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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이야기] 박문수 설화를 찾아서

Gijuzzang Dream 2008. 3. 21. 20:22

 

 

 

 

 

 

 암행어사 이야기 ② - 박문수 설화를 찾아서


 

심재우(중세사2분과)

 

 


  1.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전설, 박문수

 

 

 


<그림 1> 박문수 초상
암행어사의 대명사인 박문수의 초상이다. 박문수는 조선 영조 때 활약하였으며,

초상화는 현재 박문수 묘소가 위치한 충남 천안의 고령박씨 문중에서 보관하고 있다.

 

 

조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암행어사는 두말할 필요 없이 박문수(朴文秀, 1691-1756)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박문수하면 관직생활 대부분을 암행어사로 보낸 줄로만 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실제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활동한 것은 영조 때 딱 두 차례에 불과하다.

 

현재 암행어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전국 각 지역에서 널리 전승되어 왔는데,

박문수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박문수 관련 설화는

조선후기에 기록된 ≪청구야담(靑邱野談)≫, ≪동야휘집(東野彙集)≫, ≪계서야담(溪西野談)≫,

≪기문총화(記聞叢話)≫ 등의 야담집에 십여 편 넘게 실려 있고,

최근 채록해 정리된 ≪한국구비문학대계≫ 등 설화집에는 삼백여 편이 전해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화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모두 실존인물 박문수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박문수의 암행어사 활동 당시의 행적이 공식 기록에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설화를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 박문수에 관한 몇 가지 상상을 해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역사 속 박문수는 잠시 제쳐두고 이야기 속 박문수의 모습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도판 1> 고령박씨 종중재실. 천안시 북면 은지리에 위치한 고령박씨 종중재실.

2006년 필자가 답사할 당시 공사중이었으며, 박문수 묘는 뒤편의 산 속에 있다.

 


2. 소설 속 박문수

 

먼저 일제시대에 출판된 소설 ≪박문수전≫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박문수전≫은 1915년에 한성서관(漢城書館)과 유일서관(唯一書館)에서 처음 간행하였는데,

그 후 1921년과 1926년에 다시 발행되기도 하였다.

 

이 소설에는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이야기가 제1회에 실려 있고,

제2회와 제3회는 박문수와 관계없는 중국 명대의 소설을 번역ㆍ번안한 것이다.

박문수의 앞 일을 내다보는 선견지명, 억울한 사람들의 원통함을 해결해주는 정의의 사도로서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제1회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도판 2> 1921년에 발행된 소설 ≪박문수전≫의 첫부분

 

 

조선 영조 때 박문수가 이인좌와 정희량의 난을 진압한 후 암행어사에 선발되어

충청도,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덕유산에 이르렀다.

험한 산길을 헤매다가 등불을 찾아 어떤 집에 이르니,

한 노인이 단도를 들고 젊은 아들 배 위에 올라가 ‘이 놈 죽어라, 이 놈 죽어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누운 사람은 반항도 하지 않고 ‘다만 죽겠습니다’ 하는 말 뿐이었다.

 

박문수가 자세한 사연을 알아보았다.

노인은 글방의 훈장인 유안거이고 그 아들은 유득주인데,

유씨 가족 외에 구씨와 천씨만 살아 이곳을 구천동이라 부른다고 했다.

유안거 이웃에 천운서와 그의 아들 천동수 부자가 사는데, 천동수의 처가 행실이 좋지 못했다.

 

그런데 천운서 부자가 천동수의 처와 유득주가 통간했다는 누명을 씌워,

그 보복으로 내일 합동 혼례를 올려 유안거의 부인은 천운서가 차지하고,

유득주의 부인은 천동수가 차지하려 한다고 했다.

그래서 유안거 부자는 살아 욕을 당하기 전에 온 가족이 죽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박문수는 유안거를 안심시킨 뒤, 곧 무주 관부에 출도해

오방신장(五方神將)의 군복을 만들게 한 뒤, 땅 재주 잘하는 광대 네 명을 뽑아

그들과 박문수가 각각 신장 군복을 입고 구천동으로 달려갔다.

천운서 부자에 의한 폐륜적인 혼례가 치러지기 직전,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오방신장이 들이닥쳐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운서 부자를 잡아 깊은 산골로 끌고 가 죽여버렸다. 이 모두 박문수의 지략에 의한 것이었다.

