는 경기, 휘문 등 종로 북변의 ‘명문’ 고등학교들과 종로 동편의 서울대학교가 한강 이남으로 옮겨갔고, 주변의 입시학원들도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1979년에는 반도호텔과 국립도서관, 산업은행 - 옛 조선식산은행 - 자리에 롯데가 초대형 호텔과 백화점을 세우면서 상업 중심지를 남대문쪽으로 한걸음 더 끌어 내렸다. 충무로의 신세계백화점 - 옛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 과 더불어 서울의 양대 백화점으로 명성을 누리던 화신백화점은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남대문로와 명동에 새로 들어선 백화점들에 밀리다가 1987년에 헐려버렸다.

화신백화점이 헐리기 전 십수년동안, 그 건물 꼭대기층에 있던 화신극장 간판에는 “매일 매일 쇼도 보고 영화도 보고”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고, ‘20세기 센츄리쇼단’라는 이름도 희한한 쇼단이 매일 공연했는데, 이 쇼단도 화신백화점 건물과 함께 소멸했다. 화신백화점 건물의 철거와 ‘20세기 센츄리쇼단“의 소멸은 종로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성이 최종적으로 붕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1980년대까지 지식인, 대학생들의 아지트로 각광을 받던 종로서적이 인근의 대형서점, 교보문고와 영풍문고를 당해내지 못하고 부도처리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의 일이었지만, 그보다 훨씬 전에 동화서적, 양우당, 문학당 등 종로의 ’나름대로 큰‘ 서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1987년 철거 직전의 화신백화점.

이 건물은 본래 육의전의 수좌이던 선전(縇廛) 자리에 박흥식이 새로 지은 것이다.

선전은 중국산 비단을 취급하던 곳이었는데, 순우리말처럼 해석하여 한자로 입전(立廛)이라 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일제강점기에는 종로의 최고층 건물 - 반도호텔이 서기 전까지는 전국 최고층 건물 - 이

이 자리에 세워졌으며, 이 건물이 헐린 뒤에도 삼성타워가 들어서 강북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되었다.

건물의 고층화는 도심의 일반적 지표 중 하나인 바, 입전(立廛)에서 화신으로, 다시 삼성으로

건물의 외양과 이름이 바뀌었지만 이 자리에 선 걸물은 모두 종로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1990년대 이후 종로 중심가 북변을 점거한 ‘노인’들이 젊었을 때의 종로, 왕년(往年)의 종로는 그 모습이 지금보다는 누추하였지만, 그 상대적 활기와 중심성은 지금보다 높았다.

 

명동 충무로 일대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탓에 50~60년대의 종로는 화신백화점, 동아부인상회, 영보빌딩, 한청빌딩, 명월관, 단성사, 우미관 등이 곳곳에 포진하여 ‘북촌 조선인’의 중심가로 위세를 떨쳤던 일제 강점기보다도 오히려 화려했다.

명동백작을 비롯한 숱한 저명인사들이 명동 골목골목에 진한 추억을 남긴 것 만큼이나 지금 탑골공원과 종묘공원에 모여 앉은 가난한 노인들의 ‘화려한 왕년’은 종로 피맛길의 목로주점을 무대로 펼쳐졌다.



1972년, 종로.

전차가 철거된 후 지하철이 개통되기까지의 6년간, 서울 도시교통은 거의 전적으로 버스가 담당하였다.

그러다보니 출퇴근 시간대의 버스 정류장 부근은 아비규환의 혼잡을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종로의 쇠락이 전차의 철거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종로가 그나마 과거의 영화에 대한 기억을 보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하철 1호선’ 건설이 큰 힘이 되었다. 사실 전차 철거와 지하철 1호선 건설 간에는 일반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의도적 관련’은 전혀 없었다.

 

1966년 김현옥 시장이 전차 철거를 결심하면서 대체 교통수단으로 지하철 건설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 도상(圖上) 계획으로서의 서울 지하철 계획은 그 이전에도 있었다.

 

1965년에는 “고속전차시설기본계획조사보고서”라는 것이 만들어진 바 있고, 그보다 훨씬 전인 1930년대에도 박흥식의 지하철 계획과 경성부의 지하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계획은 아무런 실현수단도 전망도 갖지 못한 것이었다 -. 그는 누구보다도 군용 지프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 주위의 ‘승용차를 타는 높은 분’들도 대개 전차로 인한 자동차 교통의 장애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가 본 1960년대 중반의 서울 전차는 적자 투성이의 애물단지였고, 한 대만 고장나도 줄줄이 늘어서는 고물단지였으며, 자동차의 원활한 소통을 방해하는 장애시설이었다. 그는 전차 궤도만 없어지면 자동차가 그 빈 자리를 메우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하철 1호선 개통.

종로를 관통하여 청량리에 이르는 도로의 역사성은 땅밑을 달리는 새로운 운송수단의 노선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부, 경인, 경춘선 등 기존 철도 노선 자체가 전차 노선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철도와 연계하여 수송 효율을 높인다는 지하철 건설 구상에도 ‘홍릉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셈이다.

