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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박규수 - 변화하는 세계에 눈뜬 근대인

Gijuzzang Dream 2011. 11. 15. 18:02

 

 

 

 

 

 

 

 

 

 

 

 

 

“오늘날 중국이 어디에 있는가? 저리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 돌리면 조선이 중국이 되니

어떤 나라도 가운데로 오면 중국이 되는데 오늘날 어디에 중국이 있는가?”


관료로서는 최고자리라 할 수 있는 우의정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박규수가

서울 북촌 자신의 서재방에서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등과 함께 만든 ‘지구의’를 보며 한 말이다.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태어나다


 

 

개화사상의 선구자 혹은 가교자라 평가받고 있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영·정조 시대의 실학을 계승하여

19세기 시대적 격랑에 대처하기 위하여 다방면에 걸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다.

1807년 10월 7일(양력) 서울 북부 가회방 재동에서

박종채(朴宗采, 1780-1835)와 전주유씨 사이에서 3남 중 장자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환경(桓卿), 예동(禮東)이고 호는 환재(桓齋)이다(桓은 나중에 瓛으로 고침).


조부인 박지원은 박규수가 태어나기 2년 전인 1805년 68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므로 그가 조부를

직접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연암이 박규수의 학문 전반에 영향을 끼쳤음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실재 박규수가 태어나고 오랜 기간 살았던 재동 자택은 박지원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살았던 곳이다.

재동 일대는 오래전부터 북촌이라 하여 노론계 양반들이 집단으로 살았던 지역으로

연암은 이곳에 중국식 벽돌집을 지어 ‘계산초당(桂山草堂)’이라 불렀고

박규수는 조부가 만든 계산초당에서 태어났다.


박규수가 태어나기 전 부친인 박종채는 연암으로부터 옥판(玉板, 관복의 장식품)을 받는 태몽을 꾸었다.

당시 박종채 형제는 모두 벼슬을 하지 못한 신세였으며, 대를 이을 후사마저 없는 상태였는데,

이 꿈을 꾼 뒤에 박규수가 태어났고 박규수는 연암을 이어 가문을 빛낼 자손으로서

어려서부터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익종과의 만남과 은둔의 삶

 

순조 말년에 국정을 대리했던 익종(효명세자)이 박규수에게 특별한 관심과 기대를 표명한 사실은

『매천야록』에 전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익종은 박규수와 같은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역동적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 익종은 1830년 5월 6일 갑작스레 각혈을 하며 세상을 떠났다.

익종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연일 통곡하며 살 의욕조차 상실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각자 할 일을 도모하여 사람마다 스스로 선왕(효명세자)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의 자를 환경(桓卿)에서 환경(瓛卿)으로 바꾸었다.

익종과 부친의 연이은 죽음으로 상심한 박규수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18년에 걸친 은둔생활로 접어들었다.
은둔기간은 당대 학자들과 학문적 교유를 통하여 학문이 더욱 성숙되어간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박규수는 서유구 · 윤정현 · 홍양후 등 저명한 선배 문인 및 동료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이용후생을 강조한 실학자 서유구는 연암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다.

말년에 서유구가 마현(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서 저술한 「임원경제지」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인용될 정도로 영향을 받은 책이다.

박규수는 은둔 시절 이들 외에도 천문학자로 유명한 남병철 · 남병길 형제와도 친밀한 교류를 하였다.

 


동여도의 제작

 

박규수가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이다. 나이 42세에 증광별시문과에 응시, 급제하여

이듬해 12월 첫 관직으로 사관원정언에 제수되어 벼슬길에 들어섰다.

그 사이 1834년 순조가 승하했고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순조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해 또한 극에 달했다. 

박규수는 지방관으로 용강에 현령으로 부임하였는데,

 

이 무렵 오창선 등의 도움으로 조선전도인 <동여도(東輿圖)>를 제작하였다.

그가 동여도를 제작한 것은 아마도 부국강병의 길이 국방에 있다고 보고

군사적 목적에서 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평소 지리와 함께 천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박규수는 부안현감을 지내면서 ‘노인성’을 관측하였다.

