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연재자료)

[한명기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외교사] 4-5. 조선건국 직후의 조-명 갈등

Gijuzzang Dream 2011. 12. 15. 19:09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④ 조선 건국 직후의 조-명 갈등 (1)

 

 

 

 

‘조선’ 국호 받는 등 명에 조아렸지만 ‘요동정벌’ 야심 계속

‘큰나라 못거슬러’ 위화도 회군
“조선 · 화녕 중 국호 낙점해달라”
이성계, 주원장에 바짝 엎드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1337∼1398)의 영정.

원명교체라는 국제정세의 격동기를 살았던 정도전은 고구려의 고토 요동을 수복해야 한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명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자신을 잡아 보내라고 하는 등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자 그는 요동 정벌을 실천에 옮기려고 시도했다. (경기도 평택 '정도전 기념관' 제공)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명의 공갈에 격분한 우왕과 최영은 요동을 공격하려고 시도했다.

우왕은 평양으로 나아가 요동 정벌을 위한 본영을 설치하고 원정군의 지휘부를 편성했다.

최영을 팔도도통사, 조민수를 좌도도통사, 이성계를 우도도통사로 삼아

대략 5만여 명의 병력과 2만여 필의 전마를 동원했다.

하지만 이성계 일파는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입하기 직전, 휘하의 군사들을 되돌린다.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는 명분을 비롯한 이른바 4가지 불가론을 내세워 회군한 뒤

쿠데타를 감행한다. 위화도회군이 그것이었다. 이윽고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은 잘 알려진 그대로다.

 

 

 

조선, 명에 바짝 엎드리다

 

 

 

1392년(태조 1) 7월, 즉위한 이튿날 이성계는 조반 등을 명에 보내 자신의 등극 사실을 알렸다.

“공민왕이 후사 없이 죽은 뒤 신돈의 자식인 우왕과 창왕이 연이어 즉위했는데

그들이 어리석고 무능했을 뿐 아니라 참람하게도 군대를 동원하여 요동을 공격하려 했다”며

‘이성계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회군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새로 건국한 왕조는 명에 순응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확실히 전하려고 했다.

 

이성계는 또한 국서에서 자신의 칭호를 ‘권지고려국사’라고 했다.

‘임시로 고려의 국사를 맡은 자’라는 뜻이다. 스스로를 낮춰 명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조선의 공손한 태도가 효과를 발휘했던 것일까. 주원장의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보고 내용을 믿을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고려는 산과 바다를 격하여 동쪽에 치우쳐 있는 오랑캐이니 우리 중국이 간여할 바 아니다”라고 하면서

‘향후 백성들을 잘 다독이면서 틈을 만들지 말라’고 유시했다.

왕씨에서 이씨로 바뀐 역성혁명에 대해 별달리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조선은 같은 해 윤 12월에도 사절을 명에 보내 새 왕조의 국호를 정해달라고 요청한다.

주원장은 “동이의 호칭으로는 조선이란 이름이 가장 좋다”며 조선을 국호로 낙점해 주었다.

애초 조선이 명에 선택해달라고 요청한 국호의 후보 가운데는 조선 이외에 화녕(和寧)이란 이름도 있었다. 만일 당시 주원장이 화녕을 선택했다면 고려의 뒤를 이은 왕조의 이름은 내내 화녕이라 불렸을 것이다.

 

1393년 2월, 조선은 명이 요구한 말 9800여 필을 요동까지 운반해서 납입했다.

명은 말 값을 비단과 면포로 결제했다.

조선은 곧이어 사신을 다시 남경으로 보내 공물을 바치고 조공했다.

이성계가 즉위했던 직후 조선은 명의 눈치를 살피며 참으로 조신한 태도를 보였다.

 

 

사그라들지 않는 요동에 대한 야심

 

요동을 공격하기 직전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한 것, 왕조 개창 직후 국호를 정해 달라고 하는 등

명에 대해 지극히 공순한 자세를 취했던 것 등을 고려하면 이성계 일파를 사대주의자로 인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이성계와 그의 가장 가까운 참모 정도전은 사대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 개창 이후 그들이 보여준 일련의 지향을 보면 뚜렷이 드러난다.