 

그러나 버스가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과거 전차가 담당하던 교통수요를 충족할 수는 없었다.

1968년 전차 전노선이 철거된 후 1974년 8월 15일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될 때까지, 종로를 관통하는 도심의 공공교통에 ‘지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과장(誇張)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젊은 여성들이 버스 차장 - 후에 안내양이라는 야릇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안내양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풀면 ‘안내하는 처녀’쯤 될 터이지만, 실상 그네들의 일에서 ‘안내’는 극히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 일을 했는데, 차장의 업무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기사’보다 훨씬 많았다. 너무 많은 승객을 태운 탓에 옆과 뒤를 볼 수 없는 기사를 위해 수시로 몸을 차 문 밖으로 내밀고 “오라이, 스톱, 빠꾸’를 외치는 일, 요금을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는 일, 차량 내부를 청소하는 일, 이미 만원이 된지 오래인 차 안에 한 사람이라도 더 밀어넣는 일, 짓궂은 승객과 음흉한 관리자를 상대하는 일 등등. 그 무렵 종로에서 청량리를 거쳐 중랑교 방면으로 가는 버스 차장들은 정류장에 차가 서자 마자 내려서서는 ”청량리 중랑교 가요“를 외쳤는데, 이 소리가 그네들의 고달픈 삶에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죽는게 나아요“로 들리곤 했다.


지하철 1호선 건설계획도.

서울역에서 시청을 거쳐 종각에 이르는 노선을 제외하면 1898년에 놓인 전차선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1979년 새로 지어진 - 복원이 아니다 - 보신각.

짓기는 누(樓)를 지어 놓고 이름은 그대로 각(閣)을 썼다.

보신각이나 보신루나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무슨 보신탕 전문 요리점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실불부(名實不附)하게 만들어 놓은 데 대해서는 몰상식이라 해도 무방할 듯 하다.


도심의 교통지옥 상태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지하철 건설이 구체적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의 일이었는데, 이 때 확정된 노선이 지금의 지하철 1호선이다.

 

지하철 1호선이 옛 전차 노선을 따른 것은 서울역과 청량리역의 기존 철도와 연계가 가능했던 데다가 - 지하철을 지상 철도와 연계시키는 일이 항용 있는 것은 아니다. 국철과 연계되는 서울 지하철은 당시까지 세계적으로 드문 사례에 속했다 -, 종로의 가로폭이 가장 넓어 상대적으로 공사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는데, 나는 그와 더불어 도시공간, 도로에 대한 관성적 태도 - 국중(國中)의 제일도로는 종로라는 생각 -, 즉 도시의 역사성도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본다. 지하철을 예정하고 전차를 철거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 만들어질 지하철이 종로 전차를 대체해야 한다는 데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종로는 전차가 놓이기 전에도 서울의 중심 도로였고, 전차가 놓인 후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가 된 이래 서울 사람들은 대개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을 서울의 공간적 중심으로 인지해 왔다.

 

달리는 차 안으로 승객을 밀어 넣는 버스 차장.

1970년대 서울의 여성 취업인구 중에서는 공장노동자, 가정부, 버스 차장의 비중이 무척 높았는데,

이들을 비하하여 각각 공순이, 식순이, 차순이라고 불렀고, 합해서 ‘삼순이’라고도 했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모았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에서 느닷없이 이들을 떠올린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도시 공동체는 종루(鍾樓) - 임진왜란 전에는 종각(鐘閣)이 아니라 종루(鍾樓)였다. 본래는 종로 네거리에 웅장한 누각을 세우고 종을 걸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종루가 파괴되고 종도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액운을 겪은 후 그 위계와 규모를 크게 줄여 각(閣)으로 만들었다 - 의 종소리를 같이 듣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런만큼 종은 본래 도시의 공간적 중심에 걸어야 했다.

서울 정도 직후 종을 걸었던 자리는 원각사 입구, 청운교 서쪽이었는데, 태종대에 그를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그 탓에 종루의 위치는 도성의 공간적 중심에서 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아마도 창덕궁에 거처하던 이방원은 종소리의 db를 가급적 낮추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새벽 단잠을 깨우는 종의 굉음을 가까이에서 듣고 싶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도성의 물리적 중심과 감성적 중심은 괴리되었다.

 

종로 네거리는 도성의 중심이기 때문에 종이 걸린 것이 아니라

이 걸렸기 때문에 도성의 중심이 된 것이다.

 
필진 : 전우용/ 등록일 : 2006-07-05

 

 

 

 

 종로, 전차 (2)


1900년경의 보신각.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굳이 해석하면 황제가 지정한 중앙, 또는 황도(皇都)의 중심이라는 뜻이 될 터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하여 혜정교 앞에서 탑동 어구 - 현재의 교보빌딩 앞에서 탑골공원 - 까지 동서로 뻗은 길은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닌다는 뜻의 운종가(雲從街)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선전, 백목전, 청포전, 저포전, 지전 등 육의전의 중심 상전들이 모두 종루 주위에 분포하였다.

