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전차 (2)
보신각이라는 이름을 굳이 해석하면 황제가 지정한 중앙, 또는 황도(皇都)의 중심이라는 뜻이 될 터이다.
종루를 중심으로 하여 혜정교 앞에서 탑동 어구 - 현재의 교보빌딩 앞에서 탑골공원 - 까지 동서로 뻗은 길은 조선시대 내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다닌다는 뜻의 운종가(雲從街)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는 선전, 백목전, 청포전, 저포전, 지전 등 육의전의 중심 상전들이 모두 종루 주위에 분포하였다.
종각 앞, 종로 네거리는 이 도시의 상징적 중심이자 상업적 중심이었다. 종각에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1895년 3월 15일이었다. 서울의 4대문에 인의예지(仁義禮智) -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은 이 순서에 맞는데 북문은 숙정문(肅靖門)[처음에는 숙청문(肅淸門)]이었다. 잡설(雜說)이지만, 백악(白岳)의 산세(山勢)가 드세어 음(陰)이 양(陽)을 누르게 될까봐 북문에는 다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순으로 이름을 붙였던 고례(古例)에 따라 중앙을 뜻하는 신(信)을 쓴 것인데, 이로써 종각은 서울의 공간적, 상징적 중심으로 공인되었다.
더불어 이 무렵부터 황제가 내탕(內帑)을 들여 만든 각종 시설, 건물들에는 대개 보(普)자가 붙기 시작하였다. 인쇄소 보성사(普成社) - 후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 보성학교(普成學校) - 고려대학교의 전신 -, 보신회사(普信會社) - 지방관이 포탈한 조세를 추징하기 위해 그들의 집을 저당잡고 돈을 빌려주던 가권(家券) 전집회사(典執會社) - 등이 모두 그러하였다.
이미 부설된 레일 위로 침목을 실은 수레를 옮기고 있다. 종로 양편의 가가는 모두 철거되어 있고 전차길 우측에는 전선 없는 전봇대가 미리 서 있다.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를 관통하여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이어지는 전차 궤도 부설공사는 1898년 10월 17일부터 12월 2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일본인들은 “경성전기주식회사이십년연혁사”(이후 “연혁사”로만 쓴다)에서 이 전차 부설의 배경을 희화적으로 묘사했는데 그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1897년 11월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른 이후 고종의 홍릉 행차가 잦았는데, 그 때마다 10만원 안팎의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이 능행을 돈벌이 기회로 포착한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은 고종을 알현하고 능행길에 전차를 놓으면 이동이 편리하고 경비도 절약될 뿐 아니라 평시에는 시민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활용하여 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득인다. 감언이설에 현혹된 고종은 선뜻 전차 부설에 동의하고 총신(寵臣) 이학균(李學均)으로 하여금 콜브란, 보스트윅과 교섭하게 한다. 계약이 체결된 것은 1898년 2월 19일이었고, 이어 이채연(李采淵)을 사장으로 하고 이근배, 김두승 등 종로 상인들을 중역으로 하는 한성전기회사가 출범하였다. 보신각 맞은 편(현 YMCA 옆 장안빌딩 자리)에 한성전기회사 사옥이 들어섰다. 고종과 콜브란이 50대 50으로 합작하여 설립한 회사이지만 초대 사장은 이채연(李采淵)이 맡았고, 중역진은 이근배, 김두승 등 유력한 시전 상인들로 구성되었다. 간판을 단 회사로는 아마도 이 회사가 처음일 것이다.
한성전기회사는 전차 부설뿐 아니라 한성 오서내 전등, 전화의 가설, 운영권까지 독점하였다. 전차 선로 공사는 정부와 황실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순조롭게 이루어져 불과 두달여만에 완성되었고, 바로 장안의 일대 명물이 되었다.
사월 초파일, 전차 개통 당일에는 전차를 보거나 타기 위해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선로 전체가 사람들로 메워져 전차는 거의 달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능행길에 이용할 목적으로 전차를 놓은 고종 자신은 객차가 상여(喪輿)처럼 생겼다 하여 한 번도 타지 않았다.
