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8.01 통권 587호(p602~611) | |
[망우리 별곡 - 한국의 碑銘문학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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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시인 고은은 ‘한용운 평전’에서 만해에 대한 일방적 신격화를 저어하며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근대 민족사 또는 근대 문화사에 관련된 인간론이 늘 변절과 고절의 극단으로 분류해서 민족의 편에 서 있는 자를 신격화하고 그렇지 못한 자를 폄훼하는 경향이 농후한 사회에서 살아왔다. 이런 사회에서는 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310쪽)
‘한용운 평전’은 여러 대목에서 만해에 대한 무조건적 추앙을 비판하고 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면면을 드러낸다. 연설에 뛰어나고 지조가 강하며 지도자적 능력을 갖추었음은 인정한 반면, 수시로 파계를 한 승려답지 않은 행동, 첫 번째 처와 아들에 대한 무정함, 문학적으로 자기보다 앞선 최남선에 대한 시기심, 그를 숭모해 찾아온 청년들에 대한 냉정한 대응 등에 대해서는 일체의 수식 없이 그대로 전하고 있다.
이런 내용에 대해 많은 이가 반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평생 대처하지 않고 수행에 정진해온 승려들의 입장에선 만해가 아무리 위인이라 한들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려웠을 터이다. 고은은 이 책에서 “위인의 무조건적인 신격화 또한 우리의 눈을 가리는 행위”라고 일갈한다.
만해의 묘비(뒷면 약전(略傳))를 통해 본 그의 일생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4212년(1879)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본관은 청주. 모는 온양 방씨. 4220년(1887) 향숙에서 경사를 수학. 4244년(1911) 만주에 망명 독립운동. 4246년(1913)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 4247년(1914) 불교대전을 발행. 4250년(1917) 정선강의채근담을 발행. 4250년(1917) 12월 오세암에서 선정중 오도(悟道). 4251년(1918) 월간교양잡지 유심을 창간. 4252년(1919) 3·1 운동을 선도하고 행동강령으로 공약 3장을 공표. 옥중에서 독립의 소신을 장문으로 발표 3년형을 받음. 4256년(1923)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지원. 4257년(1924)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총재에 취임. 4259년(1926) 십현담주해 및 님의침묵을 발행. 4260년(1927)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및 경성지회장에 피선. 4262년(1929) 광주학생의거시 민중대회를 발기. 4264년(1931) 불교지를 인수 편집발행인 취임. 4266년(1933) 성북동에 심우장을 건축하고 흑풍 등의 소설과 다수의 문장을 발표. 4276년(1943) 조선인학병지원을 반대. 4277년(1944)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 세수 66 법랍 39. 4295년(1962)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여. 만해사상연구회 識 안동 김응현 書
여기서 세수(世壽)는 세속의 나이, 법랍(法臘)은 중이 된 후로부터의 나이를 말한다. 대한민국장은 건국훈장 중에서 가장 훈격이 높다. 참고로 대한민국장 수여자는 총 30명(그중 5명은 중국인)이고 다음으로 대통령장 93명(중국인 10명, 영국인 베델 1명), 독립장 788명, 애국장 3258명, 애족장 3868명, 건국포장 557명의 순이다(민족정기선양센터. 2008년 6월 19일 현재). 도산 안창호가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면서 망우리공원에 묻힌 인사 중 현재 대한민국장 수여자는 만해가 유일하다.
묘비에 쓰인 글자 중 ‘識’은 ‘식’이 아니라 표지(標識)처럼 ‘지’로 읽어야 한다. 만해사상연구회가 글을 짓고 현대 서예의 대가 김응현(1927~2007)이 묘비문을 썼다.
혼자 살던 만해는 55세 때 신도의 소개로 간호부인 노처녀 유씨와 결혼하고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 등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심우장을 지어 살았는데, 심우장은 총독부가 보이지 않도록 북향으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우장의 편액은 위창 오세창이 쓴 것이다. 심우장에서 ‘심우(尋牛)’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선종(禪宗)의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 즉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했다.
만해는 기미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끝내 지조를 지킨 오세창 등과는 죽을 때까지 교유했으나, 변절한 최린, 최남선 등과는 아예 관계를 끊고 살았다.
1944년 지병인 신경통으로 와병하다 조선의 독립을 1년 앞두고 유명을 달리했다. 시신은 일본인이 주인인 서울 홍제동 화장터를 피해 멀리 떨어진, 한국인이 경영하는, 미아리의 작은 화장터를 굳이 찾은 후 불교식으로 화장했고, 타지 않고 남은 치아는 항아리에 담아 망우리묘지에 안장했다.
현재 묘지 관리자는 부인 유씨와의 사이에 낳은 딸 한영숙씨로 되어 있다. “님은 갔지만은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님의 침묵’ 중에서)
만해의 묘를 지나 관리사무소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길 오른쪽 바로 아래에 글이 많이 새겨진 희끄무레한 비석이 하나 보인다. 비석의 크기도 평균 이상이다. 비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기미년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중 고 박희도 선생지묘”(앞면)
“고(故)선생은 단기 4222년(1889) 6월 11일에 해주에서 출생하여 그 후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삼십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항일투쟁을 하다 투옥되었으며 출감 후에도 계속해서 민족의 신생활운동교육사업에 이바지하던 중 단기 4284년(1951) 9월 26일에 서거하다. 단기 4291년(1958) 7월 8일 건립 육군정훈학교 장병 일동”(뒷면)
박희도와 육군정훈학교
바로 위에 있는 묘가 부모님의 묘인데 비석 뒤에 차남으로 박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 이름이 생소하다. 비문 내용 그대로라면 대표적 독립지사로 관리사무소의 안내도에도 이름이 올라 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박희도는 일제 말기의 행위로 친일파로 낙인찍힌 사람이다. 3·1운동 때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간사로 다른 기독교 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2년간 복역했고, 출옥 후에도 ‘신생활사’를 설립, ‘신앙생활’을 발간하며 독립운동과 신앙운동에 힘쓰다 다시 2년간 복역하는 등 나라를 위해 헌신했으나, 두 번째 출옥 이후로는 점차 자치론으로 경도되고 마침내 1939년 1월 ‘동양지광(東洋之光)’을 창간해 적극적으로 친일행위에 나섰다.
이러한 친일 행적 때문에, 박희도의 묘는 산책로를 사이에 두고 만해의 묘와 지근거리에 있지만, 세인이 바라보는 시선의 거리는 대극적이다. 아니, 그는 아예 우리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고 오랫동안 잊힌 존재가 되고 있다.
박희도가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풀려난 후, 1951년 사망 때까지의 행적은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공백을 메우는 단서가 바로 고인의 비석에 나타난 육군정훈학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학교의 후신인 육군종합학교에 문의한바, 비석이 세워진 1958년 당시의 이 학교 교장은 윤태호 준장인 것으로 추정되며 학교는 용산구 한남동에 있었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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