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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 강세황 <벽오청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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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중경에는 사립문 너머에 대숲과 파초를 배경으로 초막이 있고, 마루에 나와 앚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문인이 보인다. 안쪽으로 약간 기운 오동나무와 호응을 이루고 있다. | |||
그 사이로 멀리 먼산의 실루엣이 펼쳐지며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화면 안쪽으로 깊어지는 공간감을 형성한 뒤, 오동나무 오른쪽으로 펼쳐진 산의 능선을 따라 그 너머 여백의 공간으로 시선을 이끌어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물기 많은 담묵 위에 청록색 담채가 가해진 오동나무, 푸른색과 갈색 담채를 몰골법으로 처리하여 시원스런 대비가 인상적인 원산 처리 등과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창작으로서의 새로운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첨재(添齋)'가 강세황(姜世晃; 1713~91)의 초년기에 사용된 호임이 입증됨으로써 1750년대 작품으로 보고 있다. - (박효은) | |||
표암 강세황 <피금정> | |||
이 시는 강세황의 문집《표암유고(豹菴遺稿)》에도 나온다. | |||
즉 정선이 누대와 같은 피금정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이 그림에는 정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자의 모습은 김홍도의《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가운데에 있는<피금정> 장면과 유사하다. 구불구불 올라간 용의 허리 위에 올라앉은 듯한 누대 형태의 피금정이 아니라 화면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귀퉁이 부분에 작게 그려진 강변의 정자와 그 쪽에서 바라본 산이 등장한다. - (유홍준) | |||
표암 강세황 <산수대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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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행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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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성화를 기다리며> | |||
18~19세기,모시에 먹. 17.5×121.0cm
이 시첩은 12폭으로 꾸며진 것인데 지금은 횡액으로 다시 표구되었다. 각 시마다 시구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발문은 다산이 27년 전에 성화를 지은 것으로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진실을 담은 것이라고 하며, 글 마지막은 “이 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산 초부(樵夫)가 쓰다”라는 처연한 글귀로 마무리했다. 이 시첩은 다산의 해서가 얼마나 단아하고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이지적이고 해맑은 멋이 서려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 |||
단원 김홍도 <혜능상매도> | |||
선승 혜능이 유사 들의 매향을 같이 즐긴다는 내용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화제시에 “암향부동어제천(暗香浮動於諸天)”이라 썼지만, 고매에는 꽃망울조차 달려 있지 않다. - (이태호) | |||
단원 김홍도 <포의풍류도> | |||
당시 문인들의 취향이자 김홍도 자신이 지향하던 풍류를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 |||
50대 어느 시기의 김홍도 자화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인물의 주변에 배치된 파초, 붓과 벼루, 칼, 생황, 호리병, 중국골동품, 서책과 화선지 등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선의 생활상을 읽게 해준다. 김홍도의 화면 운영력이 돋보인다. 단숨에 쓱쓱 그리는 듯한 김홍도 50대 절정기의 무르익은 필묵(筆墨)으로 풍류 정신을 확실히 구현해낸 걸작이다. - (이태호) | |||
초정 박제가 <의암관수도> | |||
이 화첩의 맑고 활달한 서화풍을 보면, 남의 그림을 참고로 그려보면서 부담없이 즐겼던 대학자다운 박제가의 여유와 건전한 인간미를 읽을수 있다. - (이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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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만주 벌판을 통과할 때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산이다 . 만주에서는 보기드문 산악인지라 등산객 차림의 사람들도 제법눈에 들어온다. 산 입구의 석문에는 진의천인, 적상청운 등의 글짜가 새겨져있고 산속에는 불교와 도교의 사찰들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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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은 명나라 시절 만주의 중심이자 산해관 바깥의 ‘오랑캐 ’들을 아우르는 거점이었다 . 영락제가 이곳에 요동동사를 설치한 것도 이곳이 만주를 장악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13층, 71m까지 장대하게 쌓아올린 흰 벽돌들로부터 반사되는 빛은 북경을 향해 일망부제의 평원을 지나는 조선 사신들에게 참으로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탑은 이름만 남았을뿐 공업도시 요양의 매연에 찌들어 오히려 ‘흑탑’ 처럼 보일 뿐이다 . 건주 여진의 일개 부족 집단에서 출발하여 만주 전체를 아우르고, 장차명과 맞서겠다는 누르하치 집단의 의지가 담긴 정치적 중심지이다. 1637년 병자호란에서 항복했던 이후 인질로 끌려왔던 조선의 소현세자 일행과 청에 복속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던 삼학사의 넋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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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은 명나라시절 산해관 바깥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 가운데 하나였다. 1626년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기마대를 이끌고 이곳을 공격하다가 명나라 장수 원숭환의 홍이포 세례를 받고, 부상을 입고 결국 절명했다. 지금도 당시 성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성안에 남아 있는 조대수 패방의 주위에는 관광객을 비롯한 인파가 끊이지 않아 ‘역사 도시’ 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
산해관은 북경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감숙성에서 시작된 만리장성 동쪽 끝에서 발해와 만나는 곳이다. ‘천하제일관 ’이라는 오만한 문구가 상징하듯이 이 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중화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 글자 하나가 1.6m나 되는 장대한 이 관문을 지키던 오삼계는 1644년 청나라 군대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청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북경을 접수할 수 있었다.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이 각산관은 해발 444m의 험준한 절벽 위에 설치되었다. 산성의 여기저기에는 척계광이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적대의 형식을 계승한 많은 방어시설물들이 산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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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시절 만리장성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던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죽은 정절녀 맹강녀를 모신 사당이다. 축성 공사중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맹강녀는 호곡하면서 진시황을 질타했다. 진시황은 맹강녀의 미색과 대담성에 반해 그녀를 회유하여 유혹하려 했으나 맹강녀는 끝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고,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봉황산에 사당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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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문화와 학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유럽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려고 시도했던 문화인이었다. 남당 역시 1601년(만력 29)에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사신들도 들렀던 ‘명소’ 이자 이문화 섭취를 위한 전당이었다 . |
열하의 표지석과 보타종승묘의 원경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60여 ㎞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열하의 현재 이름은 '승덕'이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열하에는 옹정, 건륭 연간에 걸쳐 청나라왕실의 이궁들이 건설되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은 여름철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면서 피서뿐 아니라 여전히 청에게 위협적 존재였던 몽골 세력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피서산장 부근의 구릉에는 포탈라궁을 본따 건설한 보타종승묘를 비롯하여 보락사, 수미복수묘 등의 라마사원이 건설되었다. 청은 내몽고의 초원지대인 아우르는 사원들을 건설함으로써 중화세계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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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