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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망우리 별곡- 한국의 碑銘문학 7. 한국 근대유화 거성 이인성과 이중섭

Gijuzzang Dream 2008. 2. 18. 12:40

 

 

 

 

 

 

2008.07.01 통권 586호(p630~639)  
 

[망우리 별곡 - 한국의 碑銘문학 7]

 

 

 

 한국 근대유화 거성 - 이인성과 이중섭
 두 천재의 극과 극 인생궤적

예술은 가고 브랜드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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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월간미술’은 미술평론가들의 투표로 ‘근대 유화 베스트 10’을 선정했다.

 

이인성(李仁星 · 1912~50)의 ‘경주의 산곡에서’와 ‘가을 어느 날’이 각각 공동 1위와 7위,

이중섭(大鄕 李仲燮 · 1916~56)의 ‘흰 소’가 2위를 차지했다.

 

작가별로는 이인성이 김환기와 공동 1위를, 이중섭이 단독 2위를 차지했다.

 

한국 근대 화단의 대표자 격인 이인성과 이중섭 두 거성이 망우리공원에 함께 묻혀 있다.

그들의 묘는 삶이 그러했듯 이인성은 화려하며 이중섭은 조촐하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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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과 그의 작품 ‘ 한정’(위).

 ‘황소’의 작가 이중섭(아래).

지난 5월20일 언론은 ‘서울시가 문화재로 관리하던

화가 이중섭의 집과 문인 이상의 생가가 잘못 지정됐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답답하고 우스운 졸속행정의 표본을 보는 듯했지만, 그래도 서울시가 유명 예술가의 흔적을 보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중섭이 전시회를 준비하며 잠시 살던 집은 문화재로 대접을 받는 데 반해

그가 50년 이상 머물고 있는 망우리의 묘지는 찾는 이, 관리하는 이 없이 쓸쓸하기만 하다.

 

한평생 고달픈 삶을 살았어도 예술가는 그가 남긴

작품으로 후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신록이 푸르른 지금, 그들의 무덤은 비석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건다.

그곳에 가면 그들이 살던 집에서보다 더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고인의 묘지는 생가보다 더 소중한 문화재임에 틀림없다.

망우리공원 측은 1997~98년 공원화사업 당시, 어떤 연유에서인지 모르나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지사 중심으로 연보비와 안내도를 만들었을 뿐,

화가와 문인 등은 그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인성과 방정환

 

동락천 약수터 오른쪽 위 좁은 길을 올라가면 독립지사 유상규의 묘가 나오고,

다시 오른쪽 위에 있는 도산 안창호의 묘터를 지나 능선 길을 올라 오른쪽으로 조금 가면

커다란 자연석의 ‘사설(私設)’ 연보비가 보인다.

‘근대 화단의 귀재 화가 이인성’이라 쓰인 연보비의 뒷면에는 그의 치적이 적혀 있다.

 

‘서양화가 이인성(李仁星)은 1912년 8월28일 대구시 북내정 16번지에서 태어나

17세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두각을 드러낸 이래

한국 근대미술 도입기와 성장기에 빼어난 창작활동을 펼쳤다.

일본 도쿄 태평양미술학교 재학시절 제국미술전람회, 문부성미술전람회, 광풍회 공모전 등에

입선, 일본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1935년 귀국한 뒤 대구와 서울에서 활약하면서

선전(鮮展) · 제전(帝展) 등에 여러 차례 입선·특선했으며,

선전 추천작가, 국전 심사위원을 지내는 등 우리 화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굳혔다.

한국 미술사에 길이 빛날 작품들을 남긴 그는 1950년 절정의 기량을 더 펼쳐보지도 못한 채

38세로 요절, 불꽃같은 예술적 인생을 마감했다.

그의 50주기인 2000년에는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대구광역시가 이인성미술상을 제정했으며,

2003년 11월에는 문화관광부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3년 10월 16일 이인성 기념사업회 세우다’

 

묘 오른쪽에는 자그마한 검은 단비가 자리잡고 있는데 거기에도 비슷한 내용의 글이 쓰여 있다.

 

‘이인성(1912~1950). 1912 대구에서 출생.

1928 ‘촌락의 풍경’으로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1929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 ‘그늘(陰)’ 입선.

1944년까지 16회 연속 선전 출품.

1935 제22회 일본 수채화회전 ‘아리랑고개’ 일본 수채화협회상(최고상) 수상.

제14회 선전 ‘경주산곡에서’ 창덕궁상(최고상) 수상.

