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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사(修信使), 영선사(營繕司), 보빙사(報聘使)

Gijuzzang Dream 2011. 12. 23. 17:33

 

 

 

 

 

 

 

 

 보빙사(報聘使)

 

 

 

조선에서 최초로 미국 등 서방 세계에 파견된 외교 사절단.

 

 

 

뒤줄 (무관 현흥택,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 수행원 유길준, 무관 최경석, 수행원 고영철, 변수)

앞줄 (퍼시벌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중국인 통역 우리탕)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의 체결로

1883년 주한(駐韓) 공사 푸트(Foote, L. H.)가 조선에 부임하였다.

이에 고종은 임오군란 이후 비대해진 청나라의 세력을 견제한다는 뜻에서

1883년 5월 정사(正使)에 민영익(閔泳翊), 부사(副使)에 홍영식(洪英植), 서기관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은 변수(邊樹, 邊燧) · 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사들을 대동시킨 친선 사절단을

서방 세계에 파견하였다.

사절단은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과 통역관 미야오카 츠네지로(宮岡恒次郎)의

인도 하에,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고 미대륙을 횡단한 다음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서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Arthur, C. A.)와 2차례 회동하고 한글로 작성된 국서를 전하고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보여준 한국식 전통 절의 예법은 다소 충격을 주기도 했다.

(뉴욕타임즈, 1883년 9월 18일자. "THE EMBASSY FROM COREA" )  

 

 

아서 미대통령에게 큰 절하는 예가 끝나고

민영익은 다음과 같은 부임사를 읽었다고 한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 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 (大프레지던트))께 아뢰옵니다. 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백리새천덕과 미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나이다.

 

 

(뉴욕의 Fifth Avenue 호텔에서 아서 미국대통령을 접견할 때를 스케치한 그림으로, 절을 하는 세 사람은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으로 추정한다.)  

 

 

이어 세계박람회 · 시범농장 · 방직공장 · 의약제조회사 · 해군연병장 · 병원 · 전기회사 · 철도회사 ·

소방서 · 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특히, 워싱턴에서 내무성 교육국국장 이튼(Eaton, J.)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제도에 대해 소개받았다.

뒤에 교육국사(敎育局史)와 연보를 기증받았다.

그밖에 우편제도 · 전기시설 · 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뒤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 ·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등의 실현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뒤에 주한미국공사 푸트를 통하여 육영공원 교사선발을 국장 이튼에게 의뢰,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생

헐버트(Hulbert, H. B.) · 번커(Bunker, D. A.) · 길모어(Gilmore, G. W.)의 3명이 파한되었다.

또한, 볼티모어시에서 가우처(Goucher)여자대학 학장인 가우처를 만나

뉴욕 감리교 선교부에 조선에 대한 선교기금을 희사하게 하여 선교사 파견의 교두보가 되었다.

이어 스미스소니언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약용식물의 표본을 기증하여

최초의 문화교류를 기록하였고, 귀국할 때 타작기 · 벼베기기계 · 저울 등 농기구 18품을 구입하여왔다.

보스턴 등지를 순회하고 1884년 5월 대서양을 건너 유럽 각지를 여행한 다음 귀국하였다.

수행원 중의 한 사람인 유길준은 보스턴에 남아 유학하였다.

- 백과사전 내용 참고

 

 

 

1883 5월에 푸트(Foote, L. H.) 공사가 조선에 부임하였고, 이에 대한 조선의 답례로서

그해 7, 고종은 미국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을 내리는데 그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라 일컬었다.

트랜톤호는 보빙사의 3개월간의 미국 순방을 마친 후, 민영익, 서광범 그리고 변수를 태우고

6개월간 세계일주 항해 끝에 1884 5 31일 귀국할때 까지 항해를 맡았던 미군함이다.

알렌이 조선에 입국하기 약 100여일 전이었다.

1884 9 24, 알렌이 버나도우와 타운센드를 만난 곳은

미국 해군 기함 트랜톤 (Trenton)호의 장병들을 접객하기 위해 마련된 숙소였다.

 

보빙사의 일원으로 선발된 자들은 당시의 권력의 핵심에 있던 젊은이들이었다.

조선인 최초로 미국을 유람하고 미국 대통령 아서(Chester Alan Arthur)를 접견한 후,

아서의 배려로 세계일주까지한 선택받았는데, 조선인 최초의 세계일주.

그것은 그러나 재미있는 구경거리만은 아니었고, 단순한 문화적 충격을 넘어서서

같은 배에 탔던 자들의 운명을 갈라 놓는 사건이었다.