 

종각 앞, 종로 네거리는 이 도시의 상징적 중심이자 상업적 중심이었다.

종각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895년 3월 15일이었다.

서울의 4대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 -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은 이 순서에 맞는데 북문은 숙정문(肅靖門)[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잡설(雜說)이지만, 백악(白岳)의 산세(山勢)가 드세어 음(陰)이 양(陽)을 누르게 될까봐 북문에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순으로 이름을 붙였던 고례(古例)에 따라 중앙을 뜻하는 신(信)을 쓴 것인데, 이로써 종각은 서울의 공간적, 상징적 중심으로 공인되었다.

 

더불어 이 무렵부터 황제가 내탕(內帑)을 들여 만든 각종 시설, 건물들에는 대개 보(普)자가 붙기 시작하였다.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 후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 보성학교(普成學校) - 고려대학교의 전신 -, 보신회사(普信會社) - 지방관이 포탈한 조세를 추징하기 위해 그들의 집을 저당잡고 돈을 빌려주던 가권(家券) 전집회사(典執會社) -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

 

1898년가을, 전차궤도 부설공사.

이미 부설된 레일 위로 침목을 실은 수레를 옮기고 있다.

종로 양편의 가가는 모두 철거되어 있고 전차길 우측에는 전선 없는 전봇대가 미리 서 있다.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를 관통하여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궤도 부설공사는

1898년 10월 17일부터 12월 2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경성전기주식회사이십년연혁사”(이후 “연혁사”로만 쓴다)에서

이 전차 부설의 배경을 희화적으로 묘사했는데 그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1897년 11월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른 이후 고종의 홍릉 행차가 잦았는데, 그 때마다 10만원 안팎의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 능행을 돈벌이 기회로 포착한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고종을 알현하고 능행길에 전차를 놓으면 이동이 편리하고 경비도 절약될 뿐 아니라 평시에는 시민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득인다.

감언이설에 현혹된 고종은 선뜻 전차 부설에 동의하고 총신(寵臣) 이학균(李學均)으로 하여금 콜브란, 보스트윅과 교섭하게 한다. 계약이 체결된 것은 1898년 2월 19일이었고, 이어 이채연(李采淵)을 사장으로 하고 이근배, 김두승 등 종로 상인들을 중역으로 하는 한성전기회사가 출범하였다.

운종가 한복판,

보신각 맞은 편(현 YMCA 옆 장안빌딩 자리)에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들어섰다.

고종과 콜브란이 50대 50으로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이지만 초대 사장은 이채연(李采淵)이 맡았고, 중역진은 이근배, 김두승 등 유력한 시전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간판을 단 회사로는 아마도 이 회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부설뿐 아니라 한성 오서내 전등, 전화의 가설, 운영권까지 독점하였다.

전차 선로 공사는 정부와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순조롭게 이루어져 불과 두달여만에 완성되었고, 바로 장안의 일대 명물이 되었다.

 

사월 초파일, 전차 개통 당일에는 전차를 보거나 타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선로 전체가 사람들로 메워져 전차는 거의 달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능행길에 이용할 목적으로 전차를 놓은 고종 자신은

객차가 상여(喪輿)처럼 생겼다 하여 한 번도 타지 않았다.

 

한성전기회사.

1900년경 원래의 자리에 신축한 첨탑이 달린 2층의 르네상스식 건물로서 첨탑에는 시계가 걸렸다.

전차의 운행은 기계적으로 세분화된 시간이 자연적, 생체적 시간을 압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태엽 시계는 천자(天子) = 황제만이 하늘의 운행을 관장할 수 있다는 오래된 시간관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거리와 시간 사이에도 새로운 정합성(整合性)을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이 “연혁사”에서 소개한 내용은 오늘날 전차 부설의 경위에 대한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몇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이 설명대로라면 이 땅 최초의 전차, 서울 지하철 1호선의 원형이 만들어진 배경은 고종과 명성황후 간의 사적 관계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고종이 죽은 명성황후를 그리워한 탓에 능행이 되풀이되었고, 그것이 전차 부설의 직접적 배경이 된 셈이니까.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헌에 그려진 고종과 왕비(황후)는 언제나 한결같다.

“무능하고 나약한 혼주(昏主) 고종과 탐욕스럽고 꾀 많은 여걸 민비”.

 

일본인들은 고종을 10살에 왕이 되어 대원군 손아귀의 여의주 노릇이나 하다가

이른바 “친정(親政)”이라는 것을 하게 된 이후에는 여편네 치마폭에 감싸여 살면서

홀아비가 될 때까지 아내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산 - 심지어는 아내가 죽은 후에도 그를 못잊어

애타게 그리워 한 -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이런 이미지 메이킹은 무척 성공적이었던 데다가 다른 측면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한

당대 지식인들의 글도 남아 있어서 오늘날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고종이 정말 그러했고 전차는 정말 그 때문에 놓인 것일까.

 

1897년 명성황후 국장.

