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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는(문화)

소목장 설석철

Gijuzzang Dream 2008. 2. 13. 20:02

 

 

나무의 아름다움을 살리는 사람들, 대목장과 소목장



[위- 경복궁 근정전 / 아래- 봉정사 극락전]


경복궁 근정전은 대목장 신응수가 3년 10개월 동안 중수 공사를 했고,

봉정사 극락전은 대목장 최기영이 보수했다.

나무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나 예능, 그렇게 탄생한 제품을 ‘목공예’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목공예품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문헌 기록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2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궁궐이나 관아, 절 같은 건물과 백성들의 집이 나무로 만든 건물이었고,

그 안의 물건도 나무로 만든 것이 많았다.

따라서 나무를 다루는 솜씨 또한 일찍부터 발달했다.

 


건물을 짓는 장인, 대목장


목재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살림살이에 쓰이는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를 ‘목수’ 또는 ‘목장’이라 한다.

그 가운데 궁궐이나 불전(佛殿), 집을 짓는 건축 일을 하는 장인을 ‘대목장’이라고 한다.

대목장은 1982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74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목조 건축이 발달해 궁궐과 사찰 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4세기 이후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 건물인 가람이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롭고 다양한 형태의 건축물들이 많이 등장했다.

 

또 백제에는 조사공, 사공, 와박사라고 하는 전문 건축가가 있었다.

백제는 최고의 전문 기술을 쌓은 사람에게 ‘박사’라는 직위를 주고 교육을 맡아 보게 했는데,

'조사공'과 '사공'은 절 건설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가이다.

'와박사'는 막새를 비롯한 기와와 벽돌 공예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기술자이다.

조선 초기에 남대문을 건설했던 대목장 가운데에는 정5품에 이르는 벼슬까지 받은 사람도 있었다.

 
집 짓는 일에서 도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연모, 곧 도구의 발달에 따라 건축 기법과 건축 양식이 발달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가운데 톱의 발전은 건축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톱이 발전하면서 ‘결구’와 ‘결합’이라는 새로운 기법이 생겨났는데,

이 기술은 대들보를 써서 집을 짓게 해 주는 비결이다.

 

대들보는 집의 중심 기둥을 말하는데, 대들보 없이는 지붕에 아름다운 곡선을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나라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도 바로 톱의 발전으로 이루어진 것.

 


가구를 만드는 장인, 소목장

 

목재를 다루어 장롱이나 문갑, 탁자, 소반 등 집에서 사용하는 가구와

그 밖의 목공품을 만드는 장인을 ‘소목장’이라고 한다.

소목장이라는 이름은 고려 시대 때부터 있었다.

그들은 나라와 궁궐에서 사용하는 목공예를 만드는 일을 했다.

서양이나 중국의 가구는 크기가 크고 장식을 강조한 것이 특징인 반면

우리나라의 목가구는 낮고 작으며 실용적이다.

나무 자체의 결을 살려 자연 그대로의 멋을 내고, 불필요한 장식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소박하면서도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이는 집의 재료와 모양, 사람은 자연과 하나라고 생각한 오랜 전통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독특한 조형 양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구를 만들려면 다양한 공구가 있어야 하는데,

만드는 과정이 복잡한 만큼 단계마다 여러 가지 공구가 쓰인다.

공구에는 나무의 치수를 재는 자, 나무를 켜거나 자르는 톱, 나무의 면을 매끄럽게 다듬는 대패,

손으로 비비거나 돌려서 구멍을 뚫는 송곳,

활처럼 구부러진 나무에 송곳 자루를 걸어 구멍을 뚫는 활비비,

찍어 깎을 때 사용하는 자귀 등이 있다. 
 

[소목장의 공구]

① 활비비, ② 송곳, ③ 대패, ④ 자, ⑤ 자귀, ⑥ 톱


 

[우리나라의 목가구]


 

우리나라는 남녀의 생활공간을 구분했으므로 가구의 양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남자들이 기거하는 사랑방에는 경상, 문갑, 책장, 각게수리 등이 있었고,

여자들이 기거하는 안방에는 장, 농, 반짇고리 등이 있었다.

 

 

 소목장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은 1975년 기능 보유자가 지정된 이래

지금까지 송추만(1903∼1991), 천상원(1926∼2001), 강대규(1936∼1998),

정돈산(1939∼1992), 설석철(1925∼) 등 모두 다섯 명의 기능 보유자가 있다.

 

이 가운데 송추만, 천상원, 강대규, 정돈산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설석철만이 소목장 보유자로서 일을 하고 있다.

처음 소목장 보유자로 지정된 사람은 천상원으로,

현재 제자 김금철(1955∼)이 그의 기술을 잇고 있다.

또 이정곤(1959∼)이 송추만의 기술을, 조화신(1962∼)이 강대규의 기술을 이어 가고 있다.

 

소목장 전승 현황은 기능 보유자 1명(설석철)에 전수 교육 조교 3명(김금철, 이정곤, 조화신)이다.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는 명장

 중요무형문화재 제55호 소목장 기능 보유자 설석철

 

소목장 설석철은 전라남도 장성군 송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송계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오래된 나무가 많아

일찍부터 나무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목장 설석철 또한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목공예 제작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17세에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기술자들의 일을 보조하면서

기술을 익혀 공방에 들어간 지 3년 정도가 되자 혼자 힘으로 가구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24세 때 공방을 그만두고 개인 공방을 차려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는 소목 일을 하면서 여러 번 시련을 겪게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커다란 시련은 40여 년 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것과

15년 전쯤 목재를 재단하다가 나무가 튀어 왼쪽 눈을 실명한 일이었다.

지금도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에 비해 5cm 정도 짧아서 움직이는 데 불편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신체적인 고통보다

소목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 모르는 현실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소목 일을 전승하려는 열정이 남다르다. 

자식들 가운데 삼형제가 소목 일을 이어 가고 있고,

고향 송계마을에 오동나무를 심어 500주 정도가 자라고 있다.
그는 아들들이 당신에게서 배운 것만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보고 연구도 해서 기술과 기법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기를 바라고 있다.

그의 오랜 경험과 아들들의 현대적인 감각이 어우러져

전통 소목이 발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공예전시관과 같은 시설을 지원해서 소목 일을 하는 사람들이 기술을 나누고 전수해

체계적으로 전승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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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출판사에서 발간한 [어린이 문화재 박물관②]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과 사계절 출판사에 있습니다.
* 문의_문화재청 홍보담당관실 (042.481.4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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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1-21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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