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망우리 별곡- 한국의 碑銘문학 5. 소파 방정환

Gijuzzang Dream 2008. 2. 18. 12:44

 

 

 

 

 

 

2008.02.01 통권 584호(p574~585)  
 

[망우리 별곡 - 한국의 碑銘문학 5]

 

 

 

 

 동화처럼 떠나간 식민지 아이들의 산타, 소파 방정환


“검은 마차가 날 태우러 왔네, 가방을 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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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공원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다는 소파 방정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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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 · 1899~1931)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가 ‘어린이’라는 말과 ‘어린이날’을 만들었다는 사실 또한 누구나 기억한다.

그러나 너무 유명한 나머지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일화가 더 많다.

열매를 맺기까지 그가 얼마나 힘든 길을 걸어왔는지,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청소년의 달 5월, 망우리공원을 찾아 암울한 시대를 희망과 익살로 살다간 그의 삶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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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

그리고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무덤을 꼽으라면 단연 소파 방정환의 묘일 것이다.

자연석(쑥돌)으로 에워싸인 그의 무덤 상석에는 유리상자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조화 하나가 들어 있다.

언젠가는 상석 위에 어린이가 얹어놓은 동전 몇 닢과 초코파이가 놓여 있었다.

또 어느 시대에는 또 어느 어린이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얹어놓을 터.

 

상석 위의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선여심동(仙如心童), 무동의이린어, 묘지환정방파소’

그리고 비석 뒷면에는 ‘이들무동’ 이라 새겨져 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묘를 처음 찾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열이면 열 모두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러고선 금세 알아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이 비는 서울 홍제동 화장터에 봉안돼 있던 유골을 소파 타계 5주년인 1936년 망우리로 이장하면서

세운 비석으로, 글씨는 당대의 명필이며 독립운동가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썼다.

위창은 손병희 선생의 참모 격으로 3·1운동 33인 중 한 사람이고, 소파는 손병희의 셋째사위였다.

오세창의 묘도 이곳 망우리에 있다.

 

소파의 아들 방운용이 서른 살쯤 됐을 때(1948)의 일이다.

추석 전후에 부친의 묘소를 찾아간 운용은

묘 앞에 양장 여인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참배하는 것을 목격했다.

여인은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옆에 서 있는 운용을 보더니

“유족이신가요?”라고 짧게 묻곤 휑하니 사라졌다.

 

얼마 후 운용이 소파의 오랜 친구 유광렬(언론인 · 1906~1981)을 만나 여인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더니

그 여인은 신준려(신줄리아)라고 했다(‘사랑의 선물’, 이상금, 2005).

그는 소파가 1920년 봄 김일엽, 백인덕이 기획한 잡지 ‘신여자’의 편집고문으로 위촉돼

일을 도와주면서 잠시 교제한 여인이다. 신줄리아도 이 잡지의 기획자 중 한 사람.

그는 소파의 글에서 ‘S’라는 이니셜로 나타난다.

 

다음은 ‘개벽’ 4호(1920.9.25)에 나온 ‘추창수필(秋窓隨筆)’의 일부분이다.

“밤 10시 20분, 등불을 가까이하고 독보(구니기타 돗포)의 병상록을 읽다가 언뜻 S를 생각하고

한참이나 멀거니 앉아 있었다.…

독보가 말한 ‘밭 있는 곳에 반드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에 반드시 연애가 있다’라고 한

그 구절 끝에 왜 이런 구절이 없는가 한다.

‘연애가 있는 곳에 반드시 실연이 동거한다’고.

아아, 인정의 무상함을 지금 새로 느끼는 바 아니지만

S의 사랑을 노래하는 그 입으로서 어느 때일지 실연의 애가가 나오지 아니할까…

아아, 사람 그리운 가을 만유가 잠든 야반에 창 밖에는 불어가는 가을 소리가 처연히 들리는데

부질없는 벌레가 잠자던 나를 또 울리는구나….”

 

소파의 연인 ‘줄리아’

 

 

소파 22세, 줄리아 23세로 둘 다 뜨거운 가슴을 가진 청춘이었지만

소파는 이미 손병희의 3녀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둔 처지.

