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실학과 문학/ 회화/ 서예/ 무예/ 연행

Gijuzzang Dream 2010. 10. 4. 11:06

 

 


오랑캐를 일컫는 말은 많다.

대표적인 것으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을 들 수 있다.

중국은 자신들의 문명[이것을 보통 ‘중화문명(中華文明)’, ‘화하문명(華夏文明)’이라고 한다]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그 외의 것을 야만으로 배제하는 논법을 통해서 중세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세계관을 '화이론(華夷論)'이라고 한다.

그들의 개념에 의한 공간적 기준에 따르면 조선은 당연히 동이, 즉 동쪽 오랑캐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기본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이 ‘동이(東夷)’에 속한다는 사실을 잊으려고 애쓰거나 부정했다.

북방 오랑캐라고 폄하하던 만주족이 중국 문명의 본산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우자 중화문명과 오랑캐 사이에 혼란이 생긴다.

물론 17세기 조선의 상황에서 그 혼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임진왜란 때 군사를 보내주어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고,

명나라의 복수를 갚기 위해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하는 이른 바 ‘북벌론(北伐論)’이

한 시대를 넘어 18세기까지 위세를 떨쳤던 것이다.

병자호란을 통해서 이미 청나라에게 항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에 있어서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조선이었기에

청나라를 치자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연암 박지원의 작품 <허생전(許生傳)>에는

이러한 관념적 허위를 맹렬히 질타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은거해서 독서에 열중하던 허생이라고 하는 가난한 선비가

변부자의 돈을 빌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

많은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도적들을 교화한 후 남은 돈은 바다에 빠뜨려 버린다.

그리고 다시 가난한 생활로 돌아온다.

이 일을 겪은 변부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이완 장군에게 허생을 천거하게 되고,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완은 북벌론의 이념이 사회적인 맹위를 떨칠 때 그 선봉에 서있던 장군이다.

그는 청나라를 칠 계책을 묻는데, 이에 대해 허생은 몇 가지 계책을 내 놓는다.

선비들은 청나라 과거에 응시하고,

서민들은 중국 강남으로 가서 장사를 하면서 그들의 허실을 정탐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나라 사람들의 옷을 입고 그들의 말을 하며 변발을 해야 한다는 계책을 내놓았다.

철저히 그들의 문명과 풍습을 이용해서 청나라를 정확히 파악해야 정벌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연하게도 이완 장군은 난색을 표명한다.

박지원은 이같은 상황 설정을 통해서

당시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얼마나 청나라를 관념적으로 받아들였는가를 통렬히 비판한다.

문제는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는 점을 철저히 인식할 정도로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새로운 역사를 열어나갈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스며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실제적인 학문, 곧 실학의 정신이었다.

- 김풍기(金豊起),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표암 강세황 <벽오청서도>

 

175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30.5×35.5cm

명대 오파의 거장 석전 심주의 화법을 방(倣)한 것으로

밝혔는데, 모티프 자체는 남종문인화풍의 교과서적 화보인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를 베끼는 차원이 아니라,

맑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새로운 화면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전경의 솟아오른 언덕에는 두 그루 오동나무가 잎을 무성하게 드리우고 있고,

그뒤 중경에는 사립문 너머에 대숲과 파초를 배경으로 초막이 있고,

마루에 나와 앚아 더위를 식히고 있는 문인이 보인다.
앞마당을 쓸고 있는 시동의 등 뒤로는 무너질 듯한 커다란 절벽이 배치되었는데,

안쪽으로 약간 기운 오동나무와 호응을 이루고 있다.

