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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김영 - 떠돌이 고아출신 역관

Gijuzzang Dream 2008. 3. 11. 22:32

 

 

 (49) 떠돌이 고아 출신 역관(曆官) 김영

 

관상감은 천문과 지리를 비롯해 달력, 날씨, 시간 등을 맡아보는 관청인데,
영의정이 최고 책임자인 영사(領事)를 겸임할 정도로 중요한 관청이었지만
실제 업무는 중인들이 담당했다.
세조 때에는 관원 65명에 생도 4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영조 때에는 관원 150여명에 생도 60명으로 늘어났다.
경복궁 안과 북부 광화방에 관아가 있었는데,
청사와 함께 관천대(觀天臺)를 비롯한 관측시설이 있었다.
간의(簡儀)를 올려놓고 하늘을 관측하던 관천대는 첨성대(瞻星臺)라고도 불렸는데,
지금도 서울 계동 현대건설 앞에 남아 있는 관천대는 사적 제222호로 지정되었다.
경복궁이 불타버린 조선후기에는 창경궁에 다시 관천대를 만들어
보물 제851호로 지정되었다.
 
 
 

이상한 별이 나타나면 관측해 기록하다

 

관상감의 관측제도는

‘서운관지(書雲觀志)’ 권2 ‘측후(測候)’에 규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밤마다 5명이 숙직하며 관측해 기록했다.

지금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변등록(星變謄錄)’에도 날마다 5명 관측자의 서명이 남아 있다.

성변(星變)은 별자리에 변화가 생겼다는 뜻.

혜성(彗星)이나 객성(客星)이 나타나면 천문학 관원들이 협의해 영사(領事)에게 알리고 관측을 시작했다.

 

혜성이 나타날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의 움직임과 그 위치를 하루하루 관측하고 기록한

보고서를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라고 했으며

이 보고서들을 책으로 묶은 것이 등록(謄錄)이다.

 

이 보고서는 왕에게 보고되어 국정에 반영되었으므로,

관측자의 이름만 빼고 ‘승정원일기’에 거의 전문을 실었다.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자료는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성변등록’뿐이다.

 

1723년 9월21일 밤 1경에 여숙(女宿)에 나타난 혜성을 54명이 27일 동안 관측하였고,

1759년 3월5일 밤 5경에 위숙(危宿)에 나타난 혜성을 35명이 25일 동안 관측하였으며,

1759년 12월23일 밤 1경에 헌원(軒轅)자리에 나타난 객성을 21명이 11일 동안 관측하였다.

중인 출신의 천문학교수만으로는 부족해서 문관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이 가운데 1759년에 출현한 헬리 혜성에 대한 관측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은 사료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서울특별시에서 2007년 3월22일자로 ‘성변등록’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22호로 지정하였다.

 

 

중인 역관(曆官)들의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역서

 

관상감은 천문학 · 지리학 · 명과학(命課學)의 3학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천문학이 본학으로 가장 중요시되었다.

 

정성희 선생은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과 반포’라는 논문에서

“천문이나 역법에 대한 중요성이 높은 만큼, 그리고 전문성이 강조되었던 직책이던 관계로

관상감 관원의 실무(失務)에 대한 엄격한 처벌”이 따랐다고 하였다.

 

“전통시대 천문학은 농사 절기에 대한 예보 기능 외에도

천인합일적(天人合一的) 성격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식이나 월식, 오위(五緯 또는 5행성) 등 천문현상에 대한 정확한 예측과 예보가 중요했다.”

 

“1710년에 관상감 관원이 월식 예보를 잘하지 못해 이를 감추려고 천변(天變)이라고 말했다가,

다시 월식으로 정정한 일이 있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숙종은 월식을 천변으로 보고한 자와

추산(推算)을 담당한 관원을 처벌하도록 했다.”

 

역서(曆書)도 관상감에서 만들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천문학보다 역서를 통해 관상감의 존재를 실감했다.

 

조선 초기에 4000여 건에 지나지 않던 역서(曆書)가

조선 후기에는 1만5000축이 넘게 간행 보급되었다.

일부 계층이 사용하던 역서가 보다 생활 깊숙이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관상감 관원들이 종이를 사서 개인적으로 인쇄하여 판매하는 숫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역서를 위조하거나 제멋대로 인쇄한 자는 사형에 처했는데,

실제로 정조 1년(1777)에 책력을 사조(私造)한 죄로 이동이(李同伊)가 사형을 언도받았다.

 

역서 간행을 주도한 관원은 성력(星曆)을 계산한 삼역관(三曆官)인데,

삼역관 선발시험에 1등하는 사람을 부연관(赴燕官)으로 임명해,

수시로 북경에 가서 천문기계나 천문서적을 구입하는 특전을 주었다.

 

관상감 중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천문학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역관을 거쳐야 했다.

다른 관상감 기술직은 음양과에 합격하지 않아도 능력이 있으면 선발했는데,

삼역관만은 음양과 출신만 선발할 정도로 전문성이 강조되었다.

정조가 천재 과학자 김영을 삼역관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우의정 윤시동과 여러 역관들이 반대한 이유도 그가 음양과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사도세자 현륭원을 옮기기 위해 김영이 발탁되다

 

김영(金泳 · 1749∼1817)은 농사꾼 출신인데,

어려서 고아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다 서울에 올라왔다.

