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수(判數)에 대하여
오문선 -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Ⅰ. 판수(判數)의 개념
1880-90년대 조선의 풍속과 문물에 관심을 보인 이방인들을 위한 상업적 그림으로 추정되는 기산풍속도는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사이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민속 연구자료로서 소중한 가치를 가졌다.
기산풍속도 가운데는 점(占)을 치거나 독경 (讀經)을 하는 모습의 맹인들이 등장하는 그림들이 있다.
이들은 대개 판수(判數)로 불렸다. 판수란 점(占)을 치거나 독경(讀經)을 하는 맹인(盲人)으로,
우리 전통신앙의 한 흐름을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존재이다.
판수의 기원적 존재는 점을 치던 맹인들이었다.
『고려사(高麗史)』나『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고려나 조선 시대 맹인들은 형식적 관직인 검교직(檢校職)에 제수되거나
궁중 연회의 악사(樂士), 기우제같이 특수한 분야나 점복(占卜) 등의 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 맹인 가운데 일부였 다. 대부분의 맹인들은 점복에 종사하거나 구걸을 하는 등
사회 극빈층을 이루었으며, 이들에게는 국가차원의 구휼이 베풀어지기도 했다.
맹인들이 주로 점복과 독경에 종사했던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점을 치거나 독경을 하던 맹인들은 20세기 초반까지 전국 각지에 고루 분포하며 활동했다.
판수에 대한 최초의 연구논문이라 할 수 있는「盲覡攷」를 쓴 손진태는
이들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의 신앙생활상 占卜者로서 司祭者로서 呪術者로서의 기능을 가졌으며
사회생활상 없지 못할 일종의 존재였다.
그들은 巫女들과 함께 未來事를 알지 못하여 憔操하던 민중에게 그것의 吉凶을 예언하였으며
일년간 가족의 안녕행복을 위하여 成造歌, 王經, 觀世音經 기타의 經文을 읽었으며
病者災禍를 위하여 八陽經, 木神經, 突堀經, 三災經 등을 읽어 병자와 가내의 憑附한 惡鬼를 驅逐하였다.
구한말 조선에 온 미국 북장로교회 헐버트(H.B. Hulbert, 1863-1949)가
무당과 더불어 판수를 조선의 고유신앙을 주도하는 하나의 축으로 이해하기도 했던 것도
당시의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맹인들은 침(鍼), 구(灸), 안마업(按摩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 업종은 다른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입이 높고, 보행이 불편한 맹인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에 제생원(濟生院)을 설립하여 침 (鍼), 구(灸), 안마업(按摩業)을 교육하고,
1914년에는 안마술ㆍ침 술ㆍ구술영업취체규칙(按摩術ㆍ鍼術ㆍ灸術營業取締規則)을 제정하여
침사, 구사, 안마사 면허를 발급하였다. 이러한 생업상의 변화는 판수의 수를 크게 줄였다.
이와 더불어 전통신앙에 대한 인식변화와 의료기술의 발달 등도
전국적으로 분포하던 판수들의 수를 줄인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현재 서울의 판수들은 단체활동을 통해 독경(讀經)의 명맥을 유지하거나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점복(占卜)에 종사해 왔다.
점복에 종사하는 판수들의 활동은 서울의 성북구 돈암동의 미아리고개 일대를 중심으로 볼 수 있다.
독경(讀經)은 서울시 성북구 정릉 2동의 북악당을 중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온다.
비록 신앙적 차원에서 그 위상은 낮아졌으나
서울지역 독경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판수들의 의례가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본고는 기산풍속도에 소개된 판수의 그림을 소재(素材)삼아,
판수를 중심으로 한 신앙민속의 지속과 변화를 밝히는데 있다.
이를 위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통해 판수의 존재양상을 살피고,
판수의 의례와 활동을 신앙민속적 관점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더불어 기산풍속도의 판수그림의 내용을 현재 서울지역 판수의 의례와 활동을 비교함으로써
판수의 의례가 어떻게 변화되 전승되고 있는가를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울지역 신앙민속에서 판수가 어떻게 인식되고 표현되는가를
서울의 무신도(巫神圖)와 무가(巫歌)에서 보고자 한다.