1937 제16회 선전 서양화부 추천작가 선임.

1949 제1회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서양화부 심사위원.

1950 6.25 당시 작고.

1998 월간미술 주관 ‘근대유화 베스트 10’에서 ‘경주의 산곡에서’ 1위 선정.

2000 호암갤러리에서 작고 50주기 회고전 개최 ‘이인성미술상’ 조례 지정.

2002 문화관광부 2003년 11월 이달의 문화인물 이인성 선정’

 

단비에 쓰인 내용 중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 부분은 사실이 아니다.

특선을 한 것은 맞지만 ‘세계아동미술전람회’가 아니라 ‘세계아동예술전람회’가 옳다.

이 전람회는 소파 방정환 등이 운영한 출판사 ‘개벽사’가 주최하고 동아일보가 후원해

경성에서 개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였다.

필자는 ‘신동아’ 2008년 5월호에 실은 ‘소파 방정환’의 글에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소년 이인성이 특선을 한 사실을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근거로 밝힌 바 있다.

 

 

‘향토색’과 친일 논란

 

망우리공원의 화가 이인성의 묘.

무덤과 비 모두 깔끔하고 화려하다.

그런데 이인성의 삶을 담은 많은 자료는

전람회를 누가 주최했는지에 관해서조차 밝혀놓지

않았고, 또 잘못된 내용이 담긴 경우도 적지 않다.

무심코 남의 글을 옮겨 적은 것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인터넷에는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전람회’라는 잘못된 정보가 나돈다.

이 전람회의 기획자 중 한 사람인 소파 방정환과

이인성이 같은 공원묘지에 잠든 것을 바라보면서

사람 사이에 얽힌 연(緣)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인성은 1930년대에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나 무용가 최승희보다 더 유명한 존재였다.

그의 제자 손동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어른들은 그림 그리는 아이에게

“너 이인성 될라고?” 하며 농을 건넸다 한다.

그 시대에 이인성은 화가의 대명사이자 아이콘이었다.

 

여기에서 드는 의문은 이렇게 천재 화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

왜 사후에는 그림이나 예술에 관계하는 몇몇 이를 제외하곤

그 이름 석 자도 들어본 적이 없는 존재가 돼버렸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가 추정컨대 이는 이인성과 관련된 광복 후 친일 논란과 무관치 않다.

물론 그가 실질적이고 뚜렷한 친일활동을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그가 조선화가들이 만든 서화협회 전시회(協展) 등에는 작품을 내지 않고,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만든 조선미술전람회,

즉 관전(官展, 鮮展)에만 참여했다는 게 논쟁의 단서가 됐다.

 

같은 망우리공원에 묻힌 위창 오세창(1864~1953)은 당대 최고의 서화가로,

선전에는 단 1회만 참가하고 이후 출품을 하지 않았는데,

이는 선전 출품이 일본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인성의 지속적 선전 출품과는 대비되는 대목.

 

당시 선전이 향토색 짙은 작품을 선호했다는 사실도 논란거리가 됐다.

이인성을 친일파로 모는 이들은

“당시 향토색의 추구는 식민지 피지배자를 과거에의 향수, 현실도피, 소시민적인 안일,

쇠락과 퇴폐로 유도하는 정책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선전의 향토색 추구 경향에 순응한 예술가는

현실주의, 출세지향, 체제순응적인 친일파라는 결론이 나온다.

예를 들면 1936년 일본 최고의 문부성미술전람회 입선작인 ‘한정(閑靜, 원작 망실)’에는

조선 고유의 황토색 바탕에 조선의 상징인 흰옷, 그리고 태평소, 고무신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이인성이 심사위원에게 자기 그림이 조선 향토색이 강한 것임을 어필하기 위한 의도에서

그렇게 그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인성이 입선을 위해 의도적으로 향토색을 집어넣었다 해도(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향토색을 드러냈다고 아무나 입선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또 명예를 얻은 자에 대한 시기심이 당시 화단에도 만연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비록 출세주의자라는 논란은 일으킬 수 있지만 이를 딱히 친일행위로 간주할 수는 없을 듯하다.

 

생전에 그 어떤 명예도 얻지 못한 이중섭이 이런 모든 논란에서 자유로웠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일제가 향토색 취향의 그림을 선호했다고 해서

향토색 짙은 그림을 그린 화가를 모두 친일파로 몰아간다면

일제가 3·1운동 후 문화정치의 일환으로 허용한 한글신문을 발행하거나 거기에 가담한 사람도

모두 친일파로 규정돼야 한다.

