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1번 국도의 문화적 실크로드를 따라서

Gijuzzang Dream 2008. 3. 21. 02:27

 

 

고승현, <길>, 나무, 2007, 경기도박물관

 

 

1번 국도

평북 신의주에서 전남 목포까지 긴 여정을 지닌 우리나라 대표적인 국도이다.

 

경기도에 입장에서 보자면

판문점과 인접한 파주, 고양, 벽제, 구파발 등 경기 북부를 지나

서울을 관통한 후

안양, 의왕, 수원, 오산, 평택 등 경기 남부를 지나게 된다.

 

이 길은 근대사 이전부터 주요한 교통과 상업의 통로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을 터이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태평과에 장원으로 급제 한 후 어사로 명을 받아 내려간 길도 바로 1번 국도에 해당하는 경기 남부의 행로였다.

 

“남대문밖 썩 내달아 칠패팔패(七牌八牌) 청패 배다리 동작(銅雀) 월강 과천(果川)들어 중화 하고 수원(水原) 들어 숙소허고 천안 삼거리지내여...”

 

당시에 용산 청파동을 지나 노량진을 넘어

수원, 병점, 평택을 통하여 천안으로 행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흥보가의 제비노정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경기 북부를 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양주, 포천, 가평, 영평은 동교이고, 고양, 적성, 파주, 교하는 서교인데,

두 교는 모두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사대부 집이 가난하고 세도를 잃은 다음,

삼남으로 내려간 자는 집안을 그대로 보전하게 되나

교로 나간 자는 가난하고 쇠잔해져서 한두 세대를 내려오면 신분마저 낮아지게 되어,

품관이나 평민이 되어 버린 자가 많다.”

 

이는 서울 위성 도시로 경기도의 입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벼슬이나 권력을 떼인 뒤 낙향하여 불우함을 극복하고 권토중래를 꿈꾸던 저 삼남의 사대부들과는 달리 토착적 기반과 당파가 원래 없었거나 상실된 사대부들의 주된 터가 경기도 북부였던 것이다. 남인들의 거주지가 경기도 많았던 것도 이를 반증해주고 있다. 정조 때 그 흥망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인물이 두릉의 다산 정약용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번 국도에 해당하는 서교는 한국전쟁 이후 끊어진 국토와 맞붙어 군사 배후 도시의 역할을 담당했어야 했다. 비무장지대와 임진각을 앞에 둔 파주는 국토분단의 비극을 고스란히 삶으로 간직한 채 역사의 강에 몸을 맡겨왔다. 결국 파주는 휴전선으로 상징되는 위기와 광기가 혼재하던 곳이다.

 

40여 년의 짧은 생을 살았던 시인 원희석의 유품으로 남겨진 메모지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만날 수 있다.

 

“이제 파주인의 마음속에 홀로 타던 촛불들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들판에서 벼포기처럼 자라던 우리들의 희망”

 

요즈음 말로 집창촌에 해당하는 용주골은 군사도시의 한 상징일 것이다.

양공주들의 삶이 도시 곳곳에 배음으로 흐르던 파주에서 그들이 꿈꾸었던 희망과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파주 옆 일산은 이제 신도시의 신화를 이룩하며 우뚝한 빌딩으로 채워져 있다.

파주 고양에 예정된 도시화의 물결은 앞으로도 더 많은 변화를 예고해주고 있다.

얼마 전 조사에서 밝혀진대로 일산은 전국에 가장 많은 시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집계되었다. 저 황량한 서교에서 풍요롭고 기름진 도시로의 변이와 그 곳에서 살아가는 많은 시인들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경기도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는 <경기, 1번 국도전>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강영민 작가의 <중력제도>는 1번 국도를 중심으로 한 도시화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건물과 육교 그리고 사람들이 위태롭게 설치되어 있다.

45도 이상 기울진 설치물들은 개발과 속도라고 하는 현대성의 불안한 상징들이다.

토요일 오후 그의 작품을 한참 쳐다보던 중 비스듬하게 설치된 도로 위의 조그마한 자동차 설치물이 딱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슬그머니 자동차를 주어 올리며 아마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1번 국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화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민정기. <실크로드>연작, Oil on Canvas, 1993

 

 

길과 도시 그리고 시장은 언제나 하나의 범주로 묶여왔다.

단 시장의 개념이 오늘날 대형마트로 대치되며 개별적 상품 가치 대신 교환가치로 대치되어 왔던 사정이야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에 가까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경기, 1번 국도전>에 전시된 민정기 작가의 <한반도 실크로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근대화를 거치는 동안 상실한 정신풍경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동일성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경기 고양 출신으로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 맹원으로 활동하다 월북한

시인 박세영은 그의 고향인 고양을 아래와 같이 추억하고 있다.