명에 대해 공순하게 조공과 사대를 다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히 명과의 갈등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왕조 교체의 사실을 알리러 갔던 조반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고 귀국하자

1392년 10월, 조선은 명에 다시 사은사를 파견했다. 사은사는 문하시랑찬성사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당시 정도전이 귀국한 이후부터 주원장은 정도전을 대단히 위험한 인물로 규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도전이 귀국 길에 산해위를 지나면서 했다는 발언이 주원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산해위에서 “(일이) 잘 풀리면 좋지만 잘 풀리지 않으면 와서 한바탕 공격하겠다”고 운운했다는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주역이었던 정도전의 이 발언은

사실상 명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정도전은 언제부터 요동에 대한 야심을 품었던 것일까?

1398년 이른바 왕자의 난에 휘말려 목숨을 잃고 이후 ‘역적’으로 몰렸기 때문에

정도전의 야심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요동을 ‘고구려의 고토’이자 언젠가는 회복해야 할 강토로서 여기고 있었다.

정도전은 일찍이 저술한 <경제문감별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을 아주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왕건이 평양에 자주 거둥하여 친히 북변을 순시하면서 동명왕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제시함으로써 500년에 이르는 고려의 국맥을 배양했다’고 찬양했다.

태조 왕건의 북진정책을 찬양했던 정도전의 야심은 그가 이성계에게 했다는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에게 과거 오랑캐로서 중원에 들어가 왕자가 되었던 역사적 사례를 설파하면서

요동 정벌을 권유한 바 있다.

 

정도전의 문집 <삼봉집>의 목판.

1397년 그의 아들 정진이 2권으로 처음 간행했고, 1791년(정조 15) 정조의 명에 따라 모두 14권 7책, 총 228판의 목판으로 만들어졌다.(문화재청 누리집)

명, 정도전을 잡아 보내라고 협박하다

 

정도전 등의 야심을 인지했던 명은 조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주원장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조선이 요동의 여진족을 초무하는 것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선이 여진족들을 회유, 포섭하여 궁극에는 요동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393년 11월, 명의 요동도사는 이경선 등 조선인 6명을 간첩 혐의로 체포하여 남경으로 압송했다.

이듬해에는 명 사신을 영접하러 갔던 조선 지방관 일행을 붙잡아 가기도 했다.

조선이 요동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경계 의식 속에서 극단적으로 의구심을 발동했던 것이다.

 

조선을 압박하여 길들이려 했던 명의 강압적 태도는 이른바 표전 문제를 통해서도 불거졌다.

표전이란 ‘표문’과 ‘전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말한다.

‘표전 문제’란 명의 주원장이 조선이 보낸 국서 가운데 자신을 업신여기고 모욕한 내용이 있다고 하여

작성자를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면서 불거진 외교적 갈등을 말한다.

 

 

‘측근’ 정도전 공공연한 야심
‘표전 문제’로 명과 외교갈등
‘회군’ 9년만에 요동공격 준비

 

주원장은 1395년(태조 4) 10월, 신년 축하 사절 유구 등이 가져간 표전의 내용을 문제 삼아

유구 등을 남경에 억류했다. 주원장은 표전의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한 뒤

정도전을 보내야만 유구 등을 석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주원장은 이어 같은 해 11월에 남경에 도착했던 계품사 정총 일행이 소지했던 표전의 내용,

1397년 8월에 보낸 천추사의 표전 내용도 문제 삼았다.

 

명은 정도전 등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억류한 사신들의 처자까지 보내라고 강압했다.

급기야 조선이 표전 문제와 관련하여 보낸 정총, 김약항, 노인도 등을 처형하는 초강수를 뽑아 들었다.

표전 문제를 계기로 지속된 명의 강압적인 태도는 정도전 등의 요동 정벌 의지에 불을 붙였다.