1900년경 원래의 자리에 신축한 첨탑이 달린 2층의 르네상스식 건물로서 첨탑에는 시계가 걸렸다. 전차의 운행은 기계적으로 세분화된 시간이 자연적, 생체적 시간을 압도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태엽 시계는 천자(天子) = 황제만이 하늘의 운행을 관장할 수 있다는 오래된 시간관에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거리와 시간 사이에도 새로운 정합성(整合性)을 만들어 내었다.
일본인들이 “연혁사”에서 소개한 내용은 오늘날 전차 부설의 경위에 대한 상식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글에는 몇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우선 이 설명대로라면 이 땅 최초의 전차, 서울 지하철 1호선의 원형이 만들어진 배경은 고종과 명성황후 간의 사적 관계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고종이 죽은 명성황후를 그리워한 탓에 능행이 되풀이되었고, 그것이 전차 부설의 직접적 배경이 된 셈이니까.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헌에 그려진 고종과 왕비(황후)는 언제나 한결같다. “무능하고 나약한 혼주(昏主) 고종과 탐욕스럽고 꾀 많은 여걸 민비”.
일본인들은 고종을 10살에 왕이 되어 대원군 손아귀의 여의주 노릇이나 하다가 이른바 “친정(親政)”이라는 것을 하게 된 이후에는 여편네 치마폭에 감싸여 살면서 홀아비가 될 때까지 아내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산 - 심지어는 아내가 죽은 후에도 그를 못잊어 애타게 그리워 한 -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싶어 했다. 이런 이미지 메이킹은 무척 성공적이었던 데다가 다른 측면에서 비슷한 내용을 전한 당대 지식인들의 글도 남아 있어서 오늘날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고종이 정말 그러했고 전차는 정말 그 때문에 놓인 것일까.
고종은 왕비가 죽은 후 2년이나 지난 뒤,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에야 비로소 ‘황후의 예’로써 장사지냈다. 대안문을 나선 행렬은 종로를 관통하여 청량리까지 이어졌는데, 그 전에 이미 종로길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이 국장 행렬은 대한제국기 서울 시민이 기억하는 행렬 중 가장 대규모의 것이었다.
왕비가 살해된 것은 1895년 10월 2일이었고, 황후의 예로 국장을 치르고 홍릉에 안장한 것은 대한제국 선포 후인 1897년 11월 27일이었다. 문제가 된 고종의 홍릉행차는 당연히 이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석달도 되지 않아 한성전기회사가 출범하였다. 이 짧은 기간 동안에 “엄청난 경비”를 낭비할만큼 잦은 능행을 할 도리는 없다. 설사 능행이 잦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 중 가마를 메거나 깃발을 드는 역군들에 지급되는 몫은 무시해도 좋은 정도였다. 이 역(役)은 대개 시전상인들이 담당하였는데, 그들에게 따로 역가(役價)를 지급하지는 않았다. 조선 후기 이래 능행 비용에서 가장 많은 몫을 점한 것은 가가(假家) - 임시로 지은 가건물을 말하는데, 주로 상업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 말이 변한 ‘가게’가 곧 상업점포를 지칭하는 의미로 변하였다 - 철거 및 개건비였다.
언제부터 종로 양측에 가가(假家)들이 들어섰는지를 정확히 알 도리는 없다. 아마도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으로 육의전 전관(專管) 물종을 제외한 여타 소소한 물종의 자유방매가 허용되면서 소상인들이 임의로 가건물을 짓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무렵 가가(假家)들로 가득찬 운종가에는 그 가가만큼이나 많은 여릿군(餘利軍) - 오늘날의 호객꾼, 속어로 삐끼이다. 소비자를 상인에게 데려다 준 댓가로 이익금의 일부를 받는다 해서 여릿군이라고 했고, 종로 좌우에 줄 지어 늘어서 있다 해서 열립군(列立軍)이라고도 불렸다 - 들이 늘어서서 지방에서 올라온 어리버리한 소비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우곤 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가가(假家) 터에 대한 권리가 물권화(物權化)되어 전상매매(轉相賣買)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오늘날 포장마차 권리금과 같다 -.
