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명 : 신라 호국의 염원 四天王寺
- 2008년12월10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행
(2008년 12월11일 개최한 2008학술연구 심포지엄『신라 호국의 염원 사천왕사』발표논문)
7~8세기 신라 사찰가람의 배치와 특징
조유전(토지박물관장) |
Ⅰ.
신라에 있어서 7~8세기 이 200년간은 대단히 의미 있는 기간이다.
즉 한반도 내 고구려, 신라, 백제 3국이 나누어져 있던 것을 하나로 통일을 이루어,
말하자면 삼국시대가 끝나고 통일신라시대가 전개되면서
한편으로는 발해가 고구려 고토를 중심으로 일어나 남, 북으로 나누어지는 시기로써
신라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매우 발전을 도모하는 시대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신라 26대 진평왕대부터 38대 원성왕대까지의 기간에 해당된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늦게
그것도 두 나라와 약 150여 년의 간극을 지니고 공인되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삼국이 모두 불교가 국교였지만 가장 늦게 받아들인 신라가
이 불력으로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음은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다.
Ⅱ.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면 신라에 있어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찰이 애공사(哀公寺)이다.
이 애공사는 법흥왕이 528년 불교를 공인했지만 사찰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540년 타계하자
이 애공사 북봉에 장사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 한 후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로써
이는 진흥왕 때인 544년에 흥륜사를 조성했다고 해 법흥왕이 돌아가셨을 때 애공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 북봉에 장사를 지냈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에 있어서 불교가 공인되고 난 후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로 알려져 있지만 이 또한
그 위치상의 문제가 대두 되어 현재의 흥륜사터라는 주장과
근처의 현 경주공업고등학교가 원래 흥륜사 터라고 각자 논리를 세워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향후 이들에 대한 완전한 학술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시비가 가려지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어쨌든 진흥왕대에 흥륜사에 이어 황룡사가 건립되지만
이 황룡사는 9층 목탑이 이루어지는 645년까지 무려 1세기에 걸친 불사가 진행되어
7세기대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를 차지한다.
신라왕경에 있어서 대표적인 사찰은
최초의 사찰이라 할 수 있는 흥륜사와 왕실불교 도량이었던 황룡사를 들 수 있다.
7~8세기대 건립된 사찰을 보면
분황사(芬皇寺), 영묘사(靈廟寺), 황룡사 9층탑, 안양사(安養寺), 굴산사(掘山寺), 생의사(生義寺),
통도사(通度寺), 계조암(繼祖庵), 장의사(莊義寺), 낙산사(洛山寺), 범어사(梵魚寺), 사천왕사(四天王寺),
봉성사(奉聖寺), 감은사(感恩寺), 망덕사(望德寺), 삼랑사(三郞寺), 임천사(林泉寺), 이거사(移車寺),
고선사(高仙寺) 3층 석탑, 백률사(栢栗寺), 감산사(甘山寺), 쌍계사(雙磎寺), 상원사(上院寺),
법천사(法泉寺), 불국사(佛國寺), 석굴암(石窟庵), 용장사(茸長寺) 중건, 단속사(斷俗寺), 천관사(天官寺),
봉은사(奉恩寺) 등이 보인다.
Ⅲ.
지금까지 경주의 신라 왕경경역에서 발굴 조사된 신라의 사찰 가람 가운데
무엇보다 먼저 황룡사를 주목해야 한다.
동양최대의 경관대탑인 황룡사 9층목탑의 규모는 구층 건물높이 약 65m, 상륜부높이 약 15m,
전체 80m에 이르는 대탑으로 신라왕경의 평지에 마련된 1탑 가람의 완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 이전 완성된 1탑식 가람의 평면배치는
황룡사 예에서 중문을 들어서면 목탑을 중심으로 북쪽에 금당을 배치하면서
금당 좌우에 대칭되게 또 다른 건물을 배치하고 강당 역시 중심에 두고 좌우에 건물이 마련되어
이들 건물을 둘러 회랑이 마련되는데 건물배치의 평면 형태는 정방형에 가깝다.
圖1. 황룡사 1차 가람배치도
圖2. 황룡사 중건 가람배치도
圖3. 황룡사 최종 가람배치도
신라가 660년 백제를 멸하고 이어 668년 고구려까지 멸한 후 건립된 사찰이 바로 사천왕사이다.
사천왕사는 문무왕 19년(679)에 완성된 통일 후 최초의 신라사찰로서 처음으로
목탑이 좌우 대칭되게 2탑이 마련되었음을 발굴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1탑이 2탑으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경전에 입각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이설이 있어 분명하지 않은 형편이다.
물론 통일 이후부터 모든 사찰의 탑이 쌍탑으로만 조성된 것은 아니고,
1탑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사천왕사의 예와 이어 이 사천왕사보다 3년 후인 682년에 건립되는 감은사의 경우는
다시 두 석탑이 들어선다.
圖4. 감은사 창건 가람
圖5. 감은사 1차중건 가람배치도
圖6. 감은사 2차중건 가람배치도
어쨌든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하는 것은 건탑의 재료상으로 보아 목탑보다는 석탑이 오랜 세월 견디고,
더구나 화재로부터 보다 안전하다는 데 한 원인이 있기도 하겠지만 이것 역시 미스터리이다.
