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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의 비밀] 16. 영녕릉(세종대왕릉/ 효종릉)

Gijuzzang Dream 2009. 10. 4. 18:08

 

 

 



사적 제 195호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황대리 산 83-1

  
영녕릉 가는 길 :
영동고속도로 여주IC → 여주읍 방향(37번 도로) → 왕대리방향(42번 도로에서 365번 도로) → 이정표

 

 

 

 






          

영릉(英陵)

                      


눈부신 치적으로 조선 역대 왕 가운데 특별히 ‘대왕’으로 불리는 세종이

소헌왕후와 함께 잠들어 있다. 합장릉 형식으로는 세종 영릉이 처음이다.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과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 1446) 심씨의 합장릉이다.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140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

1418년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됨에 따라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그해 22세의 나이로 4대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옛 영릉 터에서 출토된 세종대왕신도비(안평대군 글씨)는

현재 서울시 동대문구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영릉 비각에는 영조 때인 1745년 세운 비석이 모셔져 있다.


원래 영릉은 1446년 소헌왕후 승하 후 광주 헌릉 서쪽에 조성하여

그 우실(右室)을 왕의 수릉(壽陵)으로 삼았다가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했다.

이 능은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병풍석(屛風石)에서 영저(靈杵) · 영탁(靈鐸) · 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병풍석의 기본을 확정했으며,

혼유석의 고석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바뀐 것들도 있다.

세조 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논이 대두되었으나 서거정이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 이곳으로 옮겼다.

이때는 세조의 유언으로 병풍석과 석실의 제도를 폐지하고, 회격(灰隔)으로 합장했다.



봉분을 지키는 석호가 무섭기보다는 해학적이다.


세종 영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최고의 명당지로 꼽히며,

《국조오례의》를 충실히 따라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드러낸 왕릉이다.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낸 능 가운데 하나가 영릉(英陵)이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이룩했으며,

좌우측에는 청룡·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역의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신도를 따라 정자각에 이른다.

정자각 동쪽에는 수복방과 비각, 서쪽에는 수라간이 있다.

봉분 둘레에는 12면으로 꾸민 돌난간을 돌렸으며,

난간석을 받치고 있는 동자석주에 한자로 12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으며,

앞에는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2개의 혼유석과 장명등석을 놓았고, 좌우에 망주석을 세웠다.

봉분 능침 주변에 양석과 호석을 서로 엇바꾸어 좌우로 각각 2쌍씩 8마리를

밖을 향하여 능을 수호하는 형상으로 배치하고, 봉분의 동·서·북 세 방향에 곡담을 둘렀다.

봉분 앞 한층 낮은 단(중계)에 문석인 1쌍,

가장 아랫단(하계)에 무석인 1쌍을 세우고, 문 · 무석인 뒤에는 각각 마석을 배치하였다.

 

 

 

  

 

 

 영릉 - 세종과 소헌왕후

 

왕과 왕비 혼령 이동 조선왕조 최초의 합장릉

 

 

영릉의 전경, 멀리 주산인 북성산이 보인다. 이런 형국을 회룡고조형이라 한다.

 

경기도 여주군에 있는 영릉(英陵)은

조선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과 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 태종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이름은 도(도), 자는 원정(元正)이며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졌다.

만백성의 스승인 세종이 태어난 날을 기려 ‘스승의 날’이 5월 15일이 됐다.

 

세종은 1418년(태종 18)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돼 22세에 제4대 임금에 등극했다. 그리고 54세로 승하할 때까지 31년 6개월간 재위하면서 ‘훈민정음’ 창제, 집현전 설치, 민본정치 실현 등 조선시대 정치 · 경제 · 사회의 안정과 문화의 융성을 일궈내며 역대 군왕 중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한 세종이 몸이 쇠약해지도록 공부만 하자 이를 걱정한 태종이 책을 모두 거둬들였다고 할 정도로 세종은 공부벌레였다.

 

어깨에 메는 상여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는 영의정 심온의 딸로 세종과의 사이에 8남 2녀를 두었다. 첫째 아들이 제5대 문종, 둘째 아들이 제7대 세조이며 제6대 단종이 장손이다. 그러나 조선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인 심온의 삶은 딸이 왕비가 된 후 평탄치 않았다.

