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초상화] 농암 이현보

Gijuzzang Dream 2008. 1. 30. 22:18

 

 

 

 농암 이현보(경상도관찰사 시절) 초상화

옥준상인(玉峻上人), 중종 32년(1537), 126.0×105.0cm, 보물 제872호  

이현보의 경상도 관찰사 시절(71세) 초상화로서,

특유의 크고 거무스름한 얼굴은 거칠 것 없는 당당함과 호방함이 느껴진다.

대구 동화사의 화승(畵僧) 옥준상인(玉峻上人)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이 그림은,

벼루갑과 서책이 놓인 경상(經床), 손에 쥔 불자(拂子), 허리띠 장식과 높은 모자 등

16세기 고위 지방관의 복식과 소도구를 보여주고 있어 자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인물 전체 분위기와 달리 유난히 가늘고 여성스런 손가락은 불화(佛畵) 속 보살의 그것과도 닮아 있다.

 

 

 

 

 

     

 

'어부가(漁父歌)’로  잘 알려진 때때옷의 선비,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는

문인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훌륭한 선비였다.

그는 당차고 소신있는 신하이면서도 사림(士林)과 훈구(勳舊) 모두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백성들에겐 자상한 목민관이요, 부모에겐 더없이 살가운 효자였으며,

벼슬과 출세에 매달리지 않은 자유인이요, 풍류객이었다.

 

농암종택 유물 중에는16세기 전반에 그려진 '이현보 초상화(보물 제872호)'를 비롯하여,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와 '홍패'를 포함한 다수의 전적류(보물 제1202호),

일반에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이현보 만년의 편지와

중종(中宗)이 하사한 '금서대(金犀帶)'  등 쉽게 실견하기 어려운 유물들이 많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표암 강세황의 '도산도(陶山圖, 보물 제522호)'에는

농암 이현보의 농암종택과 그 주변의 풍경, 퇴계 이황의 도산서원까지 잘 나타나 있다.

 

원칙없이 갈등하고 물질이나 권세로 사람의 가치를 저울질하기 쉬운 오늘날,

농암 이현보는 눈치나 대립보다 소신과 조화를,

체면과 허례허식보다 진심에서 우러나는 도리를,

벼슬이나 출세보다 담박하고 자유로운 삶의 가치를 일러주는 귀한 선비이자 스승이다.

-박물관신문에서, 서성호(국립중앙박물관 역사부)

 

 

고향 분강촌(汾江村)이 보이는 도산(陶山)

강세황(姜世晃), 영조 27년(1751), 26.8×138.0cm, 보물 제522호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보물 제1202호) 중에서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와병 중에 있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부탁을 받고 도산(陶山) 일대를 그린 그림이다.

가운데 부분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보이고,

그 왼쪽에 이현보가 은퇴 후 생활하던 분강촌(汾江村)이 묘사되어 있다.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이 곳을

'도원(桃源, 무릉도원)'이라 표현하였다.

그림에는 ‘분강촌(汾江村)’, ‘분천서원(汾川書院)’, ‘애일당(愛日堂)’ 등의 지명과

건물 명칭이 표기되어 있다. 본래 분강촌은 도산서원에서 1Km 가량 하류 지점에 위치하였으나,

훗날 안동댐의 건설로 옛 모습을 찾을 길 없게 되었다.

 

 

 

타계 1년 전에 쓴 편지

이현보(李賢輔), 조선(朝鮮) 명종 9년(1554), 20.5×30.0cm, 농암종택 소장

 

이현보가 타계하기 1년 전인 명종 9년(1554)에 사돈 김유(金綏, 1491-1555)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대방의 자식 혼사에 참석하고 돌아온 다음날, 혼사를 다시 한 번 축하하고,

전날 잔치 자리에서 감기를 염려하여 일찍 빠져나온 것에 대한 해명도 하고 있다.

아직 미혼의 자손이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감정을 상대방에게 웃으며 밝히는 모습이

예의 시원시원한 농암의 성품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