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북학파 그리고 탑골공원

Gijuzzang Dream 2008. 1. 27. 01:50

  

 

 

 탑골과 북학파  

 

 

서울 종로 2가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원으로

3·1운동의 발원지이자 한동안 ‘파고다공원’으로 불리기도 했던 ‘탑골공원’.

그 안에는 도시의 매연과 비둘기에 시달려 노쇠한 몸으로 이제는 유리집 안에서 휴식을 취하며,

늘쌍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거리의 사람들을 묵묵히 건너다보는 ‘백탑(白塔 ·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있다.

 

지금은 우리 시대의 쓸쓸한 한 단면을 보여주는 노인들의 휴식처가 돼 있지만,

한때 그 주변은 당대의 총명한 젊은 인재들이 모여 학문과 예술을 논하고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던

‘담론의 산실’이었다.

 

백탑 인근에 박지원이 머물던 집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과 초정 박제가(楚定 朴齊家·1750∼1805)는 이곳에서 처음 만났다.

박제가의 나이 18세. 이미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던 박지원의 명망을 듣고 흠모하던 박제가가

그의 집을 찾아갔다. 박제가의 재능을 익히 듣고 있었던 박지원은 버선발로 뛰어나왔고

이 둘은 첫눈에 의기투합해 그칠 줄 모르는 이야기 속에 그날 밤을 지샜다. 이 때 박지원의 나이는 31세.

 

이 무렵 박지원의 집에는 이미 인근의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어 풍류를 즐기며 시대를 논하곤 하던 터였다.

이들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어울렸고, 하루도 안 만나고는 배기지 못했다.

박제가는 신혼 첫날밤을 박지원의 집에서 이 무리들과 함께 지새기도 했다.

하지만 박지원은 당대에 정권 핵심에 버티고 있는 권문세가 노론(老論)의 일족이었고,

박제가는 벼슬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서얼 출신이었다.

 

박제가뿐이었겠는가.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유련, 이희경 의명 형제 등이 모두 함께 어울렸던 서출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 1731∼1783)은 박지원과 같은 노론 가문 출신이었고,

이조 공조 호조판서 대사헌 평안감사 호남감사 등을 두루 거친 이서구는 왕가의 종친이었으며,

서유구도 대대로 벼슬을 해 온 소론(少論)의 명문 출신이었다.

이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이들이 유별난 신분개혁론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이 이들의 활동무대였던 수도 서울은 가장 활발한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다.

 

18세기 현실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경제제도와 계급질서의 붕괴 등 산적한 사회 문제로 인해

조선의 지식인들은 어떤 해결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오랑캐라 천대받던 만주족이 중원에 청나라를 세우고는 예상 밖으로 나라를 잘도 꾸려 가고,

서구의 문물이 중국을 통해 조선에 조금씩 전해지면서 중화주의적 세계관도 흔들렸다.

청나라의 번성함과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서양의 발달된 문물은

조선의 지식인들 스스로를 끊임없이 왜소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이제 중국 한족(漢族)의 문화를 기준으로 하는 문화민족과 오랑캐의 이분법적 구도가

재검토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지배층인 양반들의 무능함이 확인되고

평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몰락한 양반이 속출하던 터였으니,

서울 장안의 젊은이들이 신분의 벽을 넘어서 어울리는 것은 그다지 기이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이 같은 문제를 성리학적 심성론(心性論)의 측면에서 논한 것이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이었다면,

백탑 주변에 모인 이들은 예술, 역사, 경제 등 다양한 방향으로 논의를 거듭했다.

   

백탑 주변에서 어울렸던 이들 젊은 지식인들은 현실의 변화 앞에서

당시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여겨지던 주자학적 세계관을 넘어 뭔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고,

그 희망은 우선 청나라를 통해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에서 엿볼 수 있었다.