같은 세상을 보았건만어떤 이의 눈에는 조국의 나약함과 후진성에 대한 비탄의 심정을,

어떤 이에게는 쥐고 있는 기득권을 앞으로 어떻게 수호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유학을 결심케 하였다.

보빙사의 세계유람은 그들로 하여금 조선을 대신해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그런 사건이었다.

 


 

 

1883년9 2, 조선 주미보빙사절단 일행이 미국에 도착한 후 찍음(포크 촬영)

앞줄 왼쪽부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미국인 퍼시벌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홍영식은 당시 28세, 영의정의 아들이었다

 

서광범 역시 명문집안 출신으로 일찍이 김옥균을 수행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문물을 경험했던 개화파 인물이었다.

 

앞줄 중앙의 민영익 15세 되던 해에 민비의 양동생으로 입양된다.

나이 차이가 9살인 조카 민영익을 민비는 친동생처럼 아꼈다.

왕비의 후광을 입고 18세에 과거급제를 하고, 이듬해에 이조참의(3)에 자리에 앉는다.

한편 보빙사의 전권대신으로 추대될 때 23세였다.


뒷줄 유길준 민영익의 특별지시로 2개월 후 다른 단원들과 함께 귀국하지 않고

마사츄세츠 주 마니필드 소재 더머학교에 입학함으로서,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

미국에 남아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그 후 그는 돌아와서 <서유견문>을 집필한다.

 

보빙사 일원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라는 목사이자, 동양학의 대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일본 도쿄대 교수로 있으면서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학자였다.

그는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해 보지도 않고 조선의 정세를 꿰뚫어보고

“Corea the hermit nation”1882년에 출판했다

그의 책은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읽어 보아야 할 조선 입문서 역할을

하였을 뿐만아니라, 구한말에 조선에 대해 기술한 책 가운데 가장 빼어난 저술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당시 조선인사들을 만났던 기록을 남겼다.

 

왕비의 사촌을 비롯하여 열 한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이

미국 군함을 타고 워싱턴을 향해 출발하여, 9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미국의 호의에 답례하고 조약 비준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석달을 보냈다.

1883 11 25, 나는 뉴욕 빅토리아 호텔에서 이들과 하루 저녁을 보낼 수 있는

즐거운 기회를 얻었다. 이들과의 대화는 일본어로 하였다.

(서광범과 변수의 일본어 실력이 상당했다고 전했다.) “

 


사절단은 또 발티모어에서 감리교 목사 가우처(John Franklin Goucher)를 만나는데

그는 저명한 교육자로서 뒷날 발티모어에 있는 가우처 여자대학(Goucher Woman’s College)을 설립한다

조선의 상황과 가능을 감지한 가우쳐박사는 뉴욕에 있는 감리교 해외선교본부에  2천 불을 보내면서

찬란한 아침의 나라의 선교기금으로 보냈고, 후에 3천 불을 더 추가하면서 조선 선교를 강하게 촉구한.

 

또한 가우처 목사는 "크리스찬 에드버컷" (The Christian Advocate)의 편집자인

버클리 박사 (Dr. James M. Buckley)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버클리 박사는 그의 신문에 조선에 관해 적어도 15편의 글을 발표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사절단 파견

 

일본에 파견 (2차례의 수신사 파견, 1차례의 조사시찰단 파견)

청에 파견 (영선사)

미국에 파견 (보빙사)

 

수신사, 영선사 - 공식사절단의 성격

조사시찰단, 보빙사 - 비밀사절단의 성격

 

 

● 일본

1876년 1차 / 수신사 김기수

1880년 2차 / 수신사 김홍집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1882년 3차 / 수신사 박영효

 

수신사 = 일본에 파견된 공식외교사절

조선시찰단 = 개화정부에서 일본에 파견한 말 그대로 사찰단 파견, 신라유람단이라고도 하며

                     원래 목적이 일본의 신문명을 보고 배워오는 것.

 

 

1차수신사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초대외교의 형식으로 조선에 요청된 사신

예정에 없었던 융숭한 대접과 더불어 근대화된 일본의 시설 견학은

이제 막 개항한 조선에게 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해주었다.

 

2차 수신사

원래의 파견 목적은 강화도조약의 부속조약인 통상조약의 각종 문제점에 대해

늦게나마 파악한 조선이 대안을 마련하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보냈으나,

일본은 주요 현안에 대해 회피했고 결국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각종 근대화된 시설을 견학 및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은

수신사 일행에게 강력한 개화의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한편 김홍집 일행을 통해 들어온 황쭌셴(황준헌)의 <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은

러시아 및 각종 강대국을 우리에게 인식시켜줌으로써 조미통상의 배경이 되었고

조선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예로 초기개혁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들 수 있다.

