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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종자들] 보천교 - 차경석

Gijuzzang Dream 2008. 3. 24. 16:17

 

 

 

 보천교 차경석

 

 

 

 ① 함양석산에서 창교와 건국을 선포하다



나라의 이름은 시국(時國), 교명은 보화(普化), 스스로 천자라 칭해

정읍시 입암면에 있던 보천교의 십일전이

조계사(당시 태고사)로 옮겨졌다.


보천교주 차경석(1880~1936)은 철저히 잊혀진 사람이다.

일제강점기 민중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지대해 누구도 따를 이가 없었다.

단순한 종교 지도자를 넘어 새로운 국가의 건립을 천명하고

자신을 중국과 일본과 조선의 천자로 내세웠다.

그는 시대의 정황상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드러내 행한 사람이다.


강증산 만나 문도 되기를 청해


차경석의 부친 차치구(車致九)는 동학의 접주였다.

친구인 전봉준의 간곡한 권유로 2차 거병 때 장령격(將領格)으로 농민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동학의 감계에는 정읍 서면 대흥리에서 선봉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자 몸을 피했지만 밀고로 잡혀 44세의 나이에 화형당했다.

15세의 차경석은 밤에 홀로 형장으로 가 부친의 시신을 업고와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차경석 자신도 관헌에 잡혀 두 차례나 사형선고를 받았다.

첫 번째는 아버지의 일로 복수할 것을 두려워한 흥덕 군수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집행 직전에 겨우 살아났다. 그 일 이후 차경석도 동학에 입도하게 된다.

흩어졌던 동학의 잔당들이 다시 모이던 때라 민심이 예사롭지 않았다.

차경석은 흥덕에서 영학계(英學契) 민란에 주도적으로 봉기를 이끌다가 다시 한 번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난의 주범이란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방면됐으니

두 번이나 죽었다 살아난 셈이다.

1907년은 그에게 운명의 해였다.

토지를 둘러싸고 집안의 송사가 있자 차경석은 고발장을 들고 전주에 가다가

우연히 금구의 주막에 들렀다. 그곳에서 강증산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송사 문서를 보고 강증산은 차경석을 타일렀다.

“네게 유리한 송사다. 하지만 이기면 피고인 집안 열한 식구의 살 길은 사라진다.

남아는 사람을 죽이는 길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어야 한다.”

증산의 설득에 감복하여 즉시 문도가 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산의 숙소까지 찾아가 간청하니 겨우 허락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차경석은 가족들을 불러모아 정황을 설득했다.

“돈이 크냐, 사람의 목숨이 크냐. 나는 사람의 목숨을 죽일 수 없어 송사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그의 말에 동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동학에 빠져 집안이 망했는데 이제는 또 무엇에 미쳤냐는 것이다.

차경석은 강증산을 집으로 모셨다.

증산은 그의 집을 포교소라 명하고 한 달간 머물며 차경석에게

“오직 도(道)를 통해서만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차경석에게 월곡(月谷)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증산이 그의 집에 머물자 몇 차례나 소란이 있었고

결국 그것이 발단이 돼 일본 헌병의 조사를 받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증산은 차경석을 신임했다.

차경석의 이종동생인 고판례를 후처로 삼고 죽기까지 3년 동안 줄곧 그를 곁에 두었다.

증산은 차경석을 병부로 세워

동학을 따르다 원을 품고 죽은 자들의 원을 풀어주는 해원공사를 했다고 한다.

1910년 증산이 죽고 나자 고판례를 중심으로 교가 일어나자 차경석도 적극 도왔다.

교세가 커지면서 중심이 차경석에게 쏠리니 고판례는 따로 떨어져나가고 만다.

그때부터 차경석은 증산의 교통이 자신에게 전해졌음을 내세워 교주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보천교(普天敎)를 일으킨 차경석의 삶의 전반이다.

보천교는 차경석의 삶과 시대적인 배경을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그가 살아온 고난과 당대의 역사가 보천교를 만들었고 이후의 활동을 규정한다.

처음에는 교의 이름이 달리 없었다.

고판례가 내세웠던 태을교(太乙敎)나 선도교(仙道敎)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이었다.

후에 차경석은 보화교(普化敎)라는 교명을 내세웠지만 세상에는 보천교로 더 알려졌다.

증산 사후 차경석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교세가 번창하자 보천교에 대한 감시가 시작됐다.

당시 보천교는 반일의 색채를 드러내 놓고 밝히고 있었다.

일본은 곧 망할 것이며 조선 · 중국 · 일본을 아우르는 나라가 탄생하며

차경석이 천자(天子)가 될 것이라는 것이 민중들의 믿음이었다.

전남대 사학과 윤선자 교수는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에 가장 어필할 수 있는 것이 민족이라는 명분입니다.