흔히 중국을 전탑의 나라라 하고 일본을 목탑의 나라로 한다면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 할 수 있을 만큼 통일 이후 석탑의 조성이 많이 이루어 졌음을
남아있는 탑의 분포에서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가람에 있어서 2개의 석탑은 감은사에서 시작해 그 완성은 불국사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석가탑과 다보탑이 마련됨으로써 석탑으로 이루어진 쌍탑가람이 완성되는데
위치는 평지가 아닌 산지에 들어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람배치의 특성은 먼저 1탑식이든 쌍탑식이든
그 모티브는 중문을 들어서면 탑이 있고 이어 북쪽으로 금당,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당이 마련되면서
중문에서 강당까지 좌우회랑으로 둘러 예배 구역을 정하고 있음을 보는데
그 평면 배치 상태가 682년에 마련된 감은사에서와 같이 방형으로 시작되었다가
751년에 조성되는 불국사에서는 장방형으로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쌍탑이 들어서게 되면 그 만큼 면적이 넓어져 방형으로 되는 것이 이해되지만
단탑의 경우 장방형으로 건물이 배치된다는 것은 단정해서 결론하기는 어렵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인지 아니면 교리에서의 어떤 률이 있는지 알지를 못한다.
우리가 아무리 유구발굴조사를 철저히 해도 이러한 의문점을 풀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지는 유구와 유물을 통해 1차적인 해석,
즉 단순히 건물배치상태를 밝히는 데 지나지 않고
출토 유물을 통해 겨우 시기를 달리하는 정도의 해석만 가능한 것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면적인 내용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Ⅳ.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것은 탑과 금당이다.
탑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는 목적으로 만들었고,
금당은 석가모니의 모습을 구현해서 봉안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탑은 석가모니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데 탑과 부처님의 형상은 다 같이 예배의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에서 밝혀진 통일신라시대 특히 7~8세기대에 마련된 사찰은
앞서 기록에 보이는 사찰들도 있지만 기록되지 않은 사찰도 많았음이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어
충분히 짐작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고학적인 조사에서는 발굴을 통해 건물의 배치 상태와 출토된 유물을 통해
시기 판단에 그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가운데 황룡사 터의 발굴을 통해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최초 건물의 배치에서
최종적으로 고려시대 몽고병란으로 화재를 입어 사찰의 법등이 끊길 때까지의 가람변화에 대해
연구한 것이 처음이자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선사지, 불국사, 감은사지, 사천왕사지, 인용사지, 분황사지 등 적잖은 통일신라기 가람터가 발굴조사
되었거나 되고 있지만 발굴결과에 따른 심층적인 연구보다는 보고서에 충실한 정도에 지나지 않고 있다.
圖7. 분황사 가람배치도
圖8. 분황사 창건 중금당지 평· 단면도
圖10. 고선사지 가람배치도
圖10. 사천왕사지 가람배치도
圖11. 망덕사지 가람배치도
圖12. 불국사 가람배치도
말하자면 유물에 따른 시기구분이거나
금동불상 등 출토 중요유물에 대한 형식과 미술사적인 면에서의 접근이 고작이고
석탑 역시 형식의 변화연구에 초점이 맞춰져있어 더 이상의 진전이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발굴조사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신적인 면에서의 접근에 의한 연구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 소유의 자택을 건립할 때에도 위치에 따른 소위 자리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고시하면서
가장 좋다는 방법을 택해 건립하는데 하물며 궁궐이나 신앙의 대상인 사찰을 조영하는 데 있어서는
더욱 더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외형적으로 호화스럽게 하는 것도 권위를 나타내게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예를들면 황룡사는 물론 불국사 등 모든 불사의 건물이 왜 그 위치에 마련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기록을 들추어 보아도 그러한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황룡사의 경우 진흥왕이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건립하게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불사로 고쳐 짓게 했다는 내용이 전해 오지만 이 내용만 가지고서는 요령부득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7~8세기대의 많은 신라 사찰 터를 발굴 조사했고
지금도 인용사 터나 사천왕사 터처럼 발굴이 진행되고 있지만
왜 그 위치가 아니면 안 되었나 의문을 속 시원하게 밝힐 수 없는 형편이다.
기록이 전혀 없고 출토유물이나 유구 역시 밝혀줄 자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 위치를 선정한 이유는 있는 것이다.
이제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통해 1차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2-3차원적인 정신세계 영역을 밝히는 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사천왕사지 발굴조사 성과와 의의 최장미· 강정미· 김수희(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Ⅰ. 머리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방치된 신라 옛 사찰 조사>사업의 일환으로
통일신라시대 사찰가람배치의 모본이 되는 사천왕사지를 그 대상으로 선정하고
2006년 4월부터 발굴조사에 착수하였다.
사천왕사지는 경주 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5km 부근에 위치한 낭산 남쪽 낮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사역 남쪽으로 약 2m의 단애부가 형성되어있고, 그 아래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동·서 귀부로 이어진다.
사천왕사는『三國遺事』에 의하면,
‘ 文武王때 唐과 전쟁을 하던 신라가 명랑법사의 건의로 狼山 신유림(神遊林)에 절을 세우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자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사천왕사 모습에 대해‘채색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三國史記』기록에는 문무왕 19년에 절을 완성하였다고 한다.1)
1)『 三國史記』卷第七新羅本紀第七文武王十九年條
“秋八月太白入月角干天存卒創造東宮始定內外諸門額號四天王寺成增築南山城.”
사천왕사가 위치한 낭산은 신유림이라 불린 숲의 존재를 통해서
불교가 신라에 전래되기 이전의 토속신앙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三國遺事』선덕여왕 지기삼사조(知幾三事條)의 내용과 함께
이곳은 前佛時代七處伽藍의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신라인들이 사천왕사를 황룡사, 분황사, 흥륜사 등과 함께 매우 중요시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三國史記』職官條에 나타난 ‘사천왕사 성전’이라는 관청이름은
사천왕사가 당시 <成典寺院>이었음을 알려준다.