Ⅱ. 역사기록으로 보는 판수의 존재와 양상
고려사(高麗史)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 따르면
판수의 기원적 존재라 볼 수 있는 맹승(盲僧)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맹승이란 용어는 『고려사(高麗史)』세가 숙종조에 처음 등장하고 있다.
기묘에 어사대가 사문진사 이제로는 ‘맹승 법종의 자이니 과거에 응함이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하니(중략),
과거에 응시케 하여야 할 것이다’하였다.<『고려사(高麗史)』세가 권11 숙종 1년>
『고려사(高麗史)』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동문선(東文選)』등에는
맹승(盲僧)이라는 표현 이외에도 ‘맹(盲)’ ‘ 맹무(盲巫)’ ‘맹인매복자(盲人賣卜者)’ ‘도류승(道流僧)’
‘맹인(盲人)’ 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한편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선사(禪師)’ ‘장림(丈林)’ ‘ 문복(問卜)’ 등도 드물게 볼 수 있다.
판수의 기원적 존재라 할 수 있는 맹승을 지칭하는 이런 용어들은 점복과 독경을 생업으로 삼았던
이들의 특성과 긴 작대기를 들고 점을 치러 다녔던 이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
맹승들은 고려시대부터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점복업이나 악사를 담당하거나
무당과 함께 종종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에 동원되었다.
임자에 우박이 내리거늘 맹승을 모아 비를 빌었다.<『고려사(高麗史)』세가 권29 충렬왕 2년조>
금년의 가뭄은 예전에 없던 바로서 기우제를 이미 열 차례나 행하였으나 아직 비가 올 징조가 없어
아주 민망스럽습니다. 경회루 못가에서 석척 및 맹인, 무녀의 기우제를 모두 오는 26일에 시작하여
3일 동안 하고 그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시행하려 전교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광해군 원년 6월 24일 계유조>
전교하기를 한재(旱災)가 이러하니 산천에 제사지내는 일 및 응당 행해야 할 기도(祈禱)에 대한일을
일체 전례에 따라 맹인과 무당을 시켜 기우제를 지내게 하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광해군 10년 윤4월 기묘조>
『지봉유설(芝峰說설)』을 쓴 이수광은 기우제와 같은 국행의례에 맹인이 동원되거나
민간을 위한 점복업에 종사하는 조선의 맹인이 중국과 달리 독특한 존재였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삼대시대로부터 천문현상을 관장하거나 점복업에 종사했던 맹인들의 존재가
다각도로 밝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의 유사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이능화는
점복맹인들이 점복을 하는 도류(道流)의 한 유파에 속하므로 맹승을 도류승(道流僧)이라 보았다.
손진태는
맹승들이 독경(讀經)을 하고 삭발한 것으 로 보아 불교의 감화를 받았고
고려시대부터 복서(卜筮)를 사용 했으므로 술가(道敎)의 감화를 받아 발생한 것이라 했다.
이러한 견해들은 도교와 불교, 무속적 요소가 혼재된 맹승들의 특성을 잘 전하고 있다.
일부 맹인들이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점복업에 종사하기 시작 한 것은 고려 원종 시기인 13세기 후반이다.
점복에 진출하여 활약해 온 맹인들은 고려 말기에 이르러 국가로부터 검교직을 제수받게 되었다.
검교직이란 고려 말, 조선 초기 정원 이상으로 벼슬자리를 임시로 늘리거나 공사를 맡기지 않고
이름만 가지게 할 경우 그 벼슬 앞에 붙이던 말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맹승들은 맹인들의 단체로 알려진 ‘明通寺’ 를 세웠다.
그 설립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태종 2년 7월에 맹인들이 ‘明通寺’에 모여 기우제를 행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맹인들의 단체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능화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설립한 맹승단체가 있었으며,
이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것이라 하여 맹인단체의 유래를 고려시대로 보았다.
