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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Gijuzzang Dream 2010. 9. 27. 22:32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은 한국 회화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대화가로

'화성(畵聖)'의 칭호를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는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고유화법을 창안해서

우리 산천을 소재로 그 내재된 아름다움까지 표출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성자이기 때문이다.

 

겸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로 이어지며

완성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자였다.

율곡으로부터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 1653-1722)으로 이어지는 율곡학파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성리학의 근본경전인 사서삼경에 박통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리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주역(周易)에 정통해서 당대 제일로 꼽힐 정도였다.

 

이에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조화(陰陽調和)와 음양대비(陰陽對比)의 원리를 이끌어 화면구성원리로 삼고,

다시 중국 남방화법의 기본인 묵법(墨法)을 취해 음(陰)인 토산(土山)을 표현하고

북방화법의 기본인 필묘(筆描)를 취해 양(陽)인 암산(岩山)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 낸다.

암산과 토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천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기법은 없다.

이는 필묘 위주냐, 묵법 위주냐 하는 대립개념으로 끝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던

중국 남북 양대 화법이 우리 손에 의해서 이상적으로 융합되는 현상이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 겸재의 동국진경(東國眞景) 산수화법(山水畵法)이다.

따라서 이 겸재의 동국진경 산수화법은

이제까지 중국문화권 내에서 이루어진 회화발전의 모든 성과를 종합하여

우리 산천을 그려내기에 가장 알맞도록 맞추어놓은 이상적인 우리 고유의 새 화법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겸재는 우리 회화사상 화성(畵聖)으로 불리워 마땅하다.

 

이런 겸재가 그 새 화풍 창안의 실험을 대담하게 시도하여 성공해 내는 것은 금강산 사생을 거치면서이다.

그가 36세 되던 해에 그와 시화(詩畵) 쌍벽으로 일컬어지던 지우(志友)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이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스승인 삼연 김창흡과 겸재를 초청하여 금강산 유람을 함께하는데

이때 겸재는 내외해(內外海) 삼금강(三金剛)의 절경을 30폭 그림으로 사생해내고

삼연과 사천은 시로 사생해낸다. 이것을 합쳐놓은 시화첩이《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인데

사천을 통해 이 시화첩이 세상에 알려지자 겸재의 화명(畵名)은 한순간에 천하를 진동하게 되었다.

 

여기서 자신을 얻은 겸재는 더욱 진경(眞景) 사생을 통한 화법 창안에 매진하여

60세 전후한 시기에 벌써 확고한 자기화풍을 확립한다.

 

그 사이 겸재는

41세 때인 숙종 42년(1716) 관상감겸 교수로 특채되어 벼슬길에 나가 조지서별제, 사헌부감찰 등을 지내고

45세 때인 숙종 46년(1720) 경상도 하양현감에 제수된다.

하양에서 6년 만기를 채우고 영조 2년(1726) 51세로 상경하는데

그 사이 경상도 일대의 명승고적을 많이 사생하여 《영남첩》을 꾸밀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영조 9년(1733) 58세로 경상도 청하현감이 되어 내려갔다가

60세 때인 영조 11년(1735) 92세의 모친상을 당해 상경하기까지 2년 가까이

경상도 해안에서 강원도 해안으로 이어지는 관동팔경 등 해산(海山) 제일경을 사생하며

진경기법을 연마하였다.

그리고 모친의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 머릿속으로 진경기법을 정리한 다음 영조 13년(1737) 탈상한 후

강산(江山) 경치로 국중 제일이라는 남한강 상류 사군(四郡, 청풍-단양-영춘-영월)산수

즉 단양8경을 찾아 진경사생여행을 떠난다. 그 결과 겸재의 진경화법은 최고도로 무르익게 되었다.