민족성을 유지하려는 개인의 노력이 일제의 문화정치에 순응한 협잡행위로 치부된다면

이 또한 논리의 자가당착인 셈이다. 역으로 민족성 말살정책에 맞서

향토색 찾기에 참여하지 않은 묵인행위야말로 친일행각이라는 논리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인성의 제전 입선 소식을 실으면서

“향토색 내기에 힘쓸 터”라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부제로 뽑았고(1932.10.25),

개인전 기사(1938.11.04.)에서는 그에 대해

‘우리 양화계의 거벽’으로 칭찬하고 있음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인성을 향토색을 잘 표현한,

그래서 선전과 제전에도 입상할 정도로 훌륭한 화가이자 큰 자랑으로 여긴 듯하다.

 

 

‘환쟁이’의 황당한 죽음

 

이인성의 이름이 우리에게 낯설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남다른 성격과 가정사일 수도 있다.

그가 일본 유학 때 만난 부인 김옥순은 대구의 의사 집안 딸로,

학력이 일천했던 이인성은 주위의 추천으로 그와 어렵사리 결혼했다.

그 후 대구에서 양화 연구소를 열고 예술다방 ‘아르스(ARS)’도 운영하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쳐나갔지만, 부인이 병사한 후

폭음을 일삼고 걸핏하면 주사(酒邪)를 부리고 다녔다 한다.

 

불행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1941년 재혼했으나 부인이 아이를 낳자마자 가출해버린 것.

광복 후에는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면서 세 번째 결혼(1947년)을 하고

1949년 제1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 심사위원에 위촉되는 등

안정되고 활발한 활동을 하는 듯했지만 6·25전쟁 때 어이없게도 경찰과의 시비로 유명을 달리했다.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작가 최인호는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라는 제목의 에세이(한국일보 1974.6.5)에서

이인성이 죽게 된 상황을 상상력을 보태 써놓았는데, 옮겨보면 이런 내용이다.

 

19세 이인성의 ‘제전’ 입선을 알린 1932년 10월 25일자 동아일보.

1950년 여느 때처럼 술을 먹고 거리를 헤매던 이인성은

한 경찰관이 검문을 하자 “조선의 귀재 이인성을 모르느냐”고

호통을 치고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는데,

그가 높은 사람인 줄 알고 놔준 경찰이 나중에

그가 ‘환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동료에게 들은 후

화가 치밀어 이인성을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또 다른 자료는 ‘경찰의 권총 발사는

단순한 오발 사고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찌 된 사정이건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화가를 환쟁이라

업신여기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뛰어난 천재 예술가에게 흔히 보이는 독선적 성격의 양면을 동시에 보고 읽을 수 있다.

 

이인성은 근대 양화계의 거벽이긴 했지만 남다른 성격 탓에 주위에 적도 많이 만든 듯하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많은 추종자에 의해 후세에 알려지는 게 일반적인데,

이인성을 따르는 이는 드물었다.

내 이름을 남이 불러주면 존경의 대상이 되지만 나 스스로 자꾸 부르면 자만이 된다.

그래서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그의 이름은 최근 그에게 개인적 감정이 없는 후세인들에 의해 무대에 올려지며 객관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부잣집 아들 이중섭

 

망우리공원에는 또 한 사람의 근대 천재 화가 이중섭의 묘지가 있다.

관리사무소 앞 순환로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시인 박인환의 연보비를 지나 몇 분만 더 걸으면

용마천 약수터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는데, 그 약수터 바로 오른편에 이중섭의 묘가 있다.

   

이인성과 이중섭, 이 두 천재는 동시대인이지만 그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대비된다.

이인성은 가난한 식당 집 아들로 자수성가해 일찍이 명예를 얻었지만

강한 개성과 자존심 탓에 유명을 달리한 반면,

이중섭은 부잣집 아들로 곱게 자란 탓인지 현실 적응 능력이 없어

결국 자괴(自愧)와 자학 끝에 목숨을 잃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두 사람은 만날 기회가 없었다.

이인성이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35년에 이중섭이 도쿄로 그림 공부를 하러 떠났기 때문.

 

두 사람의 무덤도 생전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이인성의 묘에는 화려한 경력을 나열한 비석이 두 개나 되고

상석은 조각가의 작품인데다 묘 터도 넓게 잘 정돈되어 있는 반면,

이중섭의 묘지는 면적도 작고 연보비도 없다.

단지 큰 소나무 한 그루와 사랑하는 두 아이의 모습이 새겨진 작은 조각품 하나가

단출하게 서 있을 뿐이다.