1397년(태조 6) 8월 이후 정도전과 남은 등은 연일 이성계를 만나 요동 공격 계획을 밝히고

군사 훈련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9년 전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며

위화도회군을 단행했던 개국 주체들의 시선이 다시 요동으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11. 11.11 한겨레 

 

 

 

 

 

 

 

한명기 교수의 G2 시대에 읽는 조선 외교사

 

 ⑤ 조선 건국 직후의 조-명 갈등 (2)

 

 

 

 

‘왕자의 난’에 무산된 요동정벌이 남긴 유산은…

명 강압에 격분한 정도전
장졸 훈련 등 정벌 구체화
사병철폐해 관군편입 뜻도

 

 

정도전 등이 구상했던 요동정벌 시도는 1397년(태조 6) 6월 무렵부터 본격화되었다.

당시 조선과 명의 관계는 초긴장 상태였다.

같은 해 4월, 명에서 돌아온 설장수는 주원장의 유시와 예부의 자문을 전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정도전은 조선을 망칠 화근이므로 국왕은 빨리 그를 제거하여 나라를 보전하라’며

노골적으로 정도전을 성토했다.

또 표전 문제 때문에 붙잡아 두고 있던 정총, 노인도, 김약항 등을 ‘정도전의 패거리’라며

‘화가 조선에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명의 노골적인 강압에 격분한 정도전 일파는 요동정벌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태조를 설득하려고 부심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힌다.

태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좌정승 조준이 이들의 기도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던 것이다.

 

명나라 기병의 모습.

정도전 등은 고토 회복의 열망을 바탕으로 명의 압박에 맞서 요동정벌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명은 이미 전성기로 접어들어 있었고 조선보다 훨씬 강한 경제적 · 군사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정도전 등의 시도는 모험에 가까웠지만 명의 부당한 압력에 당당히 맞서려고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국강역의 변천>(대만국립고궁박물원 출판) 수록 도판

 

 

조준, 요동정벌론을 성토하다

 

명 강압에 격분한 정도전
장졸 훈련 등 정벌 구체화
사병철폐해 관군편입 뜻도

 

1397년 6월, 정도전은 군사 지휘의 요체를 담은 <진도(陣圖)>를 각 지방에 내려 보내

장졸들을 훈련시키도록 독려했다. 요동정벌 구상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포석이었다.

태조는 정도전과 남은 등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그 필요성이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태조는 당시 와병 중이던 좌정승 조준에게 의견을 묻는다.

누워 있던 조준은 즉시 가마를 타고 입궐하여 정도전 등의 구상을 반박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사대의 예를 잃지 않았고,

또 새로 개국한 나라로서 경솔하게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해관계로 말하더라도 천조(명)가 당당하여 도모할 만한 틈이 없으니,

거사해봤자 성공하지 못하고 뜻밖의 변이 생길까 염려되옵니다.”

사대의 명분을 어기고, 이미 강성해진 명나라를 공격해 봐야 화를 부를 뿐이라는 것이 조준의 판단이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단행할 때 내세웠던 명분을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다.

주목되는 것은 ‘조준의 의견을 들은 뒤 태조가 기뻐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점이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남은은 태조에게 ‘소소한 일을 담당하는 것은 능하지만 더불어 대사를 논할 수 있는 큰 인물이 못 된다’며

조준을 성토했다.

 

요동정벌을 꾀하던 정도전 일파에게 조준의 반대는 뼈아팠다.

정도전과 조준은 태조 이성계가 신임하고 의지하는 양대 기둥이었다.

정도전이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공신이자 책사였다면,

조준은 태조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사회경제 정책을 주도해온 핵심 참모였다.

정도전은 일찍이 조준의 화상에 쓴 진찬문(眞贊文)에서

‘임금을 받들고 백성을 보살핀 조준의 공덕은 천만년 동안 빛날 것’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랬던 두 사람이 요동정벌 문제를 계기로 정치적으로 결별하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의 능.

