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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에 담긴 비밀 - 강우방 미술사학자

Gijuzzang Dream 2008. 3. 10. 22:04
 
 
 
 

 

  ‘숭례문에 담긴 비밀’

숭례문 용머리, 불을 막고 생명의 영기를 내뿜었건만…

 

 

 

 

 


 
 
 
 
《국보 1호 숭례문 화재가 발생한 지 17일째.
처참한 모습의 숭례문은 가림막으로 완전히 가려졌고
지금은 복원 준비가 하나 둘 추진되고 있다.

그래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당당하고 아름다운 숭례문의 모습이 남아 있다.

이에 미술사학자인 강우방(사진)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숭례문의 의미와 특징에 관해 흥미로운 글을 보내왔다.

숭례문 지붕에 있는 치미(鴟尾)는 화재 방지의 상징을 담아

용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며, 경남 양산 통도사에는 숭례문을 불교적으로 해석한

흥미로운 불화가 그려져 있다는 내용 등이다.》

 

 

 

○ 용마루 양 끝에 ‘용의 머리’ 세워

 


용의 입 모양의 치미 도면

숭례문 용마루의 양 끝에 세워진 치미의 도면. 용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눈썹 부분에서는 불꽃 모양의 영기문이 나오고 그 영기문에서 다시 사슴 뿔 같은 것이 뻗어 나오는 모습이다.

(그림 제공 강우방 씨)

숭례문 지붕 가장 윗부분에 가로로 길쭉한 용마루가 있다. 용마루 양 끝에는 치미 혹은 취두()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여기서 치미는 올빼미 꼬리, 취두는 독수리 머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용마루에 앉아 있는 용머리(용두 · )를 놓고 왜 그런 용어를 쓰는지 모르겠다.

이 숭례문 용마루 양 끝에서 크게 벌린 용의 입에서 용마루가 생겨나는 영기화생()의 도상이요, 동시에 용두 자체에 생명의 생성 과정을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도상이 표현되어 있다.

 

영기화생이란 말은 모든 것이 신령()스러운 기()에서 생긴다는 뜻이다.

 

숭례문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그 용두이고 용마루이며 여기에서 숭례문이 탄생한다.

화마로 상층 건물이 허물어져 내리면서 그 용두도 불탄 목재와 함께 떨어져서 깨어졌는데 파편을 찾아 붙여서 보존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그 도상의 상징을 읽어 보면 곧 알 수 있다.

용의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용의 눈썹에서 불꽃 모양의 영기문(· 영기화생을 무늬로 조형화한 것)이 나오고, 그 영기에서 사슴뿔 같은 것이 나오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작은 용의 모습이다.

 

이 모습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기문의 변화 과정을 보면

크고 긴 영기문에서 작은 영기문이 돋아나고

그것이 자라서 다시 더 작은 영기문이 돋아나는,

생명의 반복적인 생성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이 식물이 아니고 동물인 경우에는

영기의 집적()인 용의 실체에서 작은 용이 생겨나는 도상으로 표현된다.

이 도상을 숭례문에서 처음 찾게 되었으니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그 용의 머리 위로 영기의 첫 번째 싹(제1 영기 싹)이 돋아나고

다시 긴 줄기가 뻗쳐 전체적으로 또 다른 싹(제2 영기 싹) 모양으로

용두의 윤곽을 잡고 있지 않은가.

 

용은 물을 상징하니 끊임없이 생겨나는 물로 화마()를 방지하려는

옛사람들의 간절한 정신적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심혈을 기울여 이러한 모든 조형을 만들어 예부터 화마를 방지하려 했던 것이다.

화마 방지를 목적으로 건축 형태가 탄생된 셈이다.

 

 


 

 


○ 불화에 나타난 화재 방지의 상징

 

바로 그 숭례문이 불화에 나타난다.

1775년 그린 양산 통도사의 팔상탱()이다.

팔상탱은 석가모니 부처 생애의 주요 사건을 여덟 폭으로 나눠 그린 것이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사문유관상()엔

동서남북 네 성문을 나서며 노인과 병든 사람 등 고통에 허덕이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을 확인하는 광경이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마지막 성문을 나서며 승려를 만나,

인간은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세 번째 그림의 오른쪽 아래 귀퉁이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그 위에 2층짜리 문루()가 있다.

그 성문을 나와 가마에 타고 있는 태자가 병든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옆에는 약탕관에 약을 달이는 모습이 보인다.

 

문루 위에 빼곡히 가득 찬 가르마 탄 여인들과 떠꺼머리총각들의 익살스러운 풍경은

우리 풍속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18세기 후반에 단원 김홍도가 한국 풍속화를 완성하는데,

그것이 불화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알게 해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일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의 건축양식이

18세기 불화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음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 폭에는 바로 ‘(숭례문)’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숭례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아래 층엔 ‘大門(이대문)’이란 현판이 또 하나 걸려 있는데 실제로는 없는 것이다.

 

흥미 있는 건 이()가 주역의 팔괘 중 남쪽의 방위에 해당하며, 불을 표상한다는 점이다.

