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1.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이 아니었다

Gijuzzang Dream 2008. 3. 10. 22:31

  

 

 

 

 

 

 [간도 오딧세이] 조선의 국경은 압록강이 아니었다

 

 


조선 현종 3년 1662년의 일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임금께 아뢰었다.


“압록강을 경계로 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반드시 저 나라(청)와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1708년 프랑스 선교사 레지 신부가 만든 지도.

조선과 청의 국경선(분홍색 선)이 압록강과 두만강 위에 있다.

 

임금이 말했다.
“압록강을 경계로 삼을 경우 우리 땅이 저들에게 들어가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왕조실록의 이 기록을 본다면 어리둥절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니 그렇다면 압록강이 우리의 국경선이 아니란 말인가.

국경이란 개념이 분명하지 않던 이 시절에도

현종은 압록강을 청과 경계로 한다면 사리에 맞지 않다고 영의정의 청을 물리쳤다.

 


압록강 몇십 리 너머에 변문 · 책문 기록

 

이 땅은 바로 압록강 너머에 있는 서간도 지역을 말한다.

옛날 사신들은 압록강을 건너는 것을 국경을 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압록강을 건너 몇십 리를 지나 변문과 책문을 통과해야 중국 땅에 들어섰다.

변문이나 책문이라는 지명 자체가 국경을 뜻한다.

‘열하일기’에서 연암 박지원은 책문을 들어서며

“한 번 이 문을 들어서면 중국 땅이다. 고국의 소식은 이로부터 끊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780년의 일이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압록강은 국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 동쪽의 두만강은 어떠할까.

‘세종실록’의 기록을 들여다보자.

 

세종이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말했다.
“공험진을 동북의 경계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공험진이 백두산의 북쪽에 있다 하나 사실인지 알지 못한다.

‘고려사’에 이르기를 ‘윤관이 공험진에 비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령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공험진이 선춘령의 어느 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에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다.

김종서가 세종의 명을 받고도 선춘령에 있는 비석을 찾지 못했던 것일까.

선춘령은 조선 선비들의 글과 일부 지도에서 두만강 건너 북간도 지역에 모습을 나타낸다.

1766년 홍문관 부제학 서명응은 ‘유백두산기’라는 글에서

“대개 온성의 서남쪽 100리에 분계강이 있어서 선춘령 밑에 고려 시중 윤관의 정계비가 있는데,

강의 이름과 비로 추정하건대 이곳이 우리나라의 경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썼다.

 


두만강 건너 북간도 지역도 우리 조상들 ‘삶의 터전’


두만강 너머에 국경이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우리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국과 국경선이라고 알고 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우리 조상들은 서간도와 북간도에 흩어져 살며,

그곳이 남의 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땅을 갈고 오순도순 살았다.

그 곳에 시인 윤동주가 별을 헤던 용정이 있고,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다.

지금은 남의 땅인 것으로 당연하게 알고 있고, 그렇게 되어버렸다.

지금 천년을 거슬러올라가 고구려와 발해의 옛땅을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때부터 우리 조상이 머물던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땅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그때 이랬더라면’이라고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강대국에 눌렸던 우리나라의 역사 공부는 늘 서글프고 안타깝다. 

 

 

 

 

 

 백두산 정계비 ①

 토문강 국경 울타리 60년 전에도 있었다


북한 고고학지에 실린 논문에 실측기록… “간도는 조선땅이라는 명백한 증거”

‘백두산 동행’이라는 사진첩에 실린 ‘정계석’.

석퇴(돌무더기) 옆에 일본인 탐험대가 서 있다.


조선과 청의 경계였던 백두산 ‘돌무더기 울타리’(석퇴 · 石堆)가 모두 106개로,

석퇴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끝나는 지점이 5㎞에 달한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그동안 석퇴의 수와 거리에 대한 실측은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은 북한의 고고학 및 민속학지인 ‘문화유산’이란 잡지의 1957년 4호에 실려 있다.

북방나눔협의회 육낙현 회장은 “그동안 북한 자료 중 백두산 정계비에 관련한 것이 없었다”면서

“백두산에 관한 북한 자료를 살펴보다가 이 내용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백두산 정계비~토문강 석퇴로 연결


이 논문은 북한의 민속학자인 황철산 교수가 작성했다.