나라가 망했으니 민족이 중심적인 이데올로기가 됐습니다.

민족을 내세우지 않으면 교세를 확장할 수 없었던 때입니다. 보천교도 역시 민족을 내세웠습니다.”


포교와 함께 독립단체에 자금지원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는 보천교의 가르침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개인의 수도를 강조하던 강증산과 달리 차경석은 동학과 일진회를 경험한 조직의 수완가였다.

일제의 감시 속에서 신도들을 24방위에 따라 방주제(方主制)를 만들어 조직하고

방주의 책임 아래 교무를 분담하도록 하였다.

조직을 분산하여 자유롭게 확산할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다.

이 제도는 일제의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되자 빛을 발한다.

1917년에 신도가 금전 사기죄로 차경석을 고소하여 10일 동안 구속돼 조사받는 일이 발생했다.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됐지만 그는 일제의 감시가 심해질 것을 예감했다.

차경석은 곧 각 방면의 방주와 간부를 불러모아 감시를 피해 길을 떠날 뜻을 밝혔다.

이때부터 보천교의 교세는 차경석의 도피 행로를 따라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한다.

일제가 건드린 불씨가 사방으로 튀어 겉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된 것이다.

보천교 교주 차경석.

보천교의 영광과 수난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3·1 운동 직후 결국 24개의 조직은 60개로 늘어났다.

1921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는 보천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소식을 실었다.

“4년 전 제주도 의병사건의 수령인 차경석을 교주로 삼아 은밀히 국권 회복을 도모하되 교도가 5만5000명에 달하면 일제히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일종의 배일 음모 단체로서 주모자는 조선 전국을 돌아다니며 교도 모집에 분주하되 특히 산간 지방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력이 매우 성대했다.”

 

기사는 이어서 원산경찰서 관하에만 실제 교도가 수만 명이며 이들이 독립적립금을 걷었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그해에만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는 십여 차례나 독립운동의 무리로 대검거에 나섰다는 기사가 실렸다.

 

검거를 부른 활동의 요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사실을 퍼뜨렸다는 것이고 둘째는 실제로 돈을 모아 독립자금으로 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21년은 보천교뿐 아니라 조선의 민중들에게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일제의 수배령과 감시를 뚫고

9월 24일 경남 함양군 황석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려 창교와 건국을 선포했다.

 

나라의 이름은 시국(時國), 교명은 보화(普化), 스스로 천자(天子)임을 선포한 것이다.

 

일본과도 다르고 조선과도 다른 새로운 나라가 이 땅에 세워졌다.

일본은 조선의 머슴으로 일하다 물러날 것을 천명했다.

차경석은 일경의 감시를 뚫고 수천 명의 신도와 함께 유유히 제사를 올리고 감쪽같이 빠져나가버렸다.

일경을 매수하고 한편으로 역정보를 흘려 감시를 무력하게 했던 차경석의 계책이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은 민간에 여러 가지 신비한 이야기를 낳아 급속히 번졌다.

종교적인 신비주의와 독립에 대한 갈망이 만나 보천교의 교세는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1925년 조만식은 보천교도들과 함께 정의부(正義府) 군자금 모집사건으로 검거돼 재판을 받는다.

경성법원의 재판기록부에 따르면

그해 조만식은 만주에서 돌아와 정읍으로 가 차경석을 만나 군자금의 일부를 받았다.

이후 권총 두 자루와 실탄을 반입해서 군자금을 모으려다 체포된 사건이다.

차경석도 수배령이 내렸지만 소재 불명으로 기소가 중지되고 만다.

이 무렵 이와 유사한 사건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1924년 4월 26일 종로경찰서는 공산주의 단체인 형평사혁신동맹에 차경석이 돈을 댔다고 보고했다.

그해 11월 26일 만주국 관동청(關東廳) 경무국은

차경석이 김좌진의 군자금을 지원한 사건을 조사해 보고했다.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던 김철수는 후일 회고록에서 보천교의 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출판사 만들어 기관지 ‘보광’ 발행


결정적으로 차경석은 체포되지 않았다. 소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숨어 다니면서 포교와 함께 독립을 주장할 뿐 아니라 직접 돈을 모아 독립자금을

댄 것이다. 보천교는 좌 · 우익을 막론하고 선이 닿는 모든 독립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다.

독립을 원하는 대의라면 다른 차이는 하찮은 것일 뿐이었다.

곳곳에서 보천교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1922년 전남 고흥에서 경찰과 난투극을 벌인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빌미로 소요죄, 보안법, 직무방해, 치안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보천교에 대해 적극적인 검거와 탄압을 시작했다.