특히 이곳에서 행해진 문두루비법으로 볼 때 호국사찰뿐만 아니라 밀교사찰(密敎寺刹)로 위치했던
사천왕사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사천왕사는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창건된 사찰로 쌍탑식가람배치가 처음 등장한 곳으로,
특히 2기의 목탑을 배치한 첫 사찰로,
이보다 3년 늦은 682년에 창건된 감은사의 삼층석탑과 함께 당시 건축 ·미술 ·불교문화사 등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된다.
현재 낭산 일대에는 신라왕경, 월성, 황룡사, 분황사, 보문리사지, 경주남산 등과 같은
삼국∼통일신라시대의 생활유적과 종교유적이 있고,
구릉 주변으로는 선덕여왕릉, 신문왕릉 등이 있고,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망덕사지가 있다.
Ⅱ. 조사현황
사천왕사지에 대한 연구는
1929년 동경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인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가 실시한 현지조사 내용이
『朝鮮建築史論』에 실리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국내의 여러 논문에서는 사천왕사의 가람배치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사천왕사지에 대해서 이루어진 조사내용은 <표 1>과 같다
Ⅲ. 조사내용
연번 |
조사연도 |
조사자 |
조사지역 |
조사내용 |
1 |
1906 |
今西龍 |
사역 |
기와편 수집 |
2 |
1915 |
鮎貝房之進 |
서쪽 목탑지 남쪽 |
녹유전 발굴 |
3 |
1916. 02 |
諸鹿央雄 |
서쪽 목탑지 동쪽 |
녹유전 발굴 「朝鮮慶州發見釉塼」 『考古學雜誌』第6卷 第8號, 日本考古學會. |
4 |
1918. 08 |
原田淑人 |
동 · 서귀부 주변 |
경주 경편철도부설관련 발굴조사 『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 |
5 |
1922. 05 |
小泉顯夫 梅原末治 藤田亮策 |
북서편 단석지 |
주변지역 녹유전 발굴 경주-울산간 철도부설에 따른 발굴조사 『大正十一年度古蹟調査報告』 |
6 |
1923. 06 |
조선총독부 내무부 技手조사 |
동 · 서귀부 |
서쪽 귀부의 머리가 북쪽을 향했다고 기술 |
7 |
1929 |
藤島亥治郞 |
사역조사 |
사역 건물지 측량조사 『朝鮮建築史論』 |
8 |
1936 |
藤田亮策 |
철도공사구간 및 사역주변조사 |
경주 동해중부선 건설공사 녹유전 출토 「四天王寺址と新金冠塚」 『考古學』第7卷 第3號, 東京考古學會. |
9 |
1940 |
米田美大治 |
사역조사 |
측량조사 「慶州望德寺에 대한 硏究」 (『朝鮮と建築』第19輯 4號) |
10 |
1969 |
신라삼산오악조사단 |
서쪽 귀부 조사 |
귀부 실측 및 서쪽 귀부 주변지역에 대한 비석편 수습을 위한 부분조사 |
11 |
1982~84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
사역조사 |
측량 및 지표조사 『新羅狼山遺蹟調査』 |
<표1. 경주 사천왕사지 조사현황>
1. 금당지
금당지는 동 · 서목탑의 중심에서 북쪽으로 약 24.2m, 추정 단석지 중심에서 남쪽으로 20.7m 지점의
가람 남북중심축상에 위치한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을 갖춘 가구식기단(架構式基壇)으로,
지대석 외곽에 문양전을 깔고 장대석을 두른 이중기단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아있는 면석은 2개로,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온전히 남아있는 것의 크기는 1.3m×0.65m이다.
계단은 4면에 모두 설치되어 있으며 전면 2개소, 후면 2개소, 좌·우 각 1개소씩 배치되어 있다.
금당지 기단 초석의 해발고도는 평균 55.40m로 서탑지 심초석(55.72m)보다 32cm 낮다.
금당지 내진 초석과 기단지대석은 1.07m의 차이가 있다.
이중기단을 포함한 금당지의 크기는 동서 24.5m, 남북 18.2m이며,
상층기단 지대석의 외곽을 기준으로 하면 동서 20.9m, 남북 14.6m이다.
기단을 포함한 건물의 면적은 약 308.5㎡이며, 초석을 중심으로 추정한 건물 내부 면적은 약 207.7㎡이다.
비슷한 시기의 감은사지 금당지의 규모와 비교한다면
동서 15.5m, 남북 9.0m, 건물면적 139.5㎡(약 42평)보다 사천왕사 금당지의 규모가 더 크다.
금당지의 중심부에는 방형 臺石이 놓여 있으며, 양 옆으로는 원형 대석과 이형 대석이 놓여 있는데,
방형대석과 원형대석은 절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금당 중심부의 것은 본존의 지대석, 양쪽의 대석은 협시의 지대석으로 추정된다.
이 지대석 전방 좌우에는 아래가 넓고 위로 가면서 좁아든 원주형의 유공초석이 있는데,
각각 지름 20cm, 깊이 30cm 내외의 圓形柱孔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내진 초석 주변에 판석과 무문전으로 구성된 석렬이 확인되었는데,
이 주변에서 철정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목조로 된 불벽 또는 불단(佛壇)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내진초석 전방 좌우에 판석과 무문전을 이용한 동서 1.9m, 남북 0.7m의 시설이 확인되었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금당지 초석은 원형 주좌에 사각의 초반면이 잘 남아 있는데,
현 위치에서 4개만 이탈 되었을 뿐 대부분이 제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주칸거리는 동서가 약 3.55m이고, 남북은 어칸과 협칸이 다른데 어칸은 약 4.33m, 협칸은 약 3.68m이다.
상층기단 지대석은 길이가 1.28m∼4.60m로 다양하게 남아 있으며,
탱주 홈으로 추정되는 1cm∼2cm 깊이의 홈이 장방형과 ‘T’자형으로 치석되어 있다.