원칙대로라면 - 원칙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적 합리성의 범주 안에서만 구체적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 국중(國中)의 대로(大路)요 법으로 정해진 노폭(路幅)을 가진 종로 좌우에 들어선 건물은 모두 불법이었다.
당연히 이들 건물에 대해 국가권력이 취해야 할 ‘옳은’ 태도는 눈에 띠는대로 철거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옳다고 해서, 법에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냥 밀어붙일 수만도 없는 것이 나랏일이다. 소민(小民)과 세민(細民)에게 - 엄밀히 말하자면 가가(假家) 주인이나 포장마차 권리자가 영세민들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이야 어찌 되었든 이런 일에는 ‘오죽하면’이라는 형용어가 붙게 마련이고, 그래서 이들을 거리에서 내쫓으면 횡포한 권력으로 취급받는다 - 먹고 살 길을 열어 주는 것은 왕도(王道)의 기본이었다. 깍정이들에게조차 살 길을 열어주는 것이 왕이 일인데, 그깟 길이야 일시적으로 침범하면 어떠랴. 왕이 길을 쓰고자 하면 알아서 철거한다는데. 그 마음씀이 갸륵하지 않은가. 그래서였는지, 다시 어느 시점에선가는 왕실에서 가가 철거 및 개건비를 ‘보조’해 주는 관례가 생겨났고, 이윽고 그 액수가 눈덩이처럼 늘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도로 양편에 초가로 얼기설기 엮은 ‘구멍’만한 가가(假家)들이 듬성듬성 늘어서 있다. 동대문에서 서대문 방향으로 찍은 사진인데 도로 한복판으로는 장작을 진 소떼행렬이 유유히 지나고 있다. 운종가 부근의 가가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콜브란이 전차 부설을 건의하던 당시에는 이미 가가 철거 및 개건에 돈을 들일 이유가 없어진 뒤였다. 1896년 9월 30일, 내부(內部)는 종로와 남대문로변에 늘어선 가가(假家) 일체를 철거하되 노폭에 여유가 있는 곳에 지은 일부 가가를 양성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성내 도로의 폭을 개정하는 건’을 발포하였다.
19세기 이래 간단 없이 제기되어 왔던 도로 정비, 도시 공간 개조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 도심부에 가득 차 있던 가가는 대부분 철거되었고 영업장소를 잃은 가가 상인들을 수용하기 위한 장소로 선혜청(宣惠廳) 옛 창고 등 각처가 새로이 배정되었다.
명성황후의 국장이 치러지기 전에 이미 종로 대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길이 변화한 모습을 보고는 “과거 동방에서 가장 더러운 거리 - 그녀는 서울을 보기 전까지는 북경보다 더러운 도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 가 이제 가장 깨끗하고 현대적인 거리로 바뀌었다”고 찬탄했다.
종로가 바뀐만큼 종로를 지나는 능행에 드는 비용도 이전보다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그러니 돈을 아끼려 전차를 놓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대로 양편을 메우고 있던 가가는 깨끗이 철거되었고 도로 한복판에서 약간 북쪽(사진 오른쪽)으로 치우쳐 궤도가 부설되어 있다. 궤도 옆에으로는 전봇대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대로 양편의 행랑은 일직선으로 곧게 늘어서 국초 건설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사진 중앙부에 돌출한 양식 가건물은 전차표 판매소이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의 기록은 ‘능행(陵幸)’이 갖는 정치적, 상징적 의미를 애써 묵살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능행은 왕이 자신의 선조를 추모하는 사적(私的) 행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먼저 장안(長安) 백성들에게 그 자체로 존엄한 왕의 실존을 알리는 퍼레이드였으며, 더불어 왕이 백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시위였고, 나아가 일반 백성에게 직접 왕을 대상으로 발언할 기회를 주는 소통의 통로였다. 굳이 심각한 의미부여를 하지 않더라도 이 행렬은 별다른 오락거리를 갖지 못했던 서울 시민들에게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정조가 능행길에 시흥 행궁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백성들은 땅에 엎드리지 않은 채로, 행렬을 편안히 구경하고 있는데, 심지어 엿장수 떡장수까지 돌아다니고 있다. 왕에게는 ‘빠르고 편안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보다는 ‘수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이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했다.
