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장지완 - 통청운동 앞장선 율관

Gijuzzang Dream 2008. 3. 7. 16:37

 

 

 (50) 통청운동( 通淸運動 ) 앞장 선 율관 장지완 

 
중인 가운데 법률을 담당한 관원을 율관이라 했는데,
율관의 판단에 따라 형률이 달라지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직무였다.
1406년에 유학(儒學), 무학(武學), 이학(吏學), 역학, 음양풍수학, 의학, 자학(字學),
율학(律學), 산학(算學), 악학(樂學) 등 10학의 일부로 율학을 설치하고,
1433년 형조 안에 있던 율학청에 별도 건물을 마련해 독립하게 하였다.
 
율과 합격자 명부가 율과방목인데, 현존하는 16세기 자료를 보면
1507년에 9명, 1513년 7명, 1525년 8명 등으로 3년에 한번 뽑았다.
율과 정원은 9명이었지만, 일정한 성적에 이르지 못하면 뽑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율과 합격자만으로 전국의 재판을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485년에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율관제도가 성문화되었는데,

율학교수(종 6품) 1명, 별제(종 6품) 2명, 명률(明律 종 7품) 1명, 심률(審律 종 8품) 2명,

율학훈도(정 9품) 1명이 서울에 있고, 검률(종 9품)을 서울에 2명, 각도 및 제주에 1명씩

파견해 모두 18명이었다.

 

검률(檢律)은 각 지방에서 발생하는 범죄를 조사하고

법률에 비춰 형량을 정하는 임무를 맡겼으니, 오늘날의 검사라고 할 수 있다.

 

형조에 판서(정2품), 참판(종2품), 참의(정3품), 정랑(정5품), 좌랑(정6품) 등의 문관이 있고,

그 아래 중인 출신의 기술직 전문 관리들이 18명 있었던 셈이다.

이 가운데 교수, 별좌, 훈도의 임기가 차면 고을수령으로 승진시켜 내보냈다.

율과 합격자가 열심히 근무하도록 격려하는 제도이다.

 

 

전국 율학생도 정원 2388명

 

형조에는 정원 40명의 율학생도가 있었고,

부(府) 16명, 목(牧) 14명, 도호부 12명, 군 10명, 현 8명씩 있었는데,

이성무 교수가 전국의 율학생도를 모두 합해보니 238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전국의 군현에서 날마다 소송이 일어나고 재판이 벌어지기 때문에,

막중한 재판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수많은 법률종사자가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인구가 10배나 늘어난 지금도 로스쿨의 정원을 2000명으로 묶어 두는 것과 비교가 된다.

 

 

 

 

 

 

 

 

생도에게는 잡역을 면제해 공부에만 전념케 했으며, 군역도 연기 혜택을 주었다.

율학 장려를 위해 생도를 그 지역의 토관(土官)으로 임명했으니, 지역 할당제에 해당된다.

율학교수와 훈도가 교육을 담당해, 율문(律文)을 강습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양반들에게도 기술학을 장려해 습독관(習讀官) 제도를 설치했지만,

율학에는 습독관이 없었다. 중인들이 독점한 셈이다.

 

김재문 교수는 ‘한국전통법의 정신과 법체제(33)’라는 글에서

“이들의 처우가 일반직보다 낮으며 승진이 제한되어 있어,

율과 합격자는 법원장이나 검찰청장은 될 수 없는 기능직, 기술직 공무원”이라고 표현했다.

 

“일종의 법무부 공무원이나 지방의 법원서기, 사법행정직에 가까운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문과 출신이 지방의 수령, 또는 형조판서나 의금부 도사가 되어

판사나 검사의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조선 전기의 율과 시험방법은 두 가지였다.

‘대명률(大明律)’은

책을 덮어 놓고 뒤로 돌아 앉아서 질문에 대해 법조문을 외우며 강론하였다.

‘당률소의’,‘무원록’,‘율학해이’,‘경국대전’ 등은

책을 펴놓고 지적하는 부분을 해설하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이 가운데 헌법인 ‘경국대전’과 ‘대명률’, 법의학서인 ‘무원록’은

500년 가까이 필수과목으로 지속되었다.

 

율학은 중인들이 다루는 잡학이어서, 사대부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방 수령들의 판결에 잘못이 많이 생겼다.

문과에도 ‘경국대전’이 필수과목이었지만,

일종의 헌법이어서 실제 재판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정약용이 이러한 병폐를 해결하기 위해 지은 책이 바로 ‘흠흠신서’이다.

형사재판의 실태에 관한 비평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 책이니,

지방 수령을 위해 만든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뒷부분에서 실례를 소개했는데,

제4부 상형추의(祥刑追議)에서 정조가 왕세손으로 섭정한

1775년부터 재위기간인 1799년까지 25년 동안 심리했던 사건 가운데

142건을 22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요약하고, 주석과 비평을 덧붙였다.

 

제5부 전발무사(剪跋蕪詞)에서는 자신이 목민관이나 형조참의 자격으로 직접 다룬 사건과

유배지에서 들은 살인사건 16건을 논변하였다.

관리들은 살인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고, 검시(檢屍)도 직접 하지 않았다.