 

그래서 64세 기미년(1739) 봄에 그린《청풍계(淸風溪)》에서는

대담한 농묵쇄찰법(濃墨刷察法)과 임리(淋漓)한 수림법(樹林法)을 통해

겸재 특유의 진경산수화풍이 대성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65세 겨울 양천현령으로 나가 그려내기 시작하여 다음해 겨울까지 완성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서는 청록계(靑綠系)의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필치로 일관된 화법을 통해

대경(對境)에 따라 무궁하게 개발해내던 다양한 그의 진경화법을 실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70세 전후에 겸재는 노익장을 과시하며 그림솜씨의 황금기를 자랑하는데

바로 그런 황금기인 72세 때(1747)에 겸재는 벼슬도 다 내놓은 한가로운 몸으로

다시 금강산을 유람하게 된다.

36년 전에 무명 사인화가(士人畵家)로 처음 이곳에 와서 30폭 금강 절경을 그려 일거에 화명을 떨치던

옛 추억때문인지 겸재는 그 절정기의 솜씨로《해악전신첩》30폭 중 21폭을 다시 그려낸다.

그러니 이때 그린 《해악전신첩》은 겸재 진경산수화 중의 백미라 할 것이다.

 

이로부터 겸재 그림은 더욱 노력해져서 많은 걸작품들을 남기니

간송미술관 소장의 <삼일포> 등 관동팔경 8폭을 비롯해서

<통천문암> <여산초당> 등 대폭 산수도가 모두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이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기사년(己巳年) 산수화첩>도 겸재가 74세 되던 영조 25년(1749)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겸재는 76세 되던 영조 27년(1751) 윤5월 29일에 슬픔을 당한다.

시화쌍벽(詩畵雙璧)으로 평생동안 지기를 나누던 진경시(眞景詩)의 대가 사천 이병연이

81세로 타계한 것이다.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겸재는

사천과 함께 오르곤 했던 사천댁 뒷동산인 북악산 남쪽 서록(西麓) 즉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뒤쪽

산등성이에 올라 자신의 집이 있는 인왕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 개이는 정경을 장쾌한 필법으로 휘둘러낸다. 그것이 <인왕제색(仁王霽色)>이다.

 

겸재는 이런 그림을 그려 그 심회를 표출해내는 것이 겸재다운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노련한 필법으로 어느 때는 진경을 극도로 추상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욱 강건한 필력을 구사하기도 하며 진경산수화법을 철저히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겸재에게는 그 호가 가리키는《주역(周易)》겸괘(謙卦)의 괘사(卦辭)대로

만년에 유종의 미를 거두는 홍복(弘福)이 터져오게 된다.

79세 되던 영조 30년(1754) 영조의 회갑년인데

영조는 겸재에게만 종4품 사도시(司導寺) 첨정(僉正)의 벼슬을 내린다. 그림 스승에 대한 예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국왕의 과갑(過甲)과 왕대비 인원왕후의 망칠(望七, 69세) 수경(壽慶)으로

70세 이상 조관(朝官)에게 1품을 가자승직(加資陞職)시킴에 따라

겸재에게는 종3품 첨지중추부사가 제수되고,

81세 되는 그 다음해인 영조 32년(1756) 왕대비 칠순으로 다시 70세 이상 조관에게 1품을 가자(加資)하니

겸재는 종2품 동지중추부사로 오른다.

이에 2품 이상은 3대 추증(追贈)하는 법전(法典)에 따라

부친(時翊)은 호조참판, 조부(綸)는 좌승지, 증조부(昌門)는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증직된다.

 

그래서 겸재가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을 때 이를 축하 기념하는 글인

‘정겸재 선(敾)이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된 것을 축하하는 머릿글(鄭謙齋敾壽職同樞序)’이라는 글에서

창암 박사해(蒼岩 朴師海, 1711-1778)는 이렇게 말한다.

 

「옹(翁)은 끝없는 명성을 차지하였고 겸해서 80의 수를 누렸으니,

하늘이 옹(翁)에게 주는 것이 너무 풍부하지 아니한가.

대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초췌하고 마른 선비가 많다.

시(詩)에 궁인(窮人)이 많듯이 그림을 잘 그리고 궁하지 않은 자 또한 드물다.