능행의 정치성은 조선 후기에 특히 두드러졌는데, 예컨대 정조가 한강 도하(渡河)라는 번거로움을 무릅쓰면서 장조(莊祖) - 사도세자, 정조의 생부 - 의 능을 굳이 수원에 쓴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이 장엄한 행렬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였으며, 더불어 빠르게 변화하고 있던 한강변과 그 이남 지역의 실태를 직접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왕의 능행은 호화롭고 웅장하다는 점에서는 과시적이면서도 잡인(雜人)의 접근에 개방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포용적인 이중적 성격을 띠었다.
억울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은 궁궐 앞에 나아가 신문고를 치는 대신에 왕의 능행길 옆에서 바로 징이나 꽹과리를 침으로써 왕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요컨대 능행은 왕의 정치적 의도와 백성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가 만나는 한마당의 굿판이었다. 그런만큼 능의 위치나 노정(路程)의 결정 등에는 정치적 고려가 담길 수밖에 없었다.
그랬을진대 황제의 능행을 단지 황후에 대한 그리움의 발로였다고 심상히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종로와 전차, 지하철 1호선의 역사는 고종의 ‘못 다 이룬 사랑’이 남긴 한갓 에피소드가 되어 버릴 것이다.
고종이 설령 바보였다 해도 능행에 각인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몰랐을 턱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는 선왕(先王)들이 만들어 온 “국장(國葬)과 능행의 정치학”에 대한 식견이 무척이나 깊었다. 그랬기에 왕후가 죽은 지 2년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않다가 제국을 선포한 다음에야 황후의 예로써 국장(國葬)을 치렀던 것이며, 그랬기에 굳이 동대문 밖 청량리에 능을 썼던 것이고, 그랬기에 종로를 관통하는 - 고종이 홍릉에 행차할 때에는 이미 전차 부설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 능행길에 올라 시민들의 오감(五感)을 직접 자극했던 것이다.
우측 끝에 있는 것이 보신각이고, 좌측 중앙부에 보이는 서양식 첨탑을 단 건물이 한성전기회사이다.
대한제국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하건 간에 이 ‘나라’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만은 한국사 전체에서 확실히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강제로 양위되기까지 10년간, 이 ‘나라’는 국모(國母)가 없는 나라였다. 이 땅에서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수천년간 남자가 왕위에 있으면서 그 공식적 배우자가 지정되어 있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64세에 홀아비가 된 영조도 그 다음다음해에 15살 먹은 어린애를 계비(繼妃)로 들였다. 그런데 아직 강건한 40대의 고종은 곤위(坤位)를 비워둘 수 없다는 숱한 간언(諫言)을 묵살하면서까지 계비(繼妃)를 맞아 들이지 않았다. 을미사변 직후 한 때 간택작업이 진행되기는 했지만 아관파천 이후 곧 무효화되었다. 그리고는 더 이상 황후 간택과 관련된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고종은 왜 사상 유례가 없는 이같은 짓을 저질렀을까? 사실 고종은 황후를 새로 맞아들이는 일과 관련해서는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더 큰 사태를 빚기도 한다. 고종이 새 황후를 만들지 않은 것은 국모(國母)가 없는 기형적인 나라를 ‘만드는’ 엄청난 짓이었다.