장방형과 ‘T’자형의 홈들을 혼용하여 사용하였으나 규칙성이나 정형성은 보이지 않는다.
특이하게 남쪽 기단지대석의 탱주 홈은 나머지 3면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다.
전면의 탱주 홈들은 중앙의 홈을 기준으로 대략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는데,
圖4의 붉은 부분은 간격이 맞지 않는데, 이는 후대의 보수의 흔적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금당지의 계단 배치 상태를 살펴보면,
전면과 후면의 계단이 대칭되게 배치되지 않은 것이 특징적인데
전면의 계단은 퇴칸에, 후면 계단은 협칸에 배치되어 있다.
현재 남아있는 서편 계단의 폭은 계단 외곽을 기준으로
약 2.9m 이며 내곽의 크기는 약 2.28m이다.
동·서 계단은 옆 기단지대석의 마감 형태로 보아 중수할 당시 계단의 규모를 축소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며,
축소하지 않았을 때의 계단 외곽의 길이는 약 4.64m이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기단 아래의 원형 초석은 금당 초창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단을 수축할 때 혹은 그 이후에 놓여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금당지 북동쪽 계단지에서 확인된 석재는 길이가 2.22m, 폭 44cm, 두께 24cm로
특이하게 중간부분에 74cm×37cm×5cm의 홈이 있다.
석재와 마주보는 부분에도 대칭되게 똑같은 홈이 있다.
후대의 경복궁 월대와 매우 유사한 형태로 추정되며,
이러한 계단 석재는 동·서 목탑지에서도 확인되었다.
지대석 외곽에 잇대어진 원형 초석은 금당 기단 초석렬과 동일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기단 내부의 초석에 비해 크기도 매우 작고 초석 한면을 의도적으로 깨어 지대석에 연접하고 있다.
이 원형초석을 포함하여 상층기단 지대석과 이중기단의 경계석인 장대석까지 약 1.6m 너비에는
전이 깔려 있다. 확인된 전은 현재 4가지 종류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 보상화문전돌(사방 약 32cm)이고,
무문전, 서탑지에서 출토된 당초문전, 연화문전 등이 보인다.
금당지 남편에는 후대에 전돌이 빠지고 난 후, 기와를 깔아서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당지의 기단부는 현재까지 조사된 것을 살펴보면,
금당지 상면에서 약 60cm 아래까지는 암반이 섞인 적
황갈색 점질토와 마사가 섞인 황색토를 반복적으로 성토하고
그 아래로는 바닥을 편평하게 한 후 돌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성토하여 편평하게 다지고 돌을 까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하여 축조하였다.
이 성토흙을 되파기를 하여 금당 내부에 본존불, 협시불 등을 안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당 내진주초석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금당지 기단부 2단석 깊이까지 굴광한 후
먼저 10∼20cm의 천석과 할석을 직경 230cm로 깔고,
그 위에 30∼40cm정도 크기의 천석을 직경 150cm 범위로 3∼4단 쌓아 올려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2. 동 · 서탑지
동 · 서탑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구조로, 중앙에는 방형의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이 자리하고 있다.
기단형태는 가구식전석축기단(架構式塼石築基壇)으로 상층기단 지대석 외곽에 방형으로 돌아가
이중기단이 설치되어 있고 각 기단 면의 중앙에 계단이 위치하고 있다.
상층기단 장대석을 기준으로 기단규모를 추정하면 한 변 최대너비 10.75m,
이중기단을 포함할 경우에는 12.9m이고 기단의 높이는 약 1.4m이고, 계단 너비는 약 2.45m이다.
상층 기단 지대석 중간 중간에 일정 간격을 두고 탱주 홈이 마련되어 있다.
또 지대석 모서리에는 너비 30cm로 얕은 홈이 마련되어 있고,
그 안에 약 5cm 깊이의 우주를 세웠던 홈이 있다.
우주와 탱주 사이에는 당초문전을 쌓아올렸고,
이 당초문전으로 구획된 공간 안에는 녹유전을 부착하였는데,
이를 통해 녹유전이 탑의 면석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초석 상면은 약 116cm의 정방형으로 두께는 약 60cm이다.
윗면은 잘 다듬었으나, 기단토가 묻히는 부분은 거칠게 다듬어 마무리하였다.
심초석 중앙에는 너비 30cm의 방형의 사리공이 있으며, 사리공은 단이 져 있으며, 깊이는 33cm이다.
심초석 드잡이 후 진행된 하부 조사에서, 심초석 적심은 심초석 아랫면의 형태에 맞추어
북쪽 부분에는 높게 적심이 된 상태였다.
적심석 북쪽에서 철기가 확인되었는데,
이는 진단구의 의미보다는, 심초석을 안치할 때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적심석은 30∼50cm 크기의 할석을 사방 100cm 내외의 범위로 쌓았는데, 현재 3단까지 확인되고 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의 서탑지는 남쪽부분은 방형초석이 1열 결실되었고,
서쪽에는 초석들이 1열로 도괴된 모습으로 세워져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초석의 상면은 편평한 방형으로 별도의 주좌가 마련되어있지 않다.
제 위치에 가까운 사천주 초석의 주칸거리는 약 215cm이다.
남동편 사천주 초석의 적심석 주변에서 직경 20cm의 붉은색 내부토 수혈 내에
직경 7.6cm, 높이 4.7cm 청동완이 출토되었다.
청동완은 남쪽 구연부 부분이 약간 높은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이는 사천주를 안치하기 위한 진단구로 추정된다.