황교수는 논문을 시작하면서“본고는 1948년 7월에 청진교원대학 ‘백두산 탐사대’에 참가하여

조사한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돌각담의 총수는 106개이고 돌각담이 처음 있는 지점부터 끝나는 곳까지의 거리는

5391m에 달하는 것이었다”고 썼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8년까지 석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황 교수는 또 “당시 탐사 때 전장석 동무는 력사과 학생 4명을 다리고 그 전부를 조사 측정했는데

돌각담은 토문같이 량안이 절벽으로 된 곳까지 있고

그 아래는 어느 정도 더 가보아도 그런 것이 없었다”고 서술했다.

논문에서 언급한 전장석 연구사도 북한의 민속학자다.

청진교원대 교수였던 황 교수와 마찬가지로,

전장석 연구사도 청진교원대학의 교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논문에 나타난 내용은 일반인이 아닌 학자들이 직접 실측했다는 점에서

조선과 청의 국경 연구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의 실측 조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사이에 석퇴가 연결돼 있으며,

조선과 청의 경계선은 이 석퇴가 된다.

중국은 지금도 백두산 정계비에서 연결되는 두만강 물줄기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이라고 주장한다.

1712년 조선과 청은 압록강과 토문강이 갈라지는 지점에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토문강의 상류 물줄기가 바닥이 마른 건천(乾川)이라는 사실 때문에

청의 대표인 목극등은 정계비와 토문강의 물줄기를 잇는 울타리를 쌓기를 요구했다.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해 8월 석퇴(돌무더기) · 토퇴(흙무더기) · 목책(나무울타리)으로 조선과 청의 국경선을 만들었다.

이 울타리의 존재는 1885년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중국 측 관리와 직접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최근의 석퇴 자료는 1942년 일본인 탐험대의 사진이다.

뉴스메이커가 623호(2005년 5월 10일자)에 발굴, 소개한 이 사진에는

10여 개의 돌을 모아놓은 돌무더기가 보이고, 5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돌무더기가 보인다.

사진의 제목은 ‘정계석’이다.

이 사진은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백두산 등행’이라는 사진집에 실려 있다.

 

1943년과 1944년 두 차례 백두산에 오른 일본인 성산정삼(城山正三)의 사진에도

석퇴의 모습이 실려 있다. ‘정계비의 고원’이란 제목이 붙은 이 사진에는

백두산 정계비를 따라 북동-남서의 선에 50∼100m의 불규칙한 간격으로 석퇴가 있다고 적혀 있다.

또 이 선이 조선과 청의 경계라는 주장이 있다는 내용도 실었다.

 


3년 전 위성사진 통해 돌무더기 확인


 

1970년대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지도에는

정계비와 토문강을 연결하는 울타리가 보인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새로 발견한 ‘문화유산’의 자료에는 이 사진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다.

 

황 교수는 “현재 정계비가 섰던 분수계의 동쪽 골짜기의 우안에 따라

대개 사람의 머리 만한 돌들을 모아 커다란 각담 모양으로 만든 것이 일렬로 포치되어 있다”고 썼다.

사진을 보면 돌의 크기가 사람의 머리 정도 된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돌무더기가 하나의 줄로 연결돼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1930년대 두 차례 이곳을 답사했던 간도 연구가 김득황 박사는

“돌 무더기가 마치 사람의 무덤처럼 돼 있었다”며

“당시 느낌으로는 돌무더기가 10∼15m가량 떨어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일본인의 두 사진에서 석퇴 사이의 거리가 어느 정도 차이가 나고 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산정삼의 사진 설명에 나타난 ‘불규칙한 간격’이 사실임이 드러난다.

60년 전 존재했던 이 석퇴가 지금까지 그대로 토문강으로 연결돼 있다면,

이는 토문강이 흘러들어가는 송화강 동쪽의 간도지역이 조선 땅임을 말해주는 명백한 증거다.

 

황 교수는 “처음에 청차 목극등은 압록, 토문 분수계상에 정계비를 세우면서

토문강이 송화강의 한 지류임을 알지 못하고 두만강의 상류인 것으로 오인했다”고 썼다.

1948년 조사에서

석퇴가 두만강의 상류가 아닌 토문강으로 연결돼 있음을 직접 확인했다고 볼 수 있다.

