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경술국치 100년과 궁궐의 수난

Gijuzzang Dream 2010. 2. 7. 06:41

 

 

 



 


수난의 문화재 그 역사의 흔적을 찾아

 

 

지난 2009년 11월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한 지 144년 만에 광화문 상량식이 열렸다.

조선 태조 4년에 경복궁 정문으로 들어선 광화문은 줄곧 서울의 역사적 중심지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새로 지으면서 경복궁의 동쪽으로 옮겨졌다가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소실되는 운명을 맞이하기에 이르는데,

그 광화문이 철근 콘크리트 시절을 거쳐 다시 고종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이다.

 

역시 고종 때 세운 환구단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일제에 의해 황궁우 등 극히 일부 구역만 남긴 채 사라진 환구단은

정문도 없이 오랜 기간을 한 호텔의 조경시설인양 버텨와야만 했다.

그러던 것이 지난 2007년 우이동에서 정문이 ‘발견’되면서

최근 원 위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정문이 이전 복원되었다.

차츰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깃발을 올린 셈이다.

 




뿔뿔이 흩어져버린 환구단

 

서울에 남아있거나 복원된 5개의 궁궐과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 그리고 종묘와 사직 등을 두고

봉건왕조의 잔재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반면 장구한 역사를 갖는 나라의 위엄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입장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형태나 의미가 타자(他者)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될 때 고민의 종류는 차원을 달리한다는 점이다.

 

지금은 황궁우와 그 앞의 삼문, 그리고 석고와 돌난간이 남아 있는 것의 전부이지만,

1897년 완공된 환구단의 원래 영역은 지금의 웨스틴조선호텔과 롯데호텔, 프레지던트호텔 터를

아우를 정도로 광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열강의 각축 속에 왕실의 존속과 나라의 안녕을 고민하던 고종은

환구단을 세워 황제를 칭함으로써 역사적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청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꾀한다.

고종은 이곳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민심을 앙양하기 위해서였는지 미뤄두었던 명성황후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국장으로 치렀다.

 

당시 독립신문은 황제즉위식의 감격을 이렇게 전한다.

 

“광무 원년 시월 십이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년을 지나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 지다.

조선이 몇 천년을 왕궁으로 지내며 가끔 청국에 속하여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의 종이 되어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느님이 도와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들어

이달 십이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느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금월 십일일과 십이일에 행한 예식이 조선 고금 사기에 처음으로 빛나는 일인즉

우리 신문에 대개 긴요한 조목을 기재하여

몇 만 년 후라도 후생들이 이 경축하고 영광스러운 사적을 넓게 하노라.”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

 



그러나 환구단의 영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현재의 롯데백화점 본점 뒤편 주차장 자리에 있던 것으로 보이는 석고각은 해체되어

남산 북동쪽 신라호텔 자리에 있던 박문사(博文寺)로 옮겨져 종루로 이용됐고,

석고각의 정문 광선문(光宣門) 역시 남산 북쪽 기슭의 동본원사(東本願寺)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1932년 건립된 사찰이며,

동본원사는 1929년 정동 덕수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경성중앙방송국에서

최초의 ‘제야의 종’ 행사를 열 때 범종을 제공한 사찰이다.

 

파괴된 환구단 터에 들어선 것은

조선총독부립 경성도서관, 이른바 총독부도서관과 조선경성철도호텔이었다.

특히 조선경성철도호텔은 2만2천여 m² 대지 위에 독일인 게오르그 데 라란데Georg de Lalande의 설계로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들어섰는데 석재와 벽돌만 빼고 모두 외국산으로 지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의 위상을 뽐내는 건물이었다.

황제국과 천황국 사이에 끼어 있다 비로소 황제국으로 거듭난 대한제국의 상징적 건물이

제국주의 일본의 상징으로 뒤덮여 버린 것이다.

 

일제에 의해 철거되지 않은 건물이라고 해서 비극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재실 건물은 1960년대 말까지 ‘아리랑하우스’라는 간판을 내걸고 귀빈 음식점으로 이용됐고,

환구단의 정문은 군사정권 시절 우이동의 옛 그린파크호텔로 옮겨져

‘백운문(白雲門)’이라는 편액을 걸고 호텔의 정문으로, 이어서 시내버스 차고지의 정문으로 이용됐다.