그것은 서양의 과학기술과 청나라의 실용적인 문화였다.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은 청나라를 직접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교통통신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몇 달씩 걸리는 중국 여행의 비용도 비용이려니와

돈이 있다고 아무나 외국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선진문물에 관심을 가졌던 이들은 때로는 집안 덕택에,

때로는 친구 덕택에 청나라로 가는 사신일행에 끼어서 청나라를 직접 구경할 수 있었고

청나라에서 본 선진문물의 수용을 적극 주장하게 된다.

이들은 당시 그렇게 어렵다는 ‘외국 물’을 일찍부터 먹은 장안의 ‘유학파’들이었다.

 

길거리 사람들의 옷차림, 농기구 하나 하나의 효율성, 벽돌 한 장, 수레바퀴의 모양….

조선 사회의 많은 문제점들에 대해 박지원의 사랑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했던 그들이기에

청나라의 거리에서 언제나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조선의 문제를 해결할 실용적인 기구들과 청나라 문물의 효율성이었었다.

 

먼저 청나라에 갔다온 박제가가 지은 ‘북학의(北學議)’를 보고 박지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일찍부터 비 오는 지붕, 눈 내리는 처마 밑에서 연구하고,

또 술을 데우고 등잔 불똥을 따면서 손바닥을 치며 이야기했던 것이다.”

양반들의 허례허식과 비효율적인 경제 운용을 함께 비판했던 이들이기에

청나라의 실용적인 생활 모습은 분명한 대안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밖에도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의산문답’ 등

청나라 방문의 성과들은 외래문물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

조선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대를 논하면서도 문학과 음악을 즐기며 당대 지식인들의 문화를 만들어 갔던 그들의 자리.

이제 그 탑골 앞에는 바쁘게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

그리고 세계화를 외치는 외국어학원과 패스트푸드점들만 즐비하다.

선진문물의 수용을 위해 조선어 대신 중국어를 쓰자고 주장했던 박제가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홍대용-박지원이 북학파에 미친 철학적 영향

 

18세기 후반 백탑 주변에 모여들었던 일군의 지식인들을 ‘북학파(北學派)’라고 일컫는 것은

이들이 청나라를 비롯한 외래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자는 주장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이런 주장을 펼친 이면에는 기존의 조선성리학에 대한 전반적 반성을 토대로

자연관, 인간관, 세계관 등에 걸친 폭넓은 철학적 입장의 변화가 있었다.

이런 철학적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은 홍대용과 박지원이다.

 

경기 남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미호 김원행(渼湖 金元行)의 가르침을 받아

10여 년간이나 정통 조선성리학을 공부한 후 이 지식인 집단에 적극 가담한 홍대용은

조선후기 성리학으로부터 북학사상이 형성돼 간 궤적을 잘 보여 준다.

 

한편 박지원은 철학자라기보다는 당대의 문장가였지만

자유분방한 그의 예술가적 시선으로 고정된 문체와 철학의 틀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계속하면서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다양한 문장 속에 담아 냈다.

 

우선 두 사람은 땅은 둥글고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면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조선을 비롯한 지구상 어디든지 지구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수백 년 간 내려 온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론(小中華論)을 벗어날 수 있는

사고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이들은 지구가 돌 듯이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해야만 소멸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런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고 수용하려 했다.

 

박지원은 인식틀이나 분석틀이 기존 세계를 위한 편견이라고 생각하며,

고정된 편견을 버리고 변화하는 세계 전체의 흐름을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강조했다.

 

홍대용 역시 인간이 필요에 의해 설정한 범주로 우주를 규정하는 것이

진정한 사실의 인식에 장애가 된다며 인간 중심의 관점이 아닌

자연 중심의 관점(以天視物 · 이천시물)을 가질 것을 주장했다.

또한 북학파가 오랑캐의 나라인 청나라의 문물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이면에는

이 두 사람이 인성물성논쟁(人性物性論爭)에서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같다고 주장했던

노론(老論) 낙학파(洛學派)를 계승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 2002-06-23 동아, [한국철학의 고향을 찾아서] 김형찬기자 · 철학박사 

 

Tips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 ‘을병연행록’

담헌 홍대용이 1765~66년에 약 6개월 동안 중국을 여행하고 기록한 일기.