중인 신분도 못되는 데다, 말도 어눌하고 용모까지 꾀죄죄했다.

 

산술(算術)에 타고난 재주가 있어 스승도 없이 혼자 공부했다. 너무 골돌하다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는 산가지를 늘어놓고 계산하다가 ‘기하원본(幾何原本)’을 구해 읽고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제자 홍길주(洪吉周 · 1786∼1841)는 스승의 전기를 쓰면서 “혼자 ‘기하원본(幾何原本)’이라는 책 한 권을 가져다 읽은 뒤 그 이치를 모두 터득하여 산수에 있어서는 더 이상 익힐 것이 없게 되었다.”고 했다.

 

당대에 가장 이름 높았던 산학자 서호수가 관상감 제거(提擧·3품)로 있었는데, 김영의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몇 가지를 물어본 뒤에 자신의 실력보다 나음을 알았다.

 

그는 관상감의 책임자였던 영의정 홍낙성에게 김영을 추천해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김영은 그러한 인연으로 뒷날 홍길주의 집에도 드나들게 되었다. 홍길주는 김영이 관상감에 임용된 것은 “정조가 인재 등용하기를 좋아해, 남다른 재주로 이름난 자가 있으면 비록 지극히 미천한 자라도 남김없이 등용하던 시대 분위기 덕분”이라고 했다.

 

1789년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는데 길일을 잡고 시각을 정하는 데에 문제가 생겼다.

중성(中星)의 위치를 측정한 지 50년이 지나 별자리의 위치가 1도 가까이 어긋나 있었고, 해시계와 물시계의 시간도 실제와 차이가 났다.

 

관상감사 김익이 8월31일 정조에게 아뢰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근본적으로 중성의 위치를 추산하여 그 궤도와 도수를 정해야 하는데, 만약 관측기구가 없으면

측정할 근거가 없습니다. 먼저 지평의(地平儀)와 상한의(象限儀) 및 새로운 해시계를 만들어

제대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관상감의 감생 가운데는 제대로 추산할 수 있는 자가

매우 드무니, 역법(曆法)에 정통하다고 알려진 김영을 본감에 소속시켜 이 일에 참여하도록 한다면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음양과를 거치지 않았다고

    관상감 관원들이 반대하다

 

세종대왕이 1434년에 만든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이름 그대로

솥 모양을 오목하게 파내고 영침(影針)을 세워 그림자가 변화하는 정도를 살펴 시각을 측정했다.

 

그런데 김영이 새로 만든 보물 제840호 지평일구(地平日晷)는

이름 그대로 해그림자를 받는 면을 평면으로 고쳐 만들었다.

중국의 지평일구(보물 제839호)가 수입되자, 그 원리를 이용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프 용지에 1㎝ 간격으로 동심원과 10도 간격의 방사선을 그어놓고,

그 중심에 막대를 세워 시간에 따른 그림자의 변화를 보는 형태인데,

반구형 모습의 해시계 앙부일구를 전개하여 평면에 옮겨놓은 것과 똑같다.

 

김영이 처음 만들어내자 그 이후에도 여러 개가 제작되었는데,

재료는 보통 대리석이나 오석(烏石)을 썼으며, 놋쇠로 휴대용도 만들었다.

 

정조가 김영을 특채하려고 하자 관상감 관원들이 심하게 반대했는데,

홍길주가 그 사연을 기록했다.

“관상감은 천문학과를 두어 사람을 뽑기 때문에 천문학과를 통해 조정에 들어온 자가 아니면

역법(曆法)을 제정하는 역관(曆官)이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임금께서 특명을 내려 김영에게 역법을 제정하게 하시면서

‘김영같이 남다른 재주를 지닌 자가 아니면 이런 예에 해당될 수 없다.’고 말씀하시니,

김영이 크게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당시 관상감 사람들이 모두 김영을 질시했으며,‘

이는 우리 관직의 규율을 무너뜨리는 일이다.’라고 따졌다.

그러나 임금의 명이 있었으므로 끝내 그 누구도 크게 떠들지는 못했다.”

 

 

정조 승하하자 벼슬에서 쫓겨나 굶어 죽다

 

중인들은 혼인은 물론, 교육과 관직도 몇몇 집안이 주고받았는데,

중인 출신도 아닌 김영이 중인의 전유물인 역관이 되었으므로 반대가 심했다.

서호수가 죽고 정조도 승하하자, 김영은 다른 관직으로 좌천되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1807년과 1811년에 혜성이 나타나자 조정에서 관상감에 명해

혜성의 운행 도수를 계산해 올리라고 했는데,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영을 다시 불러들였다. 계산이 끝나자 그는 다시 쫓겨났는데,

그의 전기를 쓴 서유본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면전에 욕하고,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다.”고 기록했다.

 

그가 남의 집 어린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다 굶어 죽자,

관상감 생도가 그의 원고 상자를 훔쳐갔다. 미처 간행되지 못한 몇 권의 책은 다 없어지고,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나 ‘칠정보법(七政步法)’ 같은 책 끝머리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을 뿐이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2007-12-03,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