호텔 내에 '인수각'이라는 이름을 달고 음식점으로 사용되던 건물 역시

환구단 정문과 비슷한 시기에 옮겨온 점이나 당시 직원들의 증언, 단청 흔적과 대들보 규모 등으로 볼 때

재실 및 그 부속건물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경복궁 파괴와 함께 진행된 박람회

 

비단 환구단의 모습만 뒤틀린 것이 아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본격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사업이 시작된 1918년이 아니었다. 그보다 3년 앞선 1915년 9월 11일부터 다음 달 말일까지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그 개막은 경복궁 파괴와 궤를 같이 했다.

 

이미 1862년 런던세계박람회 때부터 참관을 시작한 일본은 11년 뒤 비엔나를 시작으로 직접 세계박람회에 참가하는데, 1977년부터는 일본 국내에서도 내국권업박람회 등을 개최하기 시작했고 1907년 들어서는 조선에서도 박람회를 연다.

통감부 총무장관 쓰루하라 사다키치(鶴原定吉)를 회장으로 9월 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장장 75일 동안 을지로 일대에서 계속된 경성박람회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열린 최초의 박람회이다.

문제는 1915년에 들어서면서 박람회 장소가 오랜 기간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해온 경복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경복궁을 무대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는

일제가 조선 통치를 시작한 지 5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 식민통치의 치적을 선전하고

일본 상공업인에게 조선의 사정을 쉽게 파악하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를 테면 경성박람회 때는 주로 일본 상품의 선전에 목적을 두었다면,

조선물산공진회는 위생이나 공업, 수산, 임업, 광업, 임시은사금사업 등 일제식민통치와 관련한

산업이나 행정 부분의 치적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1923년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 때나

식민통치 20주년 즈음인 1929년 역시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박람회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도는 ‘조선왕조의 흔적 지우기’라는 면에서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박람회를 열기 위해서는 당연히 전시관이 필요하다.

수많은 궐내각사 건물들을 헐어 치워버렸음은 물론이다.

 

애초 ‘5보에 1루, 10보에 1각’이라는 말이 있듯 크고 작은 전각들로 빼곡했던 경복궁이지만

조선물산공진회 때 정전인 근정전과 편전, 침전, 경회루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들,

즉 356동의 건물들이 헐려 없어지고 그 자리에 18개 동의 진열관이 새로 들어섰다.

이들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동쪽 건춘문(建春門)에서 서쪽 영추문(迎秋門) 사이에는

횡단도로가 뚫렸고, 치장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옮겨온 석탑과 부도 등이 잔디밭과 분수대에 놓여졌다.

 

대부분의 석탑과 부도는 2005년 용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 갔지만,

일제의 조선 강제병합 직후 일본 오사카로 밀반출되었다 돌아온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만은 아직도 경복궁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다.

한국전쟁 와중에 포탄을 맞아 산산 조각난 전력이 있어 옮기는 과정에 훼손될것으로 여겨

아직 경복궁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인데,

‘억불숭유’ 조선의 궁 안에 불교 유물이 들어오게 된 엉뚱한 사연이 참으로 기구하다.

 

전시방식을 보면, 나무로 된 창고 같은 건물에 르네상스식 치장을 덧붙인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물품들은 대부분 서구를 모방해 지은 건물에 집중 전시되었다.

반면 농기구나 어구, 원예품처럼 근대와는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조선의 전근대적인 물품’들은

근정전 행각에 배치해 전시했다.

이 행사에 총독부는 기차 운임의 30%, 증기선 운임의 60%를 할인해 주는 등 조선인들의 관람을

적극 유도하여, 경성박람회부터 1940년 조선대박람회까지 4번의 박람회에 오간 연인원만 약 373만여 명에

달한다. 그곳에서 조선인이 대면하는 것은 결국 근대 일본과 전근대 조선….

조선총독부가 각종 박람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한 이유가 분명해지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왕의 공간인 근정전과 그 앞마당은 일제를 위한 각종 식장으로 이용되었다.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이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 등이 박람회 포상식을 하거나

훈시를 한 곳은 근정전 용상 자리에 마련된 단상 위였으며,

1921년부터 43년까지 민족해방운동가와 싸우다 죽은 일본 순사를 기리는 ‘순직경찰관초혼제’가

주로 치러진 곳도 바로 경복궁 근정전이었다. 일제의 조선 왕궁 파괴와 희화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자선당(資善堂)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비현각(丕顯閣) 등이 있는 동궁 일대를 밀어버리고

그곳에 총독부박물관을 세웠고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는 총독부미술관을 건립했다.