그 사이로 멀리 먼산의 실루엣이 펼쳐지며 시선을 끌어당기는데,

화면 안쪽으로 깊어지는 공간감을 형성한 뒤, 오동나무 오른쪽으로 펼쳐진 산의 능선을 따라

그 너머 여백의 공간으로 시선을 이끌어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물기 많은 담묵 위에 청록색 담채가 가해진 오동나무,

푸른색과 갈색 담채를 몰골법으로 처리하여 시원스런 대비가 인상적인 원산 처리 등과

어우러지면서 화면에 생기를 주고 있다.
따라서《개자원화전》에 나오는 모티브를 원용했으면서도

창작으로서의 새로운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원숙한 솜씨로 인해 한때 만년작으로 보기도 했으나,

'첨재(添齋)'가 강세황(姜世晃; 1713~91)의 초년기에 사용된 호임이 입증됨으로써

1750년대 작품으로 보고 있다.

- (박효은)

 

 

 

 표암 강세황 <피금정>

1788, 종이에 수묵 101.0×71.0cm

표암(豹菴) 강세황은 1788년 9월 9일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그 해 가을 맏아들 인 이 심양부사로 임명되어

관사에 가 있다가, 정조의 어명에 따라 동해안 지역

그리고 내금강을 사생하러 들어가려고 회양에 들른

김응환, 김홍도 등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금강산 유람을 기록한 것이 <유금강산기>이며,

여행에서 그린 그림이 유명한<풍악장유첩>이다.
표암은 바로 이때 회양 가는 길목인 금성의 피금정에

들른 것 같다.

 

 

이 시는 강세황의 문집《표암유고(豹菴遺稿)》에도 나온다.
화면을 보면 정선 같은 이전의 화가들이 그린 피금정 모습과 사뭇 다르다.

즉 정선이 누대와 같은 피금정의 모습을 주로 그렸다면

이 그림에는 정자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자의 모습은

김홍도의《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가운데에 있는<피금정> 장면과 유사하다.
강세황이 1789년에 그린 또 다른<피금정>(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도

구불구불 올라간 용의 허리 위에 올라앉은 듯한 누대 형태의 피금정이 아니라

화면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귀퉁이 부분에 작게 그려진 강변의 정자와

그 쪽에서 바라본 산이 등장한다.

- (유홍준)

 

 

 

 표암 강세황 <산수대련>

18세기 중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58.5×33.5cm

강세황의 중기작으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바탕으로 한

시화 일치(詩畵一致)의 경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한 폭은 예찬(倪瓚) 풍의 빈 정자가 강에 인접한 채

쓸쓸하게 서 있는 전경을 강건너 멀리 안개에 감싸인 채

고즈넉한 사람들의 거처와 대비 시켰고,

다른 한 폭은 단풍진 강산 어딘가에서 기러기 소리라도

들릴 듯한 드넓은 강변을 돌아 멀리 있는

마을을 찾아가는 사람을 그렸다.
두 폭 모두 저녁 나절의 적막하고 고요한 느낌을 전하기

위해 점잖고 조용한 필선으로 간략하게 그림으로써

성글고 맑은 느낌을 자아내는데 성공하였다.

 

 

 

 다산 정약용<행서>

19세기 초반, 종이에 먹. 24.5×27.0cm

강진에 유배중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쓸쓸한 심정이

애절하게 나타나있는 소품이다.

깔끔한 다산 특유의 필치에 강약의 리듬이 더해져

글의 내용이 더욱 심금을 울린다.

 

 

 다산 정약용 <성화를 기다리며> 

18~19세기,모시에 먹. 17.5×121.0cm


다산 정약용은 강진 유배중 자신의옷이 닳아 헤지면 그것을 잘라 시첩을 만들어 사용하곤 했다.

이 시첩은 12폭으로 꾸며진 것인데 지금은 횡액으로 다시 표구되었다.
바닥에는 풀을 먹여 다리미로 다린 흔적이 남아 있다.
시첩의 내용은 고향인 남양주 능내리와 벗 성화를 생각하며 지은 칠언절구 10수이다.

각 시마다 시구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발문은 다산이 27년 전에 성화를 지은 것으로 비록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진실을 담은 것이라고 하며, 글 마지막은

“이 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다산 초부(樵夫)가 쓰다”라는 처연한 글귀로 마무리했다.


