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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의 비밀

Gijuzzang Dream 2011. 11. 25. 23:44

 

 

 

 

 

 초상화의 비밀

 
 전 시 명 : 초상화의 비밀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기     간 : 2011. 09. 27 ~ 11. 06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자신을 꾸미는데 열중하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보다 좀 더 나은 모습을 기대하고 좀 더 잘 봐주길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며

못났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가리거나 바꾸고 싶어 한다.

이처럼 외형에만 집중하다 보니

외형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내면은 들여다 볼 여유조차 없다.

 

   

 

 

이 전시를 보며 내면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초상화의 비밀>전이 진행되고 있다.

이 전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외면에 따라 당당해지고 부끄러워 하는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말이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1792년, 보물 제 1477호
비단에 색, 120.0x79.8cm, 수원화성박물관 

 

이 그림 속 인물은 정조가 신임했던 채제공의 모습이다.

정조는 어진도사가 끝난 뒤 주관화사인 이명기로부터

도제조를 맡아 수고한 채제공의 초상을 그려 하사케 했다.

당시 초상화가로 명성이 높던 이명기가 그렸음에도 두 눈의 초점이 정확치 않은 점은

궁금증을 유발한다. 바로 이 점이 포인트이다. 채제공의 눈은 사시(斜視)였다고 한다.

현 시대 같았으면 눈을 잘 그려달라고 언쟁을 벌일 터! 

외형보다는 내면을 중요시했던 시대의 일면을 볼 수 있다.

 

 

     
            김규진 촬영, 1909년                                      채용신, <황현초상>,  1911년

              보물 제 1494호                                            보물 제 1494호,  비단에 색, 
                                                                                  120.7x72.8cm, 개인소장

 

황현의 초상화도 그러하다.

초상사진과 초상화가 공존하던 시기에 제작된 이 그림은

황현이 세상을 뜬 직후 사진을 보고 그린 작품이다. 눈빛까지 거짓 없이 그린 그림.

지금은 사람을 보고 그리던 사진을 보고 좀 더 나은 모습으로 그려줘야하는 시대이다. 

그러나 병색까지 묘사했다는 조선시대 초상화.

물론 이 작품은 개화기에 제작되었지만 사시(斜視)인 눈빛까지 거짓이 없다.

다만 거짓이라면 사진에 드러나지 않는 내면을 나타내려 풍채를 조금 더 크게 그렸을 뿐.

이를 거짓이라 한다면 이 세상 거짓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조씨삼형제 초상>, 18세기 말, 보물 제 1478호, 비단에 색, 42.0x66.5cm, 국립민속박물관

 

이 뿐만이 아니다. 외형에 있어서 거짓없이 그리다 보니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그림속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조씨 삼형제의 초상에서 미묘하게 닮은 형제의 모습을 확인 할 수 있으며 

화가로 알려진 강세황 가문의 초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강현 초상>, 18세기 초, 보물 제 589호,

비단에 색, 165.8x96.0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 자화상>, 1782년, 보물 제 590호

비단에 색, 88.7x51.0cm, 국립중앙박물관

 


이명기, <강세황 초상>, 1783년, 보물 제 590호
비단에 색, 145.5x94.0cm, 국립중앙박물관

 


이재관, <강이오 초상>, 19세기 전반, 보물 제 1485호,
비단에 색, 63.9x40.3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남아 있어 강세황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강세황의 아버지인 강현 초상과 강세황의 손자인 강이오의 초상을 살펴보면

짜 맞추기 식이라 해도 닮은 점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이처럼 터럭하나 까지 닮게 그린 초상화이기에

왕의 모습을 그린 어진을 통해 왕의 풍모 또한 살펴볼 수 있다.