기단부는 대지를 정지한 후 큰 할석과 천석을 쌓고,
그 위에 풍화암반이 섞인 사질점토를 다져서 편평하게 한 후,
동일한 과정을 반복하여 11단으로 판축하여 성토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성토된 기단을 다시 굴착한 후 그 내부에 적심을 놓고 방형초석과 심초석을 안치하였다.
사천주 초석 상면에서 바닥층까지의 깊이는 약 230cm이고,
기단 굴광선은 상층기단 지대석에서 220cm 떨어진 지점이다.
특징적인 것은 기단부 10단석과 11단석의 중앙 부분은 열을 맞춰서 돌을 놓았던 것을 확인하였다(圖9).
그 옆의 돌들은 열이 맞지 않는 것을 봤을 때 이는 기단부를 축조할 때 범위를 나타내거나,
작업구역을 나눴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이는 목탑 기단부 축조방법을 유추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생각된다.
녹유전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단부 지대석 위에 부착되어 면석의 용도로 쓰였는데,
이 녹유전의 배치상태는 모서리부분에서 A-B-C상이 한 조를 이뤄,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매씩 24개의 녹유전이 탑에 부착되어 있었다.
A-B-C 상의 인물들의 얼굴방향은 왼쪽-정면-오른쪽으로 이 녹유전이 탑의 사방에 부착되었다고 한다면,
전방위를 지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녹유전 뒷부분에는 기와 또는 전을 쌓아올려 녹유전을 보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와적시설은 당초문전이나 우주 탱주 시설 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동 · 서목탑지에서 마치 옥개받침처럼 3단으로 처리가 되어있는 용도 미상의 석재는
한쪽 면은 거친다듬을, 반대쪽은 잔다듬을 하였다.
중앙에는 직경 46cm 의 반원의 구멍이 있으며,
잘 치석된 윗면에는 두 개의 은장홈이 남아 있고,
아래 넓은 면에는 약 4m 깊이의 홈이 가장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크기는 윗면이 120×(69), 아랫면이 154×(85) 두께 26cm 이다.
이 석부재는 탑지 주변에서 확인된 점을 통해 노반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목탑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는 다르지만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에도 석재 노반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3. 추정단석지
금당지 중심에서 북쪽으로 20m, 동서로 각각 20.6m 떨어진 곳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구조의 건물지로 초석 간격은 60cm로 매우 좁다.
초석 중앙부에는 지름 22㎝, 깊이 23㎝의 원형 구멍이 있고,
원공 주변에 약 55cm 크기의 방형 모각(模刻)을 이중으로 하였고
이 모각은 다시 초석의 네 귀퉁이로 연결된다.
초석의 측면에는 인접 초석과 이어진 듯한 고막이 형태의 부분이 남아 있는데 그 폭은 약 30cm이다.
1929년에 조사한 후지시마 가이지로(藤島亥治郞)는 이 건물을 종루와 경루로 추정하였고,2)
장충식은『三國遺事』에 기록된 내용에 근거하여, 이 건물을 ‘단석(壇席)’으로 보고 있다.3)
2) 藤島亥治郞, 1930-31,「 四天王寺」,『 朝鮮建築史論』, 日本建築學會.
3) 장충식,「 新羅狼山遺蹟의諸問題(Ⅰ)-四天王寺址를中心으로-」,『 新羅와狼山』
『관정경(灌頂經)』卷7「 복마봉인대신주경(伏魔封印大神呪經)」에서
문두루법에 사용하는 원목의 크기를 높이 7分, 너비 7分이라고 한 것을 고려한다면,
초석의 원공 지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잔존하는 초석을 기준할 때 건물의 규모는 동서길이 5.4m, 남북너비 5.4m, 높이 0.9m 정도이다.
중심에서 4.8m 떨어진 곳에 석열로 기단 기초시설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석열에서 남쪽으로 150cm 돌출되어 동서 약 230cm의 너비의 시설이었다.
4. 문지
문지는 금당지의 중앙에서 약 44.6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남회랑보다 1칸 남쪽으로 내밀려 위치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현재 적심은 후대 민묘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있다.
도리방향의 어칸의 간격은 약 3.7m, 협칸은 2.9m이고 보방향의 간격은 약 3.1m이다.
문지 아래에는 원형 운좌에 방형 초반석을 가진 초석이 한 점 확인되었는데,
그 위치로 보아 문지의 초석으로 추정된다.
5. 익랑지 · 회랑지
익랑지는 금당지의 좌우에서 회랑과 직각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으로 확인되었다.
규모는 정면 9칸, 측면 1칸으로 주칸거리는 약 2.6m로 거의 등간격이며 동서 길이는 약 24m이다.
익랑에 사용된 초석들은 모두 결실되었지만 적심석은 양호하게 남아 있다.
금당지 서편에서 작은 원형주좌에 방형의 초반석이 확인되었는데,
위치를 통해 추정해 보면, 이 초석이 익랑에 사용되었던 초석일 가능성이 있다.
익랑지는 금당지의 동서계단과 열을 같이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금당지의 계단이 후대에 축소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면, 이 익랑이
금당 초창과 동시에 축조되었는지, 아니면 중수할 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동 · 서회랑지는 각각 동 · 서탑의 심초석에서 약 19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회랑은 금당지의 중심에서 약 44.6m 남쪽에 위치한다.
회랑지의 초석 역시 모두 결실되었지만, 적심석의 잔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서회랑지는 현재 잔존 유구는 1칸×28칸(2.6m×3.0m)으로 단랑(單廊)구조이며,
잔존 남북 거리는 대략 80m정도이다.
동회랑지는 북편의 철로에 의해 일부 결실되었으며,
동익랑지의 남편으로만 적심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남회랑지는 문지 동편으로 도리칸 11칸, 보칸 1칸의 적심들이 확인되고 있으며,
서편은 후대 민묘로 인해 교란되어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기단부는 동회랑지에서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돌을 편평하게 깐 다음 그 위에 무문전이 놓인 상태였다.