불꽃같이 짧았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결국 소파의 도쿄 유학과 줄리아의 미국 유학으로 추억의 한 장면이 돼버렸다.

줄리아는 후에 미국 보스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곳에서 만난 류형기(감리교회의 지도자)와 1927년 결혼해 귀국했으나

사회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아 그 이름이 생소하다. 전쟁 중이던 1951년 도미해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훗날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으로 승화됐다고 증언했는데,

그 때문인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소파의 활동은 다방면으로 눈부시게 전개됐다.

너무나 유명해 그 이름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을 정도인 소파.

그래서일까? 그에 대한 사람들의 지식은 대부분 단견과 피상에 그친다.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 그리고 아동문학가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줄리아와의 ‘러브스토리’만 해도 그렇다.

줄리아에게 소파는 아동문학가이기 전에 출판인이자 언론인이었다.

소파는 공전의 베스트셀러 잡지인 ‘어린이’ 외에도 ‘학생’ ‘신여성’ ‘혜성’ ‘개벽’ ‘별건곤’ 등에

직간접적으로 깊이 관여했다. 김일엽과 신준려 등이 ‘신여자’를 기획하면서

소파를 편집고문으로 위촉한 것도 출판인, 언론인으로서 그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1923년 5월25일자

(1000호)에 실린

‘어린이 천사람’ 합성사진.

비석에 쓰인 그의 일생과 업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무덤 오른쪽 비석 앞면에는 그의 이력이 짤막하게 정리돼 있다.

 

어린이의 진정한 동무

 

‘연보. 1899년 11월9일 서울 당주동에서 출생,

1908년 ‘소년입지회’ 조직, 1917년 손병희 선생의 셋째 따님 용화 여사와 결혼,

1918년 보성전문학교 입학, 1919년 3·1운동 때 일경에 피검,

1920년 3월 일본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 1920년 8월25일 ‘어린이’라는 말을 개벽지에 처음 씀,

1921년 ‘천도교 소년회’ 조직, 1922년 5월1일 ‘어린이의 날’을 발기 선포,

1922년 6월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 간행,

1923년 3월20일 개벽사에서 아동잡지 ‘어린이’ 창간, 1923년 5월1일 ‘어린이날’ 확대 제정. ‘색동회’ 창립,

1928년 10월2일 ‘세계아동예술전람회’ 개최,

1931년 7월23일 심신의 과로로 대학병원에서 별세,

1936년 7월23일 유골이 이곳 망우리묘지에 묻힘,

1940년 5월1일 ‘소파전집’ 간행, 1971년 7월23일 남산에 동상이 건립됨,

1974년 4월20일 ‘소파 방정환 문학전집’ 간행,

1978년 10월20일 금관문화훈장을 받음, 1980년 8월14일 건국포장을 받음’

 

비석 뒷면에는 후대의 아동문학가가 소파의 삶을 반추하면서 쓴 글이 있다.

 

 

“사람이 오래 살기를 어찌 바라지 않을까마는,

오래 살아도 이 민족 이 겨레에 욕된 이름이 적지 않았거늘

불과 서른셋을 살고도 이 나라 이 역사 위에 찬연한 발자취를 남긴 이가 있으니

그가 소파 방정환 선생이다.

나라의 주권이 도적의 발굽 아래 짓밟혀 강산이 통곡과 한탄으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선생은 나라의 장래는 오직 이 나라 어린이를 잘 키우는 일이라 깨닫고

종래 ‘애들’ ‘애놈’ 등으로 불리면서 종속윤리의 틀에 갇힌 호칭을 ‘어린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여

그들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존댓말 쓰기를 부르짖었으니 이 어찌 예사로운 외침이었다 하겠는가.

 

선생은 솔선하여 어린이를 위한 모임을 만들고

밤을 지새워 ‘사랑의 선물’이란 읽을거리를 선물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날’을 확대 정착시키며 어린이를 위한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으니

이는 반만년 역사에 일찍이 없던 일이요

봉건의 미몽 속에 헤매던 겨레에 바치는 불꽃같은 그의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나라 잃은 이 나라 어린이에게 우리말 우리글 우리얼이 담긴 이야기와 노래를 들려주어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일에 주야를 가리지 않았으니

그를 탄압하려는 일제의 채찍은 선생으로 하여금 경찰서와 형무소를 사랑방 드나들 듯하게 하였다.