뉴스메이커는 611호(2005년 2월 15일)에서 1m급 위성사진을 통해 확인한 결과

돌무더기 띠가 백두산 정계비에서

토문강 상류까지 1.5㎞ 연결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아직까지 돌무더기 띠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김득황 박사는 “돌무더기는 아직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한 지역 내의 고산지대에 있는 석퇴 106개가 의도적이 아니라면 사라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1712년부터 1948년까지 236년 동안 존재했던 석퇴가

불과 60년 사이에 자연 현상으로 없어졌을 가능성은 더 더욱 없다.

‘문화유산’ 자료는 거리에 관해서도 정확히 분석해 눈길을 끈다.

황 교수는 자료에서 먼저 숙종실록을 인용했다.


“비가 서 있는 아래로부터 25리는 목책 혹은 돌을 보았고,

그 아래 물이 나는 곳의 5리와 물이 마른 내(乾川)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어서

내의 흔적이 분명하므로 표식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아래 물이 솟아 나오는 곳까지 40여 리는

전부 책(柵)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5, 6리만은 나무도 돌도 없고 토품(土品 )이 강하므로

다만 흙무덕(土敦)을 쌓았다.” (이조실록 숙종 38년 12월 임진조)

위-- 동북아역사재단(구 고구려연구재단)이

         2005년 백두산에서 찍은 정계비 주춧돌.

아래-- 백두산 천지 부근을 간략하게 그린 지도.

토문강과 정계비 사이에

석퇴와 토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돌로 경계로 만든 25리는 10㎞다.

이 거리는 1885년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보고한 내용과 비슷하다.

이중하는 “토퇴와 석퇴가 연달아 쌓여 있는 것이 90리가량인데 퇴의 높이는 여러 척이며 그 위에 나무가 자생하여 이미 늙어 구부러진 것도 있다”고 보고했다.

 

'숙종실록'에서 목책과 석퇴가 25리이며,

물이 나는 곳 5리,

마른 내가 20리,

울타리인 책이 40여 리라고 한 것을 합산하면

90리가 된다.

문제는 숙종실록과 이중하의 보고서에 나타난 것을 감안하면 25리 즉 10㎞인데,

1948년 실측에서는 석퇴 띠의 길이가 5㎞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황 교수는 “25리와 5391m는 거리상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산길을 걷는 사람들은 리수를 실지의 직선거리를 표준으로 하기보다는 그 곳까지 도달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표준으로 하는 일이 많다”고 서술했다.

 

조선 후기 국경사를 전공한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역사학)는

“북한에서 나온 ‘문화유산’의 자료를 보면

'숙종실록'과 이중하의 기록보다 이 자료의 실측 기록이 맞을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뉴스메이커 611호(2005년 2월 15일)에서

위성사진 전문가가 1m급 위성사진을 판독하여 추정한 거리는 1.5㎞였다.

인공적인 돌무더기 띠가 1.5㎞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유산’에서 발표한 실측 거리 5㎞는 인공위성을 통해 추정한 거리보다 3배 더 긴 거리에 석퇴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화유산’의 자료는

1948년 당시 이미 흙울타리(토퇴)가 무너졌다는 새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1930년대 이 곳을 다녀간 김득황 박사는 “당시에 흙울타리가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황 교수는 “흙무덕은 전혀 없고 목책이 썩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며

“필경 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는 드문드문 목책도 세웠을 것이나,

그것은 이백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썩어 없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토문감계사 이중하가 보았던 나무울타리(목책)뿐 아니라

토퇴도 이미 사라졌다는 것이다.

 


일본이 백두산정계비 계획적 인멸”

 

(왼쪽) 일본 사진집 ‘비경 백두산 천지’ 에 실린 석퇴 사진 - ‘정계비의 고원’

(오른쪽) 북한의 ‘문화유산’에 실린 논문과 석퇴 관련 내용.

 

 

 

 

 

 

 

 

 

 

 

 

 

 

 

 

 

 

 

 

 

 

 

 

 

 

 

 

 

 

‘문화유산’의 논문에서 황 교수는 백두산 정계비가 1931년까지 220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없어졌다는 사실을 적어놓았다.

 

이에 대해 황 교수는

“때는 바로 9·18사변 직전으로 일제는 만주 강점의 만단의 계획과 준비를 갖추고 있었으므로

날강도 일제의 군부는 지령을 내려 이 유서 깊은 력사적 유적을 계획적으로 인멸한 것이었다”

서술했다.

 

황 교수는 또 정계비의 향방에 대해서도 추측했다.