사직제례를 드리러 가는 황제의 행렬이다. 어떤 이유의 행차이든 간에 황제의 행차는 그 자체로서 장엄하고 화려한 퍼레이드였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대군을 거느린 친정(親征)의 유혹에 쉬 빠져들곤 했지만, 대한제국의 황제는 그런 행렬에 관한 기억과 전례(前例)를 갖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자신의 엄청난 ‘권위’와 ‘힘’을 때때로 보여줌으로써 도시민들에게 ‘황제의 실존’에 관한 인상을 각인시키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6-08-01 |
종로, 전차 (3)
고종이 이토록 기형적인 나라를 만든 것은 그가 죽은 황후를 못내 그리워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종에 대한 일반화된 이미지에는 이 설명이 가장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가 정말 아내에게서 모성(母性)을 찾은 정신적 미숙아(未熟兒)였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홀아비가 된 이후에도 여러 비빈(妃嬪)을 거느렸고, 자식도 새로 낳았다. 고종과 명성황후에게서 에드워드 8세 - 윈저공 - 의 러브스토리와 비슷한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솔깃한 해석이겠지만, 조선식 - 마누리가 죽으면 변소가서 웃는 식 - 부부관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고종이 굳이 새로운 외척(外戚)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고종을 외척 등쌀에 시달리면서 아무 것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한 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조선 말기 세도정치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왕의 친족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으로 억누르면서도 그 외가나 처가붙이들에게는 마음껏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 데에 있다.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자요, 외척은 왕권의 울타리라는 관념 - 다 알다시피 조선 후기 왕권 침식의 주역은 다름아닌 외척이었지만, 그들에게 왕은 어쨌든 주머니 속의 여의주였으니 결코 버릴 수 없는 존재였다 - 은 외척들 뿐 아니라 왕 자신도 동의하는 것이었다.
왕권의 전제성을 바란다면 외척을 억눌러야 했겠지만, 왕위의 안전을 바란다면 외척이 없어서도 안되었다. 더구나 나이 50을 바라보는 장년의 왕은 외가붙이든 처가붙이든 외척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런 해석도 별 설득력이 없다.
군사적 동원체제였던 유신체제 아래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군중을 동원한 대중집회가 자주 열렸다. 이 국민장 역시 애도와 비판, 증오와 저주의 감정을 고취하는 범국민 궐기대회의 일종이었다.
나는 고종이 “무위(無爲)의 위(爲)” - 새 황후를 맞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국모 없는 나라를 ‘만든’ 일 - 를 행한 것은 “부재(不在)의 재(在)” - 황후가 ‘없는’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써 그렇게 된 이유에 대한 기억을 ‘상존(常存)’시키는 것‘ - 를 의도한 때문이라고 본다.
국장을 치르고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가 가도록 황후 간택에 대한 소식은 나오지 않았다. 서울 개천변 빨래터에 모인 아낙네들에게나 궁벽한 산골 토반(土班) 집 사랑에 모인 남정네들에게나 ’황후 부재‘는 자주 화제거리로 떠 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 새 황후가 뉘 집에서 나올 지에 관심을 보였을 테지만, 이윽고 황후 간택이 늦어지는 이유로, 나아가 황후 부재 상태 자체로 논의의 대상을 확장해 갔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을미년 의병이나 백범(白凡)의 의거 -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죽인 일 - 를 떠올리면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하는 젊은이들도 나타났을 것이다. 설사 과거에 황후를 증오해 마지 않았던 사람일지라도,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아야 한다는 데에는 주저없이 동의했으리라.
1974년 8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난생 처음으로 청와대 - 다 알다시피 이 곳은 아직껏 일반 지도에는 그려지지 않는 금단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요즘도 가끔 차를 타고 그 부근을 지날 때면 어쩔 수 없이 긴장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 라는 곳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이후 지금껏 들어가 볼 기회를 얻지 못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8.15 기념식이 열린 장충체육관에서 북괴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 소속 재일동포 문세광이 쏜 흉탄에 맞아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온국민을 비탄에 빠트렸고, 분노하게 했다. 내 아버지는 평소에 박정희를 싫어하셨지만 그래도 어린 자식을 이끌고 청와대에 마련된 분향소로 향했다. 아버지의 마음 한 구석에 ‘이 기회에 청와대 구경 못하면 언제 해 보랴’는 생각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숙연하게 분향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북괴의 만행’을 잊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었다. 그 얼마 후 육영수 여사의 국민장(國民葬)은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행사로 치러졌다. 연도에 빽빽히 늘어선 시민들, 특히 부녀자들은 목을 놓아 울부짖었는데, 그런 그들의 모습은 해마다 8월이 되면 연례적으로 TV 화면을 채우곤 했다.