이때 헐린 건물 가운데 세자와 세자비의 생활공간인 자선당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라는 일본인 상인에게 팔려 도쿄로 팔려갔는데,

‘조선관(朝鮮館)이라는 사설 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불에 타 주춧돌만 남고

모두 타버렸다. 1995년 12월 한국으로 환수되어 경복궁 경내에 쓸쓸히 놓여 있는 주춧돌이 이것들이다.



희화화된 창경궁과 아예 사라져버린 경희궁

 

경복궁이 파괴의 대상이었다면 창경궁은 희화화의 대상이었다.

1911년부터 해방이 되고도 한참 뒤인 1983년까지 아예 ‘궁(宮)’ 대신 ‘원(園)’으로 불렸던 창경궁.

이토 히로부미의 심복이자 궁내부 차관이던 코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의 제의로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 박물관이 들어선다.

순종이 창덕궁에 있을 때 거의 한 궁처럼 여겨지던 창경궁이 행락시설이 가득한 공원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메이지정부가 에도에 입성한 뒤 도쿠가와(德川) 가문 쇼군들의 묘와 보리사인 칸에이지(寬永寺) 등이 있던 우에노 일대에 공원을 만들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세운 것과 비슷한 의미이다.

즉 옛 정치권력의 컬러를 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순종은 아직 그 공원 옆에서 엄연히 살고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

 

1918년 1월 창경원을 찾은 영친왕은 “도쿄 동물원에도 없는 하마가 있다”며 신기해할 정도로 창경원에는 코끼리나 홍학 등 이국적인 동물들이 많았고, 유리 대온실을 중심으로 하는 식물원에도 진귀한 식물들이 여럿 진열되었다.

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자경전(慈慶殿) 자리에는

1911년부터 1992년 철거될 때까지 박물관으로 이용된,

마치 오사카성처럼 생긴 장서각(藏書閣)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1617년 창건된 경희궁의 경우는 더욱 극적이다. 거의 모든 건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지금이야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옮겨졌던 위치에서 다시 옮겨왔지만

그마저도 원래 위치가 아닌 데다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가 새로 지은 것들이다.

비극의 시작은 일제가 통감부중학교를 세우면서부터이다.

조선 말기 이미 왕궁으로서의 기능은 상당 부분 잃은 상태였지만,

궁 안에 일본인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몇몇 남아있는 건물마저 원 의미를 잃고 말았다.

정문인 흥화문은 환구단의 석고각처럼 박문사로 옮겨져 정문으로 쓰였고,

정전인 숭정전(崇政殿)과 회상전(會祥殿)은 남산에 있던 조계사(曹溪寺)로 이전되어

일본 사찰의 부속 건물로 사용됐다.

 

이 외에도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건물이 들어선 달성궁(達城宮)과

대한의원 본관이 들어선 경모궁(景慕宮)과 함춘원(含春苑)까지.

일제의 식민정책과 함께 스러져간 조선왕조의 건물들은 한두 개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렇다면 우리는

 

올해는 장장 20년 동안 계속되어온 경복궁 복원공사가 끝나는 해임과 동시에 일제에 의해 성벽이 헐린 숭례문 복원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이다.

게다가 내년 완공을 목표로 종묘-창경궁 사이 율곡로 지하도로화 사업도 벌어진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뜻 깊은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마냥 뿌듯해 하기에는 이른 면도 있다.

멀게는 주지집무실로 사용되다 화재로 불타 사라진 회상전과 달리 숭정전은 지금도 동국대학교 안에 정각원(正覺院)이라는 현판을 걸고 대학 법당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1977년 언덕배기 위로 옮겨지기 전까지 강의실이나 체육관 등으로 사용된 탓에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안타깝기만 하다.

 

가깝게만 보아도  2008년 봄에는 한 방송사가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앞에서 노래자랑대회를 열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다섯 달 넘게 한 명품업체의 이벤트장으로 대여됐다가 문제를 일으켜 뒷말을 남기기도 했다.