외척세력을 철저히 배제했던 상왕 태종은 심온이 영의정이 되자 명나라 사신으로 파견, 국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더니 돌아오자마자 체포했다. 심온은 수원으로 압송되던 중 자결했다.

 

1446년(세종 28) 소헌왕후가 병이 나자 동궁(세자)과 대군들이 산천, 신사, 불사로 가서 기도드리고 팔(臂)을 불태우며 소신공양을 했으나 그해 3월 24일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집에서 승하했다.

국장도감(장례위원장)은 영의정 황희(黃喜), 산릉도감은 우의정 하연(河演)이 맡았다. 승하 4개월이 되는 7월, 장례일을 택하는데 7일과 19일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서운관(풍수비서관)이 7일은 임금에게 안 좋고 19일은 금기일이라 하자 세종이 직접 7일로 결정했다. 장지를 결정할 때도 논란이 있었다. 신하들은 대모산 아래 서쪽이 좋지 않다고 했으나 세종은 부모 곁만 한 길지가 없다며 지금의 서초구 세곡동 인릉 주변에 자신과 왕비의 능을 만들었다. 세종의 결단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예조에서 “그동안 운구를 유거(柳車·재궁을 실어 소나 말로 운반하는 수레)로 한 것은 중국의 풍습으로,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아 불편하니 어깨에 메는 상여가 좋다”고 하자 이 말을 따랐다. 이것이 민가로 퍼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의정부에서 대행대비의 시호를 소헌, 효순, 효선으로 추천하자 세종은 “뛰어나고 깊이 깨달은 것이 소(昭)이고, 선을 행하여 기록하는 것이 헌(憲)”이라며 소헌으로 정했다.

  

영릉은 ‘국조오례의’의 형식을 따른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혼유석이 2개인 것은 합장릉을 의미한다.

한 달 뒤 능지의 산역 행사가 시작됐다. 현궁(玄宮 · 임금과 왕비의 봉분)은 같이 하고 광중(壙中 · 석실)은 달리하며 석양과 석호, 석인은 2개 광중의 예에 따르라 명했다. 왕후는 동측, 왕은 서측에 배치했다.

 

광의 깊이는 10척으로 했다. 광중 동실(왕후 방)의 천상에 먹칠을 하고 하늘 모양을 만들어 동서에 해와 달을 그리고 성신과 은하, 성좌를 둥글게 그렸다. 왕후의 석실 벽에는 분으로 바탕을 칠하고 서측에 백호, 북측에 현무, 동측에 청룡, 그리고 남측 문 두 짝에는 주작을 그렸다. 백호와 청룡은 남측으로, 현무와 주작은 서측으로 머리를 향한다. 이처럼 세종은 생전에 자신의 합장릉(수릉)을 조성하면서 현궁은 석실로 하고 삼물(석회 · 황토 · 마사토)과 숯가루, 본토를 사용했다.

 

4년 뒤인 1450년 2월 16일 세종이 위독해 정사를 중단했는데 다음 날 막내아들인 영흥대군의 동별궁에서 승하했다. 세종은 일찍이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지내다 승하한 선왕들과 달리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하루도 국정을 놓지 않았다.

 

세종에 대해 실록은 “슬기롭고 도리에 밝으며, 마음이 밝고 뛰어나게 지혜로우며,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지혜롭고 용감하게 결단하며, 합(閤 · 침실)에 있을 때 배우기를 좋아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라고 기록한다.

 

의정부에서 존시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라 하고 묘호를 ‘세종(世宗)’이라 올리니 그대로 따랐다. 묘호를 올리면서 성군의 업적을 기록하는데 “태평한 정치와 거룩하신 공적이 탁연하여 비할 데 없다”라고 했다.

 

 그해 6월 10일 장례 때 청조(靑鳥 · 푸른빛 봉황)가 능지를 점치고 황룡이 앞길을 인도했으며, 능지인 대모산(영릉 초장지의 주산으로 현재 서울 서초구 헌인릉 뒷산)을 향할 때 한강의 물조차 목메어 울고 바위굴이 어두워 구름조차 못 간다고 했다.