장수의 별이라 알려진 노인성은 남극성으로 남극 부근에 위치해 있어

북반구인 서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별이다. 간혹 제주도 한라산에서 볼 수 있는 별인데

부안 관아에서 관측에 성공한 것이었다. 지방행정관 시절 박규수는 청렴한 행정관으로 인정받았고

1851년 다시 중앙 관직으로 돌아와 그동안 축적한 학문 실력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기 시작하였다.
 

2년여에 걸쳐 승지로서 국왕의 최측근에 있던 박규수는 1858년(철종 9)에 곡산부사로 나가 있었다.

이때 중국에서는 에로우호 사건에 이어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청의 함풍황제가 열하로 피난을 가는 일이 발생했다. 조선정부는 위문사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박규수가 위문사행단의 부사로 임명되어 1861년 1월에 중국 열하로 사행을 떠나 동년 6월에 돌아왔다.

열하는 조부인 박지원이 다녀왔던 곳으로 그에게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곳이다.


박규수 간찰: 1872년(고종 6)에 박규수가 진하사의 정사로 연행을 준비하면서

연재 윤종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의 두 번째 사행이었던 이때,

서양의 충격에 대응하는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목격하고 개국과 개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제너럴셔먼호의 격파한 개화의 선구자

 

고종대에 박규수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고종은 익종의 양자로 왕위를 계승하여 익종과 친분관계를 가졌던 박규수는 특별한 관심을 받게 되었다.

대왕대비 조씨 등 풍양 조씨의 후원 속에서 박규수는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 등을 거쳐

이조 참판이라는 요직에 제수되었다. 1864년 비변사당상 지위에 오른 박규수는

여러 관직을 거친 후에 천주교 탄압이 극에 달했던 1866년 돌연 외직인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박규수가 임지로 떠난 그해 7월 18일 최초의 서양과의 무력 충돌인 제너럴셔만호 사건이 발생했다.

제너럴셔먼호가 천진을 출항한 것은 1866년(고종 3) 6월 18일이었다.

7월 7일 대동강 하류에 도착하여 서서히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셔만호는

홍주목 삼전방 송산리 앞에 정박하였다. 당시 황주목사 정대식은

서양배가 조선해안에 진입하여 교역하는 것은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다고 하여 진입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셔먼호는 말을 듣지 않고 평양부 신장포까지 올라왔다.

평안감사 박규수는 고종의 승인 하에 철산부사 백낙연과 함께 화공으로 셔먼호를 침몰시켰다.

항전 3일 째 되던 7월 24일의 일이었다.

이양선을 격파했다는 승전보를 접한 대원군은 크게 기뻐하며 박규수 등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였다.


박규수가 3년간의 평안감사직을 마치고 다시 중앙으로 복귀한 것은 1869년(고종 5)이다.

1872년에는 정사의 직위로 두 번째 중국 사행길에 올랐다.

두 번째 중국 사행에서 박규수는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에 큰 공을 들였고

양무운동이 전개되던 중국에서 자신의 의식을 확장시켜 북학을 계승 발전한 개혁 사상을 발전시켰다.


무력 충돌도 불사하며 자주적 개국을 주장하던 박규수는

1875년 운양호사건과 강화도조약의 일방적 체결을 보면서 큰 실망을 하였다.

큰 허탈감 속에 박규수는 1877년(고종 14) 2월 9일 고희를 갓 넘긴 나이로 재동 사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생전의 박규수는 보통 키에 몸가짐이 항상 단정하고 온화하며 목소리는 맑고 편안했다고 한다.

1878년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인 연안이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양육하지 못하고

아우 박수주의 아들을 입양했으나 그 또한 1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저술로 「상고도회문의례(尙古圖會文義例)」와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

「벽위신편평어(闢衛新編評語)」와 「제세의명병서(地勢儀銘幷序)」등이 전한다.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성희

- 실학박물관레터, NO.7 실학자의 편지, 2011년 <실학자의 단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