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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가며(자료)

실학과 정상기의 동국지도/ 경기도 지역의 옛지도

Gijuzzang Dream 2010. 10. 4.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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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지도>는 현대 지도의 축척으로 환산했을 때 대략 1:50만 정도로

당시로서는 대축척 지도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지도에 이전 시기 지도에는 거의 불가능했던 다양한 정보를 담을 수 있었고,

이후 대축척 지도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동국지도>는 우리 나라 국토의 원형을 사실에 가깝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동국지도>에서 확립된 국토의 모습은 약간의 수정은 가해지지만

일제에 의한 근대적 측량지도가 나오기 이전까지 계속 이어지게 된다.

1757년 조정에 알려지게 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이후 관청에서 적극 활용하게 되는데, 이는 정상기의 지도가 행정 · 군사적 용도로는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는 1770년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여지도(輿地圖)〉 제작사업이다.

그는 영조의 명을 받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와 짝할 수 있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이 때 기본도로 사용된 것이 정상기의 동국지도였다.

이를 토대로 도별도(道別圖), 군현지도(郡縣地圖) 등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지도는 이후에도 관에서 계속 모사되면서 널리 이용되었다.

민간에서도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도제작에 이용되었다.

특히 해주 정씨 가문의 정철조(鄭喆祚 1730~1781), 정후조(鄭厚祚 1758~1793) 형제는 정상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편집하여 더 뛰어난 해주본(海州本)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한 이후에 제작되는 많은 전도들은 정상기의 대전도를 바탕으로 축소한 것들인데,

도리도표(道里圖表)에 수록된 전도(全圖),

19세기 전반에 제작된 목판본 〈해좌전도(海左全圖)〉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그의 후손과 다른 지도제작자들에 의해 수정, 보완되면서

조선후기 지도사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34년 제작된 김정호의〈청구도(靑邱圖)〉도 바로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수정, 보완되었던 전도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지도학의 금자탑이라 할 수 있는

1861년 김정호의〈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그의〈청구도〉를 바탕으로

보완 · 발전시킨 것인데 이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상기의 <동국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한말 일본을 통해 근대식 지도제작의 기법이 서서히 도입될 때에도

정상기의 지도는 여전히 정부에 의해 제작되는 각종 전도의 기본도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동국지도가 조선후기 지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적 지도제작기술이 도입되기 이전에 제작된 동국지도와 같은 전통시대의 지도들은

현대의 지도와는 제작기술이나 표현방식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단순히 정확도의 관점에서 전통시대의 지도를 평가한다면

여전히 미숙한 지도에 불과할 것이다.

정상기의〈동국지도〉도 이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 하나의 지도가 탄생하기까지에는

뛰어난 지도 제작자의 독창적인 노력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된 많은 경험과

당시 사회에서 공유되고 있던 지식과 관념들이 뒷받침되어 있다.

그만큼 지도는 회화와 같은 예술작품과는 다른 강한 사회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동국지도>는 비록 정상기 개인의 역작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조선시대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던 지도제작의 문화적 역량이 담겨져 있으며

우리의 국토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을 표현하려 했던 선조들의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1.여지도/ 18세기중엽 38×28cm 서울대학교 규장각
각 순현가의 도로망을 자세히 그렸다. 대로는 굵게 소로는 가늘게 적색선으로 표시하였다.

수원 · 광주 · 강화 · 개성은 유수부이기 때문에 읍치를 성곽 모습으로 그렸다.

각 군현의 진산만 표시하고 산맥 표시는 없다.

수원의 진산으로 광교산이 표시되었고, 화산(禾山)으로 표시되었다.

2.여지도/ 18세기후반 58×74cm 정신문화연구원
산맥과 하천 도로망을 잘 그렸다. 경기도는 중앙이기 때문에 노랑색으로 군현을 표시하였고,

봉수대는 횃불 모양으로 그려 알아보기 쉽게 하였다. 유천과 독성산이 표시되었다.

3.좌해도/ 18세기후반 31×28cm 고려대학교대학원 도서관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구의 이동이 많고 도록의 중요성은 그만큼 강조되었는데

그러한 필요에 의하여 제작된 지도가 이 지도이다.

각 군현간의 도로와 이정을 밝혀 여행에 도움이 되도록 제작되었다. 청계산이 표시되어 있다.

4.해동여지도/ 1804년 58×74cm 국립중앙박물관
도로를 중요시 하여 제작한 지도, 각 군현간의 도로망을 잘 그렸고,

도 경계에서는 다른 도의 군현까지의 거리를 일일이 적어 놓았다.

지도 우측에는 각 군현간의 이정표가 있다. 금천을 시흥, 수원을 화성으로 표시하였다.

5.동국여도/ 1822년 고려대학교 박물관
도로망 중심으로 그린 지도,

전국의 10대 간선도는 굵게, 기타 다른 도로는 가늘게 적색선으로 도로망을 표시했다.

지도 다음 장에는 경기도 각 군현간의 이정(里程)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이정표가 기록되어 있다. 광교산, 영화역이 표시되어 있다.

 

 

 

 

 

 

 

 

 

 

1.수원부

해동여지도 1735년 31×37cm 국립중앙도서관
전군 군현을 모두 수록한 지도책 속에 들어 있는 고지도로 영조 말엽에 그려진 수원부 모습이다.

강줄기는 잘 표시했으나 도로 표시가 없고, 해창(海倉) 등의 창고를 잘 그렸다.

 

 

2.수원부

해동여지도1735년 31×37cm 국립중앙도서관
전군 군현을 모두 수록한 지도책 속에 들어 있는 고지도로 수원부의 읍치를 팔달산으로 옮기기 전의 모습으로 동헌 · 향교 · 서원 · 사창 등을 기와집으로 표시하여 쉽게 찾을 수 있다.

 

 

3.여지대전도

1700년 15.2×19.0cm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전국 군현을 모두 수록한 지도책 속에 들어 있는 고지도이며 도로 표시가 없다.

지도 다음 장애 관할 면의 초경(初境)과 종경(終境)을 적어 놓아 수원부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4.수원지방도
대동여지도 1861년 40.0×30.0cm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동여도를 저본으로 판각한 우리 나라 고지도의 결정판이다.

지도표를 사용하여 지도 제작을 간편하게 하였으며, 도리는 10리마다 점을 찍어 누구나 쉽게 거리를 알 수 있게 하였다. 22첩으로 만들어 분합이 자유롭고 접으면 책의 크기만 하여 휴대하기에 편리하도록 하였고, 지도를 전부 펴면 4m×8m의 거대한 전도가 된다.

이 지도는 앞장의 지도중 수원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1.경기도지도 / 18세기중엽 국립중앙도서관
경기도 지도책 속에 수록된 지도,

충렬서원 앞에 정몽주 묘를, 심곡서원 앞에 조광조 묘가 있다고 표시하였고,

주막도 그려져 있다. 산맥을 푸른색으로 표시한 것이 특이하다.

2.광여도 / 1767~1776년 41×32cm 서울대학교 규장각
광여도라는 지도책 속에 수록된 지도, 강줄기는 자세한데 도로 표시가 없다.

묘도식으로 산맥을 그렸으며 직동 주막을 표시하였다.

3.해동여지도 / 1735년 31×37cm 국립중앙도서관
해동여지도에 수록된 지도,

용인현의 관할 행정구역, 강줄기 등이 자세하며, 도로와 역이 잘 그려져 있다.

향교와 관아, 서원 등이 잘 표기되었고, 십청묘, 음애묘등의 위치를 표시하였다.

 

- 발췌, <수원의 옛지도>, 수원시장 심재덕 발행

-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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