태종 13년 이후부터는 국가에서도 ‘明通寺’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명통시를 지원했다는 사실은, ‘ 明通寺’가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에 관여했거나
점복업 등의 교육을 맡아 했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해 준다.
조선 후기에는 점복에 종사하는 맹승들이 점복을 통해 권력투쟁에 휘말리거나,
이들이 궁실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무고(巫蠱) 행위와 관련을 맺은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광해군 당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다 적발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궁궐내에서 벌어졌던 무고(巫蠱)의 다양한 방법과 그 과정에서 맹인의 역할을 소상히 알리고 있다.
역적 김응벽(應璧)의 공초에는
‘능묘의 저주는 지난해 2월에 한상궁(韓尙宮) 정이(貞伊)가 여맹(女盲)을 시켜
능소에 가서 경문을 외게 하였는데, 응벽 또한 함께 가서 저주하였다.
이때 오곡밥 세 그릇을 썼는데, 연이(連伊)가 주발을 가지고 밤중에 고양이를 묻은 곳으로 갔다.
그 무덤의 길이는 1척 가량 되었다. 또 경문을 대홍단자(大紅段子)에 써서 묻어 두었는데,
응벽이 황응인(黃應仁)ㆍ이만룡(李萬龍) 등과 더불어 함께 하였다.
궐내의 저주 또한 한상궁의 소행인데, 고온(古溫) 등이 응벽에게 말해준 것이다.
맹인 장순명(張順命)이 의의 처소에 들어가 의의 생년과 생월을 써가지고
차마 말할 수도 없고 차마 들을 수도 없는 말로 경문을 외었으며,
또 종이에 사람을 그린 뒤 바늘로 눈을 찔러서 부엌 바닥에 묻었으며,
또 산 개를 죽여서 전내의 소나무 숲에 묻었으며,
내관 민희건이 말[馬]을 결박하여 금구현(溝縣) 금산사(金山寺)의 깊은 못에 던졌으며,
최상궁(崔尙宮)이 고양이와 큰 수탉을 사서 서비(西非)로 하여금 해가 뜰 때 진주(眞珠)와 부적을 먹여
고양이에게 몰아 죽였으며, 나인 환이(環伊)는 또 누런고양이의 눈에 바늘을 꽂아 굴뚝에 넣었다고 한다.’
고 하였다. (중략)
저주의 방법은 모두 여맹(女盲)에게 배워서 하였는데,
대개 매화나무 위에 쥐를 찢어서 걸고, 궐내 서쪽 담장 밑에 흰 수캐를 두고,
서쪽 담장 안에 백지에 개를 그려 땅에 깔고, 보계(補階) 밑에 죽은 쥐를 버리고,
남쪽 계단 밑에 죽은 고양이를 두고, 오미자(五味子) 떨기 밑에 큰 자라를 두고,
우물 속에 마른 대구어 (大口魚)를 두고, 동궁의 남쪽 담장 안에 죽은 까치와 죽은 쥐를 던지고,
동궁의 담장에 돼지와 우립인(羽笠人)을 그리고, 대전마루 밑에 자라를 묻고,
측간 밑에 두 발과 두 날개를 끊은 까마귀를 두는 것이었는데(중략)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광해군 7년 2월 18일(을미)>
조선시대에 정쟁에 관여하게 되는 맹인들이 공식적으로 국가 기관에 소속된 경우는 드물었다.
이들은 대개 단지 점복에 능한 그들의 능력을 인정받아 사적(私的)인 관계를 통해 발탁된 사람들이다.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것과 같이 국가기관에 소속되거나 악사 등에 종사했던 맹승들의 존재는 일부였다.
대다수의 맹승들은 점복에 종사하거나 일이 없이 단순한 구걸 등으로 연명했을 것이다.
점복이 시원찮은 이들도 있었다.
조선 후기를 지나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맹승들은 대개 판수로 불렸다.
이 시기 국행의례와 관련된 이들의 역할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민간에서 이들의 종교적 역할은 두드러진다.