서회랑지에서 후대에 교란되어 무문전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열을 맞춰 돌로 기단부를 마무리 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 · 서익랑지 외곽부분에서는 너비 200cm의 돌과 무문전으로 구획한 공간이 확인되었는데,
익랑지의 적심열과 그 너비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익랑지로 통하는 작은 문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으나, 차후의 조사를 통해 밝히고자 한다.
익랑과 회랑이 만나는 지점에서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배수로가 확인되었는데,
현재 잔존 거리는 약 5.2m 정도이다.
배수구의 모양은 바닥에 판석을 깔고 양 옆으로 전을 쌓아 올린 형태로,
회랑 안쪽 공간에 고인 물을 배수하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또한 배수구와 “ㄴ”자형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가로 남북 111cm, 동서 68cm, 최대 두께 43cm의 대석이
확인되었다. 대석을 편평하게 배치한 것을 보아 배수구와 연관된 시설물로 생각된다.
또한 동회랑지와 남회랑지가 만나는 지점 외곽에서 방형의 적심군이 확인되었는데, 용도는 알 수 없다.
6. 강당지 서편 건물지
추정 단석지 뒤편에서 강당지 서편 건물지로 추정되는 적심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지는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건물지 동북쪽에는 주좌크기 54cm인 방형 초석이 하나 잔존하고 나머지는 모두 결실되어
적심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건물의 북쪽 기단부는 약간 단이 지는 모습으로
기단부에 놓인 할석열을 따라 적심이 만들어진 중기 초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단의 높이는 약 60cm이며, 바닥면에서는 통일신라기의 연목와가 출토되었다.
이 유구는 감은사지 강당지 동서에 있는 건물지와 같은 구조의 건물지가 아닐까 추정된다.
7. 석등지
석등지로 추정되는 유구가 현재 2기 확인되었다.
이 석등지는 금당지의 중심점에서 남쪽으로 25m 지점에서
동 · 서로 약 5m 떨어진 곳에 동서탑지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 석등지의 크기는 동서 230cm, 남북 230cm이고, 동쪽 석등지는 동서 210cm, 남북 240cm이다. 5∼10cm의 잔돌을 깔아서 적심을 하였다.
금당 북편인 단석지 사이에 석등연화지대석이 남아 있어서,
사역 내부에는 금당 전후로 하여 각 2개씩 4개의 석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8. 서회랑지 바깥 후대 건물지
서회랑지 서편에서 확인된 건물지로 장방형의 기단석열이 확인된다.
건물의 장축방향은 동서향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기단 외에 배수로로 추정되는 석열이 함께 확인된다.
건물의 석열이 사천왕사 서쪽 회랑의 기단석열을 파괴한 점으로 볼 때,
사천왕사와 동시기에 존재했다기 보다는 폐사이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회랑 바깥쪽에 부속건물로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토유물로 통일신라시대의 막새, 평기와, 치미편 등과 함께 고려시대의 청자편이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고려시대 중기 이후의 건물지로 추정된다.
Ⅳ. 출토유물
서탑지에서 면석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던 녹유전은
현재 A형식(왼손에 칼을 잡은 형식), B형식(왼손에 활을 잡은 형식), C형식(오른손에 칼을 잡은 형식)이
확인되었다.
A상은 왼손에 긴 칼을 들고 우측면을 비스듬히 응시하면서,
무릎을 꿇은 좌우 악귀 위에 걸터 앉아있는 형상이다.
곱슬거리는 머리 위로 연주문(連珠文)의 둥근 정면 장식과 새날개형 장식이 달린 관을 쓰고,
동물두식(動物頭飾)의 견식(肩飾), 봉황문 흉갑(胸甲), 소찰(小札)로 된 요갑(腰甲),
그 아래 여러 단으로 부드럽게 흐르는 상착(上着)을 착용하고 있다.
B상은 정면을 응시하며, 왼손에 활을 들고 오른손에 화살을 들고 있다.
견고한 투구와 갑옷은 모두 운기문(雲氣文), 연주문, 운문(雲文)으로 장식되어 정교하고 화려하다.
C상은 작은 비늘모양 소찰(小札)로 구성된 엉성한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였으며, 눈초리를 치켜 올리며
크게 부릅뜬 눈과 넓게 퍼진 커다란 콧방울을 가진 분노상이며, 좌측을 응시하고 있다.
오른손에 술이 길게 달린 칼을 쥐고, 오른쪽 무릎에 왼쪽 다리를 올려 반가부좌한 특이한 도상이다.
기와는 일반 기와를 비롯하여 특수기와가 출토되었다.
일반기와에는 다양한 문양의 수키와와 암키와를 비롯하여, 귀면와 등의 수막새와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연화문, 암막새는 인동문이 주를 이룬다.
금당지 기단 지대석 주변에서는 특히 귀면와가 많이 출토된 것이 주목된다.
다양한 명문와가출토되었는데, 가장 많은것은‘四天王寺’명 명문와이며,
‘ 上寺’,‘ 左寺’,‘ 右寺’,‘ 四天王寺己巳年重修瓦’ 등 중수기록 명문와도 확인되었다.
주칠이 되어 있는 연목와, 녹유부연와 등의 특수기와도 많이 출토되었으며,
전이나 기와의 측면과 상면에 도장을 찍은 인장전 · 인장와도 많이 출토되었다.