 

10년 후 박문수가 삼남어사(三南御史) 자격으로 다시 구천동을 찾아가니

예전에 보지 못하던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고, 유안거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유안거가 박문수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하는 말이,

10년 전 천가 부자가 옥황상제에게 잡혀간 뒤 동민들이 ‘저 집은 곧 하늘이 아는 집이다’라고 하며,

이 집을 지어준 뒤 해마다 곡식을 갖다 바쳐 이렇게 잘 살게 되었고,

유안거 또한 동민들의 자제를 더욱 정성껏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박어사는 이튿날 구천동을 떠나 삼남지방을 암행하고 다스린 지 2년 후,

어사직을 사직하고 내직으로 복귀했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신하들이 평생 경력을 왕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박문수가 무주 구천동을 다스린 일과 유안거의 전후 사정을 아뢰니,

왕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박문수의 도량을 칭찬했다.

(≪박문수전(朴文秀傳)≫ 백합사․동흥서관, 1921)

 


<도판 3> 박문수 묘.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묘의 좌우에 무인석이 세워져 있다.

 

 

위의 이야기에서 박문수는 구씨, 천씨들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구천동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부부간에 생이별을 할 지경에 처한 유씨 가족을 구원해준다.

더욱이 박문수는 몰락한 선비 집안인 유씨 가족이

앞으로도 구천동에서 따돌림을 받지 않도록 지혜를 발휘했다.

즉 유씨 가족을 괴롭히던 천운세 부자의 처형이 옥황상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꾸며,

그곳 주민들에게 유씨 가족은 하늘이 보살피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다.

이처럼 소설에서 암행어사 박문수는

곤경에 처한 백성을 구원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3. 설화 속 박문수

 

소설 ≪박문수전≫의 내용은 앞서 본 것과 같다.

그럼 설화나 전설 속 박문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 전하는 여러 설화 속에서도

박문수는 신출귀몰하며 백성들을 구원하는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살인한 중을 붙잡아 억울한 죄수를 풀어주는 <홍판서 누명 벗겨 준 박문수> 이야기를

한 가지 소개한다.

 

<도판 4> 기은박문수도서목록(耆隱朴文秀圖書目錄).

문화재관리국에서 1979년에 박문수 종가에 소장된 전적을 조사하여 목록으로 간행한 책자이다.

책에 실린 박문수 관련 문헌의 상당수는 현재 도난당하고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옛날에 홍판서가 홀로 된 며느리와 살았다. 어느 날 며느리 혼자 집에 있는데,

�은 중이 와서 시주하라고 했다. 며느리가 시주하려고 문밖으로 나가니,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끌린 중이 그녀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정을 통하려 했다.

그녀가 중의 요구를 뿌리치며 반항하자

중은 집의 기둥에 꽂혀 있던 낫으로 그녀를 찌르고 달아났다.

홍판서가 집에 돌아와 며느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 몸에 박힌 낫을 빼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술집 마누라가 와서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노파는 “홍판서가 며느리를 겁탈하려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칼로 찔러 죽였다”고

관가에 신고했다. 그래서 홍판서는 며느리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고을 가까이 오다가 한 중을 만났는데,

명주 바지에 기름 때가 졸졸 흐르는 모습이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박 어사는 그 중을 수상히 여겨서 함께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중은 자기가 시주를 얻으러 갔다가

주인 여자의 미모에 반해 겁탈하려다가 말을 듣지 않자 죽인 일이 있다고 했다.

 

박 어사가 중과 헤어져 홍판서 집에 방문하여 홍판서가 며느리를 죽인 죄로

곧 사형에 처해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중이 거처하는 절로 사령들을 파견하여

살인한 중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홍판서는 석방되었다.

(≪한국구비문학대계≫ 강화군 내가면 설화)

 

 

위 이야기에서 보듯이 박문수는 며느리를 살해한 죄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가난한 양반을

구출하고 살인을 저지른 중을 잡아가두는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암행어사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불법한 관리나 악인을 처벌하기도 한다.

 

또한 전국을 순행하면서 나이 많은 처녀와 총각을 중매해 혼인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처럼 상당수 설화 속에서 박문수는 절대적인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정의를 위해 몸을 던지는 관리의 표상으로 등장한다.

 

물론 박문수가 민중들이 바라는 영웅으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박문수 설화 중에는 간혹 박문수가 평범한 인물로 등장하거나

심한 경우 지혜가 부족한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요즘의 자유분방한 젊은 친구들처럼 박문수는 여인을 유혹하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 암행 중에 원두막에서 만난 처녀와 관계를 맺어 아기를 낳게 하기도 했다.

 


<도판 5> 2003년 MBC 월화 드라마로 방영된 <어사 박문수>의 주연 배우들

 

 

이처럼 박문수 설화 속에는 박문수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지만

이들 설화를 있는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현존하는 암행어사 박문수에 관한 설화는

민중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면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실제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파견된 지역은 경상도와 충청도 뿐이지만,

설화에서는 조선 팔도에 다 암행어사로 다닌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암행어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박문수는 실존인물 박문수 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암행어사들을 통칭한 것이다.