이 시기는 무당과 더불어 판수의 존재도 무속의 테두리 안에서 인식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판수는 여전히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지만 무당이 담당했던 것과 같은 각종 종교적 역할을 수행하는
종교사제의 성격을 가졌다. 특히 축귀(逐鬼)와 관련된 종교적 역할을 판수가 전문적으로 담당하며,
판수는 무속의 테두리 속에서 그 성격과 역할을 자리매김하였다.
아래의 신문기사는 판수와 무당이 같은 부류로 인식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경 읽는 판수들은 모두 머리를 깎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를 선사(禪師)라 하였다.
늙은 판수 김을부(金乙富)라는 사람이 광통교(廣通橋) 가에 살았는데, 점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사람이 다투어 점을 쳐보았으나 맞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아 부인들이 모두 말하기를,
“ 광통교 선사가 흉하다고 하면 길하다.” 하였다.. -『용재총화(傭齋叢話)』
조선 백성들이 살 수 없다고 하면서 헛되이 돈 내어 버리는 것을 생각하게 되면
가히 우습고 탄식할 일이 많이 있는지라.
서울 문 밖의 어리석은 여인네들을 속여 돈 뺏는 무당과 판수들이 천여 명인데(중략)
판수의 경 읽고 무녀의 굿하고 기도하는 것은 곧 혹세무민하여 사람의 돈을 뺏는 것인즉
강도랑 다름이 없는고로 경무청에서 인민을 위하여 엄히 금한 것인데(중략)
정확한 시기를 단언하기 어렵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점(占)과 축귀(逐鬼)를 전문으로 하던 앞을 못 보는 판수는 점차 줄었다.
판수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맹인들이 점복 외에도 안마업이나 침구술에 종사하는 사례가 많아진데서
그 원인을 볼 수 있고, 의료기술의 발달을 포함하여 서양종교 유입 등 다양한 요인과도 맞 물렸다.
그러나 판수의 독경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서울의 경우 성북구 정릉 2동의 북악당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방식의 독경이 명맥을 유지하고,
안맹(眼盲)이 아닌 이들도 학습을 통해 점복과 독경에 종사하기도 한다.
또 강신체험을 통해 무(巫)가 되는 경우에도 강신무들의 선굿이 아닌 독경에 종사하는 이들을 볼 수 있다.
현재 이러한 독경의 전승이 우세한 곳은 충청도와 강원도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독경은 ‘좌경(坐經)’ 또는 ‘앉은굿’ 등으로 불리며,
독경을 주재하는 이의 명칭은 불교용어인 법사(法師)로 대체되었다.
Ⅲ. 판수의 여러 의례와 내용
판수들의 의례는 독경(讀經)이나 축언(祝言)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이들이 주로 읽는 경문은 금단경(禁壇經), 영보경(寶經), 연생경(延生經), 태일경(太一經), 옥추경(玉樞經), 진무경(眞武經), 용호경(虎經), 용왕경(王經), 옥갑경(玉甲經) 등의 도경(道經)과
팔양경(八陽經), 천수경(千手經) 등이 있다.
판수를 기원적 존재로 하고 있는 충청도지역 법사들은 옥추경, 옥갑경, 기문경, 천지팔양경 등을
중요한 4대 경문으로 꼽는다.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나 궁중 내의 맹승 혹은 판수들의 의례절차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민간의 의례와 비교해 그 양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민간의 독경제는 새로 집을 지을 때 많이 열렸다.
집을 새로 짓고 상량할 때 대들보 위에 ‘모년모월시 상량대길’이라 쓰며,
바깥문에 ‘경신년월일시 강태공이 지었다’고 써서, 집이 준공된 다음에 판수를 불러 옥추경을 읽게 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과거에 응시하려는 유생들이 인왕산 칠성암의 신당에 와서 기도(祈禱)드리면
반드시 과거에 급제한다 해서 맹인들로 하여금 경을 읽게 하는 풍습이 있었다.
판수의 의례로는 질병과 관련된 독경이 가장 두드러진다.