옹(翁)은 비록 청빈하다 하나 안으로는 부인과 자손이 갖춰있는 즐거움이 있고

밖으로는 녹을 받는 벼슬의 영광이 있어 삼현(三縣)의 인부(印符)를 나누어 가졌었고

품계가 금옥(金玉)을 지냈으니(당상관의미) 하늘의 복이 옹(翁)에게만 어찌 완전한가.

 

 

이런 대복인(大福人) 겸재가 영조 35년(1759) 3월24일 84세의 천수를 누리고 영면(永眠)하니

현재 도봉구 쌍문동인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에 안장한다.

이에 겸재의 10년 후배로 만년에 30여 년을 이웃해 살며

조석상봉으로 겸재와 함께 화도(畵道)에 정진하여 풍속화풍을 대성해낸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 1686-1761)은 다음과 같은 애사(哀辭)를 지어 겸재의 일생을 총평한다.

 

 

정공(鄭公)의 휘(諱)는 선(敾)이요, 자(字)는 원백(元伯)이며

겸재(謙齋)라고 자호(自號)하니 광산인(光山人)이다.

어려서부터 한양 서울의 북쪽동네 순화방(順化坊) 백악산 밑에서 살고

나 역시 순화방에서 대대로 살며 公보다 10세가 어리니

내가 죽마를 탈 때 公은 이미 엄연히 관(冠)을 쓴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항상 공경하여 일찍이 너나들이를 한 적이 없다.

公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었고

나 역시 그림 좋아하는 병이 있어서 대략 그 삼매경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나는 곧 매달려 하지 않았고 公은 곧 날마다 정진하고 익혀서

육요육법(六要六法)을 정밀하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 동쪽나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이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公에 이르러서 고화(古畵)를 널리 보고 공부를 또한 독실히 하여

앞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런 까닭으로 이름도 날로 무거워지고 비단은 날로 쌓여 스스로 한가할 틈이 없었는데

곧 또한 예운림(倪雲林: 瓚)과 미남궁(米南宮: 芾), 동화정(董華亭: 其昌)을 배워

대혼점(大混点)으로 갑작스러움에 응대하는 법을 삼으니

세상의 그림 배우는 사람들은 다만 公 中年의 권필(倦筆: 마구 휘두르는 필법)만 보고

속으로 그림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다투어 서로 찡그린 것을 흉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짙고 진한 것은 세상에 미칠 자 없다.

매양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면 나에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집 곁으로 이사와서는 서로 수십 보 가까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각건(角巾)쓰고 청려장 짚은 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거른 날이 없이 지금 30년에 이르렀으니

公의 일생을 알기로는 나만한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대체 公의 성품은 본래 부드럽고 안존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남과 사귐에 일체 겉으로 꾸밈이 없었다.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자주 걸렀으나 일찍이 비의(非義)로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었다.

일찍이 옳지 않게 남을 간섭한 적도 없었다.

 

또 경학(經學)에 깊어서 《중용》과 《대학》을 논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꿰뚫는 것이 마치 자기 말하듯 하였다.

만년에는 또한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힘썼으니

손수 뽑아 베끼기를 파리머리 같이하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갓 公의 이름을 그림으로만 알고

公이 경학(經學)에 깊은 것이 이와 같음을 모른다.

어찌 이른바 위정공(魏鄭公: 魏徵, 580-643)의 문사(文辭)가 직간(直諫)으로 덮여지고,

구양공(歐陽公: 歐陽脩, 1007-1072)의 정사(政事) 재주가

문장(文章)으로 가려지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公이 하양과 청하를 거쳤으니 현감으로 양읍을 다스려 영광스럽게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나이가 80을 넘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영화가 3世에 미쳤었다.

진실로 公의 인후한 덕과 성실하고 효성스런 독행(篤行)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임금님께서도 또한 公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 號를 부르시니,

위로 공경 재상으로부터 아래로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公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작은 그림 한 폭을 얻어도 큰 옥을 얻은 듯 집안에 전해줄 보배로 삼으려 하였다.