 

 

         
박동보, <연잉군초상>, 1794년,                     조석진/채용신, <영조 어진>, 1900년,

보물 제 1491호, 비단에 색,                                 보물 제 932호, 비단에 색,

183.0x87.0cm, 국립고궁박물관                         110.5x61.0cm, 국립고궁박물관


이한철, <철종 어진>, 1861년, 보물 제 1492호,

비단에 색, 202.0x93.0cm, 국립고궁박물관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를 지켰던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비정한 아버지로 비춰지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18세기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의 초상화는 왕세제로 책봉되기 이전인 연잉군 시절과

훗날 이모된 초상화가 전하고 있는데, 연잉군 초상은 한국전쟁 때 1/3이 소실되었다.

 

철종 어진 또한 한국전쟁 때 부분적으로 소실되었는데,

안타까운 마음과 이만큼이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정몽주 초상>, 16세기,  종이에 색, 172.7x104.0cm, 경기도박물관     

 

훌륭한 군주가 있었다면 그 뒤에는 충(忠)을 다했던 충신과 공신이 존재한다.

일백 번 고쳐죽어도 고려 왕조에 일편단심하며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던

정몽주의 초상은 고려시대 공신상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려시대 초상은 현재 남아 있는 예가 거의 없어

조선 초에 그려진 공신상을 통해 살펴 볼 수 있는데 정몽주 초상에서 볼 수 있듯

흉배가 부착되지 않은 단령을 입고 사모의 양각은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또한 조선시대 초상화와는 반대로 오른쪽 얼굴을 보이는 예가 많다는 점도 특징이다.

 


<주도복 초상>, 1776년경, 비단에 색,
113.0x57.0cm, 함안박물관

 

주도복 초상은 충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주도복은 위독한 어머니에게 단지 수혈할 정도로 효성도 지극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충심도 깊었다.

영조가 승하한 후 제단을 차려 3년 동안 절을 하고 통곡하며 예를 다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다른 초상화와는 다른 화면구성을 보이며 복장 또한 상복차림임을 알 수 있다.

 

 


<신숙주 초상>, 15세기 중엽, 보물 제 613호,   
비단에 색, 167.0x109.5cm, 고령 신씨 문충공파 종약회
         

 

어느 시대이건 충신은 존재하기에 여러점의 작품이 남아 있는데,

여러 충신들의 초상화 사이에 신숙주의 초상이 눈에 띈다.

요즘 한창 ‘공주의 남자’라는 사극이 방영되고 있어

이 드라마의 시청자라면 신면의 아버지인 신숙주의 초상화를 관심 있게 볼 것이다.

대부분 사육신은 충신으로 생각하는 반면

신숙주를 공신이나 충신으로 여기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신숙주는 단종을 폐위시킨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공을 세운 공신이며

세종부터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모시고 삼정승의 요직을 두루 역임한 문관이기도 하다.

반란을 일으켜 잘되면 개혁이요 잘못되면 반역이 되지 않는가.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우리는 이 초상화를 보며 조선 초기 공신상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에 집중해야 할 터이다.

 

 

     
            <사명대사 진영>, 1796년경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 일본 에도초기 
보물 제 1505호,  삼베에 색, 122.9x78.8cm              비단에 색, 82.9x41.3cm

동화사성보박물관                                      교토대학박물관

 

 

나라를 위해 힘쓴 건 비단 충신과 공신만이 아니다.

사명대사는 임란 후 일본에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천 5백 명을 데리고 돌아온 공을 세우기도 했다.

400여 년이 흐른 지금 사명대사와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초상화로 마주하게 됐다.

박물관 불이 꺼진 시각 이번에는 독도 문제에 대해 담판 짓지 않을까?..

 

 

               
이명기, <허목 초상>, 1794년, 보물 제 1509호,    <송시열 초상>, 조선후기, 국보 제 239호
  비단에 색, 72.1x57.0cm, 국립중앙박물관          비단에 색, 89.7x67.6cm, 국립중앙박물관

 

엉뚱한 상상이지만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처럼 초상화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인다면

이들의 숙명은 어떻게 될까?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라운드라면

2라운드 맞수는 서인과 남인의 영수로서 대결했던 붕당정치의 두 거목

송시열과 허목이 아니겠는가.