오직 기울어가는 나라의 장래를 내일의 주인공인 어린이에게 바람을 걸고

오늘보다 내일에 사는 어린이를 위한 아동문화의 개화와 아동문학의 씨뿌리기에 신명을 바쳐

이바지했으니 실로 청사에 길이 빛날 공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애닯다. 그처럼 눈부신 활약이 끝내는 건강을 크게 해쳐

마침내 젊은 나이로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면서

다만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한다’는 한마디를 남기셨으니

뉘라서 이 정성이 애틋한 소망을 저버릴 수 있으리오.

여기 조촐한 돌을 세워 민족의 스승이요 어린이의 어버이이신 그의 뜻을

이 겨레의 내일을 위해 천고의 역사 위에 새겨두고자 하는 것이다.

1983년 어린이날 사계 이재철 짓고 월정 정주상 쓰다.”

 

‘어린이’ 잡지 동요 공모에 입선한 아동문학가들의 당시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서덕출, 윤석중, 이원수, 최순애.

이 비석은 1983년 한국 최초의 ‘본격적’ 아동잡지 ‘어린이’ 창간(1923) 60돌을 맞아

아동문학인과 출판인, 뜻있는 어른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것이다.

비문을 쓴 이재철(단국대 명예교수)은 시인이자 아동문학가로

‘아동문학개론’ ‘현대아동문학사’ 등을 저술하고 ‘소파전집’을 편찬했으며 세계아동문학대회(1997)를 개최했다.

그는 한국아동문학학회장과 아동문학평론사 주간을 맡아

방정환문학상을 시상(올해는 18회째)하는 등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이론적 정립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글씨를 쓴 정주상은 아동문학가이자 서예 교과서를 집필한 저명한 서예가다.

 

비석에 쓰인 연보를 읽던 필자는 그의 연대기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1928년 세계아동예술전람회 개최’와 관련해서다.

소파 무덤 근처에는 한국 화단의 거두 이인성(1912~1950)이 묻혀 있는데, 그가 바로 이 전람회 출신이다.

이인성의 비석 뒷면 연보에는 16세 때 이 전람회에 ‘촌락의 풍경’을 출품해 특선에 입상했다고

새겨져 있다. 이는 전람회 측이 ‘동아일보’ 1928년 10월12일자에 발표한 수상자 명단에서도 확인된다.

 

소파가 남긴 ‘사랑의 선물’

동아일보(1928.10.12)에 실린

세계아동미술전람회 특선작품

발표 광고. 원안은 개인화 부문

특선을 차지한 이인성(당시 16세).

 

이인성 평전에 따르면 동양 최초로 열린 세계아동예술전람회는

대구의 이인성이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 동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후에 이인성은 조선국전(鮮展) 및 일본국전(帝展)에도 입상해

한국 화단의 귀재로 부상했으니 소파와 동료들이 3년 동안 준비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가 없었다면

어린이 이인성의 인생항로는 180도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소파가 벌인 또 하나의 큰 이벤트는

잡지 ‘어린이’를 통한 동요 운동이다.

당시 어린이가 접할 수 있는 노래는 학교에서 배우는 일본 노래와 어른들이 부르는 민요밖에 없었다.

1970~80년대까지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동요의 대부분은

잡지 ‘어린이’를 통해 탄생했다.

 ‘오빠생각’은 11세의 최순애가,

‘고향의 봄’은 15세의 이원수가 응모해 뽑힌 것이다.

설날(‘까치까치’…윤극영), 반달(윤극영), 고드름(유지영), 따오기(한정동), 오뚜기(윤석중),

봄편지(서덕출) 등도 모두 ‘어린이’를 통해 세상에 나와 지금껏 애창되고 있으며,

작사가들 또한 대부분 유명한 작가로 성장했다.