 

장생수파 터로 옮겨

 

그로부터 17년 뒤 단종을 폐하고 사약을 내린 세조는 신숙주, 한명회, 임원준, 서거정 등에게 영릉 천장을 명하나 풍수가들과 서거정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468년 아버지 세조의 뜻을 이어받은 예종이 다시 천장을 요구하자 정인지, 신숙주, 노사신, 서거정, 한명회 등이 상지관의 의견을 들어 이계전 분묘가 장생수파(長生水破)의 터라고 추천했다.

 

일화에 따르면 이들이 여주 북성산에 올라 사면을 바라볼 때 마침 산기슭에 정기가 어린 곳이 있어 찾아가보니 풍수적으로 뛰어난 지세였다. 하지만 이곳에는 이미 세조 때 대제학을 지낸 이계전과 우의정을 지낸 이의손의 묘가 있었다. 일행은 서울로 돌아와 예종에게 이를 아뢰었다. 몇 군데 산릉 자리를 살펴보았지만, 이계전 무덤 자리야말로 자손이 창성하고 만세에 승업을 계승할 땅이라며 왕릉 모실 장소로 이보다 좋은 곳이 없다고 했다.

예종은 평안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로 있던 이인손의 맏아들 이극배를 불렀으나 대놓고 그 자리를 비워달라는 말은 못하고 은근히 그 뜻을 비쳤다. 이에 이극배는 아우들과 상의한 끝에 조상의 묘자리를 내놓았다. 예종 또한 기쁜 마음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대신 부모의 묘를 이장하는 것이 매우 애절한 일이라며 이극배를 의정부 우참찬(정2품)으로 승진시켰다.

 

이극배의 집안에서도 이장을 위해 산소를 파고 유해를 들어내니 그 밑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왔다.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어라. 그리고 바람에 날려 연이 떨어지는 곳에 이묘를 옮기어 모셔라.”

여러 사람이 신기하게 여겨 그대로 했더니 과연 연은 바람을 타고 서쪽 약 10리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 자리에 이장한 뒤에도 자손이 번창했다. 그곳은 연이 떨어진 마을이라 하여 ‘연주리’가 됐다.

 

훗날 영릉이 이 자리로 이장해서 조선 왕조가 100년 더 연장됐다는 설이 퍼졌다.

이를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 한다.  

 

정자각 측면에서 바라본 영릉.

 

영릉 터는 천하명당으로 평가받는 곳이다. 풍수가들은 이곳을 용이 똬리를 트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 봉황이 알을 품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이며, 북성산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산맥인 안산(案山)들이 마치 신하가 왕릉을 향해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는 데다 좌우의 청룡과 백호는 겹겹이 산머리를 돌아 혈(穴)을 감싸주어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을 한 ‘모란반개형(牧丹半開形)’의 명당이라 한다.

 

천장을 할 때 세조의 뜻에 따라 석실이 아닌 회격실로 하고 광릉(光陵 ·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무덤)의 예를 따랐다. 병풍석을 쓰지 않고 명기 등은 새로 만들었다. 비석, 잡상, 정자각, 향관청 등은 옮겨서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었는데 이를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발굴했으나 비각만 발굴되고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함께 발굴된 석물들은 영릉의 것이 아니라 옆에서 천장한 희릉의 것으로 2008년 판명됐다.

잡상들도 옮기지 않고 으슥한 곳에 묻었다. 이 유물들은 헌인릉 주변에 묻혀 있거나 수세기 후 인릉에 다시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다.

 

1469년(예종 3) 2월 23일, 구지(舊址)를 천장하려 천궁을 하니 현궁에 물기 하나 없고, 재궁(齋宮)과 의복이 새것 같았다고 한다. 3월 6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는 영흥(여주)으로 옮겨 안장됐다.

1970년대에 발굴된 영릉 초장지의 신도비, 청량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입구에 있다(왼쪽). 세종과 소헌왕후의 비. 영조 때 만들었다.