맑은 관직을 두루 거쳐서 한 시대에 벼슬살이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었지만

고요하기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세상을 피하여 은둔한 사람) 같았으니 어떠했겠나.

그러니 외물(外物)의 영욕과 청탁(淸濁)이 어찌 公에게 있었겠는가.

 

아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무오(戊午: 1738년) 겨울에 公과 내가 약속이 있었는데 하루는 바람이 맑고 달이 밝았다.

公이 그 막내 자제를 데리고 와서 이르기를

“내가 마땅히 약속대로 하리라”하며 붓과 벼루를 찾아들고 문비(門扉) 위에 나가

<절강추도도(浙江秋濤圖)>를 그리는데 순식간에 휘둘러내니

필세(筆勢)가 기이하고 웅장하여 정말 볼만 하였다.

 

내가 詩를 지어 이르기를

“정로(鄭老)가 밤중에 호흥(豪興)이 일어, 문 열고 쳐들어와 벼루 찾는다.

얕고 깊게 먹을 갈아 신운(神運)에게 맡기고, 좌우에서 등(燈)을 밝혀 눈 밝혀준다.

육필(六筆)을 함께 몰아 바람 천둥치듯하니, 세 문짝 모두 젖고 파도가 친다.

내 방은 이로부터 낯빛 더하고, 예원(藝苑)에 거연(居然)히 호사(好事) 이뤘네.”

 

다음날 악하 이공(岳下 李公: 秉淵)이 듣고 역시 그 운자(韻字)를 따서 지었었다.

 

그날 나는 홀연 안음으로 제수되어, 말을 주어 떠나보내니 드디어 公과 잠깐 작별하고 갔었다.

6년 있다가 만기가 차서 돌아와 다시 公을 대하니 문 위의 그림이 새벽에 그려낸 것 같거늘

다시 公에게 부탁하여 담채로 선염(渲染)하려 하였었으나 미적거리다가 해내지 못하고 말았었다.

그 후에 나는 배천군수가 되고(1748년) 公 역시 외읍(外邑)으로 나갔으며

(1740년 양천현령 임명, 1745년 1월 해임)

문 위 그림은 남이 빼앗아가게 되었었는데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20여 년이 지났고

公은 또한 돌아가서 사적(事蹟)이 쓸어낸 듯하니 정말 슬프구나.

 

대체 내가 이제 늙어 움직일 수가 없어서 公이 돌아갔고 장기(葬期)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직 가서 곡(哭)을 하지 못하였으니 公에게 잘못함이 많다.

公의 여러 자손들이 만어(挽語)로 나에게 부탁하거늘 차마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이에 감히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애사(哀辭) 일통(一通)을 지어 내 슬픔을 쏟아내노니,

이 하나로 公의 대강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사(辭)로 말한다.

 

"두 번 곱살이로 봉양하니, 좋은 반찬 거르지 않고, 三世에 추은(推恩)하니, 영요(榮曜)가 극하구나.

성주(聖主)께서 그 호를 부르시니, 가마꾼도 그 이름 아네.

옛 사람들 이름이 이루어짐 중히 여겨서

혹은 의술(醫術)로 혹은 검술(劍術)로 혹은 바둑 장기로 하기도 하고

심지어 빨간 불길 속에 몸을 던져 그 죽고 삶을 돌아보지 않기도 하였었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죽어서 이름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하였네.

비록 功 세우고 德 세울 수 없었다 하나, 살아서 일세에 이미 이름났었고,

죽어서 백대 이후까지 내려갈테니, 가히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네."」

 

 

 

 

겸재는 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하는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진경문화를 주도해간 장본인으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우리 고유의 화법(畵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산수를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

 

그의 진경산수화풍은 이후 많은 사대부화가들과 화원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쳐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우리 고유화법으로 표현해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세계 최고수준의 우리 고유의 그림이 있음을 보여주어

후손들에게 영원히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게 하였으니

마땅히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이라 하겠다.

- 최완수, 간송미술관연구실장

- 국립중앙박물관, 2009년 인문학 명사 토요특강 9월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