고종은 왕비가 죽은 후 2년이나 지난 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야 비로소 ‘황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대안문을 나선 행렬은 종로를 관통하여 청량리까지 이어졌는데, 그 전에 이미 종로길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 국장 행렬은 대한제국기 서울 시민이 기억하는 행렬 중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다.

 

왕비가 살해된 것은 1895년 10월 2일이었고,

황후의 예로 국장을 치르고 홍릉에 안장한 것은 대한제국 선포 후인 1897년 11월 27일이었다.

문제가 된 고종의 홍릉행차는 당연히 이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석달도 되지 않아 한성전기회사가 출범하였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엄청난 경비”를 낭비할만큼 잦은 능행을 할 도리는 없다. 설사 능행이 잦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 중 가마를 메거나 깃발을 드는 역군들에 지급되는 몫은 무시해도 좋은 정도였다. 이 역(役)은 대개 시전상인들이 담당하였는데, 그들에게 따로 역가(役價)를 지급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 이래 능행 비용에서 가장 많은 몫을 점한 것은 가가(假家) - 임시로 지은 가건물을 말하는데, 주로 상업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말이 변한 ‘가게’가 곧 상업점포를 지칭하는 의미로 변하였다 - 철거 및 개건비였다.

 

언제부터 종로 양측에 가가(假家)들이 들어섰는지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아마도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 전관(專管) 물종을 제외한 여타 소소한 물종의 자유방매가 허용되면서 소상인들이 임의로 가건물을 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무렵 가가(假家)들로 가득찬 운종가에는 그 가가만큼이나 많은 여릿군(餘利軍) - 오늘날의 호객꾼, 속어로 삐끼이다. 소비자를 상인에게 데려다 준 댓가로 이익금의 일부를 받는다 해서 여릿군이라고 했고, 종로 좌우에 줄 지어 늘어서 있다 해서 열립군(列立軍)이라고도 불렸다 - 들이 늘어서서 지방에서 올라온 어리버리한 소비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곤 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가가(假家) 터에 대한 권리가 물권화(物權化)되어 전상매매(轉相賣買)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오늘날 포장마차 권리금과 같다 -.

 

원칙대로라면 - 원칙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적 합리성의 범주 안에서만 구체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 국중(國中)의 대로(大路)요 법으로 정해진 노폭(路幅)을 가진 종로 좌우에 들어선 건물은 모두 불법이었다.

 

당연히 이들 건물에 대해 국가권력이 취해야 할 ‘옳은’ 태도는 눈에 띠는대로 철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옳다고 해서, 법에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냥 밀어붙일 수만도 없는 것이 나랏일이다. 소민(小民)과 세민(細民)에게 - 엄밀히 말하자면 가가(假家) 주인이나 포장마차 권리자가 영세민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이런 일에는 ‘오죽하면’이라는 형용어가 붙게 마련이고, 그래서 이들을 거리에서 내쫓으면 횡포한 권력으로 취급받는다 - 먹고 살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왕도(王道)의 기본이었다. 깍정이들에게조차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왕이 일인데, 그깟 길이야 일시적으로 침범하면 어떠랴. 왕이 길을 쓰고자 하면 알아서 철거한다는데. 그 마음씀이 갸륵하지 않은가.

그래서였는지, 다시 어느 시점에선가는 왕실에서 가가 철거 및 개건비를 ‘보조’해 주는

관례가 생겨났고, 이윽고 그 액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896년 이전의 종로.

도로 양편에 초가로 얼기설기 엮은 ‘구멍’만한 가가(假家)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다.

동대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찍은 사진인데 도로 한복판으로는 장작을 진 소떼행렬이 유유히 지나고 있다. 운종가 부근의 가가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콜브란이 전차 부설을 건의하던 당시에는 이미 가가 철거 및 개건에 돈을 들일 이유가 없어진 뒤였다. 1896년 9월 30일, 내부(內部)는 종로와 남대문로변에 늘어선 가가(假家) 일체를 철거하되 노폭에 여유가 있는 곳에 지은 일부 가가를 양성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성내 도로의 폭을 개정하는 건’을 발포하였다.

 

19세기 이래 간단 없이 제기되어 왔던 도로 정비, 도시 공간 개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 도심부에 가득 차 있던 가가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영업장소를 잃은 가가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선혜청(宣惠廳) 옛 창고 등 각처가 새로이 배정되었다.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지기 전에 이미 종로 대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길이 변화한 모습을 보고는 “과거 동방에서 가장 더러운 거리 - 그녀는 서울을 보기 전까지는 북경보다 더러운 도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 가 이제 가장 깨끗하고 현대적인 거리로 바뀌었다”고 찬탄했다.

 

종로가 바뀐만큼 종로를 지나는 능행에 드는 비용도 이전보다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니 돈을 아끼려 전차를 놓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전차 궤도 부설 후의 종로.