이 시첩은 다산의 해서가 얼마나 단아하고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이지적이고 해맑은 멋이 서려 있는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단원 김홍도 <혜능상매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5×41.5cm

중국 명대 도석인물화본 <홍씨선불기종(洪氏仙佛奇縱)>에서 선종 6대조 혜능 의 도상을 빌려다 그린,

단원 김홍도(1745~1805경) 50대의 걸작이다.

멍하니 앉아 삼매경에 든 혜경을 두 마리 까치가

앉은 고매 위에 포치하여 유.불의 상징을 복합시켜놓았는데, 역시 김홍도다운 멋스러운 발상이다.

 

선승 혜능이 유사 들의 매향을 같이 즐긴다는 내용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화제시에 “암향부동어제천(暗香浮動於諸天)”이라 썼지만, 고매에는 꽃망울조차 달려 있지 않다.
그 매향을 지루하게 기다리는혜능의 삼매경 속이 매화 가지처럼 시커멓게 엉켜 있는 듯하다.

- (이태호)

 

 

 

 단원 김홍도 <포의풍류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28.0 ×37.0cm

김홍도는 표암 강세황에게서

문인 삶의 멋과 취미를 습득했는데,

표암의 평에 따르면 김홍도가 신선 같은 용모를

타고났다고 한다. 또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문사들과 어울려 시회아집을 가졌을 만큼

그림뿐 아니라 시. 서. 악 모두 수준급이었다
“흙벽에 종이창을 내고 종신토록 포의 차림으로

시와 음악을 즐기면” 가장 좋겠다는

글의 내용을 풀어 그린 작품이다.

 

방건(方巾)을 쓰고 정좌한 채 당비파(唐琵琶)를 켜는 인물의 모습은

당시 문인들의 취향이자 김홍도 자신이 지향하던 풍류를 묘사했다고 할 수 있다.

50대 어느 시기의 김홍도 자화상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인물의 주변에 배치된 파초, 붓과 벼루, 칼, 생황, 호리병, 중국골동품, 서책과 화선지 등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신선의 생활상을 읽게 해준다.
다양한 기물들을 복잡하게 늘어놓은 듯하면서도 삼각형 구도로 적절히 갈무리해놓은

김홍도의 화면 운영력이 돋보인다. 단숨에 쓱쓱 그리는 듯한 김홍도 50대 절정기의

무르익은 필묵(筆墨)으로 풍류 정신을 확실히 구현해낸 걸작이다.

- (이태호)

 

 

 

초정 박제가 <의암관수도> 

 

 

18세기 후반 종이에 수묵담채. 각 27.0 × 33.5cm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경)는

잘 알다시피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북학파(北學派) 실학자이다.

청조(淸朝)의 신문물을 수용하여

부국과 백성들의 생활 향상을 꾀하자는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을 주장했다.

 

서얼 출신인 그를 정조가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했을 만큼 뛰어난 문사였다.

박제가는 네 번의 연행을 통해

청나라의 학문과 문예를 익혔고, 나빙. 옹방강 등

중국의 문인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시.서.화의 문인 취미를 길렀고,

문인으로서 전인적 교양을 갖추어나갔던 것이다.

한편 그러한 교양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학자.

정치인. 외교관의 한 사람으로

자신의 위상을 다졌을 것이다.

이 화첩에 담긴 네 점의 그림과 한 점의 제시는

박제가의 예술적 수준을 가늠하는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박제가가 추구했던 신분차별의 타파와

상공업 진흥에 대한 소신이 담겨있는 그림은

아니지만, 전통적이고 평범한 소재를 취하여

여기 화가다운 소담한 솜씨를 보여준다.


우선 <의암관수도>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모사해본 듯

단원 화풍에 근사하다. 