 

1916년 평안남도의 부농 집에서 막내로 태어난 이중섭은

오산학교를 거쳐 1935년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문화학원 미술학부 재학 때인 1938년,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이남덕(李南德))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증언에 따르면 이중섭은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운동, 노래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어

자신을 비롯한 모든 여학생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어느 날 실기수업이 끝나고 나란히 앉아 붓을 빨면서 시작됐다.

졸업 후 귀국한 이중섭과 편지 왕래로 아쉬움을 달래던 마사코는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너와 5월 원산에서 이중섭과 한국식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도 잠시, 6·25전쟁의 혼란기에 부산과 제주도를 전전하는 궁핍한 피난생활에

병을 얻은 부인은 1952년 임시방편으로 두 아이를 데리고 일본 송환선을 탔다고 한다.

 

1953년에 친구 구상(具常 · 1919~2004, 시인)이 해운공사의 선원증을 만들어줘

(이에 대해선 시인 박인환이 힘썼다는 자료도 있다. 이중섭은 박인환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박인환의 처삼촌은 당시 해운공사 사장이었다)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되지만, 일시체류 자격밖에 없던 그는 다시 훗날을 기약하며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결국 이것이 이중섭과 가족의 마지막 만남이 됐다.

영원한 이별을 한 것이다.

 

역사에 가정법을 적용하는 것은 어리석다지만, 만약 그의 처가가 평범한 집안이었다면,

또 그가 이기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면

혹 일본에 눌러앉아 가족과 함께 안정된 삶을 꾸리며 화가로 대성하지 않았을까.

실제 이중섭이 일본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왜 바보처럼 돌아왔느냐”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석양 아래 우짖는 슬픈 황소

 

황소처럼 힘세고 야성적이지만 온순한 성격의 이중섭은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

일본 책을 한국에서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오산학교 후배의 말을 들은 아내가

일본에서 어음을 주고 사 보낸 책의 판매대금은 중섭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후배가 중간에서 사기를 친 것이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마사코는 일본에서 삯바느질 등을 해가며 오랜 세월 생고생을 하며 살아야 했다.

그가 빚도 갚고 일본에 가서 살 돈을 벌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개최한

‘이중섭 개인전’(1955년 서울, 대구)은 화단의 평가를 얻었지만 경제적인 면에선 완전 실패였다.

많은 사람은 그의 그림을 외상으로 가져간 후 그림 값을 갚지 않았다.

전시회를 위해 대구의 여관에 머물 땐 그림을 훔쳐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망우리공원의 이중섭 무덤과 비석.

옆에 선 소나무가 그의 기개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후배에게 돈을 돌려받기 위해, 일본 입국 비자를 받기 위해, 돈을 벌어 하루라도 빨리 가족과 재회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절절히 드러나 있다.

그러나 개인전의 실패는 화가 이중섭의 희망을 완전히 꺾어버렸다.

그때부터 우울증은 극한에 달했고,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의 내용이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다며 같은 제목의 그림을 그릴 지경이었다.

 

일본에서 온 아내의 편지는 봉투조차 뜯지 않았고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았다.

황달, 영양실조, 간장염이 뒤를 이었고 정신분열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인 구상은 그의 말년을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9월6일로 향우 이중섭을 죽인 지 두 돌이 된다.

내가 이렇듯 살해자의 하나로 자처하며 그의 죽음을 비통하게 표현하는 것은

우정을 더욱이나 사후에 과장하려는 게 아니라

어쩌면 한 위인의 치명을 앞에 가로 놓고서도 너무나 무정하고 무력하고 무도했던

자신이 뼈아프게 뉘우쳐지며 때마다 가슴을 찢어놓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중섭이 병들어 미쳐 죽었다고도 하고 굶어 죽었다고도 하고 자살했다고도 한다.

정신병원엘 두 차례나 입원까지 하였으니 병들어 미쳐 죽은 것도 사실이요,

먹을 것을 공궤치 못했으니 굶어 죽인 것도 진상이요,

발병 1년 반 그나마 식음을 완강히 거부했으니 자살했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그러나 그를 살게 하고 죽게 한 것은 오로지 ‘고립’이었다.

중섭은 너무나 그림밖에 몰랐다. 그의 생존의 무기란 유일 그림뿐이었다….”

(동아일보 1958년 9월9~10일)

 

그의 불우한 삶은 우리 민족의 고난을 생각케 한다.

그의 대표작인 ‘황소’(1953)를 보면

석양의 붉은색을 배경으로 누런 소가 슬픈 큰 눈을 하고 우짖는 듯하다.