길 좌우에 무성한 백양목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고종 재위시에 이 가로수 관리는 홍릉 위병의 책임이었다. 백성들은 한동안 길 연도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에서 황후를 안장하던 날에 도열해 있던 자신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신체제가 몰락한 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혹’이 제기되었고 몇해 전에는 모 방송을 통해 그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정리한 다큐멘타리가 방영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사건에 의문을 던질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비록 대통령과 영부인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 70년대초에는 어떤 개그맨이 라디오 방송에서 ‘육박전’을 ‘청와대 부부싸움’이라고 정의했다가 혼쭐이 난 일도 있었다 -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 이후 홀아비 대통령과 엄마를 대신해 그 옆에 서있는 불쌍한 영애(令愛)는 존재 자체로서 ‘북괴가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했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상징이 되었다.
전차길 옆으로 새로 자동차 길을 내면서 가로수를 베어 버린 것은 그렇다 쳐도 굳이 전차길 옆에 있던 가로수까지 다 베어 버릴 필요가 있었을까. 이로써 청량리는 이름과 달리 황량리가 되어 버렸다.
뻔한 얘기를 하기 위해 너무 먼 길을 돌아왔나 보다. 국장도 능행도 핵심은 보여주는 데 있었고 만나는 데 있었다. 황후의 능을 굳이 동대문 밖 청량리에 쓴 것도 이 장엄하고 과시적인 행렬이 도성의 한복판, 국중(國中)의 대도(大道)를 관통하게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으리라. 더 말하면 잔소리다.
이 퍼레이드는 치밀하게 고안되고 화려하게 장식된 ‘시위(示威)’에 다름 아니었다. 이 퍼레이드가 통과할 길은 이미 몇 해에 걸쳐 널찍하고 정결하게 정비되었고, 동대문 밖에서 홍릉에 이르는 연도에는 이 땅 최초의 가로수로 백양나무가 늘어섰다. 이 가로수는 혜화동에 거주하던 홍태윤(洪泰潤)이라는 사람이 자비를 들여 심었는데, 그는 이 공을 인정받았음인지 이후 양주군수, 홍릉감독을 역임하였다.
이 가로수는 홍릉(洪陵) 위병(衛兵)들이 극진히 관리한 탓에 무척 잘 자라서 1930년경에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도로가 전국 최고의 가로수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가로수는 사라지고 없다. 1933~34년경 청량리 도로 확장 공사 과정에서 모두 베어졌기 때문이다.
전차 옆의 태극무늬가 선명하다. 일반 전차와는 달리 황실용으로 도입했다고 하는데, 정작 고종은 이 전차가 상여를 닮았다고 하여 타지 않았다고 한다. 글쎄, 상여를 닮았나?
아마도 콜브란은 이 퍼레이드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잘 알지 못하고 ‘사람의 행렬’을 ‘기계의 왕복’으로 대신하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치밀하게 퍼레이드를 준비해 왔던 고종은 그를 위해 애써 다듬고 가꾸어 놓은 길 위에 전차궤도를 놓자는 제안을 덜컥 수용해 버렸다.
정말 단지 빠르고 편하게 능행을 하고 싶어서였을까? 황후의 죽음과 관련된 제반 조치들의 총괄 기획자였을 그가 능행의 형식과 절차, 상징성 - 일반 대중에게는 상징적인 것이지만 황제 개인에게는 현실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 - 전체에 영향을 미칠 대토목공사를 정말 별 생각없이 승인했으리라 볼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새로 놓일 전차에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는 가가 철거와 가로수 식재, 국장과 능행을 겪으면서 종로길에서 시민들이 느꼈던 ‘황후 부재’의 이미지를 항구화하는데 이 기계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는 하루에도 몇차례씩 종로를 관통하여 홍릉 앞까지 ‘자동으로’ 왕복하는 거대한 가마를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원통하게 세상을 떠난 황후를, 국모(國母)의 위(位)를 비운 채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황제를 떠올려 줄 것을 바랐는지도 모른다.
몸은 가렸으나 전차 안에서 신체적 접촉을 피할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전차는 내부에 아무런 칸막이도 없어 남녀노소가 섞여 탈 수밖에 없었다. 대중교통수단으로서의 전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를 극단적으로 좁힘으로써 그들 사이의 심리적, 문화적 격차도 줄여 놓았다.
