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론 출신의 북학파
북학파의 선구자 혹은 과학사상가, 위대한 비판적 사상가로서 ‘지구가 자전한다’는
즉, 지전설의 주창자로 일컬어지기도 했던 담헌 홍대용(洪大容)은
1731년(영조 7) 충청도 천안군 수신면 장산리 수촌에서
부친 홍역(洪櫟)과 어머니 청풍 김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사회의 중심에서 출발한 인물이다.
그가 속한 남양 홍씨 가문은 누대로 정계에 진출한 노론의 핵심 문벌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는 보장받은 혈통이었다.
그런 배경을 안고 출발하였지만, 홍대용은 집안 전통과 달리 순수한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이미 10세 때부터 ‘고학(古學)’에 뜻을 두어 과거시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노론의 명망가 출신이다보니 스승을 정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홍대용은 어린 나이에 당시 김원행(金元行)이 있는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들어갔다.
석실서원은 안동김씨 세거지에 있었던 서원으로
북벌론의 이념적 표상이었던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었다. 이후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김창협(金昌協)이
이곳에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였고, 스승인 김원행은 당대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유학자였다.
홍대용이 석실서원에서 수학한 기간은 12세부터 35세까지 23년간이다.
이 기간 동안 엄격한 학풍을 내면화하면서 철저한 도학자로서의 기반을 닦았다.
아울러 이 무렵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를 형성했던 인물들과 교유하였고,
부친이 나주목사를 하던 시기에는 나주의 실학자인 나경적(羅景績)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처럼 청년시절에 이룩한 구도자적 삶과 과학적 탐구정신은
연행(燕行)을 통하여 빛을 발하게 되었다.
■ 세계관을 바꿔 높은 중국 여행
1765년(영조 41) 초겨울날 홍대용은
서른다섯의 나이로 중국 땅을 밟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고 있었다.
평소 시 짓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만은 예외였다.
평생의 소원이 하루아침의 꿈같이 이루어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 순간,
말고삐를 움켜쥐며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서른다섯의 나이로 머나먼 중국 땅에 가게 된 홍대용.
좁은 조선 땅 안에서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인생의 전부인 것으로 아는
대부분의 조선 유자층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중국 여행은 세계관을 변화시킨 큰 경험이었다.
북경 유리창에서 만난 항주의 선비 엄성과 반정균, 육비와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면서,
그리고 천주당과 관상대를 방문하여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홍대용은 서서히 새로운 세계관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되어갔다.
중국을 다녀 온 뒤 쓴 『을병연행록』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그리고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와 함께
조선 3대 중국견문록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고, 중국견문의 붐을 일으켰다.
■ 의무려산에서 만난 실옹과 허자
홍대용이 북경에서 60여 일 간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경험은 이후 자신의 사상을 살찌우는 산 경험이 되었다.
특히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소설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실제로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醫巫麗山)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의산문답』은 모든 사람이 진리라고 믿는 것을 풍자한 과학소설이라는 점에서 1623년 갈릴레이가 쓴 천동설과 지동설에 대한 오디세이, 즉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에 비견되는 글이다.
『의산문답』은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세속적인 허례허식과 공리공담만을 일삼는 허자(虛子)의 물음에 실학적인 인물인 실옹(實翁)이 답하는 대화체의 글로,
30년간 성리학을 익힌 허자가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다가 의무려산에서 실옹을 만나
자신이 그동안 배운 학문이 헛된 것이었음을 풍자한 놀라운 작품이다.
그렇다면 홍대용은 왜 의무려산에서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했을까?
북경 방문길에 들렸던 소설 속 배경인 의무려산은
화이(華夷)의 구분을 짓는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그가 의무려산에서 무한우주관을 제시한 것은
최종적으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와 이의 구분을 부정하는데 있었다.
북경 방문을 계기로 홍대용은 기존의 우주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관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 시공을 초월한 우정
시류의 선비들이 이론만 떠받들면서 실천에는 등한시한 세태를 걱정하며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기만을 고대하던 조선의 지성,
홍대용은 아쉽게도 1783년 풍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했다.
홍대용의 갑작스런 부고를 전달 받은 연암 박지원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묘지명을 썼다.
홍대용은 넓은 땅에서 제대로 된 선비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있던 차에 북경 유리창에서 엄성 · 반정균 · 육비 등 청나라 학자들을 만났다.
… (중략) …
덕보는 이들 중 동갑인 엄성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엄성에게 충고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은 때에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엄성이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어서 과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간 뒤 몇 해 만에 그만 죽었다.
부고를 받아든 덕보가 제문을 짓고 제향(祭香)을 중국으로 보냈는데, 마침 이것이 엄성의 집에 도착한 날이 대상(大祥; 죽은 지 2년만에 지내는 제사)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며 ‘명감(冥感)이 닿은 결과다’라고 하였다.
엄성의 아들이 부친의 유고를 덕보에게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도착하였다.
그 유고에는 엄성이 손수 붓으로 그린 덕보의 초상화가 있었다.
(그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홍대용의 유일한 초상화이다).
엄성이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떠났다.
관 속에 이 먹을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절강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 하였다.
(박지원의 「홍덕보묘지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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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박물관 학예사 정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