기와를 재가공하여 만든 원형토제품 및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원공이 있는 반구형토제품도
다소 출토되었다. 반구형토제품 중 가운데 구멍에 못이 그대로 박혀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못으로 어딘가에 고정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당지 본존불 지대석 근처에서 3cm 크기의 소라 모양 토제품이 2개가 확인되었는데,
바닥면은 오목하게 들어가 있으며, 오른쪽으로 감겨 있는데, 마치 부처의 나발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Ⅴ. 조사성과
사천왕사지는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조사성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사천왕사지의 전체 가람배치를 확인하였다.
금당지, 동서탑지, 추정 동서단석지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익랑지, 회랑지, 석등지, 강당지 서편 건물지 등을 통해서
통일신라 초기의 사찰 가람배치 구조를 밝히게 되었다.
둘째, 사천왕사지 목탑지와 금당지의 내부 및 기단의 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
특히 백제시대 목탑의 판축기법과는 달리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판축기법이 활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셋째, 녹유전의 위치와 배치상태를 규명하였다.
녹유전 발굴조사 전 학계에서 그 위치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었으나,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탑의 면석으로 사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녹유전의 배치상태는 모서리부분에서 A-B-C상이 한 세트를 이뤄,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매씩 24개의 녹유전이 탑에 부착되어 있었다.
향후, 사역 내의 건물지에 대한 추가 정밀조사와 사역 외곽에 대한 조사를 더 진행하여,
전체적인 사천왕사지 사역에 대해서 심도 깊은 조사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圖1. 사천왕사지 주변 유적 현황
圖2. 사천왕사지 가람배치도
圖3. 금당지
圖4. 금당지 기단 평면도
圖5. 금당지 북동쪽 계단
圖6. 경복궁 월대 계단
圖7. 금당지 동편 계단지 주변 원형 초석과 전돌 노출 상태
圖8. 금당지 초석 적심과 기단 적심
圖9. 서탑지 기단부 부석층(11단) 노출 상태
圖10. 동탑지 녹유전 출토 상태
圖11. 동회랑지(북에서)
圖12. 동회랑지(남에서)
圖13. 동익랑지 추정 계단
圖14. 서회랑지 서편 후대 건물지
圖15. 서회랑지 서편 치미 노출 상태
- 녹유전(A상) -
- 녹유전(B상) -
- 녹유전(C상) -
圖16. 녹유전(A상 B상 C상)
圖17. 수막새
圖18. 암막새
圖19. ‘四天王寺己巳年重修瓦’명 기와
圖20. 명문와
圖21. 인장와 · 인장전
圖22. 토제품
圖23. 연목와 · 부연와
圖24. 당초문전
圖25. 치미
圖26. 서탑지 출토 청동완
중국 선유사(仙遊寺) 사리탑(舍利塔)의 고고학적 발견과 초보적인 연구 - 仙游寺法王塔的發現與初步硏究 - 劉簞運(중국 섬서성고고연구원)
번역 : 양은경(부산대학교 고고학과)
선유사(仙遊寺)는 서안시 주지현(周至縣)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흑수하(黑水河)의 강가에 위치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사찰은 수대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당, 송, 원, 명, 청대를 거쳤다.
섬서성에서 유명한 사원 중 한 곳이다.
1998년 흑하댐을 건설하기 위해 선유사와 사리탑을 전체적으로 철거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필요성에 의해 다른 곳에 중건되어졌다.
탑을 해체하는 공사에서 우리는 선유사 사리탑의 천궁(天宮), 지궁(地宮)을 발굴하였다.
Ⅰ. 선유사 사리탑의 고고발견
선유사 사리탑의 높이는 29.55m, 7층 밀첨식(密叔式) 방형 벽돌탑(塼塔)이다.
각 층의 남쪽에는 아치형의 구멍(券洞)이 하나씩 배치되어 있다.
탑은 모두 448층의 벽돌을 사용하였는데 이중 지상은 428층, 지하는 10층이다.
사리탑을 해체하는 공사는 1998년 8월 17일에 시작되었다.
9월 17일 오전, 탑의 제2층 북벽의 남측에서 천궁이 발견되었다.
천궁은 탑을 건립할 당시 함께 건립되었다.
천궁은 장방형을 이루며 길이는 42cm, 폭은 26cm, 깊이는 26cm이다.
네 주위는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렸다. 안쪽에는 황색 비단으로 포장된 석관이 놓여져 있었는데
황색 비단의 모서리는 끈으로 묶여 있었고 비단의 바깥은 비단줄로 덮여져 묶여 있었다.
위쪽에는 종이 한 장으로 덮여져 있었다. 실크직물을 제거하고 석관을 열었다.
안쪽에는 금동관 1점이 있었고 관 위쪽은 홍문(鴻文: 기러기무늬)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동관(銅棺)의 안쪽에는 실크로 포장된 호로형(葫蘆形)의 유리병이 있었고
이 유리병의 안쪽에는 3과의 사리가 있었다. 크기는 쌀알의 크기와 같았다.
1점은 흰색이고 2점은 노란색이다.
석관(石棺):
석관 앞쪽은 높고 뒤쪽은 낮으며 앞쪽은 넓고 뒤는 좁다.
머리가 크고 꼬리가 작다. 뚜껑과 몸체부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조성되었다.
관의 뚜껑은 둥근 모양(弧形)을 이룬다. 관 뚜껑, 관의 틀에는 석류꽃과 인동당초문이 선각되어 있다.
대좌에 장식된 안상에도 도안이 있다. 석관의 총 길이는 41.5cm이고 앞쪽의 높이는 24.4cm,
뒤쪽의 높이는 18.1cm, 앞쪽의 폭은 17.6cm, 뒤쪽의 폭은 13cm이다.
금동관(臘金銅棺):
도금된 금동피(臘金銅皮)를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관의 네 주변과 뚜껑에는 선조로 유창하게 조각된 쌍홍문(雙鴻文)이 새겨져 있다.