<의암관수도>에 쓴 칠언시

“귀는 물에 몸은 돌에 의지했는데,

세 사람이 있지만 마음은 하나다” 등은

박제가가 주역과 노장의 사상에도 심취했음을

짐작케 한다. <의암관수도>에 쓴 '수기(修基)'는

박제가의 자(字)이다.


<산수도>는 깔끔한 수묵담채로 산마을 풍경을

담고 있는데, 표암 강세황의 화풍이 느껴진다.

<어락도>는 장한종의 화풍을, 

오른편에는 <장자>의 고사를 썼다.

네 점중 가장 활달한 필치로 그린 <야치도>

다시금 단원풍을 연상시킨다.

서화첩의 마지막 <야치도 제시>에는

관리생활을 하면서 내심 꿩처럼 은둔처를 찾고

싶어했던 박제가의 마음자리가 투영되어 있다.

행서 오언시는 표암의 서풍인 듯하면서도 분방한

힘이 실려 있다. 전체적으로 선배 문인화가인

강세황보다 회화적 견실함을 이룬 듯하다.

이 화첩의 맑고 활달한 서화풍을 보면, 남의 그림을 참고로 그려보면서 부담없이 즐겼던

대학자다운 박제가의 여유와 건전한 인간미를 읽을수 있다.
'정유(貞蕤)'는 박제가의 또 다른 아호 이다.

- (이태호) 

 

  

 

   

 

 

 

 

 

 

 

조선은 건국 이후 이렇다할 큰 전란을 겪지 않고 있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란을 연이어 겪으면서

농토는 황폐화되어 국가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었고 백성들은 생활에 큰 어려움 겪게 되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왕의 귄위가 크게 떨어져 신료들의 권한이 더 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나라의 살림을 맡은 양반사대부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갖가지 명분을 걸고

쉼 없는 정쟁을 거듭하면서도 백성들의 어려운 형편은 돌보지 않아

많은 원성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실학’이다.


실학 사상의 등장은 구시대의 사회 체제를 극복하고,

부국강병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지식인들 사이의 일련의 사상 체계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실학자들은 무릇 학문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을 주어야 하고,

백성들의 실생활에서의 쓰임과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의 국기(國技)인 ‘무예 24기(技)'는 탄생하게 된다.

 

 

무예24기는 조선의 문예부흥기라 불리는 정조 14(1790)년 4월 장용영(壯勇營)에서 펴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실린 24가지 기예를 말한다.

여기에 실린 24가지 기예는 조선의 쓰라린 전쟁의 역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왕조는 전쟁의 승패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 진법과 활, 대포만이 아니라

소홀히 다루었던 창검무예가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승리하기 위해 조선의 군대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군사들의 창검무예를

열심히 익혔다.

 

1598년, 선조의 명을 받은 훈련도감의 낭청(담당 실무자) 한교가 중심이 되어 중국의 기예인

장창과 쌍수도 등 6기를 조선 군사들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풀이한「무예제보」를 편찬하였다.

이어서 1604년에는 맨손권법을 풀이한「권보」를,

그리고 1610년 광해군 집권 시기에는「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하여 군영에 보급하였다.

이후 1759년 북벌을 준비했던 할아버지 효종을 빼 닮았던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주도로

훈련도감의 장교 임수웅이 18가지 기예를 정리한「무예신보」를 편찬하였다.

 

이러한 역사 배경을 바탕으로 그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하던 1776년에

아버지가 완성한 18가지 기예와 더불어 마상무예 4기를 군사들에게 적극적으로 훈련토록

지시하였다. 또한 이들 기예들을 1785년부터는 무사를 선발하는 시험과목으로 규정하였으며,

1790년에 기마군(騎馬軍)의 훈련강화를 위해 마상재와 격구를 추가하여

24가지의 기예를 그가 창설을 주도한 최정예의 군부대인 장용영에서 편찬하게 하고

책이름을「무예도보통지」라 지어주었다.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할 때 무예의 역사와 고증은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이덕무 그리고 무예실기는 장용영 초관 백동수가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동양 최고의 무예서로 꼽히는 「무예도보통지」는

국왕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문무(文武) 인재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이 책은 장용영을 비롯한 훈련도감, 어영청 등 중앙 군영은 물론이고

지방의 군영까지 보급되어 군사들의 훈련교범으로 사용하였다.