 

산 없는 이곳에서
물 흐린 이 땅에서
흘러다니는 나그네 몸이 외롭구나,
지금은 추석달, 끝없는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저 달,
北滿(북만)의 들개 짖는 소리에 마음만 소란쿠나.

고향의 하늘을 날으는 새, 땅에 기는 짐승들도,
지금은 따스한 제 집에서 단꿈을 꾸련만,
팔려간 노예와 같이
풍겨난 새와 같이 이 몸은 서럽구나.
- 박세영 시 「행수」 부분

 

나라를 잃고 북만으로 떠돌다 맞이한 추석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덩어리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향도 아파트 단지로 둘러쌓인 비정한 도시의 모습으로 서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문병탁 작가를 위시한 많은 작가들이 생명과 생태에 그들의 감각적 렌즈를 맞추어 놓고 있다.

박이창식 작가는 <1번 국도 산수풍경>을 통하여 1번 국도에서 주운 가구와 물건들로 국토의 또 다른 유토피아를 꿈꾸는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GOD FATHER CLUB'이라는 상호도 낡은 채 번쩍이며 한 켠에 놓여 있었다.

도시에서 살아야 하지만 도시의 진화를 바라보며 절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의 삶을 보여준다. 1번 국도는 도시와 농촌의 경계, 그리고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첨예하게 안고 있는 한반도 생명의 기준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반, <날개 DMZ 1~5>, 폴리우레탄, 1995

 

서울을 관통하여 만나는 1번 국도 초입은 안양이다.

시흥과 안양 의왕으로 이어지는 길은 산업도로로서의 1번 국도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는 시인 기형도의 고향이었으며 그 평생을 산 곳이기도 하다.

여기서 평생이라고 말했지만 그의 일생은 30년을 전후 한 짧은 생이었다.

만 스물아홉의 나이로 심야 극장에서 마감한 그의 생은 젊은 시인들에게 부채 의식과 같은 것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어쩌면 80년대 말 시대상황과 맞물려 광장으로 상징되는 당대 현실 속에서 철저히 유폐된 개인의 실존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 29세의 젊은 시인 기형도는 그렇게 시대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쓸쓸히 자신의 생을 다하였다. 시흥에서 안양으로 가는 중간 기아대교를 건너 좌회전을 하면 그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생가로 가는 길은 아직 천변으로 낮은 판자집들이 줄을 지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교회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눈에 띠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1번 국도 그 산업도로 한 켠에서 산업의 발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들의 생의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 기형도 시 「안개」 부분

 

기형도 시인의 등단작 「안개」는 안양천변의 고단한 삶이 유려한 필체로 그려져 있다. ‘주식’,  ‘희고 아름다우며’,  ‘무럭무럭 자라’ 등과 같은 서술은 기실 아이러니의 극치를 보여준다. 어쩌면 기형도의 위 시는 1번 국도의 불편한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오늘날 1번 국도의 번성은 안개 주식을 지분으로 나누어 가진 여공으로 상징되는 가난한 사람이 쌓아올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1번 국도는 사실 산업도로 불리기까지의 길과 그 이후의 길이 얼마간의 차이를 보인다. 원래 1번 국도는 늘 도시 중심을 통과하였으나

길을 확장하고 새로 내는 과정에서 도시 외곽으로 길을 새로 내는 바람에

오늘날 1번 국도를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구체적인 사람살이를 만나기 어렵다.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헤어졌다가 사람이 뜸한 곳에서 다시 만나는 형국이다.

아직도 장이 서는 파주, 문산, 오산 송탄 평택의 오일장을 지금의 일번 국도 상에서는 만날 수 없다.

 

안양에 들어서면 평촌이라는 거대한 신도시를 만나게 된다.

원래 지명이 벌말이었던 너른 벌판이 지금 아파트 숲으로 변해있고 신도시의 아파트 가격을 주도한다는 소리를 듣고 보면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안양역은 오래 전 기차가 서고 그것이 교통수단이었던 서울에서 보면 가깝지 않던 곳이었다.

 

나의
고향은
급행열차가
서지 않는 곳.

친구야,
놀러 오려거든
삼등 객차를
타고 오렴.
- 김대규 시 「엽서」 전문

 

안양이 고향이며 안양을 그의 문학적 토대로 삼고 그 곳으로부터 한 발자국도 물러난 적이 없는 김대규 시인의 짧고도 이름다운 위의 시를 보면 안양은 서울에서도 꽤 먼 장소로 느껴질 정도이다.