 

건물만 복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 글 · 사진 : 권기봉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 저자   
- 사진 · 서울시청 문화국 문화재과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10-01-20

 

 

 

 

 

 

 

 

 환구단(圜丘壇)

 

대한제국의 건립과 위엄을 알리는 상징

 

 

 

황제가 하늘에 제사드리는 곳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

황단(皇壇) 또는 원구단(圓丘壇), 원단(圓壇)이라고도 한다.

(원래 환(圜)이라는 글자를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두를 환, 에울 환 이외에 둥글 원으로도 나온다.

즉 원구단이 더 정확한 명칭이고 한동안 원구단이라 하였지만

현재 유적 안내판에 환구단으로 표기되어 있기에 통일하고자 한다).

 

본래 이 자리에는 조선 후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이 있었는데

고종이 1897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대한제국의 예법에 맞추어 제사시설을 건설하였다.

원구단에서 행해지던 제사는 매년 정월에 풍작을 비는 기곡제와

4월 중 적당한 날짜에 지내는 기우제의 형태로 나누어져 있다.

 

이러한 제사의식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조선 세조 때까지 제사 기록이 보이나 본래 원구단이 황제가 제사를 드리는 곳으로서

당시 중국의 제후국이었던 조선에서 원구단은 예법에 어긋난다는 논의에 따라

정기행사에서 제외되면서 폐지되었다가

대한제국의 성립과 발맞추어 다시 시행되면서 건설되었던 것이다.

 

1897년 10월에 완공된 환구단은

3층의 화강암 원형 제단 위에 황색으로 칠한 원추형 지붕의 제사시설이며,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축소 복원된 모형이 있다)

이외에 환구단을 쌓고 2년 뒤인 1899년에 세워진 건물로서 하늘신의 위패를 보관하고 있는

팔각형 3층의 황궁우(皇穹宇), 돌로 만든 북이 있던 석고각, 어재실, 향대청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황궁우와 돌북, 환구단 정문뿐이다.

 

1911년 2월에 일제는 환구단의 건물과 땅을 조선총독부 소관으로 한 다음,

1913년 황궁우와 돌로 만든 북, 정문을 제외한 환구단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지상 3층, 지하 1층의 석조로 된 경성철도호텔을 지었다.

현재 황궁우 옆에 있는 조선호텔은 1967년 기공하여 1970년에 개관한 새 건물이다.

 

 

2009년, 호텔 정문으로 쓰이던 환구단 정문 이전 복원

 

돌로 만든 북인 석고는 광무 6년(1902) 고종 황제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3개의 돌북은 하늘에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으로

몸통에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 용무늬는 조선조 말기 최고의 조각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환구단 정문은 원래 황궁우 남쪽 지금의 조선호텔 출입구가 있는 소공로변에 위치하였는데,

1960년대 말 철거된 이후 오랫동안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2007년 강북구 우이동에 있는 그린파크 호텔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호텔의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던 문이 원래 환구단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정문의 이전 복원을 논의하게 되어 2009년 이 자리에 이건하였다.

이건하게 된 배경으로는 서울광장 및 덕수궁과 마주보고 있어서

보다 많은 시민이 환구단의 존재를 인식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삼문이고, 가운데 칸이 특별히 넓고 양 측칸을 좁게 조정하였으며,

대한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던 오얏꽃 문양과 봉황문 등을 장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록 원래 위치는 아니지만 조선호텔 안에 있는 환구단과 계단을 통해 연결하고 있다.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건립을 대내외에 널리 알리는 상징적 시설이다.

청일전쟁과 아관파천을 겪고 다시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이제 조선이 더 이상 청나라의 속국이 되어서는 나라가 발전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연호 대신 독자적으로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임금의 칭호도 대왕에서 황제로 격상하는 칭제건원(稱帝建元)을 단행하였다.

 

1897년 8월 15일 금년을 광무 원년으로 하고 8월 16일부터 거행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그리고 황제 즉위의 장소로 사용할 요량으로 환구단의 부지를 물색하게 되었는데

이때 정해진 곳이 지금의 중구 소공동자리이다.

10월 11일 고종이 대신들을 거느리고 환구단에 나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황제에 즉위하였다.

더불어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고치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였다.

 

현재 환구단은 시민광장으로 조성이 되어 있다.