대로 양편을 메우고 있던 가가는 깨끗이 철거되었고 도로 한복판에서 약간 북쪽(사진 오른쪽)으로 치우쳐 궤도가 부설되어 있다. 궤도 옆에으로는 전봇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대로 양편의 행랑은 일직선으로 곧게 늘어서 국초 건설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진 중앙부에 돌출한 양식 가건물은 전차표 판매소이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은 ‘능행(陵幸)’이 갖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애써 묵살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능행은 왕이 자신의 선조를 추모하는 사적(私的)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저 장안(長安) 백성들에게 그 자체로 존엄한 왕의 실존을 알리는 퍼레이드였으며, 더불어 왕이 백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시위였고, 나아가 일반 백성에게 직접 왕을 대상으로 발언할 기회를 주는 소통의 통로였다.

굳이 심각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이 행렬은 별다른 오락거리를 갖지 못했던 서울 시민들에게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

정조가 능행길에 시흥 행궁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백성들은 땅에 엎드리지 않은 채로,

행렬을 편안히 구경하고 있는데, 심지어 엿장수 떡장수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왕에게는 ‘빠르고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보다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했다.

 

능행의 정치성은 조선 후기에 특히 두드러졌는데, 예컨대 정조가 한강 도하(渡河)라는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 장조(莊祖) - 사도세자, 정조의 생부 - 의 능을 굳이 수원에 쓴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이 장엄한 행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였으며, 더불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던 한강변과 그 이남 지역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의 능행은 호화롭고 웅장하다는 점에서는 과시적이면서도 잡인(雜人)의 접근에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포용적인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궁궐 앞에 나아가 신문고를 치는 대신에 왕의 능행길 옆에서 바로 징이나 꽹과리를 침으로써 왕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요컨대 능행은 왕의 정치적 의도와 백성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가 만나는 한마당의 굿판이었다.

그런만큼 능의 위치나 노정(路程)의 결정 등에는 정치적 고려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랬을진대 황제의 능행을 단지 황후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였다고 심상히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종로와 전차, 지하철 1호선의 역사는

고종의 ‘못 다 이룬 사랑’이 남긴 한갓 에피소드가 되어 버릴 것이다.

고종이 설령 바보였다 해도 능행에 각인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몰랐을 턱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는 선왕(先王)들이 만들어 온 “국장(國葬)과 능행의 정치학”에 대한 식견이

무척이나 깊었다. 그랬기에 왕후가 죽은 지 2년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않다가 제국을 선포한 다음에야 황후의 예로써 국장(國葬)을 치렀던 것이며, 그랬기에 굳이 동대문 밖 청량리에 능을 썼던 것이고, 그랬기에 종로를 관통하는 - 고종이 홍릉에 행차할 때에는 이미 전차 부설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 능행길에 올라 시민들의 오감(五感)을 직접 자극했던 것이다.

 

한성전기회사와 보신각(1905년경)

우측 끝에 있는 것이 보신각이고, 좌측 중앙부에 보이는 서양식 첨탑을 단 건물이 한성전기회사이다.

 

대한제국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하건 간에 이 ‘나라’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만은

한국사 전체에서 확실히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강제로 양위되기까지 10년간, 이 ‘나라’는 국모(國母)가 없는 나라였다. 이 땅에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년간 남자가 왕위에 있으면서 그 공식적 배우자가 지정되어 있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64세에 홀아비가 된 영조도 그 다음다음해에 15살 먹은 어린애를 계비(繼妃)로 들였다. 그런데 아직 강건한 40대의 고종은 곤위(坤位)를 비워둘 수 없다는 숱한 간언(諫言)을 묵살하면서까지 계비(繼妃)를 맞아 들이지 않았다. 을미사변 직후 한 때 간택작업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곧 무효화되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황후 간택과 관련된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고종은 왜 사상 유례가 없는 이같은 짓을 저질렀을까?

사실 고종은 황후를 새로 맞아들이는 일과 관련해서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사태를 빚기도 한다. 고종이 새 황후를 만들지 않은 것은 국모(國母)가 없는 기형적인 나라를 ‘만드는’ 엄청난 짓이었다.

 

고종황제행렬

사직제례를 드리러 가는 황제의 행렬이다.

어떤 이유의 행차이든 간에 황제의 행차는 그 자체로서 장엄하고 화려한 퍼레이드였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대군을 거느린 친정(親征)의 유혹에 쉬 빠져들곤 했지만,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런 행렬에 관한 기억과 전례(前例)를 갖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엄청난 ‘권위’와 ‘힘’을 때때로 보여줌으로써 도시민들에게 ‘황제의 실존’에 관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6-08-01

 

 

 

 

 종로, 전차 (3)

 

고종이 이토록 기형적인 나라를 만든 것은 그가 죽은 황후를 못내 그리워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종에 대한 일반화된 이미지에는 이 설명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가 정말 아내에게서 모성(母性)을 찾은 정신적 미숙아(未熟兒)였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홀아비가 된 이후에도 여러 비빈(妃嬪)을 거느렸고, 자식도 새로 낳았다. 고종과 명성황후에게서 에드워드 8세 - 윈저공 - 의 러브스토리와 비슷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해석이겠지만, 조선식 - 마누리가 죽으면 변소가서 웃는 식 - 부부관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종이 굳이 새로운 외척(外戚)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고종을 외척 등쌀에 시달리면서 아무 것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한 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왕의 친족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으로 억누르면서도 그 외가나 처가붙이들에게는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 데에 있다.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자요, 외척은 왕권의 울타리라는 관념 - 다 알다시피 조선 후기 왕권 침식의 주역은 다름아닌 외척이었지만, 그들에게 왕은 어쨌든 주머니 속의 여의주였으니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였다 - 은 외척들 뿐 아니라 왕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었다.