일반 백성들은 박문수 이름을 빌려 모든 암행어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다양한 지역에서 암행어사 박문수 설화가 구전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박문수는 점차 암행어사의 대명사로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필진 : 심재우 | 등록일 : 2007-11-02

 

 

 

 

 

 

 

 경기도 남양주 능내에서의 암행어사 박문수 고택지(古宅址) 발견

 

박문수의 고택지, 현재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1987년 봄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을 답사하였는데 촌노(성명 미상) 한 분으로부터 박문수(朴文秀)의 집터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으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낸 일이 있다.

 

그 이유로

첫째 마재마을에는 누대를 나주 정씨(羅州丁氏)가 살아왔고, 현재에도 살고 있는 반면 고령 박씨의 후손들이 부재(不在)하다는 점과,

 

둘째 나주 정씨 입향조(入鄕祖)로 병조참의를 지낸 정시윤(丁時潤, 1646-1713)은 남인(南人)이며, 박문수는 서인(西人, 少論)이었기 때문에 극단적 대립관계의 인사가 한 마을에 동거한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시윤의 입향(入鄕)시기는

1694년 3월(숙종 20) 남인 일파가 몰락한 갑술(甲戌) 옥사가 일어나 소론이 정권을 장악할 때와 1698년(숙종 24) 잠시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복직되었다가 파직될 때가 아니면, 1708년(숙종 34)전국적으로 홍역과 나병이 창궐하여 수 만명이 죽고 같은 해 5월 큰 한해(旱害)로 인하여 농사를 망친 일로 인하여 9월 조정에서는 백성에게 양곡 방출을 의논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정시윤은 숙종으로부터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정시윤의 마재마을 입향은 1708년에 무게를 두고 싶다. 그리고 5년 후 1713년 졸(卒)하게 된다.


박문수의 입향에 관하여 년보(年譜)를 옮겨 보면,

1751년(영조 27) 그가 61세 되던 해 4월에 배를 타고 초천(苕川)에 갔다.

자신이 노후 전원생활을 할 곳을 늘 생각하던 차에 1650년 나랏일로 관동에서 돌아오는 길에 보아 둔 초천이 생각나서 당도하여 보니 이미 정씨(丁氏) 일문이 마음이 즐겁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상에서 볼 때 박문수의 입향은 정시윤의 증손되는 정지해(丁志諧, 1712-1756), 즉 열수(洌水)의 조부 때 일이다.

여기에 다산의 임청정기(臨淸亭記)를 분석하여 보면 병조참의 정시윤 공이 죽은지 60여 년이 지난 후 판서 박문수가 정시윤이 초천에 지은 '임청정'이 탐이나서 많은 돈을 주겠다고 꾀어 마침내 박씨의 소유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박문수의 입향년은 1751년이므로 정시윤 사후 60년이 아니고 38년으로 고쳐져야 한다.

 

박문수는 고령 박씨로 자는 성보(成甫), 호는 기은(耆隱), 이조판서 장원(長遠, 1612-1671)의 증손이며, 영은군(靈恩君) 항한(恒漢, 1666-1698)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영의정을 지낸 백사(白沙) 이항복의 고손녀(高孫女)이며, 아버지는 공조참판 이세필(李世弼)이다.

부인은 청풍 김씨(淸風 金氏)로서 남양주 삼패리(현 삼패동) 평구마을 유택이 있는 영의정을 지낸 잠곡(潛谷) 김육(金堉)의 고손녀이며, 청풍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의 증손녀이니, 이분의 따님은 현종비(顯宗妃)이신 명성왕후(明成王后)이고, 숙종 임금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장인은 목사를 지낸 도협(道浹)이니 외가를 보나 처가를 보나 당대 최고 명문가로 꼽힌다.

박문수는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고 발탁되고

그 뒤 세자시강원설서, 병조정랑이 되었으나 1924년(영조 즉위년)노론이 집권하면서 삭탈되었다가

1727년 7월(丁未換局)에 소론이 집권할 때 사서로 등용되고 그 길로 암행어사에 발탁되니 박문수가 훑고 지나간 곳(영남지방)은 부정과 비리가 발본색원되고 산천초목이 떠는지라 이때 얻은 별칭이 어사 박문수로 통하였다.

 

1728년 3월 소론의 거두였던 김일경(金一鏡)의 잔당인 이인좌(李麟佐)등이 효종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왕으로 추대하여 세도를 얻고자 무신란(戊申亂)을 일으켜 청주성(淸州城)을 점령하고 승리를 거듭하여 한양으로 북상 중이었다.