 

3차 수신사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직후, 일본에 사과하기 위해 박영효 일행이 파견되었다. 

수신사(修信使)는 1876년(고종 13) 때 이후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전까지의 <조선통신사>에서

1876년 조선과 일본 관계가 바뀌면서 <수신사>로 바꾸어 불렀다.

‘통신사’가 문물을 주는 입장이었다면, ‘수신사’는 문물을 받는 입장을 고려한 이름이다.

1876년-1882년까지 3차에 걸쳐서 파견되었다.

 

   출발일 도착일  수신사 정사  기록 
 1차 수신사  1876년 4월 4일  1876년 윤5월 7일  김기수

 일동기유

(日東記游)

 2차 수신사  1880년 5월 28일  1880년 8월 28일  김홍집

 수신사일기

(修信使日記)

 3차 수신사  1880년 5월 28일  1880년 11월 28일  박영효, 김만식

사화기략

(使和記略)

 

 

 

조사시찰단의 원래 명칭은 '신사유람담'인데

그 명칭이 유람하는 뉘앙스가 풍겨 명칭을 '조사시찰단'으로 변형시킨 것이라고 한다.

 

조사시찰단과 수신사의 차이는 한마디로 말하면 공식과 비공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조사시찰단 즉 신사유람단을 보낼 당시에는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간의 갈등이 상당히 치열했기 때문에

고종은 신사유람단이라는 명칭 하에 국내에선 암행어사로 위장,

일본 내에서도 일본정부의 도움 없이 사비를 통해서 활동하게끔 했다.

유람단이라는 이름도 공식적인 출장이라는 의미를 약화시키기 위해서 지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신사유람단도 조선 내의 개화여론을 크게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수신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조사시찰단에는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등 12명을 동래부 암행어사로 위장하여 50명의 수행원을 대동하여 극비리에 일본에 보내 74일간 일본의 정부 기관, 각종 산업 시설을 시찰하고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도록 하였다. 조사시찰단 일행은 귀국 후 각기 담당 분야에 관한 시찰 보고서와 여행기인 견문기록을 제출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송헌빈의 <동경일기>, 강진형의 <일동록>, 일본의 근대 농법을 소개한 안종수의 <농정신편(農政新編)> 등이 있다. 조사시찰단은 통리기무아문 각 사(司)의 개편에 따라 조사 12명이 각기 그 해당 부서의 요직에 배치된 뒤 개화정책을 주도하게 되었다.

 

 

 

 

●청

영선사(營繕司)는 청에서 근대기술을 습득하여 우리나라에 적용시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영선사들이 청에서 돌아온 뒤 세운 대표적인 건물이 무기창고인 기기창이다.

영선사는 재정부족으로 1년도 채 안되어서 귀국하게 된다.

개항 이후 김윤식, 어윤중 등의 온건 개화파들은 무비자강(武備自强)의 일환으로 중국을 통하여 서구 과학 기술과 무기 도입을 위해 유학생 파견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영선사 김윤식, 종사관 윤태준, 유학생 20명, 기술자 18명, 관원, 수행원 등 모두 83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사절단이 에 파견되었다. 유학생들은 이듬해 1월부터 화약·탄약 제조법·기계 조작법 등 근대적 군사 지식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 외국어 등도 학습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재정 악화로 대부분 중도에 귀국하였으며, 더욱이 임오군란(1882. 6)이 발발하여 민씨 정권이 붕괴된 후, 무비자강의 목표를 완수하지 못한 채, 약 1년 만에 귀국하였다.

 

 

●미국

1883년에 1882년에 체결했던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해 미국에 보빙사를 보내게 되는데

이 보빙사절단 중에 유길준은 2개월 후 다른 단원들과 함께 귀국하지 않고

마사츄세츠 주 마니필드 소재 더머학교에 입학함으로서, 한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보빙사일원으로 전권대사에 민영익, 부대신에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 유길준, 고영철 등 대부분 개화에 뜻을 둔 젊은이들을 수행원으로 구성한 8명의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1883년 7월 하순 인천을 출발해 나가사키·요코하마 · 샌프란시스코 · 시카고 ·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도착하였다. 9월 18일 미국 대통령 C.A. 아서를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그 후 보스턴으로 가서 세계 박람회와 공업 제조 회관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 기관을, 뉴욕과 워싱턴에서는 정부 각 기관을 시찰하면서 미국 제도에 관한 각종 지식을 습득하고 귀국하였다.