최장편 한글 연행록이다.

원래 ‘을병연행록’은 한글본과 한문본 두 가지 형식으로 썼는데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한문본은 주제별로 편집 축약한 반면

한글본은 풍속과 인물, 역사 등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한 일기체다.

 

한국정신문화원 장서각에 소장된 한글 연행록을 쉬운 현대어로 옮긴 것이

돌베개가 펴낸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이다.

홍대용은 1765년 11월2일 고향을 출발 - 1766년 4월27일 한양에 이를 때까지 170여 일,

왕복 6200여 리의 여행길을 매우 꼼꼼하게 기록했다.

 

 

 

‘오랑캐 문명’ 체험한 사대부 일기

  

 

◇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홍대용 지음/ 김태준·박성순 옮김/ 돌베개 펴냄/ 504쪽

 

지금부터 236년 전인 1765년,

조선 북학파의 선구자인 담헌 홍대용이

연행(燕行: 청나라 시절 북경은 연경)이라 불리는 북경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 청나라는 건륭 황제 치하에서

야만스러운 여진족 이미지를 벗고 ‘건륭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영조 40년 치하에서 조선 고유의 문화를 창달하며 ‘진경시대’를 꽃피웠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는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배타적인 관계에 있었다.

 

홍대용이 북경으로 향하면서

“비록 더러운 오랑캐라 하더라도 중국에 웅거하여 1백여 년이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번 볼 만하지 않겠는가?

만일 ‘오랑캐의 땅은 군자가 밟을 바 아니요, 호복을 한 인물과는 함께 말을 못하리라’ 한다면

이것은 편협한 소견이며, 인자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고 한 것에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청나라를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 실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양국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 무렵 조선은 해마다 두 차례 이상 북경에 연행사절을 파견했는데

매번 사절 규모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

 

연행은 조선이 외국과 지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조선시대 선비에게는 단기 해외연수나 다름없었다.

 

홍대용 역시 중국 여행을 동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30년 평생 소원이던 중국여행에 대비해 역관에게 한어를 배우고

그 나라 학문의 진보를 충실히 점검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홍대용은 6개월의 중국 여행에서 중국과 서양의 문물에 접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명의 친구(엄성, 육비, 반정균)를 얻었다.

그리고 한글로 2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행문 ‘을병연행록’을 남겼다.

 

이 여행기의 장점은 딱딱한 학술보고가 아닌,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심양의 한 부잣집에 들렀을 때 일화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학자적 호기심과 사대부의 체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까지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잠시 그 장면을 재현해 보자.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 청심환이 인기여서 부잣집 아낙도 홍대용에게 청심환을 청했다.

“청심환은 진짜를 하나 내주겠지만, 나 또한 청할 일이 있어도 불안해 못하겠구나.”

“무슨 일인지요? 말씀하세요.”

“그대 머리에 꽂은 수식과 상투의 제도를 보고 싶은데,

남녀가 다른 까닭에 감히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지 못하니 안타깝구나.”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아낙은 자식을 남편에게 맡기고 머리에서 여러 가지 비녀를 다 빼어 보이고,

두 손으로 앞을 짚고 머리를 앞으로 숙여 좌우로 돌리며 보여주었다.

홍대용이 아낙의 머리 모양을 어찌나 꼼꼼히 살폈던지

‘을병연행록’에는 마치 사진을 보는 듯 묘사해 놓았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먼저 중국의 저잣거리와 여염집 등을 돌아보며 중국의 전통예법과

의식주, 건축양식 등 문화와 풍속을 관찰하고 기록한 부분과

북경의 천주당에서 서양문물에 접하는 부분이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서양건축과 화법을 관찰하고

본당에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의 동작 원리를 살펴보기도 했다.

 

여행기의 세 번째 부분은 청나라 선비들과의 교우에 할애했다.

그는 두 달이 못 되는 기간 이들과 일곱 번 만났을 뿐이지만 평생 동지를 얻었다.