 

왕권의 전제성을 바란다면 외척을 억눌러야 했겠지만, 왕위의 안전을 바란다면 외척이 없어서도 안되었다. 더구나 나이 50을 바라보는 장년의 왕은 외가붙이든 처가붙이든 외척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해석도 별 설득력이 없다.

 

1974년 육영수여사 국민장.

군사적 동원체제였던 유신체제 아래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을 동원한 대중집회가 자주 열렸다. 이 국민장 역시 애도와 비판, 증오와 저주의 감정을 고취하는 범국민 궐기대회의 일종이었다.

 

나는 고종이 “무위(無爲)의 위(爲)” - 새 황후를 맞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국모 없는 나라를 ‘만든’ 일 - 를 행한 것은 “부재(不在)의 재(在)” - 황후가 ‘없는’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써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한 기억을 ‘상존(常存)’시키는 것‘ - 를 의도한 때문이라고 본다.

 

국장을 치르고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가 가도록 황후 간택에 대한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서울 개천변 빨래터에 모인 아낙네들에게나 궁벽한 산골 토반(土班) 집 사랑에 모인 남정네들에게나 ’황후 부재‘는 자주 화제거리로 떠 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 새 황후가 뉘 집에서 나올 지에 관심을 보였을 테지만, 이윽고 황후 간택이 늦어지는 이유로, 나아가 황후 부재 상태 자체로 논의의 대상을 확장해 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을미년 의병이나 백범(白凡)의 의거 -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일 - 를 떠올리면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하는 젊은이들도 나타났을 것이다. 설사 과거에 황후를 증오해 마지 않았던 사람일지라도,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아야 한다는 데에는 주저없이 동의했으리라.

 

1974년 8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난생 처음으로 청와대 - 다 알다시피 이 곳은 아직껏 일반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는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끔 차를 타고 그 부근을 지날 때면 어쩔 수 없이 긴장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 라는 곳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지금껏 들어가 볼 기회를 얻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8.15 기념식이 열린 장충체육관에서 북괴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 소속 재일동포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온국민을 비탄에 빠트렸고, 분노하게 했다. 내 아버지는 평소에 박정희를 싫어하셨지만 그래도 어린 자식을 이끌고 청와대에 마련된 분향소로 향했다. 아버지의 마음 한 구석에 ‘이 기회에 청와대 구경 못하면 언제 해 보랴’는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숙연하게 분향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북괴의 만행’을 잊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그 얼마 후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國民葬)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다. 연도에 빽빽히 늘어선 시민들, 특히 부녀자들은 목을 놓아 울부짖었는데, 그런 그들의 모습은 해마다 8월이 되면 연례적으로 TV 화면을 채우곤 했다.

 

동대문-청량리로 향하는 전차길 주변.

길 좌우에 무성한 백양목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고종 재위시에 이 가로수 관리는 홍릉 위병의 책임이었다.

백성들은 한동안 길 연도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에서 황후를 안장하던 날에 도열해 있던 자신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신체제가 몰락한 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되었고 몇해 전에는 모 방송을 통해 그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정리한 다큐멘타리가 방영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사건에 의문을 던질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비록 대통령과 영부인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 70년대초에는 어떤 개그맨이 라디오 방송에서 ‘육박전’을 ‘청와대 부부싸움’이라고 정의했다가 혼쭐이 난 일도 있었다 -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후 홀아비 대통령과 엄마를 대신해 그 옆에 서있는 불쌍한 영애(令愛)는 존재 자체로서 ‘북괴가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간선도로 개수 직후의 청량리(1935).

전차길 옆으로 새로 자동차 길을 내면서 가로수를 베어 버린 것은 그렇다 쳐도 굳이 전차길 옆에 있던 가로수까지 다 베어 버릴 필요가 있었을까. 이로써 청량리는 이름과 달리 황량리가 되어 버렸다.

 

뻔한 얘기를 하기 위해 너무 먼 길을 돌아왔나 보다.

국장도 능행도 핵심은 보여주는 데 있었고 만나는 데 있었다. 황후의 능을 굳이 동대문 밖 청량리에 쓴 것도 이 장엄하고 과시적인 행렬이 도성의 한복판, 국중(國中)의 대도(大道)를 관통하게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더 말하면 잔소리다.