 

 

 


 

 

 

 

 태극기

 

 

 

박영효는 김옥균, 김만식과 함께 임오군란 후 일본 피해에 대한 사과의 뜻을 표하기 위해 일본에 다녀와서 <사화기략(使和記略)>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김홍집의 명에 따라 역관 이응준이 처음 만들어 사용한 태극기를 수정하여 사용하였으며, 이들은 일본에서 차관 교섭을 벌이고 구미 외교 사절과 접촉하였다(3차 수신사). 정부는 박영효가 고안한 태극기를 국기로 제정하고 이를 전국에 공포하였다(1883. 1.27).

 

태극기의 제작과 게양(1882. 9. 25)

새로 만든 국기(國旗)를 묵고 있는 누각에 달았다.

기는 흰 바탕으로 네모졌는데 세로는 가로의 5분의 2에 미치지 못하였다.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색칠을 하고

네 모서리는 건(乾) · 곤(坤) · 감(坎) · 이(離)의 4괘(掛)를 그렸다.

이것은 이전에 上께 명령을 받은 적이 있다.

- <사화기략>

 

 

 

태극기 최초 창안 (이응준)

 

태극기를 창안한 사람은 1882년 일본에 3차수신사로 파견되었던 박영효가 아니라,

이보다 앞선 그해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역관인 이응준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독립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가 개최한 '국기 원형 자료 분석 보고회'에서 나온 주장이다.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태극기의 창안자는 이응준이었고,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 첫 태극기가 게양되었던 것으로 동의하였다.

결국 박영효는 이응준 태극기를 기본 삼아 4괘의 좌우를 바꾼 뒤 국기로 공식 제정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응준이 제작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사용된 태극기는

청의 속국임을 상징하는 청룡기 대신 조선이 반청 자주독립국임을 상징하는 것이었는데,

청은 이 태극기가 일본 국기와 서로 혼동된다는 이유로

청의 국기를 본떠 색깔만 다르게 칠하거나 태극 주변에 팔괘를 그린 국기로 바꾸라고 강요하였다.

 

 

“1882년 조미조약 당시 조선은 국기가 없었다.

미국 전권대사 슈펠트 제독은 조선이 청나라 국기인 ‘황룡기’와 비슷한 국기를 게양한다면

조선을 주권독립국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조선의 접견대신인 신헌과 김홍집에게

국기를 제정해 조인식에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를 제정할 것을 명했고,

이응준은 5월 14-22일 사이에 미국 함정인 스와타라 호 안에서 국기를 만들었다.

이 ‘이응준 태극기’가 5월 22일의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함께 나란히 걸렸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처음 내걸린 ‘이응준 태극기’는

그동안 정확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추정에 그쳤으나

1882년 7월 미국 해군부 항해국에서 제작한 문서 ‘해양 국가들의 깃발’에 실려 있는 것이

최근 발견됨으로써 말로만 전해오던 이응준 태극기의 실체가 드러났다.

 

박영효는 3개월 후 청나라가 ‘조선은 청의 속국’이라며

조선 측에 청나라의 ‘황룡기’와 비슷한 ‘청운홍룡기’를 게양할 것을 요구하자

메이지마루 호의 선장인 영국인 제임스에게 자문을 구해

‘이응준 태극기’를 토대로 사괘의 좌우를 바꿨을 뿐이다.

 

 

태극기가 조선국기로 공식 반포된 때는 이듬해인 고종 20년 음력 1월 27일이고,

대한민국 국기로 제정된 것은 1949년 10월 15일(대한민국 문교부 고시 제2호)이다.

 

이응준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당시 역관으로 청나라 측 역관을 통해 미국과의 통역을 담당했다.

김홍집의 명에 의해 국기를 만들었다는 기록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1832년 태어난 이응준은 1850년(철종 1) 증광시 역과에 차석으로 합격한 뒤 역관이 되었다.

1889년 사신단의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던 이응준은 귀국 즉시 체포돼 의금부에 수감됐다.

청나라 북양 군벌의 실력자인 원세개가

‘이응준이 왕을 속이고 2만 금을 가로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고종실록’ 고종 26년(1889) 3월 30일)”

 

이후 기록에 이응준은 등장하지 않으며 ‘태극기를 만든 사람’으로 역사에 남은 사람은

중인 신분의 역관 이응준이 아니라 철종 임금의 부마인 금릉위 박영효였다.

- 세계일보, 2010.02.05

- 소설가 박충훈의 논픽션, <태극기의 탄생―조선 국기 제정에 얽힌 진실>(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