영조는 긴박하게 대응하니 도순무사에 오명항(吳命恒, 1673-1728)을,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하여 안성까지 올라 온 반란군을 3월 24일 완전 소탕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영안에 이어 충청도 암행어서로 나가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을 기울이니 만백성이 어사 박문수를 칭송하였다.

 

그 후 병조, 호조, 예조판서를 거쳐 1752년 왕세손이 죽자 책임추궁을 당하여 제주도로 유배 후 다음해 우참찬에 올랐다. 1742년 함경도 진휼사로 나갔는데 진휴사의 임무는 흉년으로 기아에 어려움을 겪고있는 백성들을 도와주고 해결하여 주는 직책인바 이때 경상도의 곡식 1만섬을 실어다 기민하였다. 함경도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주기도 하였다.


다음은 정문(丁門)과 박문(朴門)의 입향에 관하여 열수(洌水)의 '임청정기(臨淸亭記)'로 참고하고자 한다.

 


'임청정기(臨淸亭記)'

 

옛날 100년 전에는 소양강이 고랑(皐狼)아래에 이르러 동쪽 남주(濫洲)의 북쪽을 남한강(南漢江)으로 들어갔다. 남강의 물살은 빠르고 거세어 곧장 서쪽으로 달려 반고(盤皐)의 아래에서 합쳐졌다.

그리하여 홍수가 질 때마다 반고는 물에 잠기므로 사람들이 그곳에 살지 않았다.

그 뒤에는 소양강 물이 아래쪽 부암(鳧岩: 물오리 바위)의 남쪽에 이르러 비로소 남강과 만나 남강의 거센 물상을 밀어내어 물리쳤다.

물은 귀음(龜陰)의 강기슭을 지나 석호(石湖)의 동쪽에 이르러 비로소 이어져 서쪽으로 향하게 됨으로 이 때는 반고가 높이 솟아 있게 됨으로 촌락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초천이 생기게 된 역사이다.

 

숙종 만년에 나의 5대조 할아버지 병조판서 정시윤(丁時潤, 1646-1713)공께서 상소하여 양곡 방출을 애원한 일을 가지고 논의 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열수(두물머리)의 물가를 따라 노후에 살만한 곳을 구하다가 초천의 위쪽에 이르러 반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반고의 주인이 있는지를 물었으나 주인은 없었다.

산 아래 사는 주민들을 �아가서 그들을 깨우쳐 말하기를 "이 반고는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렇다고 그저 차지할 수는 없는 노릇으니 먼저 살고 있는 너희들이 곧 주인이 되는 것이다."하고 말다레(말의 안장에 길게 늘어트린 천)을 벗겨 그들에게 주고 그 땅을 얻었다.

 

그 땅의 형세를 살펴보니 동쪽에는 두물이 새로모여 여울이 잔잔하지 않고 서쪽에는 골짜기 입구가 처음 갈라져서 바람이 모이지 않았다.

이어 반고를 셋으로 나누어 그중 3분의 2는 서쪽에 있는데 여기에 정자를 짓고 '임청정(臨淸亭)'이라 편액하여 걸었다. 이는 아마 도잠(陶潛)의 '귀거래사'에서 뜻을 취한 것 같다.

 

정자 앞에는 괴송(怪松)을 많이 심으니 나무가 늙어서 마치 용(龍)이 도사리고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형상이며 거북이가 움츠리고 학이 목을 길게 뺀 것 같이 매우 기이하였다.

공께서는 아드님을 두었는데 동쪽에는 큰아들(道泰, 1664-1713)집을, 서쪽에는 둘째아들(道復, 1666-1720)이 살고, 막내(성명 미상)에게는 이 정자(임청정)를 주었고, 유산(酉山) 아래에는 작은 집을 지어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이 살게 하였다.

 

공(시윤)이 돌아가신지 60여 년(실제는 38년) 후에 판서 박문수(朴文秀)가 배를 타고 초천을 지나다가 이 정자를 보고 탐이 나서 많은 돈을 주겠다고 꾀어 마침내 박씨(朴氏)소유가 되었다.

그 뒤 임청정이라는 이름은 떼어 버리고 '송정(松亭)'이라 이름하였다.

 

후대의 아이들은 이 정자를 송정으로만 알고 본래의 '임청정'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나는 이것에 느낀 바 있어 기(記)를 써서 보이고자 한다.