다른 집에서 음식이나 의복이 들어왔을 때 질병이 생기면 판수를 불러 경을 읽고 잡귀를 쫓게 했다.
판수가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손에 들고 독경하면 환자의 병이 낫는다고 믿었고,
판수로 하여금 귀신을 쫓는 경문을 읽고 복숭아나무의 가지로 정신질환자를 때리면 정신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병이 났을 경우 판수들을 불러 3일이나 5일, 7일 동안 경을 읽는다.
마지막 날에는 신장(神將)의 강림을 청하여 사귀(邪鬼)를 잡아 가둔 후 땅에 묻는다.
복숭아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신장대[神將竿]를 만들고 작은 각시를 만들어 이를 사귀라 했다.
그 옆에 주둥이가 좁고 밑이 넓은 병을 놓은 후 판수들은 신장이 강신하도록 정성을 다해 경을 하면
신장이 강림하였다는 신호로 신장대를 잡고 있는 손이 저절로 떨기 시작한다.
이 때 맹인이 사귀를 잡아달라고 청하면 신장대는 귀신을 찾아 아픈 사람의 몸과 방안 여기저기를 찾다가
각시를 만나면 맹인은 호통을 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사귀가 병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나 사귀는 쉽게 들어가지 않고 이리저리 피해 다닌다.
맹인은 다시 사귀를 병 속에 몰아넣고 메밀떡으로 병을 막고 헝겊으로 싸매어 빠지지 않도록 한 후
신장대가 가리키는 장소에 묻는 것으로 병자를 치료했다.
정월을 즈음해 한 해의 액을 막고 복을 구하는 의미에서 판수들을 불러 경을 읽는 풍습도 일반적이었다.
장님을 불러서 보름날 전부터 안택경을 읽으며 밤을 새우는 풍속도 있다. 액을 막고 복을 비는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풍속에 장님의 점을 쳐서 그 말을 믿고,
일직성(日直星), 월직성(月直星), 수직성(水直星) 등의 명궁(命宮)에 든 자는 재액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종이를 잘라 해와 달의 모양으로 만들고 이것을 나무에 끼우며 이것을 용마루에 꽂아둔다.
<『경도잡지(京都雜誌)』>
Ⅳ. 기산풍속도 속의 판수와 서울지역의 판수
김준근의 그림에 대한 미술사 분야의 연구에 의하면,
기산풍속도는 1880-90년대에 주로 원산을 근거지로 삼아 조선인의 풍속과 풍물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이방인들을 위해 상업적으로 그림을 그린 화가집단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산풍속도에서 판수를 그린 그림은
무당들의 굿 모습을 담은 그림과 비교해 숫자적으로 거의 비슷한 비중을 나타낸다.
이는 선교사로서 조선의 민간신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헐버트(H.B. Hulbert, 1863-1949)가
판수를 무당과 더불어 조선의 고유신앙을 주도하는 하나의 축으로 이해하기도 했던 점과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산풍속도 가운데
판수가 등장하는 그림은 판수의 역할과 행위의 내용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판수의 독경모습, 단골을 상대로 점을 치는 것, 판수가 점을 치러 다니는 것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독경의 모습을 담고 있는 모습은 판수 내외만 등장하는 그림과
판수와 더불어 대잡이, 단골가족까지 함께 등장하는 그림으로 나눌 수 있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을 비롯해 서울역사박물관,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이른바 모본의 단일 장면을 그대로 계승하여 또 다른 그림을 생산하였다고 하는
기산의 풍속화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과 독일 함부르크박물관의 소장품은 그림이 담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볼 때
앞서 소개한 모본들을 바탕으로 한 그림들과는 조금 차이가 난다.
이 두 박물관의 소장품은 의례의 상황을 보다 세밀하게 전하고 있다.
특히 독일 함부르크박물관의 소장품은 독경의 주재자인 판수 이외에도
독경이 벌어지는 공간과 도구에 대한 정보, 독경의 한 과정인 대잡기에서 대를 잡는 대잡이,
독경을 의뢰한 단골가족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판수의 독경의례의 전모를 보다 잘 드러냈다.