 

이 퍼레이드는 치밀하게 고안되고 화려하게 장식된 ‘시위(示威)’에 다름 아니었다. 이 퍼레이드가 통과할 길은 이미 몇 해에 걸쳐 널찍하고 정결하게 정비되었고,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연도에는 이 땅 최초의 가로수로 백양나무가 늘어섰다.

이 가로수는 혜화동에 거주하던 홍태윤(洪泰潤)이라는 사람이 자비를 들여 심었는데, 그는 이 공을 인정받았음인지 이후 양주군수, 홍릉감독을 역임하였다.

 

이 가로수는 홍릉(洪陵) 위병(衛兵)들이 극진히 관리한 탓에 무척 잘 자라서 1930년경에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도로가 전국 최고의 가로수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가로수는 사라지고 없다. 1933~34년경 청량리 도로 확장 공사 과정에서 모두 베어졌기 때문이다.

 

특실이 있는 개통당시의 전차.

전차 옆의 태극무늬가 선명하다. 일반 전차와는 달리 황실용으로 도입했다고 하는데,

정작 고종은 이 전차가 상여를 닮았다고 하여 타지 않았다고 한다. 글쎄, 상여를 닮았나?

 

아마도 콜브란은 이 퍼레이드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사람의 행렬’을 ‘기계의 왕복’으로 대신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치밀하게 퍼레이드를 준비해 왔던 고종은 그를 위해 애써 다듬고 가꾸어 놓은 길 위에 전차궤도를 놓자는 제안을 덜컥 수용해 버렸다.

 

정말 단지 빠르고 편하게 능행을 하고 싶어서였을까?

황후의 죽음과 관련된 제반 조치들의 총괄 기획자였을 그가 능행의 형식과 절차, 상징성 - 일반 대중에게는 상징적인 것이지만 황제 개인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 - 전체에 영향을 미칠 대토목공사를 정말 별 생각없이 승인했으리라 볼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새로 놓일 전차에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는 가가 철거와 가로수 식재, 국장과 능행을 겪으면서 종로길에서 시민들이 느꼈던 ‘황후 부재’의 이미지를 항구화하는데 이 기계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종로를 관통하여 홍릉 앞까지 ‘자동으로’ 왕복하는 거대한 가마를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원통하게 세상을 떠난 황후를, 국모(國母)의 위(位)를 비운 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황제를 떠올려 줄 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장옷을 쓰고 전차에서 내리는 아낙.

몸은 가렸으나 전차 안에서 신체적 접촉을 피할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전차는 내부에 아무런 칸막이도 없어 남녀노소가 섞여 탈 수밖에 없었다.

대중교통수단으로서의 전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힘으로써

그들 사이의 심리적, 문화적 격차도 줄여 놓았다.

 

“연혁사”는 고종이 능행용으로 전차를 부설하고도 막상 전차가 개통된 후에는 객차의 모양이 “상여”를 닮아 불길하다고 하여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썼다.

“바보같은 군주”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증거도 없다.

 

아마도 처음 등장한 전차를 보고 상여를 닮았다는 말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런 연상작용 없이 서로 다른 대상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지는 않는다. 객차와 상여는 닮았다면 닮았고 닮지 않았다면 또 닮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타는 가마가 상여인 것이니 탈것의 모양이야 그렇고 그런 것 아닌가. 가마 닮았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상여 닮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었을 터인데도 사람들은 객차에서 상여의 이미지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것도 보통사람은 죽어서도 탈 수 없는 무척이나 큰 상여. 사람들이 전차 개통식 당일에 객차에서 떠올린 것은 바로 한 해 반 전, 이제는 전차길이 놓인 그 길을 따라, 이 날과 같이 온 장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 지켜 보는 가운데 행차했던 바로 그 큰 상여는 아니었을까.

고종은 객차가 상여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파괴당한 전차의 잔해.

전차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기계의 무서움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치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일단 이 새로운 ‘살인기계’를 파괴함으로써 보복했지만,

동시에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누차 반복하는 말이지만,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대로만 반응하지는 않는다. 설사 그 설계자가 황제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그 뜻을 거스르곤 한다. 사람들은 황제가 전차에 부여한 복합적 용도와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여를 닮았든 어쨌든 사람들은 기꺼이, 다투어 전차를 탔고, 그 주변에 몰려 들어 환성을 질렀다. 날이 가물어 흉년이 든 것은 전차가 천지간의 습기를 말려 버렸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나돌았고, 전차로 인한 교통사고에 격분하여 전차를 뒤집어 엎고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중은 점차 전차에 친숙해졌고, 전차 노선도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중이 한 때 전차에 부여했던 상여, 괴물, 살인기계 등의 의미도 점차 희석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핵심만 남았다. 문명의 이기(利器)로서의 전차.

 

오포(午砲).

