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전통을 재해석한 미켈란젤로의 걸작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Accademia Gallery)은
이탈리아 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미술관이다.
1784년 미술 교육을 목적으로 피에트로 레오폴도(Pietro Leopoldo)가 설립한 미술원이 규모가 커져
미술관으로 개관한 것이다.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의 걸작 <다비드(David)>다.
구약성서 사무엘상 17장의 대결 장면을 묘사한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미술관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다.
전통을 재해석한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
<다비드>, 1501~1504년경, 대리석 |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블레셋 진영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나와 “놋 투구와 갑옷, 쇠로만 든 창날로 무장한 채 일대일로 싸워 진 쪽이 상대의 종이 되자”고 외쳤다.
그 기세에 눌려 어느 누구도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던 중, 병사들에게 양식을 가져다주기 위해 진영에 와 있던 양치기소년 다윗이 막대기와 자갈 다섯 개만 가지고 용감하게 도전을 한다.
다윗이 돌 하나를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혀 쓰러뜨리고, 재빠르게 골리앗에게 다가가 그의 칼을 뽑아들고 목을 베었다.
당시 피렌체 공화국은 영웅 다윗의 조각상을 의뢰하기 위해 카라라 채석상의 대형 대리석 덩어리를 준비해 두었다. 자기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운 다윗은 공화제의 미덕을 완벽하게 상징하기 때문이다.
피렌체 공화국은 이를 26세의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다. 공화국은 전통적인 표현 방식에 따라 나뭇잎 줄을 머리에 두르고 황금 허리띠를 찬 영웅의 모습을 원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고대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그리스신의 입상처럼 젊은 남자의 나체로 제작한다. 그는 고대 조각을 참고해 이 작품을 제작했지만 과거의 전통을 재해석해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다윗은 돌팔매 끈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팔을 내려 운명의 돌을 쥐고 있는 긴장된 모습으로 서 있다. 한 곳에 집중하고 있는 시선과 돌을 쥔 근육을 통해 싸움 직전의 긴장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한 달에 금화 6플로를 받고 2년 안에 작품을 완성할 것을 약속했고, 대성당 근처 임시 작업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품에 매진한다.
혼자 작업하는 것을 좋아한 성격 때문에 결국 4년 만에 완성한다.
공화국은 완성한 <다비드> 상을 피렌체 정치 활동의 중심지인 시뇨리아 광장(Piazza della Signoria)에
놓기로 한다. 이 작품이 애국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1873년 이탈리아 통일 직후 오랜 세월로 인한 훼손이 우려되자,
광장에는 모작을 놓고 진품은 시뇨리아 광장에서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미술관은 <다비드> 상을 위해 건축가 에밀리오 데 파브리스(Emilio de Fabris)에게 의뢰해
특별실을 따로 만들었으며,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해 주변에 미켈란젤로의 걸작들을 전시했다.
물론 복제품으로.
최근에는 ‘다비드 상이 복제품에 둘러싸여 전시되는 것이 부적당하다’는 논란이 일어
미켈란젤로의 진품 전체가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풍경에 독자적 주제를 부여한 <폭풍우>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베네치아파의 미술품들을 주로 소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독창적인 방식으로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이
조르조네 바르바렐리(Giorgio Barbarelii, 1477?~1510)의 <폭풍우(Tempest)>다.
조르조네는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예술의 형태, 즉 시적 감흥을 최초로 표현했다.
이 작품의 의미를 놓고 논쟁이 많지만 미술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함에 분명하다.
<폭풍우>, 1508년경, 캔버스에 유채, 82×73 |
왼쪽에 창을 들고 있는 남자가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자가 앉아 있다.
배경에는 다리를 중심으로 그 뒤에 마을이 있다.
하늘에는 번개가 치고 있지만 번개와 무관하게 화면의 인물들은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 배경이 되고 있는 풍경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표현이었다.
그 당시 풍경은 독자적인 주제로서 묘사된 것이 아니었지만
이 작품에서 풍경은 독자적인 주제를 지니고 있다. 조르조네는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표현했다.
다리 바로 뒤에 있는 가장 큰 집 지붕 위에 앉아 있는 황새는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사랑을 암시한다.
하늘의 번개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고대인들도 신의 분노라고 믿었다.
이 작품에서 번개는 신화적 의미로까지 해석된다. 번개는 신의 분노를 암시하고 있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 뒤에 있는 기둥은 견고함을 상징하고 있지만 부러진 기둥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삼손이 무너뜨린 성전을 연상시킨다.
이 작품에서 남자는 병사인지 집시인지 목동인지 불분명하지만,
조르조네는 당시 유행하던 옷을 입고 있는 남자를 최초의 인간 아담으로 그렸다.
그리고 앉아 있는 여인은 어깨에 걸치고 있는 흰 천을 제외하면 나신이다.
나신의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브로 보고 있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지만
처음 소장하고 있던 베네치아 귀족 가브리엘레 벤드라민(Gabriele Vendramin)의 유언에 따르면,
이 작품에서 평온함과 영혼의 평화를 발견했다고 한다.
조르조네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지만 베네치아 회화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이 작품은 벤드라민의 저택에 소장될 당시
‘조르지 다 카스텔 프랑코가 그린 폭풍우와 집시와 병사가 있는 작은 풍경’이라고 언급되었다.
(the little landscape on canvas with the storm, with a gypsy and a soldier by Giorgio of Castelfranco)
그 이후 300년 동안 공식석상에서 사라졌다가 1855년 예술사학자들에게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그 의미의 해석에 대해 의견이 분분해진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은 스물네 가지가 넘는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명화산책] 2009.11.25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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