 

시인 박목월은 17세 때인 1933년 ‘어린이’에 동요 ‘통딱딱 통짝짝’이 입선된 바 있고,

강소천도 같은 해 18세 나이로 ‘울엄마젖’이 입선했다.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자였던 서덕출은 ‘어린이’로 등단해 31세로 요절하기까지 많은 활동을 했는데,

요즘 출신지 울산에서는 그를 기리는 사업이 왕성하다. 학성공원에 노래비가 세워졌으며,

서덕출 창작동요제와 서덕출문학상이 매년 열린다.

‘세계아동예술전람회’가 화가 이인성을,

‘어린이’가 서덕출과 이원수를 배출했듯,

소파는 암울한 시대를 사는 가련한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사했다.

 

소파는 어린이들을 위한 읽을거리를 싸게 제공하기 위해 1922년 번안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펴냈다.

비록 번안이기는 하지만 이 책은 80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어린이’에 실린 ‘사랑의 선물’ 광고가 눈에 띈다.

가을에는 “낙엽이 우는 가을 밤, 외로운 등잔 밑에 마음이 쓸쓸할 때” 이 책을 읽으라 하고,

한겨울에는 눈 오는 창밖을 바라보는 소녀의 그림과 함께

“눈이 옵니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퍼억 퍽 저녁때까지 쏟아집니다.

쓸쓸한 저녁 혼자 안에서 어린 가슴이 울고 싶을 때 ‘사랑의 선물’을 읽으십시오”라며

독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물론 발간 3년째에 10만명 이상의 독자를 모은 잡지에 실린 광고이니만큼

그 홍보효과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나온 다른 책들은 사라지고 없는 반면,

이 책만이 지금까지 읽힌다는 사실은 광고 외의 본질적 가치가 있음을 말해준다.

‘어린이’ 등에 실린 이야기나 동요는 슬픈 내용이 많아 너무 감상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는 어른도 고생이 많았지만, 식민지에 태어난 어린이의 현실과 장래는 더욱 암울했다.

소파가 전한 슬픔은 그 시대 어린이의 공감대를 타고 독서와 예술로 승화했다.

그것이 소파가 어린이에게 주고자 한 최선의 선물이자 활동 목표였다.

그중의 하나인 ‘사랑의 선물’은 그 제목부터가 상징적이다.

 

일본 순사도 울린 동화구연

 

소파는 뛰어난 동화구연가로도 유명했다.

동화구연을 할 때마다 가득 찬 청중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으며,

심지어 감시하러 온 입회 순사도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한다.

 

‘별건곤’(1930.10.11)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내가 맨처음(10년 전) 경성에서 동화구연이란 것을 할 때 천도교당에서 ‘난파선’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날 온종일 울고 앉아 있는 소년을 두 사람 본 일이 있었지만은,

금년 봄에 이화여자보통학교에 끌려가서 전교학생에게 ‘산드룡(신데렐라의 불어 발음 Cendrillon)이’

이야기를 할 때 옆에 앉아 계신 남녀 선생님이 가끔 얼굴을 돌이키고 눈물을 씻으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때 학생들은 벌써 눈물이 줄줄 흘러 비단저고리에 비 오듯 하는 것을 그냥 씻지도 않고

듣고 있었다. 그러다 이야기가 산드룡이가 의붓어머니에게 두들겨맞는 구절에 이르자

그 많은 여학생이 그만 두 손으로 수그러지는 얼굴을 받들고 마치 상가집 곡성같이 큰소리로

응- 응- 소리치면서 일시에 울기 시작하였다.

옆에 있는 선생님들도 일어나 호령을 할 수 없고, 나인들 울려는 놓았지만 울지 말라고 할 재주는 없고

한동안 단상에 먹먹히 서 있기가 거북한 것은 고사하고 교원들 뵙기에 민망해서 곤란하였다.”

 

‘어린이’ 1929년 5월호‘ 표지.

소파가 지은 ‘어린이날 노래’ 악보가 표지사진으로 실려 있다.

위에 든 활동 외에

후세의 학자들은 소파를 아동교육 사상가로도 높이 평가한다.