“연혁사”는 고종이 능행용으로 전차를 부설하고도 막상 전차가 개통된 후에는 객차의 모양이 “상여”를 닮아 불길하다고 하여 한 번도 이용하지 않았다고 썼다. “바보같은 군주”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증거도 없다.
아마도 처음 등장한 전차를 보고 상여를 닮았다는 말이 있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무런 연상작용 없이 서로 다른 대상 사이에서 유사성을 찾지는 않는다. 객차와 상여는 닮았다면 닮았고 닮지 않았다면 또 닮지 않았다. 죽은 사람이 타는 가마가 상여인 것이니 탈것의 모양이야 그렇고 그런 것 아닌가. 가마 닮았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상여 닮았다고 할 것까지는 없었을 터인데도 사람들은 객차에서 상여의 이미지를 보았던 모양이다. 그것도 보통사람은 죽어서도 탈 수 없는 무척이나 큰 상여. 사람들이 전차 개통식 당일에 객차에서 떠올린 것은 바로 한 해 반 전, 이제는 전차길이 놓인 그 길을 따라, 이 날과 같이 온 장안 사람들이 모두 나와 지켜 보는 가운데 행차했던 바로 그 큰 상여는 아니었을까. 고종은 객차가 상여를 닮았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전차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기계의 무서움을 모르는 어린아이가 치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일단 이 새로운 ‘살인기계’를 파괴함으로써 보복했지만, 동시에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누차 반복하는 말이지만, 공간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공간을 설계한 사람의 의도대로만 반응하지는 않는다. 설사 그 설계자가 황제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그 뜻을 거스르곤 한다. 사람들은 황제가 전차에 부여한 복합적 용도와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여를 닮았든 어쨌든 사람들은 기꺼이, 다투어 전차를 탔고, 그 주변에 몰려 들어 환성을 질렀다. 날이 가물어 흉년이 든 것은 전차가 천지간의 습기를 말려 버렸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나돌았고, 전차로 인한 교통사고에 격분하여 전차를 뒤집어 엎고 태워 버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중은 점차 전차에 친숙해졌고, 전차 노선도 빠르게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중이 한 때 전차에 부여했던 상여, 괴물, 살인기계 등의 의미도 점차 희석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핵심만 남았다. 문명의 이기(利器)로서의 전차.
전차개통에 따라 도성의 대문을 여닫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문의 개폐를 알리던 종을 대신하여 일상의 시간적 분할을 알리는 대포가 등장했다. 전차는 이렇듯 일상의 재조직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 문명의 이기는 사람들의 이동을 편하게 하는 교통수단에 머물지 않았다.
전차는 같은 무렵에 개통된 경인철도와 힘을 합쳐 수천년간 변하지 않고 있던 시간과 공간 사이의 정합성(整合性)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다. 도보(徒步)를 기준으로 하던 일정(日程) - 하룻길, 반나절 길 등 - 대신에 훨씬 더 세분화된 기계적 시간(時間)이 거리 측량의 새로운 기준으로 떠 올랐다. 전차 개통과 때를 같이 하여 보신각 타종이 중단된 것은 전차 궤도가 남대문을 통과하면서 더 이상 문을 여닫을 수 없게 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낮과 밤의 구분보다는 생활시간의 분할 - 인경[人定]과 바라[罷漏] 대신에 새로 오포(午砲)가 등장했다 - 이 더 중요하게 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이 교통수단은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태웠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성별 연령별 ‘격리’의 관념은 점차 약화되었고, 무차별적인 ‘대중(大衆)’ - 이 이상한 집단을 만드는데 교통수단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도 드물 것이다 - 이 가시적 실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 전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차 승객들이 시각(視覺)을 통해 받아들이는 단위시간당 정보량은 크게 늘어났다. 올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고 배짱을 튕기던 가로변 상점들이 하나 둘 간판을 내 걸어야 했고, 전차에도 광고 문구가 붙었다. 사람들은 전차를 타면서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체험하기 시작했다.