삼등 열차에서 내려 느릿느릿 찾아온 친구와 허름한 술집에 앉아 대포잔을 나누며 시를 이야기했을 흑백 사진과 같은 한 컷의 정경이 떠오른다. 오랜 것은 모두 폐기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면에서 <경기, 1번 국도전>에 간이역들을 소재로 한 사진들은 결국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카스테라 봉지를 뜯던 女子가 있었다
주홍빛 망에 담긴 계란이 빛나던 시절
허기진 시간 속에서
자그마한 사람들이 모두
조금씩 먹고 있었다
역에서 사람들은 나누어 먹는 연습을 했던 것
부자들은 역을 줄였다
나누어 먹는 연습을 할 곳이 사라졌다
더 빨리 가기 위해
우리는 역을 폐쇄했다  
- 졸시 「사라진 역(驛)」 전문

 

이제 모두 것은 파시스트적 속도로 움직이며 그것이 큰 자랑이 된 시대이다.

간이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이제 없다.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낯모르는 이에게 먹거리를 나누어 주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수원은 경기 남부 최대 거점 도시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지니고 있는 곳이다.

나혜석을 위시한 박팔양 등의 고향이 수원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수원 화성은 단장을 거듭하여 옛 면모를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이다. 더욱이 정조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의 터전이 바로 이 곳이었으며 그 절망의 한이 고스란히 남은 곳도 바로 수원이다.

 

이 길은 정조대왕의 화산 행차, 그 길이기도 했다.

철인군주가 품었던 기상과 아버지의 불우한 죽음이 한이 되어 서린 길이 바로 지금의 1번 국도인 것이다.

한양으로 돌아가며 아버지와 자신의 한을 달랠 길 없어 지지부진 돌아보던 지지대 고개의 전설이야 오늘날 진정한 부모 자식 간의 정리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바이다.

대개의 유교적 가치들이 빛바랜 이념으로 남은 이 때 정조가 보여준 효(孝)의 실천을 그대로 이어가고자 몸부림치는 곳도 바로 효원의 도시 수원인 것이다.

 

늙은 노모를 필리핀에 버리고 올 정도의 파렴치하고 비인간적 정서가 지배하는 이 때 부자유친의 정리를 말해 보아야 시들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고 말 터이다.

병점으로 내려가다 차로 10여분 오른쪽으로 가면 용주사와 융건릉을 만난다.

팔월 염천 뒤주에 갇혀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죽어간 아버지를 기억하는 고통스러움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강영민, <중력제로>, 복합재료, 2007

 

화성시 동탄은 이미 1차 신도시 건설이 완성된 상태이며 2차 신도시 계획이 추가적으로 발표되어 거대 도시로 탈바꿈을 눈 앞에 두고 있다.

그곳이 노작 홍사용의 본거지이자 남양 홍씨의 세거지이다.

석우리, 일명 돌모루에서 그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으며 대지주였던 그의 부친으로 인해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문예지 <창조>의 창간과 극단 <토월회>에 참가하는 과정에서 그는 많은 재산을 쏟아부었다. 그의 젊은날은 떠돌이의 삶 그 자체였다.

 

“아- 서울은 무섭다. 서울은 지겨웁다. 나의 길이길이 살 영주(永住)의 낙토는 어느 곳에 있느냐. 나의 그리운 고향은 어느 쪽으로부터 서 있느냐.”라고 노작이 울부짖었을 때

고향은 낙원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터였다.

어쨌든 모든 재산을 다 날리고 자신의 몸조차 의지할 수 없었을 때 돌모루를 찾아 칠 년만에 귀향을 하게 된다.

 

일곱 해 동안에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살았느냐. 모군꾼, 전차운전수, 석탄광부. 그러나 그것도 모두, 뼛심을 들이여 죽도록 벌어야, 한 몸뚱아리 먹고 입을 치다꺼리도, 마음대로 넉넉하게 잘 되지 못하였다....(중략)

단풍 든 앞뒷동산이, 찌그려놓은 듯이, 빼곡이 소담스러웁게 영근 논과 밭을, 에둘러 휩싸였다. 예전에 김장 심던 텃밭에는, 새로이 집을 지었고, 예전에 집있던 터전에는 고추를 심어 가꾸었다. 집집마다 지붕마루에는, 널어 말리는 붉은 고추가, 한창 가을빛을 시새워한다.
- 홍사용 시 「귀향」 일부

 

자신의 예술적 신념에 따라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타향을 전전하던 그에게 고향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홍신선 시인, 홍일선 시인이 바로 돌모루를 근거지로 한 노작의 일족들이다. 그러나 이제 모두 택지 개발지로 수용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경기도 1번 국도의 끝은 오산, 송탄, 평택이다.