영릉은 1469년 이장하면서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병석(屛石)에서 영저(靈杵) · 영탁(靈鐸) · 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난간석의 기본을 확정했다. 또한 혼유석(왕릉의 봉분 앞에 놓는 직사각형의 돌)의 고석을 5개에서 4개로 줄이는 등 제도상 바뀐 것들도 있다.

난간석에 방위를 표시하기 위해 그동안 십이지신상을 조각해왔으나 이때부터 십이지간 문자로 표현한 것도 변화 중 하나다.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이 2개인 것은 합장릉임을 나타낸다. 합장릉은 2개의 격실 사이에 48cm의 창문(창혈)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통하게 했다.

 

영릉은 1970년대 성역화 사업 중 원형 일부가 훼손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에서 우려를 하고 있다. 최근 재실 터가 발굴돼 재실의 원위치 복원과 경관 보존이 요구되고 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 5명의 후궁 사이에 18남 4녀를 두었는데 이 중 첫째 문종의 현릉(顯陵)은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으며, 둘째 세조의 광릉은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1에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2010. 04.27. 733호(p78~80), 주간동아 [신의 전원, 조선왕릉] 

 

 

 

 

 

 


          

영릉(寧陵)



효종과 효종왕비 인선왕후가 잠든 동원상하릉으로,

위쪽이 왕, 아래쪽이 왕비의 능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아들로 대군 시절,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조선 17대 효종(孝宗, 1619~59)과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74) 장씨의 쌍릉이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병자호란으로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가

온갖 고초를 겪었다. 1645년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서거 소식에 귀국하여 세자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왕에 즉위했다.




공간 구성과 배치가 뛰어난 영릉 재실.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었다.

효종은 대동법을 실시해 백성의 조세부담을 덜어주었고,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효종은 무엇보다 북벌정책을 수립하고 군비개편은 물론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나 북벌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659년 4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인선왕후는 봉림대군을 따라 8년간 심양에 머물며 현종을 낳고,

1645년 귀국해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아래쪽 인선왕후 능에서 바라본 효종 능. 왕의 봉분 주위에만 곡장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는 왕과 왕비가 부부이기 때문에 한방을 쓴다는 개념이다.


각 지붕 뒤로 인선왕후 능과 효종 능이 차례로 보인다.

정자각 지붕과 왕릉 사이에 보이는 건물은 비각이다.

 

원래 효종의 능은 건원릉 서쪽 산줄기(원릉 자리)에 병풍석을 갖춘 왕릉으로 조성되었다.

1673년 현종 때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 하여 여주의 영릉(英陵) 곁으로 옮겼다.

그 다음해에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되어

왕릉 앞에 왕비릉을 써서 앞뒤로 나란히 쌍릉을 이루었다.


 

 영릉 - 효종과 인선왕후

 

8년간 끔찍한 볼모생활 ㅡ 자나깨나 '북벌의 꿈' 꾸었다

 

 

멀리서 보면 영릉은 옆으로 누운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영릉(寧陵)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1649. 5~1659. 5)과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1618~1674)의 능이다. 같은 능선 위에는 왕의 능침을, 아래에는 왕비의 능침을 조성하는 동원상하봉 형식의 쌍릉이다.

조선시대 최초의 동원상하봉 능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영릉(英陵) 동측 능선 너머에 있다.

 

효종은 1618년(광해군 11) 5월 22일 서울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서울시 종로구 종로 3가 부근) 사저에서 16대 왕 인조와 인열왕후의 5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효종의 이름은 호(淏)이며 자는 정연(靜淵), 호는 죽오(竹梧)다.

 

효종이 태어난 날 저녁에 흰 기운이 침실로 들어와 오래 머물다 흩어졌다고 한다.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과일, 채소 같은 흔한 것이라도 반드시 아버지 인조에게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늘 효자라고 칭찬하며 사랑과 기대가 높았다. 인조의 병세가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시호를 효종이라 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함께 볼모로 끌려가 청나라 심양에 8년간 머물렀다.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봉림대군은 그대로 청나라에 있다가 그해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 세자에 책봉됐다. 그리고 인조 승하 5일 후인 1649년 5월 13일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해 1659년 5월까지 꼭 10년간 재위했다.