 

 

무예24기가 수록된 무예도보통지에는

실학(實學)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정신이 ‘금(今)'과 ‘용(用)'의 정신이다.

예를 들면 24가지의 기예를 중국[화식(華式)]과 일본[왜식(倭式)]의 기예와 더블어

조선의 방식을 그림으로 표현 것의 설명을 조식(朝式)이 아닌 ‘금식(今式)'이라 표현하였다.

이는 바로 동양 삼국 최고의 무예를 적극 받아들여 오늘날 우리 군사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예도보통지」편집자인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가 정조 임금께 올린 글에

“그리하여 조정은 실용 있는 정책을 강론하고, 백성은 실용 있는 직업을 지키고,

학자들은 실용 있는 책을 펴내고, 무사들은 실용 있는 기예를 익히고,

상인들은 실용 있는 상품을 유통시키고, 장인들은 실용 있는 기구를 만든다면,

어찌 나라를 지키는 일을 염려하며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일에 걱정이 있겠습니까?"

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의 군사들이 익히는 무예 또한

지극히 실사구시의 발상으로 접근하겠다는 실학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 24기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몸바쳤던 조선의 무사들과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고심했던 실학자들의 공동작품이다.

다시 말해 무예24기는 오랜 역사경험과 전투현장에서 걸러진 실학정신의 무예적 표현물이자

자주국방을 상징하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라 할 것이다.

 

 

수원 화성(華城)은 앞서 설명한 「무예도보통지」 무예24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정조는 1784년에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고

이를 경축하는 과거시험을 열어 많은 무사를 뽑고,

이듬해에는 훈련도감과 경과에 합격한 무사들 가운데 무예실력이 빼어난 자를 뽑아

국왕경호부대인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였다.

이후 장용위는 1788년에 ‘장용영(壯勇營)’이라는 독립군영으로 발전하였고,

1793년에는 도성의 내영과 수원에 외영을 두어

기존의 핵심 군영인 훈련도감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조가 주도하여 창설한 장용영은

주 훈련과목으로 무예24기를 채택하여 전투력 극대화에 최선을 다하였다.

이처럼 당시 최고의 무사들이 모인 곳이 장용영이었으며,

장용영 외영군이 주둔했던 수원 화성은

무예 24기가 가장 활발하게 수련되고 펼쳐졌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정조가 서거한 후 1802년 노론벽파들에 의해 17년만에,

짧지만 영원한 족적을 남겨 놓으며 폐지되었다.


결론적으로 수원 화성은

정조의 효정신과 실학사상 및 자주국방의 상징인 「무예도보통지」무예24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공간으로, 우리민족의 자랑스런 전통문화 산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 글, 최형국 무예24기 사범

 

 

 

 

 

 

 


 

변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만주 벌판을 통과할 때 제일 먼저 마주치게 되는 산이다 .
넓게 펼쳐진 수수밭 평원과 대조적으로 837미터의 우뚝솟은 봉우리들이 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만주에서는 보기드문 산악인지라 등산객 차림의 사람들도 제법눈에 들어온다.

산 입구의 석문에는 진의천인, 적상청운 등의 글짜가 새겨져있고

산속에는 불교와 도교의 사찰들이 들어서있다.

 

 

요양은 명나라 시절 만주의 중심이자 산해관 바깥의 ‘오랑캐 ’들을 아우르는 거점이었다 .

영락제가 이곳에 요동동사를 설치한 것도 이곳이 만주를 장악하는 거점이기 때문이다.
요양벌판에 우뚝선 백탑은 거란족 국가인 요나라 시절에 세운 전탑이다.