이러한 구성상의 변화는 여러 기산풍속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그림은 판수 내외만 등장하는 독경그림과 달리 독경에 대한 풍부한 정보를 담기 위한 목적 등으로
모본의 도상을 재구성하여 그려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그림상의 이러한 변화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임의성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주문 받은 사람과
이방인으로 조선에 온 외부자로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주문을 한 사람과의 소통이 있었다면,
이러한 변화는 그림상의 단순한 재구성의 의미를 뛰어 넘어
어떤 문화적 소통을 지향하거나 의사소통이 반영된 결과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문화의 내부자적인 입장에 있는 화가는
판수의 단순한 독경 모습만으로 판수의 의례와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지만,
조선의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외부자로서의 이방인들은
판수의 독경모습만으로는 판수를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과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의 판수 그림이
판수 독경의례의 전모를 잘 담고 있는 것은,
주문자인 이방인과 주문받은 사람인 화가의 문화간 의사소통 결과가 그림에 반영되거나
이방인을 위한 문화적 소통의 지향이 그림으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복자점치고」란 화제(畵題)가 붙은 그림은 판수가 점을 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대개 판수들이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생업에 종사하기 어려워 점을 치는 일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품에서 볼 수 있는데,
판수의 지물(持物)로 보아 거북점을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판수가 점을 치러 다니는 모습의 그림(呼占)도
그 양이나 그림의 제작방식이 독경 그림과 거의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호점(呼占)을 그린 그림은 모본의 기본도상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스왈른본), 서울역사박물관, 영국도서관 소장품에서는
판수 외에 또 다른 인물을 등장시키거나 판수를 한 명 더 그림으로써 변화를 주고 있다.
독경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은 판수가 북과 징을 치며 경을 읽 는 독경의 일반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주목되는 점은 맹인송경의 경우 의례를 진행하는 인물들이 내외로 등장하는 모습이다.
판수의 점복과 독경이 맹인들의 호구지책에서 비롯되고, 맹인들끼리의 혼인이 많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독경의례의 의례적 특성, 무신도에도 맹인 내외가 신령으로 등장하는 점 등을 감안하면
판수가 내외를 이루어 의례를 행했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을 보면 명백한 실수로 보이는 몇몇의 장면들이 발견된다.
우선 판수와 내외격으로 보여지는 여성인물이 있는 그림을 자세히 보면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의 김양선본의 경우 여성 판수가 안맹(眼盲)이 아닌 상태이다.
더욱이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의 독경 그림은 판수 내외가 전부 안맹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동일한 맥락으로 여성 판수의 지물(持物) 또한 지적할 수 있다.
채색이 되지 않은 그림들에서 여성 판수의 지물인 이두령(二頭鈴)으로 보이는데,
채색된 상태의 그림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스왈른본이나 프랑스 국립기메 동양박물관 소장의
그림에서는 여성의 지물(持物)이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아 그 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만약에 이들 그림들이 어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려진 것이라면 결정적인 결점을 안고 있는
그림인 것이다. 이러한 실수는 기산풍속도의 다른 작품에서도 더러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한 명 이상의 화가들이 함께 일하는 협업형태의 가능성으로 볼 때 작업상 실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산의 호인(號印)이 찍힌 천 여 점 이상의 작품에 김준근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이 크고
이 그림들이 조선의 문화에 낯선 이방인들을 위한 상업적 목적의 그림이라면, 작업과정과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통해 몇몇 명백한 실수에 대한 배경과 이유 또한 구체적으로 밝혀져야겠다
판수의 독경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을 서울지역 독경의례와 비교해 보면 몇몇 차이가 발견된다.
2005년 복원된 서울의 독경의례에 의하면
서울지역 독경은 다른 지역과 달리 여러 영역에 걸쳐 불교적 요소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지역의 독경은 맹인단체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고,
타 지역의 독경이 학습이나 강신에 의해 비안맹인 법사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는 것에 비해
안맹인 판수들이 집단으로 참여해 독경을 이끌어가는 특징을 보인다.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의 그림과 같이 독경에서 대를 잡는 양상은
현재 충청도 일대의 전승되고 있는 앉은굿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본래 대잡이는 마을마다 대를 잡는 이가 있었으나 지금은 대잡이들이 거의 사라졌다.