 

“백두산은 무쌍하게 웅대하나 급준하지는 않으므로

정계비가 서 있는 지점까지는 말도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신무성까지는 약 24㎞나 되며 신무성에서 혜산 또는 삼장까지는 80㎞가량 된다.

당시 이 구간도 겨우 인마가 통하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 비를 자취 없이 운반하여 가기에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혹시 이 근방 어느 지점에 매몰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비가 섰던 자리에는 비를 꽂았던 자연 암반에 뚫은 구형 구멍만 남아 있다.”

정계비가 백두산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황 교수의 논문이 실린 ‘문화유산’이라는 잡지는

과학원 소속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에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발간됐다.

황 교수는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를 창립할 때 초대 민속학 연구실장을 맡았다.

함경도 출신의 민속학자로, 청진교원대학 교원시절부터

함경도 일대에 대한 현지 조사를 많이 한 것으로 민속 관련 서적에 소개돼 있다.

황 교수의 논문 이후 백두산 정계에 관한 북한의 글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북한은 1962년과 1964년 중국과 협상하여 백두산 천지를 나누고,

두만강의 최고 북쪽 지류를 연결하는 국경선을 확정했다.

이후 백두산 관련 서적에서 정계비 또는 석퇴에 대한 자료는 나오지 않았다.

황 교수의 논문이 1948년 조사를 토대로 하고 있으나 1957년 ‘문화유산’을 통해 발표된 것을 보면,

조선과 청의 국경인 석퇴가 적어도 1957년까지 존재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경인교대 강석화 교수는 ‘문화유산’의 논문에 대해

“석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자료”라면서

“숙종실록에 실린 내용의 실체를 증명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백두산 정계비 ②

 북한지역 토문강 상류가 보인다

 

백두고원 탐사원이 찍은 사진서 확인… 천지 가는 길 잇는 다리도 설치



 

백두산 정계비에서 연결되는 조선과 청의 국경선인 토문강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토문강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볼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발굴됐다.

2001년 6월 당시 KBS백두고원 탐사팀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한상훈 박사(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척추동물 연구과장)가 찍은

사진 한 장이 토문강 상류 물줄기를 멀리서 포착하고 있다.

 


강 깊이 얼마 되지 않고 폭도 좁아


사진의 맨 윗부분은 향도봉으로, ‘혁명의 성산 백두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점선으로 표현된 지점이 토문강 물줄기의 상류다.

이 사진을

뉴스메이커가 611호(2005년 2월15일)에서 소개한 위성사진(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 위아 제공)과

비교하면 토문강 상류의 물줄기를 바로 확인할 수 있다.

토문강 인근의 위성 사진. 굵은 흰 띠가 토문강이며, 가는 흰 띠가 길이다.

빨간 선은 정계비에서 토문강을 연결하는 돌무더기의 띠가 있는 것으로

위성 사진을 통해 추정한 지점이다.

 


사진 중앙에 두 개의 집이 보인다. 위성 사진에서 파란 원으로 표현된 점이다.

오른쪽 집 옆에 다리가 있다. 위성 사진에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점이다.

삼지연 쪽에서 천지 쪽으로 가는 길을 잇기 위해 토문강 상류에 이 다리가 설치돼 있다.

왼쪽 집에서 10시 방향으로 보이는 지점이 바로 점선 속의 토문강 상류다.

이곳에는 얼음이 얼었다가 6∼8월에 물이 조금 흐른다.

사진에는 마른 내(乾川)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토문강은 중국에서는 오도백하로 불린다.

한 · 중 국경 문제를 다루면서 일부 신문사나 방송국에서는

중국의 오도백하를 따라 올라가 국경 인근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북한 내의 토문강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상훈 박사가 제공한 사진 속에서 북한에서의 토문강 상류가 드디어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한 박사는 KBS백두고원 탐사팀으로, 2001년 6월께 33일간 백두산 일대를 탐사했다.

야생동물 전문가인 한 박사는

“사진 속의 두 집이 북한군 막사여서 함부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며

“다리 옆에서 3박4일 동안 야영했다”고 밝혔다.

사진 속에서 다리의 오른쪽에 있는 흰 점 몇 개가 바로 야영 텐트다.

 

한 박사는 “이 사진은 6월 22일 찍은 것으로, 강에는 아직 얼음이 얼어 아래쪽으로 물이 흘렀다”고

회고했다. 한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토문강은 강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은 도랑에 불과했다고 한다. 또한 다리의 높이가 3m 정도라고 기억했다.