13층, 71m까지 장대하게 쌓아올린 흰 벽돌들로부터 반사되는 빛은

북경을 향해 일망부제의 평원을 지나는 조선 사신들에게 참으로 경이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탑은 이름만 남았을뿐

공업도시 요양의 매연에 찌들어 오히려 ‘흑탑’ 처럼 보일 뿐이다 .

고궁은 1626년에 건설된 후금의 황궁이다.

건주 여진의 일개 부족 집단에서 출발하여 만주 전체를 아우르고,

장차명과 맞서겠다는 누르하치 집단의 의지가 담긴 정치적 중심지이다.
대정전 앞에는 만주 팔기의 각 기의 집소가 배치되어 있다 .

1637년 병자호란에서 항복했던 이후 인질로 끌려왔던 조선의 소현세자 일행과

청에 복속을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했던 삼학사의 넋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홍성은 명나라시절 산해관 바깥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 가운데 하나였다.

1626년 승승장구하던 누르하치는 기마대를 이끌고 이곳을 공격하다가

명나라 장수 원숭환의 홍이포 세례를 받고, 부상을 입고 결국 절명했다.

지금도 당시 성의 모습이 거의 원형 그대로 남아 있고,

성안에 남아 있는 조대수 패방의 주위에는 관광객을 비롯한 인파가 끊이지 않아

‘역사 도시’ 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산해관은 북경에서 만주로 이어지는 관문이다.

감숙성에서 시작된 만리장성 동쪽 끝에서 발해와 만나는 곳이다.

‘천하제일관 ’이라는 오만한 문구가 상징하듯이

이 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중화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었다 .

글자 하나가 1.6m나 되는 장대한 이 관문을 지키던 오삼계는

1644년 청나라 군대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청군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북경을 접수할 수 있었다.

북경 쪽에서 이어져온 연산산맥의 동쪽 끄트머리인 각산산성의 길이는 1587m에 이른다.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이 각산관은 해발 444m의 험준한 절벽 위에 설치되었다.

산성의 여기저기에는 척계광이 왜구를 막기 위해 쌓았던 적대의 형식을 계승한

많은 방어시설물들이 산재해 있다.

 

진시황시절 만리장성 축성공사에 동원되었던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죽은

정절녀 맹강녀를 모신 사당이다.

축성 공사중에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맹강녀는 호곡하면서 진시황을 질타했다.

진시황은 맹강녀의 미색과 대담성에 반해 그녀를 회유하여 유혹하려 했으나

맹강녀는 끝내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키고,

사람들은 그녀를 기리기 위해 봉황산에 사당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현존하는 북경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성당이다.

천주교가 중국에 전파되는 과정에는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리치의 역할이 컸다.

그는 단순한 선교사가 아니라 중국문화와 학술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동시에 유럽의 학문과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수하려고 시도했던 문화인이었다.

남당 역시 1601년(만력 29)에 건립한 것이다.

남당은 홍대용을 비롯하여 북경을 방문했던 조선사신들도 들렀던 ‘명소’ 이자

이문화 섭취를 위한 전당이었다 .

열하의 표지석과 보타종승묘의 원경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260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열하의 현재 이름은 '승덕'이다.

박지원 「열하일기(熱河日記)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열하에는

옹정, 건륭 연간에 걸쳐 청나라왕실의 이궁들이 건설되었다.

강희제 이후 역대 황제들은 여름철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면서

피서뿐 아니라 여전히 청에게 위협적 존재였던 몽골 세력에 대한 견제를 시도했다.

피서산장 부근의 구릉에는 포탈라궁을 본따 건설한 보타종승묘를 비롯하여

보락사, 수미복수묘 등의 라마사원이 건설되었다.

청은 내몽고의 초원지대인 아우르는 사원들을 건설함으로써

중화세계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는 지배자임을 과시하고자 했다.

 

 

 

 

   

 - 이상, 실학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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