이방원은 1398년 8월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켜 정도전 등을 제거했다. 그는 이후 명에서 벌어진 내전을 주시하면서 명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부심했다. 문화재청 누리집

 

정도전의 구상과 정벌의 성공 가능성

 

좌정승 조준 반대 부딪히다
이방원에 축출당한 정도전
“대국 맞서 원칙 지켜” 평가

 

조준의 강력한 반대에 밀려 주춤했던 정벌 시도는 1398년 윤 5월 무렵부터 재연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명이 조선 사신 정총 등을 살해한 데다

이후에도 표전 작성자를 압송하라고 요구하는 등 압박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히 조선에서도 정도전 등의 정벌 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정도전 등은 군사력을 정비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진도>를 강습하는 데 소홀한 내외 관리들을 엄중하게 처벌했다.

유비고(有備庫)를 두어 군량미 비축에 나서고

도성과 가까운 양주의 목장에서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태조 또한 관망하던 자세를 벗어던지고 정도전 등의 구상에 힘을 실어주었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시도했던 목적은 복합적이었다.

본래부터 고토 회복의 열망을 품었던 데다 명의 강압이 이어지자 정벌 실천의 의지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정도전은 또한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공신과 종실들이 보유하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

원정에 필요한 군사력 확보라는 명분을 내세워 사병을 철폐하고 그들을 국군으로 편제하려 했다.

그것은 막 건국한 조선의 정치체제를 안정시키는데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요동정벌 구상이 성공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었을까?

요동정벌 시도에 반대했던 조준은 당시 조선의 현실을 정벌의 성공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우선 백성들의 어려운 처지를 강조했다.

건국 직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궁궐과 관아 등을 짓는 토목공사 때문에

백성들이 힘이 이미 고갈되었다고 진단했다.

또 건국 직후부터 흉작과 기근이 이어졌기 때문에 원정에 필요한 군량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장졸들의 훈련 상태가 미흡했던 상황도 지적했다.

조준은 나아가 명이 이미 전성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조선의 군사적 도전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정도전은 과연 그 같은 사정을 몰랐을까?

정도전은 자신이 쓴 진법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4가지 원칙’을 제시한 바 있다.

구체적으로 ‘많은 병력으로 적은 병력을 공격한다’, ‘정돈된 군대로 어지러운 군대를 공격한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를 공격한다’, ‘훈련된 군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군대를 공격한다’ 등이었다.

당시 명과 조선의 전반적인 국력의 격차, 경제 전문가였던 조준이 분석한 현실,

나아가 정도전 스스로 제시한 ‘공격 원칙’ 등을 고려하면 요동정벌 시도는 모험이었던 셈이다.

 

 

꿈의 좌절과 조명관계의 안정 

 

정도전은 1398년 8월, 이방원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개국 과정에서 커다란 공을 세웠음에도 공신이 되지 못하고

왕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났던 이방원의 불만은 컸다.

논공행상과 왕세자 책봉을 주도한 정도전에 대한 원한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요동정벌을 계기로 사병까지 빼앗기고 무장해제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이방원은 거사를 단행했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 그것이다.

가장 신임하던 심복과 왕세자를 잃은 태조는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하야한다.

 

정도전의 죽음, 태조의 하야와 함께 요동 정벌의 꿈도 사라졌다.

동시에 정도전은 ‘역적’이자 ‘간신’, ‘목숨을 구걸한 비겁한 인물’로 매도되었다.

곧이어 조선에게 강압을 일삼았던 주원장도 세상을 떠난다.

양국 관계를 긴장시켰던 두 장본인이 잇따라 사라진 것이다. 조명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정도전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고토 수복을 열망했던 ‘민족주의자’였을까? 아니면 현실을 무시한 ‘모험주의자’였을까?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원명교체를 겪고 조선의 개창을 주도하면서

그가 중국에 대해 외교적으로 확고한 원칙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정도전은 ‘대국’에 대해 공순히 사대할 것을 강조했지만,

‘대국’이 ‘소국’을 함부로 능멸하려 할 때는 당당히 맞서려 했고

또 맞설 수 있는 능력을 키우려 노력했던 ‘원칙주의자’였다.

-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2011. 11.25.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