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오딧세이]

[간도 오딧세이] 4. 무인지대는 누구의 땅인가?

Gijuzzang Dream 2008. 3. 10. 22:41

 

 

 

 [간도 오딧세이] 무인지대는 누구의 땅인가?

 


서양 고지도가 대부분 간도를 우리 땅으로 표기한 것은

무인지대를 조선의 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을 받아 이 지역을 실측했던 레지 신부가

인지대를 사실상 중국의 땅이 아니라고 지도에 표기한 것이다.

 

레지 신부의 실측을 기초로 작성한 프랑스인 듀 알드의 지도에서

“봉황성 동쪽에 조선국 서쪽의 국경이 있다.

그런데 만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에 앞서 조선과 싸워서 이를 정복했으나

그때 장책과 조선의 국경 사이에 무인지대를 두기로 정했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에서 무인지대의 성격이 잘 나타난다.

조선과 직접 국경을 맞닿지 않기 위해 완충지대를 둔 것이다.


조선인과 청인 다툼 외교문제 비화


무인지대는 흔히 봉금(封禁)지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봉금지대란 순전히 중국 측 입장에서 나온 말이라 할 수 있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고 만주지역을 벗어나 베이징까지 진출할 때

만주는 사실상 빈 공간이 되었다.

만주족 대부분이 이동해 사실상의 중국 영토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는 만주를 자신들의 조상이 살던 고향으로 여겨

이곳에 한족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다는 뜻에서 봉금지대란 명칭을 붙였다.

 

봉금지대의 경계선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울타리를 만들었다.

이를 유조변책(柳條邊柵)이라고 했다.

지금도 만주 일대에는 버드나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지역에 아무도 살지 않았던 17세기 시대만 해도

중국은 유조변 밖을 중국 땅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17세기 만주상황을 연구한 멜리호프(러시아인)의 지도. 빗금친 부분은 청나라 통치 밖의 영토로, 왼쪽 경계가 유조변(버드나무 울타리)이다.


이곳에는 한족들이 몰래 들어가기도 했지만, 조선사람들도 삼을 캐기 위해 이 지역을 드나들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범월(犯越)이라 하여 국법으로 단속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이 지역에 밝은 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이었다.

무인지대에서는 충돌도 벌어졌다.

조선인과 청인이 다툼을 벌여 양국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를 빌미로 청나라는 1712년 백두산에서 경계를 획정하려 했다.

청조의 발상지인 백두산 인근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는 목적에서다.

당시 청의 강희제는 영토 의식을 갖고 있었다.

서양 신부들에게 지도를 제작하게 한 것도 이런 영토 의식의 발로였다.

정계비를 세운 후 양국간의 경계선은 압록강과 토문강으로 비문에 새겨졌다.

이후 무인지대는 청의 땅이 된 듯했다.


처음으로 땅을 갈고 정착한 것은 조선인


하지만 여전히 압록강 너머의 서간도 지역은 조선의 땅으로 여겨졌다.

서양인들이 만든 지도에서도 조선의 땅으로 표기했으며,

18세기 이후에도 많은 조선인이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로 건너갔다.

특히 19세기 후반에는 함경도의 조선인들이 대거 간도지역으로 넘어가 농사를 지었다.

나라를 잃은 20세기 초 용정 같은 곳에는 조선인 마을이 대규모로 형성됐다.

간도 땅에 대한 논란은 이 무인지대부터 시작한다.

무인지대를 누구의 땅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아무도 살지 않은 지역에 땅을 갈고 정주를 한 사람은 조선인이었다.

흔히 만주지역을 이야기하면 고구려, 발해시대를 떠올리며

그 지역이 원래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고려와 조선 중반기까지 우리나라의 힘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이 지역은 명과 청의 세력이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인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 2008 03/18   뉴스메이커 766호, 윤호우 기자

 

 

 

 

 

- 대지를 적시는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