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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왕릉의 비밀] ⑮ 융건릉

Gijuzzang Dream 2009. 10. 4. 18:07

 

 

 

 




사적 제 206호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융건릉 가는길 :
수원역 → 오산방향(병점역) → 안녕동(343번도로) → 이정표




                                     

 

 

융릉(隆陵)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혜빈 홍씨(추존 장조왕비 헌경왕후)의 합장릉,
혼유석은 하나만 놓았다.

모란과 연꽃 무늬가 화려한 병풍석과 꽃봉우리 모양의 인석이 눈길을 끈다.

인석에 새겨진 ‘손巽’ 자는 동남쪽을 가리킨다.

 

 

선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정조의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 1735~ 62) 장조와

비 혜경궁 홍씨(헌경의황후, 1735~1815)의 합장릉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장헌세자는

2세 때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장헌세자가 부왕을 대신하여 정무에 임하게 되면서

노론에서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 등을 내세워 모함하여

세자는 결국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무석인과 문석인의 뒷모습. 머리 장식의 세부적인 표현이 사실적이며 매우 세련되었다.

조선 후기에 문예 부흥의 꽃을 피운 정조 시대 분위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비참하게 죽은 장헌세자에 대해 후회하면서

시호를 사도(思悼),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고 했다. 사도라는 것은 ‘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는 뜻이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소설체로 쓴 『한중록(恨中錄)』을 남겼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인 1762년 혜빈(惠嬪)의 호를 받았다.




추봉된 능이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고, 무석인도 배치하여 왕릉으로서의 격식에 다가갔다.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석마는 무석인 뒤쪽에만 배치하였다.

 

 

사도세자의 능은 원래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바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1789년에는 이곳으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隆陵)으로 바꿨으며,

고종 때 의황제(懿皇帝)로 추존함과 동시에 어머니도 의황후(懿皇后)로 올렸다.





 

건릉(健陵)


                              

사도세자의 둘째아들로 영조에 의해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왕위에 오른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건릉의 곡장. 꽃담으로 장식되었다.

사도세자 융릉과 마찬가지로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하나만 놓여 있다.

 

 

조선 22대 정조(正祖, 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융릉에 있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정조는 제위 24년 동안 탕평책을 실시하여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규장각을 두어 학문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으며, 수원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을 쌓았다.

무엇보다 지극한 효심은 백성들에게까지 추앙을 받았다.



장명등을 비롯하여 건릉의 석물들은 사도세자의 융릉과 거의 똑같다.

팔각 장명등에 새겨진 매·란·국 꽃무늬는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운 정조 시절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영조의 눈을 어둡게 했던 당쟁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화성(華城) 천도를 꿈꾸었다.

효의왕후도 정조에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해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다.

효의왕후는 1800년 순조가 즉위하자 왕대비로 진봉되었고, 소생 없이 69세로 승하했다.

능호를 정릉(靜陵)이라 했다가 건릉에 합장되면서 능호를 따로 쓰지 않았다.




정조는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화성으로 천도를 꿈꾸었다.

왕릉은 화려하고 기운찼던 그 꿈을 소리 없이 그리고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건릉은 사도세자의 현륭원 동쪽 구릉에 있던 것을 서쪽 구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의왕후와 합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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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문화에서 발간한 [조선 왕릉 답사 수첩]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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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효심 상징 ‘첫 왕릉 터’

 

 

 

화성 사도세자릉 인근 택지지구서 재실-정자각 터 등 발굴

“아버지보다 낮은 곳에 첫 무덤 정해”

전문가들 “사적지 지정 종합관리를”, 주공은 난색 “시설별 별도보존 방침”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애틋한 효심을 상징하는 정조의 첫 왕릉 시설 터(봉분 터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정자각 터 및 재실 터)가 발견되면서 이를 사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정자각 터와 재실 터는 대한주택공사가 아파트 단지 건립을 추진 중인 택지개발지구(태안3지구)에 속해 있어 보존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 터가 발견된 곳은 경기 화성시의 사적 206호 융릉과 건릉 인근.

이곳엔 영조의 노여움을 사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융릉)와 아들 정조(건릉)가 나란히 묻혀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에 따르면

정조(1752~1800)가 처음 묻힌 곳은 현재의 건릉(융릉 서쪽)이 아니라 융릉 동쪽의 구릉이었다.

이곳 구릉은 지대가 낮은 데다 습하고 좁아 왕을 모실 자리가 아니라는 우려가 많았다.

정조는 왜 애초 무덤 터로 정비됐던 건릉을 마다하고

상서롭지 못한 구릉에 자신을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전문가들은 아버지 곁에 묻히되 아버지보다 낮은 자리에 있고 싶었던 정조의 효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설명한다.

구릉에 묻혔던 정조의 주검은 1821년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가 죽은 뒤 현재의 건릉으로 이장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사실은 잊혔고 첫 왕릉 터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융·건릉 사적 밖 동남쪽에서 재실 터가 발굴됐다. 이 터는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재실의 평면 배치를 간략히 도식화한 '재실간가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재실 터에서 서북쪽으로 400여 m 떨어진 곳에서

정자각 터로 추정되는 건물 터와 무덤으로 가는 큰 길인 신도()에 사용된 전돌들도 발견됐다.

이 터는 정조의 첫 무덤으로 추정되는 융릉 동쪽의 커다란 구덩이에서 남쪽으로 100여 m 떨어져 있다.

 

조선 왕릉은 주검이 묻힌 봉분과 정자각(봉분에서 100여m 떨어져 있음), 재실(정자각에서 남쪽으로 300~400m 떨어져 있음)로 구성된다. 정조 첫 왕릉 시설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셈이다.

정해득 한신대 외래교수(조선사)는

"정조가 융릉을 찾은 원행() 길 터도 함께 있어 보존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이남규 한신대 교수(고고학)는

"이 터들은 정조 효심의 결정체인 만큼 사적으로 일괄 지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최근 이곳을 실사한 한영우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위원장(한국사)도

"재실 터만으로도 정조의 첫 왕릉 시설이 확인된 셈"이라며

"봉분 추정 터를 발굴해 이를 확증하고 사적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유적의 가치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 정자각 터가 발굴이 중단된 채 흙으로 덮였으며,

정자각 터와 재실 터가 주공의 택지개발지구에 속해버렸다는 점이다.

경기문화연대와 경기도는 아파트 단지가 융·건릉의 경관을 해칠 수 있다며

개발지구 전체 약 115만7000m²(35만여 평)를 주공은 최근 정부 관계 기관 회의에서

개발지구 북쪽(49만6000m²·, 15만여 평)을 ‘효 테마공원’으로 하고

개발지구 남쪽의 재실 터는 체육공원(9만9000m², ·3만여 평)에 포함시켜

별도 보존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영우 위원장은

 “왕릉을 구성하는 무덤 정자각 재실이 따로 분리된 ‘점’ 단위 문화재가 아니어서

왕릉 관련 시설은 함께 보존할 때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  2008-06-17 조선,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