오산비행기장이라고 부르는 K2는 실제 송탄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의 비행기장 뒤편 두릉리 일대는 모두 수용되어 일부는 비행기장으로 일부는 국제평화신도시로 예정되어 있다. 사실 지금의 비행기장도 한국전쟁 직후 어느날 갑자기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그 혼란통에 건설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금 수용당하는 비행기장 주변의 주민들은 또 다시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6.25 전쟁 후 미군의 공군 기지는 확장을 거듭하며 원래 오산 공설 운동장부근에 있던 것이 송탄으로 이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오산 비행기장으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군들 자신도 오산 에어베이스라는 이름을 고수하고 있다. 하긴 그들에게 이곳이 오산이든 송탄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송탄의 원래 지명은 숯고개이다.

유난히 소나무가 많았던 이곳에서는 숯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숯고개가 쑥고개로 발음되면서 일반화되는 듯 싶었지만 미군의 진주와 함께 기지촌 특유의 저속한 대칭 명사인 씹고개라는 말이 오가면서 서둘러 송탄이라는 지명으로 바꾸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박석수는 기지촌으로서 송탄의 본질을 일찌감치 간파한 인물이다. 그의 모든 작품들이 기지촌으로 전락한 자신의 고향에 대한 분노 그리고 연민으로 채워져 있음은 바로 이러한 사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마을은 철조망 속 휘파람
소리 일찍 저물고
저문 들녘 무거운 정적 속에서
구중의 땅 밑을 헤매던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왕복 엽서처럼 구겨질대로 구겨진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철수하는 미군의 가슴이나
태평양이나 아메리카로도
닦여지지 않는
누이의 눈물은 피가 되었다.
십자가에 못박힌 한반도의
가장 참혹한 노을이 되었다.
- 박석수 시 「노을 - 쑥고개 4」 전문

 

‘철조망 속의 휘파람’은 박석수 시인이 인식한 현실의 지평이다.

‘철조망’은 미군이 거주하는 비행기장 안의 공간과 가난하고 척박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쑥고개를 구분하는 구실을 한다.

그 철조망의 경계는 끝없이 와해되며 견고하게 고수되기도 한다.

미군들은 자신들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철조망을 와해시키지만 쑥고개 사람들은 가난한 생을 뿌리치기 위해 그 철조망을 넘나든다. 미군들은 자신들의 현실적 이익을 위해 철조망을 견고하게 고수하며 쑥고개 사람들은 딸의 정절을 위해 철조망을 고수한다.

그 누이의 눈물은 평택 평야의 참혹한 노을과 어우러져 십자가에 달린 한반도의 비극적인 운명을 보여준다.

 

이윤엽, <대추리―동네미술관>, object, 2006

이제 1번 국도는 경기도의 마지막 관문 평택에 도달한다.

 

평택 시내를 통과해

천안으로 방향을 잡으면

사방의 트인 벌판을 만난다.

그 곳에서 오른쪽이 바로

대추리이다.

 

<경기, 1번 국도전>에서 선보인 작가 이윤엽의 <대추리-동네미술관>, 작가 이종구의 <대추리 사람들> 등의 작품들은 대추리에 대한 사실적인 기억을 잊지 않고자 하는 몸부림 바로 그것이다.

 

시골집 대청마루 위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는 일은 어쩌면 그 자체로 가족사 복원의 느낌을 준다.

어느 먼 곳을 떠돌다 집에 돌아온 한 여름, 늙으신 어머님께서 쪼개주시는 수박을 먹으며 할머니를 위시한 삼촌 그리고 사촌, 당숙의 얼굴이 박힌 빛바랜 사진을 올려다보는 일은 잠시나마 낙원으로 돌아가는 그것이리라.

 

이 두 작가 모두 사진을 위시한 대추리 마을의 실생활 소품을 오브제로 쓴 이유는 바로 우리의 기억의 층을 더 두텁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을 터이다.

기억이여, 두껍게 먼지를 뒤집어 쓴 기억이여.

 

이제 이 안성천을 넘으면 충청남도 천안이다.

그 어느 곳이든 길의 사회학이 크게 다를 수 없겠지만

유독 경기 일원의 1번 국도가 우리의 가슴을 데우는 이유는

개발과 발전 그리고 피폐의 시대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탓이리라.

 

자신의 몸을 구부려 끊어진 곳에서 다시 길을 이어가고,  

언젠가는 그 철조망마저 온몸으로 밀고 들어가 <건널 수 없는 길>을

다시 1번 국도로 이을 날이 오고 말 것이다.

저 상처투성이의 1번 국도로 말미암아

이용후생의 튼실함이 국토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 우대식 / 시인. 1965년 생. 아주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 논문집 『해방기 북한 시문학론』 등이 있다.

현재 평택진위고 교사로 일하고 있다.

 

*** 경기문화재단 / <기전문화예술> 2007년 가을호.

 

 

 

 

 

 

 

- Seiko Sumi - Pechi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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