 

 

박문수(朴文秀)의 마현(馬峴) 입향에 관하여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거니와

지금 '대가(大家)' 음식점 자리에는 몇 해 전까지도 박문수 고가(古家) 터의 주초석(柱礎石)이 옛 모습 그대로 땅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 주초석들은 집터에서 동쪽으로 약200여m 지점에 한 카페의 정원에 주인을 잃고 있지 않은가 ?

그 수효가 무려 95개인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를 짐작하니 아마도 우리 남양주에서는 가장 큰집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고 건축가의 자문을 얻은 바에 의하면 주초석 한 개가 한옥 한간(間)으로 계산하면 우리 평민들이 지을 수 있는 한계가 99간이기 때문에 주초석 4개 정도가 없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약 20여 년을 구전으로만 듣던 박문수 고가에 대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 것은 고령 박씨 문중의 묘표(墓表) 4점이 발견된 지난해 12월 초였다.

 

마을에서 도로 굴착공사 중 약 50cm 깊이에 있던 비석 4점이 발굴되었다는 마을 이장으로부터 전화신고를 받은 문화관광과 직원의 안내로 조사에 들어갔고,

결과는 박문수의 10대 조부 박수림(朴秀林, 교하현감)과 그 배위(配位) 청주 한씨(淸州 韓氏), 아드님 박시손(朴始孫), 손부(孫婦) 숙부인 여양 진씨(驪陽 陳氏) 등 4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여양 진씨는 박심(朴諶, 참봉)의 부인이다.

 

이 비석들은 한결같이 박문수 근식(謹識)으로 되어 있으며 박문수의 유일한 필적인 안성 오명항토적송공비(吳命恒討賊頌功碑) 뿐이었는 바, 고택지 부근에서 그의 글씨를 다량으로 접할 수 있는 행운은 물론이려니와 사료적 가치 또한 크다고 할 수 있다.

입비(入碑)의 연대 역시 숭정후재무오(崇楨後再戊午)인데, 1738년(영조 14)으로 입향한 1751년과는 13년 전이 된다.

 

한가지 추상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박문수는 평시에도 이곳 마현 근처를 자주 출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청주 한씨(淸州韓氏)의 사패지였는데, 조선 초기 환확에게 내려진 땅이였고 박문수의 10대조 박수림(朴秀林)의 배위가 한확의 후예인 것으로 미루어 처가댁 분산에 유택을 마련했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으로 연구의 과제이다.


묘표 4기가 나란히 정열하여 누워 있는 것도 을축(乙丑, 1925) 대홍수 때 묘소와 가옥이 유실되고 박문수의 후손들이 이사갈 때 비석을 묻고 떠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이야기는 20년전 마을 노인으로부터의 증언으로, 을축 대홍수 때 많은 양의 고서(古書) 등이 유실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전란 때 중공군들이 수십 마차(馬車) 분량의 책을 싣고 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렇다면 마현에서 박문수의 후예들은 그가 입향한 이후 약 200여 년에 거쳐 세거한 것으로 보여진다.

 

박문수의 증손으로 공조와 형조판서를 지낸 영선군(靈善君) 박영보(朴永輔, 1808)의 자호가 열수(洌水)요, 뒤는 초천(苕川)이라 한 것도 지역과 일치한다.

박문수는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상식은 암행어사로서의 행적을 꼽을수 있다. 암행어사는 임금이 친히 임명하는 비밀특명사신으로 왕의 근시(近侍)의 당하조관(堂下朝官) 중에서 임시적으로 특명하여 지방을 밀견(密見)하고 고을 수령들의 부정과 비리를 적발하여 처결함은 물론 백성들의 어려움을 탐문하여 임금에게 복명하는 사신을 말한다.
극비로 임명된 사신은 징복(徵服, 변장)을 하고 행동을 비밀스럽게 하여 누가 보아도 신분 노출이 되어서는 안된다. 마패(馬牌)는 역마(驛馬)의 지급을 규정하는 패로서 발마패(發馬牌)라고도 하며, 암행어사는 이마패(二馬牌)를 사용한다.
이마패는 말그림이 두 마리이다.

 

박문수의 묘소는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적산에 있으며 묘표만 있을 뿐 단순하다.

고령 박씨 종중재실(충남 문화재자료 제289호)과 그 안에 박문수 영정(보물 제 1189호)이 걸려있다.


앞으로 박문수 고택지에 관하여는 심층연구가 계속 이루어져야 하며, 마현를 중심으로 열수(洌水) 정약용을 비롯한 정약전, 정약종 형제와 유산 정학연, 운포 정학유형제, 한확선생, 임숙영, 정백창, 이택등 삼사(三士)와 일가 김용기 생가 등 본격적인 연구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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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타임즈 정명현 기자, 2007-03-31

- , 남양주 역사기행(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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