비록 그의 아동교육철학이 이론으로 집대성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서양으로부터 존 듀이의 교육론이 도입되기 이전 시대에 이미 소파는 아동 중심의 교육철학을 정립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소파의 어린이 운동은

장래 조선 독립의 역군이 될 인재를 키우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소파는 기성세대의 분열상에 대한 좌절감을 신세대에 대한 기대로 전환했다.

어린이 잡지는 검열에 걸려 빈번히 기사가 삭제됐고 그때마다 소파는 경찰서를 밥 먹듯 들락거려야 했다.

 

일경이 작성한 ‘왜정인물 1권’(국사편찬위원회)에는

소파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경력 및 활동 : 고 손병희 손녀 용화의 남편으로서 항상 천도교의 중요 임무를 전담함.

                      1920년 동경에서 천도교 지부를 설립하여 손병희 사후 이례적으로 그 상속인이 된 자임.

인물평 외모 : 키 5척 2촌. 둥근 얼굴형에 까만 피부. 비만임.

                    배일사상을 가지고 있고 불온한 행동을 할 우려가 있음’

 

일경이 작성한 문서에는 소파의 부인을 ‘손병희의 손녀’라고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파의 부인은 손병희의 손녀가 아니라 셋째딸이 맞다.

일경이 문서를 잘못 작성했는지, 이를 옮겨 적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오기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일제는 소파의 배일혐의를 잡기 위해 갖은 음모를 꾸몄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일제 강점기 드라마에 단골로 출연해 우리에게 이름이 낯익은 종로경찰서 미와(三輪) 경부는

어린이날 행사의 불온성을 밝혀내기 위해 소파를 자주 불러 취조했지만

소파는 그때마다 능청맞은 말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한다.

 

1967년 ‘신동아’ 5월호에 실린 미와 경부의 말에는 소파의 비범함이 묻어난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일본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사회라면 든든히 한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윤극영)

 

산타클로스 대신 소파를…

‘어린이’를 통해 발표된 한정동의 동요 ‘ 따오기’. 윤극영이 곡을 썼다.

 

소파는 전국을 도는 강연, 여러 잡지의 간행, 집필, 행사 기획 등으로

바쁘게 일하다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고혈압에 의한 신장염이라는 진단이었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간호사들에게 동화를 들려주며

웃음을 잃지 않고 지냈지만 당시 의학은 끝내 그를 구하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도 “어린이들을 잘 부탁한다”라는 말과

“여보게, 밖에 검정말이 끄는 검정 마차가 와서 검정옷을 입은 마부가 기다리니 어서 가방을 내다주게”라는 말을 남기고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필자는 소파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접하고 이런 생각을 해봤다.

해마다 연말이면 온 거리에 내걸리는 산타클로스 대신

뚱뚱보 소파를 어린이의 친구로 등장시키면 어떨까.

어린이날이나 성탄절 밤에 뚱뚱보 소파가 검정 마차를 타고 사랑의 선물을 가지고 온다는 콘셉트로

문화운동을 벌이면 어떨까.

그와 더불어 소파를 다룬 명작 애니메이션이나 뮤지컬을 만들면 그 또한 대박이 나지 않을까.

 

그렇지만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새로 짓는다고 모금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과는 딴판으로

독립운동가, 문학가, 사회·문화운동가, 동화구연가, 언론인, 출판인, 교육자(경성·중앙보육학교 출강),

아동교육 사상가로서 다방면으로 분골쇄신한 소파를 기리는 기념관은 세우자는 사람조차 없다.

위인의 기념관은 주로 어린 학생들이 많이 찾는데,

정작 영원한 ‘어린이의 동무’인 소파의 기념관은 어디에도 없다.

소파는 우리에게 정말 이것밖에 되지 않는 인물이었나.

 

‘어린이’ 10주년 회고에서 최신복(필명 최영주·1906~1945)은 소파를 그리며 이렇게 썼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무척 가슴을 괴롭게까지 하며 생각키우는 이가 있습니다.

‘어린이’를 탄생시킨 산파였고 길러준 어머니였고 또 ‘어린이’ 대장이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생각입니다.

한 몸의 괴로움은 조금도 돌보지 않고 오직 뜨거운 열성과 끈기를 가지고

반석처럼 움직이지 않고 ‘어린이’의 성장에 힘을 써주시었습니다.”