황소는 불행한 우리 민족의 상징이기도 하고 이중섭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1930년대 우리 민족의 소재와 색채로 향토색을 살린 대표 화가가 이인성이라면

이중섭은 자기와 일체화된 소와 닭 같은 우리 고유의 상징을 통해

민족의 역사성과 심정을 구현한 대표적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양 유화의 형식에 우리의 마음을 심어 한국적 유화 분야를 개척한

근대 유화의 선구자였다.

 

 

상품화한 브랜드 네임 ‘이중섭’

 

이중섭은 병원에서 죽은 후 무연고자로 처리돼 방치되어 있다가 사흘 만에

고향 친구 김이석(1914~64·소설가. 그의 묘도 망우리공원에 있다)에게 발견됐다.

유해는 서울 홍제동 화장장에서 화장돼

반은 망우리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의 가족에게 보내졌다.

일본에서는 처가 야마모토가(山本家)의 묘에 합장됐다.

 

그의 망우리 무덤 앞 상석은 몇 년 전에 세워진 것으로

오른편에 아들 태현(泰賢)과 태성(泰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망 1년 후 친구 한묵이 ‘대향이중섭화백묘비’라고 쓰고

후배 차근호가 아이 둘의 모습을 새긴 조각품이 세워졌다.

 

차근호는 이중섭의 뼈가 묻힐 때 함께 죽겠다며 묘 구덩이로 뛰어들 정도로

이중섭을 친형처럼 따르던 조각가였다.

그는 1960년 4·19 기념탑 제작자로 내정됐으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자기 제작자가 바뀌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그해 12월 자살했다.

정부보다 한발 앞서 동아일보가 위령탑 추진을 발표했을 때

그는 그 즉시 설계를 무료로 맡겠다고 자원(동아.1960.4.27)했을 만큼 탑 제작에 열정을 가졌다.

 

순수 예술가가 대접받지 못하고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예술가만이 출세하는 세상,

그런 사는 짓거리에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 세상을 버린 이중섭.

후배 차근호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시 대구의 미국문화원장이던 아더 맥타가트는

1955년 2월3일 동아일보에 쓴 개인전 관람기의 끝에

“대체적으로 씨의 작품전은 볼 만하며, 또한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은 매집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라고 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맥타가트에 의해 한국 화가 최초로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소장됐고,

그 후 세월이 지날수록 이중섭을 찾는 이는 늘어났다.

 

그의 드라마틱한 삶이 대중적 인기를 끌면서 그를 다룬 책도 쏟아졌다.

회고전이 열릴 때마다 갤러리는 문전성시를 이뤘다. 작품의 가치는 높아만 갔다.

 

그러나 대중성의 부작용이랄까.

벌떼처럼 달려든 세상 사람들은 조용히 잠든 이중섭을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위작이 판치고, 진품의 그림 값을 올리기 위한 마케팅이 불붙은 것이다.

자본은 예술가를 키우는 스폰서의 기능도 하지만,

예술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면 예술적 가치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이중섭을 죽음으로 이끈 바로 그 세상의 사람들은

미술시장에서 최고가 된 브랜드 네임 ‘이중섭’을 연호할 뿐,

그의 고뇌와 작품의 예술적 가치에는 아주 작은 관심조차 없다.

그들에게 ‘예술은 곧 사기’일 뿐이다.

‘브랜드’ 이중섭이 경매장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때

‘예술가 이중섭’의 망우리공원 묘지는 찾는 이 없어 황량하기만 하다.

 

 

언제나 푸른 네 빛

 

일본에 두고 온 두 아이가 보고 싶어

길거리의 아이들을 데려와 몸을 씻겨줄 만큼 아이들을 좋아했던 이중섭. 그래서일까.

비록 찾는 이 드물지만 무덤 인근 용마약수터엔 유치원생의 사생대회가 끊이지 않는다.

그를 위로하듯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무덤까지 날아든다.

생전에 독일 민요 ‘소나무’를 늘 부르고 다녔다더니

그의 무덤 곁에도 잘 자란 소나무가 무덤을 지키며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산 밑의 세상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가지고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하고 있지만,

그의 예술 혼과 맑은 정신은 아이들의 청아한 목소리처럼 순수하게,

사계절 푸른 소나무처럼 독야청청(獨也靑靑), 변함이 없다.

 

그의 무덤에서 내려오는 필자의 입에서 어느덧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 날에도 /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 언제나 푸른 네 빛….”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