미수(眉叟)라는 호에 걸맞게 하얀 눈썹의 허목 초상과

유난히 큰 풍채로 그려져 당당한 풍모를 표현한 송시열 초상은

보는 이에게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항복 초상>, 17세기, 종이에 색,                 <이덕형 초상>, 1906년, 비단에 색,
 59.5x35.0cm, 서울대학교 박물관                   146.8x90.1cm, 경기도박물관 

 

반면 초상으로나마 만나서 반가운 이들이 있으니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이다.

이항복 초상에서 검고 낮은 사모와 몇 개의 선으로 간략하게 표현된 관복은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반면

이덕형의 초상은 대한제국기에 제작되어 부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면을 보인다.

 

 

 


윤두서, <심득경 초상>, 1710년, 보물 제 1488호
비단에 색, 160.3x87.7cm, 국립중앙박물관

 

오성과 한음에 뒤지지 않는 우정을 보여주는 심득경 초상화는

벗처럼 가까이 지냈던 윤두서가 그린 작품이다.

윤두서는 심득경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를 추모하여 초상을 그렸는데 

심득경의 집안에서는 죽이 이가 되살아 온 것 같다고 평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난 벗을 기억만으로 그린 윤두서. 물론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우리는 친구 얼굴의 어느 정도나 기억하고 있을까..

 

 

 

        

 

 

윤두서가 벗을 그린 심득경 초상화도 명작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 또한 명작 중에 명작이다.

벗의 모습과 인품을 기억하고 초상을 그렸다면

자화상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까지 화폭에 담아낸 작품이다.

책에 실린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 보는 이를 압도하는 힘 때문에

큰 화폭에 그려진 그림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실제로 작품을 대하면 생각했던 것 보다 작은 사이즈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작은 화폭에 그려졌으나 보는 이를 사로잡는 힘만은 결코 작지 않은데,

지금은 볼 수 없으나 자료를 통해 본래 그려져 있던 몸체를 함께 볼 수 있어 매우 흥미롭다.

 

 

        
<신익성 초상>, 17세기, 종이에 색, 60.5x30.9cm, 일암관

 

신익성 초상 또한 윤두서의 자화상을 연상시키는데

미완성 작품이지만 인물이 지닌 내면을 드러내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우리의 초상화가 서양의 초상화와 다른 점은

미완성작품도 완성작 못지않지 않게 전달력을 갖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페터르 파울 루벤스, <한국인 초상>, 1617-1618년경, 
종이에 초크 등, 38.4x23.5cm, 폴게티미술관 

 

이처럼 터럭 하나까지도 닮게 그리고 인물의 내면까지 표현하려 했던 시기.

네덜란드 화가 루벤스는 어떤 생각을 하며 조선인을 그렸을까?

‘플랜다스의 개’의 주인공 네로가 갈망했던 그림을 그린 화가로 기억되는 루벤스는

1600년대에 조선인을 그림으로 남겼다.

인물 뒤에 그려진 배 한척은 먼 곳에서 온 방문객을 암시하는데,

그림 속 인물은 임진왜란 중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 병사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이 인물은 조선의 관리로

일본과 네덜란드 선박에서 선원으로 일하며 네덜란드에 다녀온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인물이 입은 옷은 16세기 조선시대 관리들이 입던 철릭과 유사하여

관리였을 가능성도 야기된다.

그들은 조선인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화폭에 담았고

우리는 네덜란드 화가의 손끝에서 옮겨진 조선인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직시한다.

 

 

이 외에도 보는 이의 눈에 호기심을 어리게 하는 여러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를 보면서 모든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왕을 만나고 공신을 만나고 문인을 만나고

화가를 만나는 것처럼 설레고 기대되는 순간의 연속이다.

몇 백 년 전의 인물을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 

겉모습만 담겨있는 사진과는 또 다른 감흥이 느껴진다.

타임머신이 있다고 해도 초상화 속 인물들을 다 만나기는 힘들 터.

많은 관람객들이 편한 신발로 골라 신고 박물관으로 향하길 바라본다.

 

- 2011-10-04, 한국미술정보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