시민광장은 2000년 10월 28일 서울시가 지정하였으며,

잊혀져 가는 우리의 문화재를 시민들이 찾아볼 수 있도록 하여

찬란한 문화유산과 전통의 향기를 재음미하는 차원에서 열린 쉼터로 만든 것이다.

 

환구단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층건물이 있지도 않고 넓디넓은 곳에 조성되었을 터인데

지금은 현대식 건물 속에 가려져 있어 대로상에서는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다.

환구단 정문 옆길로 들어가서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만나는 황궁우는

이제 고층건물에 포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위엄을 잃지 않고 오늘도 당당히 대한제국의 유적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 사종민, 서울역사박물관 교육홍보과장

- 2010.08.12 하이서울뉴스 [서울역사기행]

 

 

 

 

 

황궁우 옆 석고(石鼓), 원구단 부속물인가 

 

서울시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웨스틴조선호텔을 가로지르면 뒤뜰처럼 들어앉은 황궁우(皇穹宇)가 보인다.

그 옆으로는 3개의 석고(石鼓, 돌북)가 이웃하고 있다. 이들 건축물은 조선호텔의 일부분인 듯 보이지만

사실 원구단 부속물로 알려졌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석고가 원구단의 부속물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은

“황궁우와 석고는 건립 연도가 다르고 원래부터 별도의 공간에 각각 존재했다.

석고는 1902년 고종황제 등극 40주년을 기리는 칭경기념(稱慶記念)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석고가 원구단의 일부분이라는 주장을 뒤집었다.

박관우 시사칼럼니스트 역시 “옛 석고단 위치가 원구단의 동쪽 영역이었으나

석고가 만들어진 취지를 생각해 볼 때 원구단의 부속시설물이 아닌 독립적인 건축물이다”고 전했다.

석고의 원위치와 관련해 <경성부사>에서는

‘원구단의 동린(東鄰). 현 하세가와쵸 6번지 조선총독부도서관 부지 내’라고 기록됐다.

 

이 소장에 따르면 하세가와쵸는 지금의 소공동을 말하며,

당시 석고 위치는 소공동 6번지에 자리한 ‘롯데쇼핑’ 구관 및 후면에 해당된다.
이 소장은 설명하길 “애당초 석고는 황궁우 곁에 있지 않았다”며

“소공동 6번지에 있었던 것을 ‘소공동 39-1번지’ 황궁우 쪽으로 옮겨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라고 했다.

<황성신문> 1902년 2월 4일자에는

석고의 건립 장소가 소공동 6번지로 결정됐으며, 보조금 모금·징수가 추진됐다.

1902년 11월경에 광선문이 완성되는 등 1903년 여름 즈음에 석고를 보호하는 석고각(石鼓閣)이 완성됐다.

석고는 석고각이 완공된 지 6년 후부터 착수됐다.

 

1909년 11월 24일 <대한민보>에 따르면

석고각 완성 후, 7~8년이 흐른 1909년 말에 비로소 석고가 완공됐다.

석고가 완성되는 데 지연된 이유로 석고단 건립을 위한 보조금 모금 · 징수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당시 신문기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소장은 “석고가 없었던 시기 석고각은 1908년 이후 ‘한성부민회’가 관리했는데,

1910년을 기준으로 석고단 구역은 해체과정을 겪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석고단의 수난은 시작됐다.

1911년에 석고단의 광선문과 석고각은 보존됐으나 중문과 남문은 철거에 들어갔다.

이 소장의 말을 빌리면 1923년 3월 이후 총독부도서관 건립 공사가 진행되면서

석고단 구역은 총독부도서관 건물에 가려졌다.

석고단의 정문인 광선문(光宣門)

1927년 남산 총독부 아래에 위치한 일본 사찰 ‘동본원사(東本願寺)’에 옮겨졌다.

이후 석고각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로 이전되는 등 석고단 건물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석고단 터에 홀로 남은 석고는 더 이상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황궁우 옆으로 이전됐다. 

“역사적 기록을 보더라도 황궁우와 석고단은 다른 목적으로 건립됐으며, 별개의 시설물이었다”며

“석고가 하늘에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악기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인식도 바로 잡아야 할 대목”이라고

이소장은 꼬집었다.

- 2010년 07월 10일, 천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