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백제와 신라 고분출토유물(금동관, 금제귀걸이, 허리띠장식, 금동신발)

Gijuzzang Dream 2009. 11. 23. 18:21

 

 

 

 

 

 

 

 

백제

신라

금동관

   

나주 신촌리고분 출토

백제, 국보 295호

서봉총 출토

신라, 보물 339호, 국립경주박물관

금관을 상상하면 의레 신라의 것을 떠올리지만 백제의 고분에서도 금관은 발견되었다.

나주 신촌리 고분발견 금동관(국보 295)은 구리에 금도금을 입혀 만든 것으로 내관과 외관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에서 신라와 차이를 보인다.

 

신촌리 금동관의 내관 형태는 옆에서 보았을 때 반원형의 동판 2개를 맞붙인 모습이며, 외관은 3개의 장식을 머리에 두른 띠 부분에 세웠다. 띠에 두른 장식도 신라의 ‘山’자 형태가 아닌 나무형태의 꽃모양이다.

 

이 금동관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왕과 왕비의 것으로 보이는 금제관식이 어떤 방식으로 쓰였는지 알려주는 좋은 자료임과 동시에 외관과 내관으로 구성된 백제 관 형태를 제대로 갖춘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 금관은 금관총을 시초로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꾸준히 발견되었다.

 

신라금관은 사진과 드라마에서도 쉽게 보는 것처럼 머리를 감쌀 수 있는 둥근 관테(대륜, 臺輪) 주변으로 나뭇가지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을 둘렀으며, 여러 갈래로 나뉜 가지는 곱은옥으로 장식하였다.

 

서봉총 금관의 안쪽에는 교차되어 있는 반원형의 금판이 있고, 금관의 양옆으로 귀걸이형태의 드리개가 있다. 이 드리개는 신라금관 대부분이 위쪽 형태가 유사한데 반해, 금관총과 황남대총 등의 금관에서는 곡옥을 달거나 복잡한 금 세공품으로 꾸며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허리띠

장식

  

 

무령왕릉 출토(금은제)

백제, 국립공주박물관

금관총 출토(금제)

신라 5세기, 국보 192호

무령왕의 허리부분에 남아있던 왕의 허리장식은 2벌의 금은제 허리띠이다. 이 중 한 벌은 띠고리와 띠 끝장식, 드리개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다른 한 벌은 띠고리와 띠꾸미개만 발견되었다.

 

띠드리개 한 줄이 길게 남아있어 황남대총 허리띠의 긴 띠드리개와 비교해 볼 수 있다.

34개로 이루어진 띠꾸미개는 표면이 오목한 타원장식이 크기에 맞춰 배열되어 있다.

띠 끝장식은 오각형의 금판에 두꺼비무늬가 새겨져 있다.

귀면이 장식된 띠드리개 장식과 백호, 주작이 그려진 은판은 형태를 강조한 신라의 드리개 장식과 달리 회화적 표현 감각을 엿볼 수 있어 담박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금관과 함께 금관총에서 발견된 신라의 허리띠는 얇은 금판으로 만든 띠꾸미개로 이루어진 약 110㎝의 긴 유물이다. 40매의 띠꾸미개와 띠고리, 띠 끝장식으로 되어있는 허리띠에는 17줄의 띠드리개가 연결되어 있다.

 

인동무늬가 간략하게 투각되어 있는 띠꾸미개는 달개를 금실로 꼬아 장식성을 더했다.

각각의 띠드리개는 타원형과 방형 장식 끝에 곱은옥을 비롯하여 물고기모양, 금판, 향낭 등으로 꾸몄다. 이중 가장 긴 띠드리개의 장방형 금판은 수많은 달개와 함께 세 개의 방울이 매달려 있다.

금동신발

 

 

익산 입점리 1호묘 출토

백제, 국립전주박물관

황남대총 출토

신라, 국립경주박물관

산 입점리 1호묘에서 발견된 금동신발은 보존상태가 좋아 신라의 신발보다 화려해 보인다.

 

신라의 신발이 바닥, 발등, 뒤축으로 이루어진 것과 비교해 볼 때 제작방식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옆면이 아닌 발등과 발뒤축에서 판이 고정되기 때문에 발등에 접합부분이 있다.

신라의 신발이 ‘凸’자형 새김 장식으로 구멍이 뚫린 여름용 신발 같다면, 백제의 신발은 각 면이 닫힌 겨울용 신발같다. 백제의 신발에는 신라의 것에는 없는 바닥에 박힌 금동못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마름모꼴 무늬를 기준으로 안쪽에 꽃잎을 새겼다. 31.5㎝의 이 신발 역시 의례용으로 추정한다.

신라 신발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것으로 발등의 ‘凸’자형 새김장식이 두드러진 이 신발은 바닥판과 발등, 발뒤축을 감싸는 세 부분으로 제작되어 발등의 판과 발뒤축의 판이 신발 옆부분에서 만나 발등이 매끄러운 형태이다.

 

신발의 전면에는 달개를 매달아 단순하게 표현된 신발의 절제미를 더하고 있다.

신발 안쪽에 직물이 깔려있는 이 신발의 크기는 길이 34.5㎝이며 현대인의 평균 발크기와 비교해볼 때 엄청나게 큰 신발이다.

주로 큰무덤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왕의 권위를 상징하거나 망자를 위한 껴묻거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귀걸이

 

금제귀걸이(王), 무령왕릉 출토

백제, 국보 156호, 국립공주박물관

경주 부부총 출토

신라 6세기, 국보 60호

공주의 무령왕릉에서도 역시 왕과 왕비의 귀걸이 출토되었다.

 

왕의 귀걸이는 연결고리에 두 개의 드리개가 달린 형태이다. 반원통 모야의 장식 2개를 상하로 붙인 형태로 샛장식을 꾸민 드림에는 심엽형 장식이 꾸며져 있다. 신라 황오리 출토품과 유사한 형태이다.

 

다른 드리개는 여러 개의 원형장식을 차례로 이어 만들고, 여기에 작은 심엽형 달개를 화려하게 둘러 꾸몄다. 끝부분은 금 알갱이 붙임기법으로 만든 금모장식을 한 푸른 곱은옥으로 마무리했다.

수준 높은 금세공 기법의 장신구는 백제의 꾸밈문화 또한 신라만큼 화려했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신라의 고분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유물은 귀걸이다.

 

귀걸이의 종류는 두 가지로 확인되는데 굵은고리(太鐶)귀걸이와 가는고리(細鐶)귀걸이가 그것이다. 굵은고리귀걸이는 중심고리와 연결고리 장식의 세 단계가 일반적인 형태로 금관 장식에서 볼 수 있듯 관테나 모자에 달았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가는고리귀걸이는 다양한 형태로 꾸며졌기 때문에 직접 귀에 달거나 장식으로 쓰였다.

가는고리귀걸이의 샛장식(中間飾)은 보통 동그란 형태 또는 상하가 대칭되는 형태로 꾸몄다.

드림은 주로 심엽형이나 펜촉형의 장식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