경복궁을 마주 보는 관악산의 센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즉 불로 불을 막는 이화치화()로써 강력히 대항하려고 또 하나의 현판을 달아

남대문이라는 의미와 함께 불을 나타내 숭례문의 존재 이유를 더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통도사 불화에 나타난 건축이 바로 숭례문이란 증거는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의 표현에 있다.

물론 창건 당시 숭례문의 중국식 공포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18세기에 재건한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홍화문의 공포 양식,

그러니까 당시 우리나라 건축의 독자적 공포 양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이 불화는 기념비적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18세기 건축 양식 가운데 하나인 제2의 영기 싹이

바로 이 불화에 그대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 부처의 자비의 공간

 

그렇다면 이 숭례문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팔상탱 불화 가운데 두 번째 폭인 도솔래의상()은

마야 부인이 잉태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도솔천에 중생을 보호하고 길을 밝혀 주는 호명보살()이 머물고 있었는데,

흰 코끼리를 타고 해의 정기를 띠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가는 광경이다.

 

마야 부인은 전각 안에서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그 꿈을 꾸고 있다.

그 전각 하층의 현판은 ‘(마야궁중)’,

상층에는 ‘(입태실)’이란 현판이 각각 걸려 있다.

그런데 오른쪽 구석의 대문을 보면 놀랍게도 ‘(돈화문)’이란 현판이 보인다.

현판이 걸린 건물은 한국적 양식이며

영기문으로 표현한 공포는 18세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럼 돈화문은 창덕궁의 대문이므로 마야 부인이 머물고 있는 곳이 바로 창덕궁이며,

태자는 왕비의 침소인 대조전(殿)에서 태어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로 싯다르타 태자가 창덕궁에서 잉태되어 태어나 장성한 후

궁성의 대문을 나서며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을 목도하는 것으로

특히 남쪽의 숭례문을 나서서 병든 노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싯다르타 태자의 삶의 공간이 창덕궁으로 설정되었을까.

 

그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전율했다.

석굴암 논문을 쓸 때 석가모니가 바로 토함산 그 자리에 앉아 성도를 이루며

신라의 불국토() 사상이 완성된다고 결론지은 바 있었다.

 

경주의 신라 황룡사 터에는 가섭불연좌석()이 있는데

석가모니 이전의 가섭불이 설법하며 앉았던 바위라고 했다.

이처럼 모든 나라는 석가모니가 자기 나라 사람이라며

각각 자기 나라를 불국토라고 믿는 사상이 있었다.

 

흥미 있는 것은 요즈음 아프리카에서는 흑인의 모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한복을 입히고 갓을 쓰게 하여 예수의 일생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통도사 팔상탱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싯다르타 태자가 숭례문과 창덕궁에서 성장하였음을,

우리 고유의 건축양식을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숭례문의 비극적 죽음을 바라보며

나는 건축과 회화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든다.

- 강우방 미술사학자

- 2008. 02.27 동아일보

 

 

 

 

 

 

유하집

 

단청한 누각 허공에 높이 솟아         畵閣嶢出半空
올라보니 마치 나는 기러기 탄 듯     登臨황若駕飛鴻
평소의 웅지(雄志) 의탁할 데 없어   平生壯志憑無地
천지의 만리 바람에 혼자 누웠네      獨臥乾坤萬里風

- 임득충(林得忠)이 숭례문 누각 벽면에 썼다고 전하는 시

   (홍세태의 ‘유하집’에서)


무인 임득충이 써서 숭례문 누각에 걸었다는 이 시는

조선 문인들 사이에서 꽤 회자됐던 모양이다.

용력이 뛰어났던 그는

남대문에 올라 탁 트인 한양을 바라보며 자신의 호연지기를 노래했다.

훗날 여항문인 홍세태는

이러한 기개를 갖고도 크게 쓰이지 못한 임득충을 안타까워 하는 한시를 남겼다.

 

영조 때의 문인 채평윤은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자 숭례문에 올라 그 감회를 읊었다.

 

 

나쁜 기운 사라져 다시 해와 달 밝으니

멀리 상서로운 구름 사이로 궁궐의 자태 드러난다

수양버들 늘어진 길에 말과 수레 가득하고

고향으로 내려가기 앞서 남대문에 오른다

(분新消日月明 五雲宮闕望쟁嶸 滿城車馬垂楊裏 獨上南樓去國情).

 

예나 지금이나 숭례문은 민족의 긍지이자 자부심이었던 것이다.

문화유산이 소중한 것은 그것의 문화예술적 가치 때문만이 아니다.

600년 전 조선시대 최고의 건축물을 축조한 장인들의 재능도 잊지 말아야 한다.

숭례문 현판을 썼다는 양녕대군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애정을 갖고 숭례문을 지켜온 민초들,

그것을 노래했던 임득충 · 채평윤 같은 시인묵객들도 잊어서는 안된다.

 

문화유산은 창조와 보존,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 전승될 수 있다.

숭례문 전소가 안타까운 것은

우리 민족이 수백년간 지켜온 이 두 가지의 가치를 한꺼번에 앗아갔기 때문이다.

- 2008-02-12, 조운찬기자 [옛글의 숨결], ⓒ 경향신문 & 경향닷컴(www.khan.co.kr),

 

 

 

 

 

 

 

 

- 나 홀로 길을 가네(Ja Vais Seul Sur la Route) / Anna G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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