이들의 만남은 자손 삼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을병연행록’은 18세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당대 지식인의 문명 체험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혼천의’를 만든 뛰어난 과학자이며 ‘의산문답’을 남긴 사상가이고,

‘주해수용’을 저술한 수학자,

당대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 등 백과전서적 실학자 홍대용의 생전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다.

홍대용은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일반적으로 농학자(農學者)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농학자라는 시각을 중심으로 그의 학문을 파악할 때, 그의 학문 영역은 극히 제한된다.

농학이 서유구의 학문에서 핵심에 속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학문 편력과 저서를 통해 볼 때,

서유구의 학문은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학자로서 바라보는 것이 실상에 부합한다.

그는 18세기 후기의 이용후생학파의 사상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학자로 보는 것이 옳다.


 

이우성 교수는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로 불리는 일군의 학자들이

주로 18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파악하면서도 서유구에 대해서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논의 이후 서유구는 학파의 소속이 다소 어정쩡하게 취급되었다.

그는 18세기의 이용후생파 학자가 대부분 세상을 떠난 19세기 전기에는 정약용에 의해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성과가 집대성되었다고 계보를 정리함으로써

이용후생학파의 계승자로 정약용을 내세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을 이용후생학파의 사상을 정통으로 계승한 학자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정통으로 계승한 학자는 사실상 서유구로 보아야 한다.


 

서유구의 이용후생학은 종적으로는 박제가, 박지원의 학술,

횡적으로는 이규경, 이강회 등의 학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특히, 박제가의 『북학의』에서 전개된 북학론의 핵심적 주장을 긍정하면서,

서유구는 인간의 일상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향유할 수 있는 학문으로 확대발전시켰다.

18세기의 이용후생학파가 제기한 학문적 주장은

실제로는 19세기의 서유구에 의해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고 집대성되었다.

 

 

최근 필자는 서유구의 학술을 정약용과 대비하여 논하면서

그의 사상을 이용후생학의 정점에 놓고 서술한 적이 있다.

서유구가 18세기 이용후생파의 학설을 계승하여 구체적이고 방대하게

이용후생학의 학문적 장점을 광범위하게 구현한 학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용후생학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

서유구의 학문을 이해하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인간의 의식주 생활을 윤택하게 영위하는 후생(厚生)에 목표를 두고

다양한 이용(利用)의 도구와 방안을 모색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추구가

서유구 학문의 주축이라는 말이다.


 

서유구는 인간 생활에 가장 기초적인 의식주의 해결을 밑바탕에 깔고

문화생활과 여가생활의 개념까지 접목하였다.

여기에 다시 상층귀족의 수준 높은 생활과 문화에서부터

하층 백성의 저급한 생활과 문화까지 모두 고려한 생활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럼으로써 18세기의 학자들이 내세운 주장에 비해

한층 폭이 넓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내놓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용후생학파의 학설이 18세기 후반에 제한적으로 제기되었다거나

18세기 후반에 성행하고 그 이후에는 쇠퇴한 사상적 조류로 이해한 기존의 일부 견해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박제가의 주장이 쇠퇴하거나 현실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는

19세기 전반과 중반에 발전적으로 계승된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서유구가 사상체계의 전반적 경향이나

구체적 부분에서 『북학의』의 학설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점은 일일이 지적하기 번거롭다.

『행포지(杏蒲志)』 권2에서 분뇨를 이용하여 농사하는 문제를 두고

박제가와 서유구의 설이 전개되는 양상이나,

길거리에 재를 버리는 자를 처벌하는 문제를 다루는 차이점을 놓고 보아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요컨대,

서유구는 일반 백성의 피부에 닿는 생활현실, 日用의 삶을 개선하고 개혁하는 것을 지향하여,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구축한 이용후생학자이다.

그는 18세기 후기의 이용후생학을 계승하여 19세기 실학의 위대한 성과로 자리매김한

뛰어난 학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 경기문화재단, 차와 함께하는 경기도이야기 제 1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