여기에서 대란 흔들림을 통해 신의 의사가 인간에게 전달되거나 접신(接神)됨을 알리는
일종의 무구(巫具)적 성격을 갖는다. 신의 의사가 전달되면 대가 떨리거나,
대잡이의 손에 들린 대가 문제가 있는 곳에 가 내려 앉는다.
이때 대의 떨림이나 움직임은 대잡이의 의사가 아니라 신의 의사로 인식된다.
호점(呼占)을 그린 그림은 판수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점을 치러 가는 모습이다.
판수가 호구지책으로 점을 치러 거리를 직접 다니는 모습은 현재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맹인으로 태어난 이에게는 어려서부터 점을 치는 법을 배우게 했으며,
서울지역의 경우에도 불과 몇 십년 전까지도 판수들이 점을 치러 다녔던 것이 일반적 양상이었다.
서울지역의 경우 판수들은 ‘무이리~수 에~’ 하고 외치고 다닌다 했다.
이것은 판수가 점을 치러 다닐때 냈던 소리인 ‘문수(文數)요’ 하는 것에
음정과 박자를 가미하여 발성한 것이 변형되어 고착된 것으로 보인다.
Ⅴ. 서울지역 무신도(巫神圖)와 무가(巫歌)에서 본 판수
판수는 의례를 직접 주재하는 존재이기도 했으나 무속에서는 신령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서울지역 여러 유서있는 당(堂)에서는 판수가 신령으로 모셔진다.
이는 판수가 점을 치고 의례에 종사했기 때문에 무당의 조상신적(祖上神的) 성격으로 봉안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서울의 무신도에서 판수가 신령으로 모셔져 무신도로 봉안되어 있는 사례는
구파발의 금성당, 용문동 남이장군 부군당, 영등포구 방아고지 부군당 등에서 볼 수 있다.
구파발의 금성당 무신도의 판수는 금성당의 하당에 봉안되어 있는데,
각각 맹인도사와 맹인삼신마누라로 불린다. 이들이 내외관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가운데 맹인도사는 와룡관에 남색 도포, 홍색 술띠를 둘러맨 차림으로, 거북이를 들고 있다.
맹인 도사의 지물(持物)인 거북이는 거북점을 치는 도구이다.
맹인도사의 앞에는 시종격인 어린 맹인 둘이 앉아 있다.
맹인도사는 눈병을 고쳐주는 영험력과 자손번영, 수명장수, 가운의 대통을 관장하는 신령으로 모셔졌다.
맹인삼신마누라는 조바위를 쓴고 남치마와 초록색저고리 차림으로,
방울을 흔들며 아기를 점지해 달라고 점을 치고 있다.
맹인 삼신마누라는 아기를 점지해 주기도 하지만 눈병을 고쳐주는 신령으로 인식되었다.
남이장군 부군당에는 맹인 내외로 이름 붙여진 무신도가 있다.
맹인 내외의 무신도는 당의 좌측 상단에 봉안되어 있다.
여성 판수는 쪽진 머리와 치마저고리 차림이며, 남성 판수는 갓을 쓴 두루마기 차림이다.
이들은 각자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남성 판수는 손에는 요령이 들려 있어 이들 내외가 점을 치는 판수임을 더 분명하게 해준다.
한편 이들의 앞에는 시종(侍從)격의 어린 판수가 등장하는데 몸집이 아주 작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흔히 서울지역 무신도에서 신적 비중이 낮은 시종격의 신령들이 주격 신령들보다 상대적으로
아주 작게 그려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 시종격의 판수는 손에 부채를 들고 있으며,
맹인 내외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판수 내외를 당안에 봉안한 것은 마을 사람들의 눈병을 예방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남이장군 부군당과 금성당의 무신도에서 판수가 각각 남신과 여신으로 등장하는 것과 달리
방아고지 부군당은 남신만 봉안되어 있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양의 이 판수는 지팡이를 지물(持物)로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굿거리에도 판수가 등장한다.
