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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의 이중섭 무덤과 비석.
옆에 선 소나무가 그의 기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후배에게 돈을 돌려받기 위해, 일본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 돈을 벌어 하루라도 빨리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절절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개인전의 실패는 화가 이중섭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때부터 우울증은 극한에 달했고,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의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며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봉투조차 뜯지 않았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았다.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뒤를 이었고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인 구상은 그의 말년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9월6일로 향우 이중섭을 죽인 지 두 돌이 된다.
내가 이렇듯 살해자의 하나로 자처하며 그의 죽음을 비통하게 표현하는 것은
우정을 더욱이나 사후에 과장하려는 게 아니라
어쩌면 한 위인의 치명을 앞에 가로 놓고서도 너무나 무정하고 무력하고 무도했던
자신이 뼈아프게 뉘우쳐지며 때마다 가슴을 찢어놓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요,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동아일보 1958년 9월9~10일)
그의 불우한 삶은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생각케 한다.
그의 대표작인 ‘황소’(1953)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큰 눈을 하고 우짖는 듯하다.
황소는 불행한 우리 민족의 상징이기도 하고 이중섭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1930년대 우리 민족의 소재와 색채로 향토색을 살린 대표 화가가 이인성이라면
이중섭은 자기와 일체화된 소와 닭 같은 우리 고유의 상징을 통해
민족의 역사성과 심정을 구현한 대표적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양 유화의 형식에 우리의 마음을 심어 한국적 유화 분야를 개척한
근대 유화의 선구자였다.
상품화한 브랜드 네임 ‘이중섭’
이중섭은 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방치되어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 김이석(1914~64·소설가. 그의 묘도 망우리공원에 있다)에게 발견됐다.
유해는 서울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반은 망우리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의 가족에게 보내졌다.
일본에서는 처가 야마모토가(山本家)의 묘에 합장됐다.
그의 망우리 무덤 앞 상석은 몇 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오른편에 아들 태현(泰賢)과 태성(泰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망 1년 후 친구 한묵이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고 쓰고
후배 차근호가 아이 둘의 모습을 새긴 조각품이 세워졌다.
차근호는 이중섭의 뼈가 묻힐 때 함께 죽겠다며 묘 구덩이로 뛰어들 정도로
이중섭을 친형처럼 따르던 조각가였다.
그는 1960년 4·19 기념탑 제작자로 내정됐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자기 제작자가 바뀌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해 12월 자살했다.
정부보다 한발 앞서 동아일보가 위령탑 추진을 발표했을 때
그는 그 즉시 설계를 무료로 맡겠다고 자원(동아.1960.4.27)했을 만큼 탑 제작에 열정을 가졌다.
순수 예술가가 대접받지 못하고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예술가만이 출세하는 세상,
그런 사는 짓거리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중섭.
후배 차근호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대구의 미국문화원장이던 아더 맥타가트는
1955년 2월3일 동아일보에 쓴 개인전 관람기의 끝에
“대체적으로 씨의 작품전은 볼 만하며,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매집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맥타가트에 의해 한국 화가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됐고,
그 후 세월이 지날수록 이중섭을 찾는 이는 늘어났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그를 다룬 책도 쏟아졌다.
회고전이 열릴 때마다 갤러리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작품의 가치는 높아만 갔다.
그러나 대중성의 부작용이랄까.
벌떼처럼 달려든 세상 사람들은 조용히 잠든 이중섭을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위작이 판치고, 진품의 그림 값을 올리기 위한 마케팅이 불붙은 것이다.
자본은 예술가를 키우는 스폰서의 기능도 하지만,
예술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예술적 가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중섭을 죽음으로 이끈 바로 그 세상의 사람들은
미술시장에서 최고가 된 브랜드 네임 ‘이중섭’을 연호할 뿐,
그의 고뇌와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는 아주 작은 관심조차 없다.
그들에게 ‘예술은 곧 사기’일 뿐이다.
‘브랜드’ 이중섭이 경매장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때
‘예술가 이중섭’의 망우리공원 묘지는 찾는 이 없어 황량하기만 하다.
언제나 푸른 네 빛
일본에 두고 온 두 아이가 보고 싶어
길거리의 아이들을 데려와 몸을 씻겨줄 만큼 아이들을 좋아했던 이중섭. 그래서일까.
비록 찾는 이 드물지만 무덤 인근 용마약수터엔 유치원생의 사생대회가 끊이지 않는다.
그를 위로하듯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무덤까지 날아든다.
생전에 독일 민요 ‘소나무’를 늘 부르고 다녔다더니
그의 무덤 곁에도 잘 자란 소나무가 무덤을 지키며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산 밑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가지고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 혼과 맑은 정신은 아이들의 청아한 목소리처럼 순수하게,
사계절 푸른 소나무처럼 독야청청(獨也靑靑), 변함이 없다.
그의 무덤에서 내려오는 필자의 입에서 어느덧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 날에도 /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 언제나 푸른 네 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