 

효종은 조귀인(趙貴人 · 인조의 후궁)의 옥사를 계기로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키고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등 대청(對淸) 강경파를 중용,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해 나라의 중요 정책목표로 삼았다. 또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날로 강해지는 청의 군사력에 눌려 북벌을 실천하지 못했다. 대신 두 차례에 걸친 나선(러시아) 정벌에서 군비를 확충하는 효과를 보았다. 한편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을 훈련도감에 수용해 조총·화포 등의 신무기를 개량하고, 이에 필요한 화약을 얻고자 염초(焰硝) 생산에 주력했다.

 

효종은 두 차례의 외침으로 흐트러진 경제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충청도,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던 것을 쌀, 베 혹은 돈으로 통일해 바치게 한 납세제도)을 실시해 성과를 거두었고, 전세(田稅)를 1결(結)당 4두(斗)로 고정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고 유통시켰으며, 역법(曆法)을 개정해 태음력의 구법(舊法)에 태양력의 원리를 결합,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해 만든 시헌력(時憲力)을 도입했다.

 

대동법 실시·상평통보로 경제 질서 확립

 

조선 왕릉 재실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아서 보물로 지정된 영릉의 재실.

효종은 ‘진풍(秦風)’의 황조장(黃鳥章)을 강할 때 “중국에서는 잔인하게 신하로 하여금 광중에 들어가게 하고, 자기는 죽기 싫어하면서 사람(신하)을 죽인다. 또한 광중에 보화를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유익함이 없고 오히려 도굴의 참화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여후(呂后)의 무덤이 모욕을 당하고 진나라 황제의 무덤이 도굴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문제(漢文帝)는 검약하게 해 참화를 당하지 않았고, 광무제(光武帝)의 수릉도 겨우 빗물만 흐르게 했으니 어찌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이 말에서 조선 왕릉이 검소하고 간결하며 부장품을 화려하게 넣지 않아 도굴을 방지하고, 능역 조영에 드는 국력의 손실을 줄였음을 알 수 있다. 백성을 위한 이러한 문민정치 덕분에 조선 왕조는 518년의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에서는 능침 현궁의 안쪽에서 빗장을 치기 위해 능침에 산 사람을 넣었고 부장품도 많이 넣었다. 실제로 필자가 중국의 어느 능역을 방문했을 때 관리자로부터 “중국의 능은 능원 조영 다음 날부터는 도굴범과의 전쟁이었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조선 왕릉이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산릉도감의궤’ 등에 부장품의 종류와 내용이 자세히 소개돼 있으며, 실물보다는 간소화한 부장품과 모조품을 매장했기 때문이다. 엽전도 종이를 이용한 모조지폐를 사용했다. 조상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효종은 능을 배알(참배)할 때도 간소화할 것을 명했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가 심하게 부어서 안포(眼胞 · 눈가)에 산침을 놓았으나 혈락(血絡)을 찔러 피가 멈추지 않은 채 효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41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의료사고로 추정되는데, 이 일로 의관들은 국문을 당하고 유배됐다.

 

그해 지금의 구리시 동구릉 내 건원릉 서쪽 원릉(元陵) 자리에 병풍석으로 효종의 영릉을 조성했다. 그러나 부실공사인지 예송(禮訟) 논쟁에 휘말린 탓인지, 능침에 틈이 생기고 빗물이 스며들어 수차례 수리를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1673년 10월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초장지를 조성했던 총호사와 산릉도감 등은 관직이 삭탈돼 유배됐다. 그러나 현궁을 열어보니 완벽했다. 그래서 온전한 재궁은 열지 않고 그대로 여주로 옮겼다. 천봉 시 새 능터에 있던 민가 25채, 묘소 60여 기를 옮기고 조성했다. 천봉 시 작성한 ‘효종천봉 도감의궤’에는 반차도(국장 시 장례행렬도)가 채색도로 그려져 있어 현존하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왼쪽) 영릉은 능침과 정자각이 일직선에 있다.

(오른쪽) 효종의 능침은 위에, 인선왕후의 능침은 아래에 놓인 조선시대 최초의 동원상하 쌍릉.