정식의 굿거리를 전부 마치면, 정식의 굿거리에 초대받지 못한 잡귀잡신을 모시는 뒷전이 이어진다.
예를 들면 일명 ‘갖인뒷전’ 이라고 불리는 성주받이 뒤전은
양반집의 재수굿인 천신굿(薦新굿)에서만 연행되는데,
단순한 잡귀잡신의 나열이 아니라 춤과 재담, 노래로 구성된다.
여기에는 판수가 등장하는데, 판수가 등장하여 재담과 점을 치는 것 등으로 뒷전이 진행된다.
소경놀이 무가의 내용에는 판수의 점복과 점치는 도구 등이 등장한다.
아래의 무가는 삼각산 도당제의 뒷전에서 놀아지는 소경놀이 가운데 한 부분이다.
판수가 무당의 굿에 등장하는 것은
판수도 인정하는 좋은 굿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러나 내가 아흔아홉 수살귀 영산다리를 떡 건너다가 내가 첨미통을 잃어버렸어.
그러니까 첨미통을 잃어버려으니까 대신 내가 이걸루 점괘를 보리다. (중략)
여보! 세상에 무당들이 알기는 아주 족집게처럼 알고 굿을 했구랴. 산통천문을 흔드니까 삼괘가 나왔거든.
근데 대동 일동이 다 편안한데 5월 6월에 거리 노중에서 깜짝 놀랄 일이 있어.
아, 그런데 이따가 술이나 잔뜩 먹고 굿판 마른 목을 점질러서
산 좋고 물 좋고 경치좋은 데로 그저 그냥 잡귀잡신을 몰아다가 요절을 내면 편안해,
그리고 도화주 가중에 이화주 가중에 삼화주 가중인데 조금 미진하구 꾸려.
그러니까 돌다리두 두드리고 건너가라고 했으니깐은 올해 이렇게 모든 매사가 편안치가 못하니까
모든 매사가 돌다리도 두드리고 차근차근 해나가면은
그럭저럭 올해 해후년에 을유년 열두달 사백은 여순날에 하루같이 편안하게 된단 말이야.
그럼 대동 일동이 편안하다고.
Ⅵ. 마치는 글
일제강점기까지 무당과 더불어 전통신앙의 한 축을 주도하던 판수들은
점을 치던 맹인들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맹인들의 일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검교직을 제수받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독경이나 점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맹인들은 침(鍼), 구(灸), 안마업(按摩業)에 진출하는 사례가 많았다.
다른 직종에 비해 수입이 높고, 보행이 불편한 맹인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880-90년대에 조선인의 풍속과 풍물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했던 이방인들을 위해 그려진
상업적 성격의 기산풍속도 가운데는 판수의 역할과 의례를 담고 있는 그림들이 있다.
이는 당시 판수라는 존재가 무당과 더불어 전통신앙의 한 축을 구성하고 있는 당대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산풍속도의 판수 그림들은 구한말 이방인들을 위한 상업적 그림으로서,
모본을 바탕으로 생산되는 체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생산체계 속에서 보다 정확한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 구성상의 변화를 보이는 것은
문화의 내부자인 화가와 주문자인 외부자의 의사소통의 결과일 가능성이나
문화에 낯선 이방인을 위한 소통의 지향이 그림에 표현되었을 것으로 해석가능하다.
서울의 경우 판수들은 맹인단체를 중심으로 독경의례의 명맥을 이어온 특징을 보인다.
한편, 판수는 의례를 주관하는 사제자로서 뿐만 아니라 무속에서 신령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이는 판수가 축귀(逐鬼)를 담당하는 사제자로서
무속의 테두리에서 일종의 조상신적 의미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판수는 서울굿의 말미인 뒷전 소경놀이에 등장하여 굿의 재미를 더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 기산풍속도 특별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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