전차개통에 따라 도성의 대문을 여닫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문의 개폐를 알리던 종을 대신하여 일상의 시간적 분할을 알리는 대포가 등장했다. 전차는 이렇듯 일상의 재조직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 문명의 이기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교통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전차는 같은 무렵에 개통된 경인철도와 힘을 합쳐 수천년간 변하지 않고 있던 시간과 공간 사이의 정합성(整合性)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도보(徒步)를 기준으로 하던 일정(日程) - 하룻길, 반나절 길 등 - 대신에 훨씬 더 세분화된 기계적 시간(時間)이 거리 측량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 올랐다. 전차 개통과 때를 같이 하여 보신각 타종이 중단된 것은 전차 궤도가 남대문을 통과하면서 더 이상 문을 여닫을 수 없게 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낮과 밤의 구분보다는 생활시간의 분할 - 인경[人定]과 바라[罷漏] 대신에 새로 오포(午砲)가 등장했다 - 이 더 중요하게 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이 교통수단은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태웠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별 연령별 ‘격리’의 관념은 점차 약화되었고, 무차별적인 ‘대중(大衆)’ - 이 이상한 집단을 만드는데 교통수단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드물 것이다 - 이 가시적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 전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차 승객들이 시각(視覺)을 통해 받아들이는 단위시간당 정보량은 크게 늘어났다.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고 배짱을 튕기던 가로변 상점들이 하나 둘 간판을 내 걸어야 했고, 전차에도 광고 문구가 붙었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전차가 가져다 준 변화는 다면적이고 심층적이며 불가역적(不可逆的)이었다.

콜브란은 어땠는지 모르나 고종도 이채연 - 당시 한성부윤이자 한성전기회사 초대 사장이었다 - 도, 김두승도 이런 변화를 예측하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전차의 본질이었다.

 

전차매표소.

가가 철거 이후 종로 거리 한복판에 돌출한 가건물로는 전차 매표소가 유일했다.

 

종로도 전차와 함께 변화했다.

보신각 - 다른 말로 인경전[人定殿]이라 했다 - 종은 비록 벙어리 신세가 되어 중심점으로서의 상징성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대신에 중심가로로서 종로의 지위는 한층 굳건해졌다. 더구나 경운궁(慶運宮)이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고 그 동문(東門) 대안문(大安門)이 대궐의 정문이 되면서 종로는 동서축 가로라는 태생적 한계 - 제왕남면(帝王南面)이니 정궁(正宮)은 남향(南向)을 하여야 한다. 당연히 나라의 중앙 대로 main street 는 남북축선상에 놓여야 했다 - 를 돌파하여 새삼스럽게 중앙대로의 지위를 얻었다.

 

종로에 궤도가 놓인지 얼마 되지 않아 남대문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남북간 궤도도 건설되었지만, 종로선에서 그대로 연이어진 서대문 - 애오개 - 마포간 노선의 비중이 더 커졌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개천 남쪽에서 원(原) 청국인 거류지와 상권(商圈)을 탈취하고 이어 종로 한인 상가를 위협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전차 선로는 마포 객주로부터 시전 상인으로 연결되던 종래의 한인간 유통구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공간적 담보로 기능하였다. 후일 이른바 선은전광장(鮮銀前廣場) - 현재 한국은행과 신세계백화점, 중앙우체국으로 둘러싸인 충무로 광장 - 이 경성(京城)의 새 도심으로 떠올랐을 때에도 종로가 ‘조선인의 도심’이자 ‘조선의 상징적 도심’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전차의 힘이 컸다.

전차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도 종로를 도심으로 남게 한 유력한 도구였다.

 

남대문 안쪽으로 통행하는 전차.

전차 길이 놓이면서 문을 여닫는 일이 불가능해졌고, 그 결과 보신각 타종도 중지되었다.

 

 

보신각 앞에 정차한 전차.

전차에 오르는 노인을 떠꺼머리 총각이 밀어 주고 있다.

전차 지붕 옆에 붙은 산호표니 삼영표니 하는 상표는 자본주의의 본격 도래를 알리는 심볼이었다.

 

1970년 10월 30일 오전 10시, 종로네거리 보신각 앞에 지하철 전노선의 기준이 되는 수준점이 설정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하철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옛 전차 노선 아래로 지하철을 놓겠다는 명시적 합의는 없었지만, 또 이미 이 때의 서울은 사대문 안으로 국한되었던 1890년대의 서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을 서울의 중심으로 인정했고, 지하철 1호선은 종로를 관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까지도 사람들은 종로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집단적 이끌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탑골공원과 종묘공원 사이를 산보하는 노인들은 전차가 달리던 옛 종로의 모습을 기억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왜 서울역에서 청량리로 뻗은 노선이 지하철 1호선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110년 전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장중한 행렬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 한성전기회사는 러일전쟁 직후 일한와사전기회사로 바뀌었고, 명성황후의 능은 고종 사후 금곡으로 옮겨졌다.

 

1929년에 “연혁사”는 전차에 관한 고종의 기획을 한갓 코미디로 만들어 버렸고,

1933,34년 사이에는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엄숙하게’ 늘어서 있던 백양목 가로수들이

모두 베어져 버렸다. 1968년 종로 전차 궤도가 철거될 때쯤에는

이미 더 이상 잊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6-08-31

 

 

 

 

 

PechiKa --Seiko Su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