 

소파의 무덤(뒤쪽 갓머리 쓴 비석).

아래는 최신복 가족의 무덤.

맨 아래 단비가 있는 무덤이 최신복의 묘.

그 최신복의 무덤이 소파 묘지 바로 아래에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그가 지은 동요 ‘호드기’가 새겨져 있다.

‘- 호드기 -

누구가 부는지 꺽지를 말아요

마디가 구슬픈 호드기오니 

호드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내 엄마 생각에 더 섧습니다. - 최신복 작’

 

뒷면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신 선생은 화성소년회를 조직하여 소년운동에 힘쓰시고, 소파 방정환 선생을 도와

‘어린이’ ‘학생’ ‘소년’ 등의 잡지 편집에 종사하는 한편,

어린이를 위한 많은 글을 쓰시어 아동문학에 기여하시었다.’

 

최신복은 배재학교를 거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수원에서 화성소년회를 이끌면서

소파와 인연을 맺었다. 소파 사후 ‘어린이’에 실린 최신복의 추모 글은

소파가 화성소년회의 초청으로 내려와 강연할 때 입회 순사가 소파의 강연에 감동해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소파를 ‘선생’으로 모시게 된 일화를 전한다.

 

‘동아일보’ 수원지국 기자로 일하던 최신복은 소파의 부름을 받고 1929년 개벽사에 들어갔다.

망우리공원에 소파의 무덤을 만들어준 이도 최신복이다.

무덤도 없이 홍제동 납골당에 남아 있던 소파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윤석중, 마해송 등과 함께

망우리공원에 소파의 무덤을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모금운동을 벌인 끝에

소파의 묘를 망우리에 조성했다.

 

최신복 3대가 소파 곁에 묻힌 사연

 

최신복은 소파 10주기 때인 1940년 박문서관에서 마해송과 함께 ‘소파전집’을 간행하는 등의

기념사업과 소파의 유지를 잇는 일로 분주하게 보내다

1945년 38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유언은 “존경하는 선배 소파의 밑에 묻어달라”는 것.

 

소파에 대한 그의 사랑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최신복은 자신의 부친(그 또한 소파 숭배자였다)이 1939년 타계하자

소파를 더 자주 찾아보고 싶다며 수원의 선산을 놔두고 부친의 묘소를 소파 아래쪽에 모셨고,

1942년에는 모친을 다시 그 옆에 모셨다. 또 자신의 갓난아이가 죽었을 때도 그 옆에 묻었다고 하며,

최신복의 부인도 후에 최신복 묘에 합장됐다.

 

그리고 ‘오빠생각’의 작사자 최순애는 최신복의 여동생으로,

후에 ‘고향의 봄’의 작사가 이원수와 결혼했으니 온 가족이 대대로 소파와 맺은 인연이 깊고 크다.

김영식
● 1962년 부산 출생
● 중앙대 일문과 졸업
● 한국미쓰비시상사 근무
● 現 지원상사 대표
● 2002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수필), 2003년 문예진흥원 선정 우수문학사이트(일본문학취미)
● 역서 : 기러기(모리 오가이, 리토피아)라쇼몽(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문예출판사)

 

필자가 지난 2월호 ‘신동아’에 쓴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편에서,

도산이 임종 때 평안도의 선산에 묻지 말고 자식처럼 사랑한 유상규 옆에 묻히기를 유언으로 남긴 사연을 소개한 바 있는데,

 

여기 방정환의 묘소에는 존경하는 선배 소파를 따라간 후배 최신복과 그의 가족 3대의 사연이 있다.

사회에 나와 이해타산으로 교제하다 저마다 자신의 무덤을 홀로 찾아가는 요즈음,

존경하는 이와 죽어서까지 함께하고자 한 최신복의 사연은 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5월은 어린이를, 어버이와 선생님을,

나아가 세상 모든 사람과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달이다.

소파의 무덤을 찾아 소파가 우리에게 준 ‘사랑의 선물’을 되새기면서

최신복의 가족사를 통해 소파의 사람됨과 그들의 숭고한 인간관계를 돌아보기를 권한다.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