강의 깊이도 얼마 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토끼가 사는 돌무덤이 석퇴 가능성”

 

백두산 천지 근처의 돌무더기에 우는 토끼가 살고 있다.


토문강은 강이 양쪽 흙벽이 마치 ‘흙문’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강의 다리가 3m에 불과했다면,

사진 속 다리 지점에서 한참 더 나아가 대각봉까지 가야 ‘토문’을 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직접 토문강 인근에 머물렀던 한 박사는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인 것은 몰랐다”며

“다만 인근 돌무덤에 우는 토끼가 살고 있는 것을 관찰했다”고 말했다.

 

한 박사의 증언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우는 토끼가 산다는 돌무덤이

백두산 정계비에서 토문강을 연결하는 돌무더기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한 박사는

“해발 1600m에서 백두산 정상까지 살고 있는 우는 토끼가 돌무덤에서 돌무덤으로 왔다갔다 했다”고 말했다.
- 2008 02/19   뉴스메이커 762호/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간도오딧세이] 서양 고지도에는 간도가 우리땅


 

우리 땅 독도를 두고 흔히 서양 고지도를 많이 언급한다.

우리나라 고지도에서는 당연히 독도가 우리 땅으로 그려진 만큼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면 세계적으로 당연히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청나라 강희제 백두산정계비 세워


그렇다면 간도는 어떨까? 근대적인 지도가 만들어지던 18세기의 서양 고지도를 살펴보면,

모든 고지도에서 조선과 청나라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존재한다.

서양 고지도를 증거로 하면 우리나라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 선이 아니다.

압록강 너머의 서간도와 두만강 건너의 북간도 일부가 우리 땅이 되는 셈이다.

국제적으로 이 영토 문제가 부각된다면

이들 서양 고지도가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료가 된다.

경희대 혜정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서양 고지도.

1745년 키친이 제작한 이 지도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위에 국경선이 그려져 있다.

 
청나라가 영토에 눈을 뜨고, 자신의 강역을 의도적으로 넓히려 한 것은 강희제 시절이다.

이때 조선을 압박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1712년의 일이다.

당시 강희제는 청의 강역을 분명히 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에게 의뢰해 지도를 제작하게 한다.

1709년부터 프랑스 신부 레지는 직접 길림과 흑룡강 유역 등을 조사했다.

이 조사를 토대로 서양식 지도인 당빌지도가 만들어졌다.

청나라가 스스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이 지도에서조차

조선과 청의 국경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있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선을 ‘레지선’이라고 이름 붙였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프랑스의 여러 고지도에서도

조선과 청의 국경은 레지선과 비슷한 곳에 그어져 있다.

지난해 건설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이 명지대학교에 의뢰해

서양 고지도 400점을 분석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모든 서양 고지도에 20세기 초까지 간도는 한국 영토로 표기됐다.

외국인들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영토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간도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병자호란 이후 영토문제 언급 기피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의 고지도는

서양 고지도처럼 간도를 우리 영역 안에 뚜렷하게 포함시키지 않았다.

독도와는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우리나라 지도가 한결같이 독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19세기 후반 일부 서양 고지도에서 독도에 일본식 표기를 한 반면,

간도는 서양 고지도가 모두 우리 땅으로 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영역이 분명하지 않다.

여기에는 1636년 병자호란의 깊은 상처가 담겨 있다.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은 그 후 영토 문제를 언급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간도를 우리 영역으로 표기한 지도가 청나라에 알려질 경우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우리나라 지도에서조차 간도를 우리 강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어떻게 조선 후기의 간도를 조선 땅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냐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청이 조선에 군신(君臣)관계를 요구했던 역사적 상황을 미뤄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지도에서 왜 그렇게 표시할 수밖에 없었는지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영역을 분명하게 표시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 고지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부분이 그려져 있다.

특히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전도에는 간도지역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두만강 너머에 선춘령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윤관이 고려의 경계선으로 세운 비석도 표기돼 있다.

조선 초부터 선비들은 이 선을 조선의 경계선으로 여겼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나라 지도에서는

백두산 천지에서 북쪽으로 흘러들어가는 혼동강(지금의 송화강)을 표시해놓았다.

우리의 지리적 영역이 이미 이곳까지 뻗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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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02/26   뉴스메이커 763호
- 경향, 윤호우 기자

 

 

 

 

 

 

 

- The Interrupted Slee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