교주의 잠행과 탄압 속에도 보천교는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22년 출판사 보광사를 만들었고

이듬해부터 기관지 보광(普光)을 발행하여 교의를 전면에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4년에는 최남선의 시대일보 주식을 인수해 실질적인 운영에 나섰다.

보광 제1호는 미신으로 매도하는 일제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우리 교인은 조선 사람이니만큼 민족이 전통적으로 믿어온 신념을 따르고 있다.

조선인이 보편적으로 믿어온 것을 신념하나 교리는 아니다.

세간에서 미신을 우리 교에 전가시키려는 것은 고의적인 곡해다.”

검거에는 독립을 예언하며 민중의 신망으로 맞섰고,

언론을 통한 여론조작은 잡지와 신문의 발행을 통해 대응하고 있었다.

보천교는 조선민중의 가슴에 박힌 화근이자 일제의 골치거리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차경석은 세간에서 이미 차천자라는 이름을 확고히 얻어가고 있었다.

- 2008 03/25   뉴스메이커 767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② 독립적립금 명목 성금 거둬… 일제, 금전사취사건으로 고발

 

민중의 마음은 누르면 튀어오르고 덮으면 퍼져나간다.

보천교가 조선 곳곳에 급격히 교세를 확장한 근간에는 일제의 탄압이 있다.

나라가 사라지고 의지할 곳 없어진 백성들은 보천교가 내세운 새로운 건국에 꿈을 싣고 있었다.

민간에서 차경석은 이미 새로운 나라의 주인공이 되었다.

전북 정읍시 입석면 대흥리에 있는 보천교 신파 건물.


“보천교에 쏠린 관심은 민중들의 독립운동 차원이었습니다. 강증산이 예언한 민족의 운명과 미래를

실제 집행할 대행자를 주장하며 나선 이 중 하나가 차경석입니다. 새로운 왕국이 세워졌고 차경석이

황제가 된다는 신앙이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한국종교학회 김탁 박사의 설명이다. 

십일전 본소에 이르는 대흥리 저잣거리. 약방 건물이 있던 터에 조선에서 가장 큰 종이 걸려 있었다.

인근마을 마석리 주민 남도희(86)옹은 당시 사정을 이렇게 말한다.

“바로 옆인 우리 동네에는 보천교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흥리에는 거의 대부분 타지 사람이 왔어요. 무슨 날이 되면 멀리 경상도 하동, 함양, 경주에서부터 강원도 할 것 없이 전국에서 몰려와 길을 메웠어요.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가 또 돌아갔습니다.”

노인들은 차경석이 당당한 풍채와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고 전한다.

문에 서면 건물 전체를 꽉 채울 정도여서 일제 관리와 경찰도 머리를 숙이고 눈을 피했다는 것이다.

새세상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한 용모였다.

1923년 8월에 발행된 ‘개벽’ 제23호에는 차경석의 인상기가 실려 있다.

진주 출신의 필자는 보천교에서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 까닭에

가짜 상투를 달고서 겨우 차경석과 만났다.

그의 외모에 대해 “머리에는 통천관을 쓰고 의복은 순전히 조선에서 난 것만 입고 있으며,

과연 인격이 있어 보여 여럿이 받들 만하다”고 적고 있다.

이어 대화를 마친 후 이런 평가를 내린다.

“세상 사람은 차씨를 일개 미신가이며 또한 무식한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유혹하여

금전을 사취하는 자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는 그렇게 무식한 이가 아니다.

비록 현시대의 지식은 모자란다 할지라도 구시대의 지식은 상당한 소양이 있다.

그의 엄격한 자태와 정중한 말은 능히 사람을 감복케 할 만하다.

그는 한갓 미신가가 아니라 상당한 식견이 있다.”

 

보천교와 경쟁관계였던 천도교의 기관지에 실린 기사란 점을 감안하면

차경석의 인품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개벽’은 줄곧 보천교를 비판하는 기사를 싣고 있었다.

물산장려운동은 보천교의 민족중심주의를 잘 드러낸다.

민족경제를 살리기 위해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조선사람, 조선 것’을 표방하고 나선 대표적인 민족생존권 운동이다.

1922년 조만식을 중심으로 평양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세워지고

1923년 정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며 애국계몽운동의 선두 역할을 한다.

물산장려운동 핵심역할 맡아


일부에서는 조만식이 보천교의 내각기구에 해당하는 육임의 직을 맡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보천교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보천교의 핵심 인물이라는 것이다.

1923년 2월 13일 동아일보는

보천교에서도 음력 초하루부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할 것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학계의 연구는 보천교가 물산장려운동의 핵심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차경석은 교단의 중심지인 대흥리 일대에 자급자족의 경제기반을 조성한다.

일본산 옷감을 쓰지 않기 위해 직물공장을 만들고 염색공장까지 세웠다.