 

곡선미 아름다운 동원상하릉

 

효종의 정비인 인선왕후는 성이 장씨(張氏)이며 본관은 덕수(德水)다. 아버지는 우의정 신풍부원군 장유(維)이고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인선왕후는 1618년 12월 25일 안산(安山)에서 태어났다. 13세에 12세인 봉림대군의 아내로 간택돼 다음 해 가례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해졌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의 볼모로 심양에 갔을 때 함께 머물면서 뒷바라지를 했다.

 

효종이 여주로 천봉된 다음 해 인선왕후는 질병으로 고생하다 1674년 2월 24일 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이때 시어머니인 인조의 비 조대비(趙大妃)가 복(服)을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기년복(1년복), 대공복(9개월복)을 둘러싸고 서인인 송시열과 남인인 윤휴, 윤선도 등이 대립했다. 결국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큰며느리로 대우하는 기년설을 따라 1년간 상복을 입기로 했다.

 

발인에 3690여 명을 동원해 150여 척의 배로 강나루에서 한강과 남한강을 이용해 3일 만에 여주에 도착했다. 인선왕후의 능이 동원(同原)에 택정(擇定)돼 왕릉 앞에 비릉(妃陵)을 써서 위아래로 쌍분을 이루는 조선시대 최초의 동원상하릉(東原上下陵)이 만들어졌다.

 

효종의 능침은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없애고 난간석을 사용했다. 이후 이러한 제도가 한동안 지속됐다. 또 동자석주에 글씨를 새겨 방위를 표시했다. 동원상하의 능은 하나의 강(岡)에 광(壙)의 넓이가 좁아 아래위에 풍수상 혈의 자리에 능침을 조성한 조선시대의 특이한 형식이다. 또 상하 능이 나란한 일자형이 아니라 약간 사선에 놓였는데, 자연의 지형을 잘 이용한 곡선미와 조형미가 아름답다.

 

영릉의 석호들은 해학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동원상하릉은 성북구의 의릉(경종)과 더불어 2개뿐이다. 동원상하릉은 왕의 능침만 곡장을 두르고 왕비의 능은 두르지 않는데, 정자각과 곡장 사이를 하나의 공간으로 해석해 왕과 왕비가 같은 방을 쓰고 있다는 의미다.

영릉의 능침 석물은 사회적 안정기에 조성한 것이어서 조각의 기교가 뛰어나고 아름답다. 특히 무석인의 모자 표현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시대상을 읽을 수 있으며, 석호의 눈망울이 크고 해학적이며 발톱과 꼬리가 생동감을 준다.

 

영릉은 재실에서 하천을 따라 곡선을 이루는 배향로를 걸으면 위요감(圍繞感) 속에 능원이 숨어 있음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것은 성역의 공간과 속세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정자각의 배치가 왕의 능침과 일직선으로 있으며,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금천교를 놓은 유일한 능원이다. 일반적으로 금천교는 홍전문 앞에 있다. 이렇게 자연의 지형에 조화롭게 시설물을 배치한 것이 조선 왕릉의 특징이다.

 

영릉의 재실은 현재까지 소실된 전사청 외에는 온전히 보전돼 재실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됐다. 영릉 재실의 건물들은 전반적으로 민도리 홑처마 집으로 간결하고 소박하면서도 세부 수법을 보면 짜임새가 있다. 그리고 제기고, 재방, 전사청, 행랑채(대문 포함), 우물 등의 시설이 유기적으로 적정하게 배치돼 있다. 또한 경내의 제향과 관계있는 향나무와 회양목은 천연기념물 제459호로 그 의미를 더한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전통 담과 어우러져 자라고 있어 고풍스러움을 준다. 느티나무는 정승을 나타내는 나무다. 효종 영릉은 인조의 장릉(長陵)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대표적 능원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종은 인선왕후 장씨와 1명의 후궁 사이에 1남 7녀를 두었다. 첫째가 18대 왕 현종(顯宗)이다.

그의 능호는 숭릉(崇陵)이고 구리시 동구릉 내 서측 능선에 있다.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사진 제공 · 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 2010. 10.11. 733호(p78~80), 주간동아 [신의 전원, 조선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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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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