전차가 가져다 준 변화는 다면적이고 심층적이며 불가역적(不可逆的)이었다. 콜브란은 어땠는지 모르나 고종도 이채연 - 당시 한성부윤이자 한성전기회사 초대 사장이었다 - 도, 김두승도 이런 변화를 예측하지는 못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전차의 본질이었다.
가가 철거 이후 종로 거리 한복판에 돌출한 가건물로는 전차 매표소가 유일했다.
종로도 전차와 함께 변화했다. 보신각 - 다른 말로 인경전[人定殿]이라 했다 - 종은 비록 벙어리 신세가 되어 중심점으로서의 상징성이 많이 퇴색되었지만, 대신에 중심가로로서 종로의 지위는 한층 굳건해졌다. 더구나 경운궁(慶運宮)이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고 그 동문(東門) 대안문(大安門)이 대궐의 정문이 되면서 종로는 동서축 가로라는 태생적 한계 - 제왕남면(帝王南面)이니 정궁(正宮)은 남향(南向)을 하여야 한다. 당연히 나라의 중앙 대로 main street 는 남북축선상에 놓여야 했다 - 를 돌파하여 새삼스럽게 중앙대로의 지위를 얻었다.
종로에 궤도가 놓인지 얼마 되지 않아 남대문에서 용산으로 이어지는 남북간 궤도도 건설되었지만, 종로선에서 그대로 연이어진 서대문 - 애오개 - 마포간 노선의 비중이 더 커졌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이 개천 남쪽에서 원(原) 청국인 거류지와 상권(商圈)을 탈취하고 이어 종로 한인 상가를 위협해 들어오는 상황에서 전차 선로는 마포 객주로부터 시전 상인으로 연결되던 종래의 한인간 유통구조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공간적 담보로 기능하였다. 후일 이른바 선은전광장(鮮銀前廣場) - 현재 한국은행과 신세계백화점, 중앙우체국으로 둘러싸인 충무로 광장 - 이 경성(京城)의 새 도심으로 떠올랐을 때에도 종로가 ‘조선인의 도심’이자 ‘조선의 상징적 도심’으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전차의 힘이 컸다. 전차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아래에서도 종로를 도심으로 남게 한 유력한 도구였다.
전차 길이 놓이면서 문을 여닫는 일이 불가능해졌고, 그 결과 보신각 타종도 중지되었다.
전차에 오르는 노인을 떠꺼머리 총각이 밀어 주고 있다. 전차 지붕 옆에 붙은 산호표니 삼영표니 하는 상표는 자본주의의 본격 도래를 알리는 심볼이었다.
1970년 10월 30일 오전 10시, 종로네거리 보신각 앞에 지하철 전노선의 기준이 되는 수준점이 설정되었고, 이를 계기로 지하철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옛 전차 노선 아래로 지하철을 놓겠다는 명시적 합의는 없었지만, 또 이미 이 때의 서울은 사대문 안으로 국한되었던 1890년대의 서울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종로 네거리 보신각 앞을 서울의 중심으로 인정했고, 지하철 1호선은 종로를 관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까지도 사람들은 종로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집단적 이끌림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탑골공원과 종묘공원 사이를 산보하는 노인들은 전차가 달리던 옛 종로의 모습을 기억하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왜 서울역에서 청량리로 뻗은 노선이 지하철 1호선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110년 전 이 길 위에서 벌어졌던 장중한 행렬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러나 기억하는 것만이 역사가 아니라 잊어버리는 것도 역사다. 한성전기회사는 러일전쟁 직후 일한와사전기회사로 바뀌었고, 명성황후의 능은 고종 사후 금곡으로 옮겨졌다.
1929년에 “연혁사”는 전차에 관한 고종의 기획을 한갓 코미디로 만들어 버렸고, 1933,34년 사이에는 동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엄숙하게’ 늘어서 있던 백양목 가로수들이 모두 베어져 버렸다. 1968년 종로 전차 궤도가 철거될 때쯤에는 이미 더 이상 잊을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
필진 : 전우용 / 등록일 : 2006-08-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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