농기계 공장을 비롯해서 생업과 관련된 물품은

모두 조선의 것으로 쓴다는 것이 보천교의 기본적인 방침이다.

농촌지역에 어울리지 않게 근대 공장시설이 많은 것이 이 지역의 특징이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보천교의 대사회적인 움직임이 커져가자 일제는 적극적인 와해공작을 펼쳤다.

보천교 신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함께 한편으로는 언론을 이용해 사교라는 점을 강조하고

다른 편에서는 친일을 유도하며 회유했던 것이다.

민중으로부터 보천교를 떼어놓기 위한 술책은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다.

항간에는 조선 총독 사이토가 보천교 본부를 방문했다는 소문과

아사요시 경무국장도 비밀리에 차경석을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보천교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친일에 대한 의혹을 퍼뜨리는 데도 기여했다.

강증산은 생전에 차경석에게 예언 같은 말을 남겼다.

“너는 집을 크게 짓지 마라. 그러면 네가 죽게 된다.”

운명을 거슬리려는 듯 차경석은 1925년 1월부터 중심교당인 십일전(十一殿) 건설에 나섰다.

이미 건국을 선포한 시국(時國)의 궁전을 건설하려는 것이다.

차츰 조여 오는 탄압에 대한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민간에는 정감록 등의 비결과 예언서가 팽배해 있었다.

특히 정감록 징비록에 실린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의 구절은

곧 닥칠 기사년(己巳年, 1929년)에 일어날 일로 믿어졌다. 진사년에 성인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십일전 신축과 맞물려 기사년 기사월 기사일에 새로 지은 궁전에서 천자로 오른다는 소식도 퍼져갔다.

근정전보다 두 배 큰 십일전 건립

차경석의 3남인 차봉룡(81)옹과 차경석의 묘.

십일전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1만 여 평(33만㎡)의 부지에 건평 350평(1155㎡), 높이 99척(30m), 가로 30m, 세로 16.8m에 이르러 패망한 조선왕조의 정전인 근정전보다 두 배나 크고 화려했다.

십일(十一)은 흙 토(土)자를 나타내니 보천교에서 말하는 세상의 중심이다.

그러나 차경석은 그 건물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다. 일제는 건축 당시부터 시비를 일으켜 1929년 십일전이 완공된 후에도 건물 사용을 불허했다.

결국 교단의 재산을 쏟아붓고 사용은 하지 못하게 되니 일제가 의도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시대일보의 인수가 실패로 끝나고 안팎으로 벌린 교단의 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일제의 이간책이 성공하게 된다. 핵심 인원들이 혁신회를 발족하여 내분을 일으키고

일각에서는 차경석을 암살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교리를 둘러싸고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고 만다.

 

보천교에서 떨어져나온 신도들은 강증산을 교조로 삼는 다른 종단을 설립했다.

동화교와 수산교, 삼성교 등으로 교단이 분열되고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언론은 악의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경찰은 보천교 본소에 주둔하며 출입자를 일일이 감시했다. 활로가 사라져갔다.

결국 1936년 3월 10일, 57세를 일기로 차경석은 세상을 떠난다.

당시 아홉 살의 나이로 임종을 지켜본 3남 차봉룡(81)옹은 이렇게 증언한다.

“부친은 분사하셨습니다. 일제가 교를 억압하고 눈앞에 교당을 다 지어놓고도 들어가지 못하니

어찌 억울하지 않으셨겠습니까. 수족을 잘라 조선이 망할 때와 똑같은 형국이었습니다.

화를 삭이지 못하시고 병이 들더니 별 말씀을 남기시지 않고 돌아가셨습니다.”

몰려든 인파를 물리치고 일본 경찰은 유구를 빼앗다시피 하여 인근 산에 묻고 콘크리트로 덮어버렸다.

민중의 가슴 속에 차천자로 되살아나는 것이 그만큼 두려웠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야 겨우 봉인을 깨고 그 곁에 묘소를 만들 수 있었다.

일제는 교단을 강제 해산하고 재산을 공매처분한다.

십일전은 해체돼 땔감으로 팔려가고 나머지 재목의 일부는 당시 돈 500원에 팔려

지금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다시 지어졌다. 건물은 3분의 1로 줄어든 초라한 모습이 됐다.

지상천국의 나라 시국(時國)도 사라지고 보천교도 사라졌다.

지금 보천교 본당에는 1년에 네 차례 제사가 있을 뿐이다.

멀리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겨우 맥을 지켜가는 15명 남짓한 간부 신자만이 참석한다.

묻어버리기엔 아까운 식민지 민족의 자각이 조용히 스러지고 있다.

- 2008 04/01   뉴스메이커 768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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