사건 현장이 참혹한 데다, 시체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령과 의생(醫生)이 출동해 검시하지 않고,

시체를 만지던 오작인이나 아전에게 검시를 위임해서 문제가 많았으며,

고문을 가해 자백을 받는 방법을 주로 썼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수집하고 엄밀한 심문과정을 통해

자백을 받아내지 않았던 것이다. 시체 검사방법을 자세히 소개한 ‘무원록(無寃錄)´이

율과의 필수과목이었지만, 중국에서 수입된 책이라 문장이 어려웠다.

세종은 이 책에 주석을 붙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게 했으며,

‘검시장식(檢屍狀式)’이라는 공문서 서식을 인쇄하여 배포했다.

 

김호 선생은 ‘신주무원록과 조선전기의 검시’라는 논문에서

“‘신주무원록’이 일종의 검시 지침서라면

‘검시장식’은 실제 검시 현장에 가지고 나가서 시체의 손상부위 등을 기록하는 공문서”

라고 설명했다.

 

 

율학 집안에 태어난 시인 장지완

 

장지완(張之琓·1806∼1867 이후)은 할아버지 장택과 아버지 장덕주를 거쳐

자신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율과에 합격한 집안에 태어났다.

넉넉한 집안이 아니어서 가정교사를 두지 못하고 장덕주가 직접 아들들을 가르쳤다.

 

장남 지련은 33세에 율과에 합격해 교수가 되었고,

차남 지완은 20세에 합격해 훈도겸 교수가 되었으며,

3남 지환은 17세에 합격해 교수가 되었다.

3형제가 모두 교수가 되었으니, 율관으로선 가장 출세한 편이다.

 

인왕산 언저리에 살았던 장지완은 율과 공부를 아버지에게 했지만,

시는 이름난 시인 장혼을 찾아가 배웠다.

 

글방 친구 유기의 시집 머리말에 “나는 총각 때부터 마을에서 친구들을 구했는데,

학덕도 비슷하고 나이도 비슷한 자가 일곱 명 있었다.

이 일곱 명은 다른 일에 유혹받지 않고, 오로지 글을 배우는 데만 뜻을 두었다.

시를 지어서 넣어 두는 주머니와 비단 시축(詩軸)을 가지고,

날마다 숲과 골짜기에서 노닐었다. 밤에는 등불을 밝히고 머리를 맞대면서,

마치 서로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지냈다.”고 회상하였다.

 

이 가운데 장혼의 손자 장효무는 무과에 급제하여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지만,

고진원은 글방 선생으로 늙었으며,

유기는 필경(筆耕) 품삯으로 한 달에 500전을 받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살았다.

가난한 가운데도 시 짓기를 좋아했던 이들의 문학모임을

장지완의 호를 따서 비연시사(斐然詩社)라고 하는데,

장지완 말고는 거의 30대에 세상을 떠나 문단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중인 1670명 거사자금 234냥 마련

 

장지완은 “시가 성정(性情)에서 나온다.”고 했다.

“성정이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긴 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 기질이 맑고 흐린 구분이 있다.”

 

그가 말한 성령(性靈)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개성이다.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지니고 태어난 개성을 시의 존재근거로 삼은 까닭은 위항문학이

사대부문학에 대해 근본적으로 안고 있는 신분적 차이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이다.

 

그는 자신들의 신분을 자각하고 존재의의를 부각시키기 위해,

자기 당대에 살았던 여러 중인들의 전기나 묘지명을 지었다.

50세가 넘어 문단의 원로가 되자, 위항인들의 시선집인 ‘풍요삼선(風謠三選)’에

발문을 써주어 후배들의 활동을 격려하였다.

 

양반이면서도 차별받던 서얼들은 조선 중기부터 여러 차례 상소하여

‘신분에 제한없이 실력에 따라 벼슬하게 해달라’고 청했다.

 

1772년에 삼천 명이 집단적으로 상소할 정도로 세력이 커지자,

정조가 1777년에 정유절목(丁酉節目)을 정하여

이덕무 · 유득공 · 박제가 · 서리수를 검서(檢書 5품)로 임명했다.

서얼들이 만족하지 않고 1823년에 9996명이 연명하여 상소하자,

결국 1851년에 서얼도 벼슬에 등용한다는 조치를 내렸다.

 

이에 자극받은 기술직 중인들이 4월 25일 통례원에 모여 통문(通文)을 만들고,

5월 2일에는 통례원, 관상감, 사역원, 전의감, 혜민서, 율학, 주학(籌學), 도화서에서 4명씩,

내의원, 사자청(寫字廳), 검루청(檢漏廳)에서 2명씩의 대표자가 도화서에 모였다.

 

장지완은 ‘중인도 사대부 같이 벼슬하게 해달라.’고 상소문을 지을 제술유사로도 뽑혔다.

1670명의 기술직 중인들이 거사자금 234냥을 갹출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5월 어느날 통청운동(通淸運動)의 핵심인물인 장지완의 집으로 투서가 날아들었다.

방법이 너무 온건하니, 좀더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몰아붙이라는 과격파의 선동이었다.

 

이들은 윤8월 18일에 철종이 경릉에 행행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행차길에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1872명의 이름으로 상소를 올렸지만,

‘철종실록’에는 왕이 경릉에 행차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만 남아 있고

상소문은 실려 있지 않다.

 

고관 대작의 자제들이 중심이었던 서얼들의 통청운동은 성공했지만,

힘 없는 기술직 중인들의 통청운동은 공식적인 기록에도 남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올렸던 상소문 초안만 역과 합격자 명부인 ‘상원과방’에 실려 전한다.

-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2007-12-10,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