바탕문양은 연주문이다. 금동관의 총 길이는 13.2cm이고 앞쪽의 높이는 10.5cm, 뒤쪽의 높이는 6.5cm,
앞쪽의 폭은 6.7cm, 뒤쪽의 폭은 4.6cm이다.
유리병:
호로형(葫蘆形)이고 저부는 안쪽으로 들어가 있으며 전체 높이는 4.2cm이다.
아래의 지름은 3.2cm, 위쪽 지름은 1.8cm이다.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띠고 병 위쪽에는 작은 깨어진 무늬가 있다.
지궁은 평대(平台), 용도(漫道), 터널(隧道) 및 궁실(宮室) 부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전체 길이는 7.05m이다. 용도와 터널은 대형 강돌을 이용하여 가득 채워져 있다.
지궁의 석문(石門)은 이미 파손되어 원래의 위치에 놓여져 있지 않다.
문미(門楣)는 양호하며 위쪽에 인동보상화문이 선조로 조각되어 있다.
문의 양측에는 보살상 1구씩이 배치되어 있고 문테(門管)는 파도식의 인동덩쿨문으로 장식되었다.
지궁의 정중앙에는 선조로 가득 조각된 녹형 천정( 頂)의 석함이 1점 놓여 있다.
길이와 폭은 모두 58cm이다. 석함의 위쪽에는 흑갈색의 다리를 가진 훈향로(熏香爐)가 1점 안치되었다.
현재 안쪽에는 단향(檀香)과 흑향회(黑香灰), 백향회(白香灰)가 보존되어 있다.
석함의 오른쪽에는 방형의 석비가 1점 있는데 지궁의 서쪽 벽면에 기대어 놓여져 있다.
길이와 폭은 50cm이다.
석함을 열어보니 안쪽에는 실크로 감싸져 있는 안상으로 장식된 대좌를 가진 금동관이 1점 있었다.
이 금동관의 길이는 약 12cm이고 폭은 5.4cm, 앞쪽의 높이는 8cm, 뒤쪽의 높이는 6cm이다.
동관의 저부에는 백회가 있었다.
관은 목화비단을 이용하여 싸놓았고 바깥부분은 실크를 이용하여 싸놓았다.
관 뚜껑과 관 몸체는 3줄의 실크선으로 묶었다.
동관의 안쪽에는 실크목화로 감싼 직경(直頸)의 유리병이 있었고
이 병의 안쪽 벽에는 10과의 사리가 들어 있었다.
유리병의 높이는 4.6cm, 병의 목 높이는 2cm, 병의 몸체 직경은 2.7cm이다.
석비는 앞뒤 양쪽에 모두 명문이 새겨져 있다.
앞쪽에는 “舍利塔下銘”이라는 명문이 있다. 그 발원문은 다음과 같다.
“爲大隋仁壽元年歲次辛酉十月辛亥朔十五日乙醜,皇帝普爲一切法界,幽顯生靈,謹於幽州周至縣
仙遊寺,奉安舍利,敬造靈塔,願太祖武元皇帝,明元皇後,皇帝/ 皇後/ 皇太子/ 諸王子孫等,竝內外群
官,爰及民庶,六道三塗,人非人等,生生世世,値佛聞法,永離苦空,同升妙果.”
석비의 뒤면에는“仙遊寺舍利塔銘”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고 그 발원문은 다음과 같다.
“ 竊聞天宮敞而七
寶明, 舍利現而千光徹. 八國爭立, 育王創跡而先置萬塔. 齊秀優塡,憶而寫容,寔大雄之盛德,卽衆聖之醫王者歟 · 無得而稱,無言而述. 此塔卽大隋仁壽元年十月十五日置也. 至大唐開元四年重出舍利,本寺大德沙門敬玄,道門若節,遠近謝其精誠,神機爾朗,合寺欽其高行,乃眷彼前修,情深仰正. 謹舍衣雹之資,用崇斯塔.
奉爲開元神武皇帝/ 太子/ 諸王/ 文武百官/ 爰及含識,竝同沾勝福,共結妙因. 至開元十三年歲次乙醜十二
月十五日甲子朔,莊嚴事畢,重入靈塔. 其塔乃瑩以丹靑,飾以朱漆,致使固齊天地,菅然獨存. 其銘曰:蜂台構畢,雁塔休工,天花隨喜,地塔崇封. 開元十三年十二月十五日下.”
Ⅱ. 선유사 사리탑의 연대에 대한 토론
선유사 사리탑의 연대에 대해 학술계에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수대 탑으로 생각하는 견해와 당대 탑으로 여기는 주장이 있다.
사리탑이 전체적으로 이전된 이후 이 문제는 점차 명료해졌는데
우리는 다음의 몇가지 사항을 통해 그 연대를 살펴볼 수 있다.
1.사리의 매장제도에 관하여
중국에서 발견된 수대 지궁은 모두 비교적 간단하다.
하나는 석함을 직접 이용하여 지하에 매장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벽돌을 이용하여 간단한 방형 구덩이를 만들어 지궁으로 하는 것으로
서로 연결되는 터널시설이 없다.
한웨이(韓偉) 선생은「法門寺塔基與舍利无埋制度」라는 논문에서[①],
사리를 매장하는 것에 관하여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지궁은 당대에 출현한다고 주장하였고 무덤의 건축 구조를 모방하여
단실(單室)과 삼실(三室) 등 서로 다른 형식이 있다고 하였다.
이는 민간과 황실에서 사리를 매장하는 등급의 차별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였다.
염만리(撲萬里) 선생은「略論隋代的舍利无埋制度」에서[②],
사리매장, 지궁 출현, 사리용기의 조합, 종류에 대해 구체적인 서술을 하였다.
중국의 기타 지역에서 발굴된 수대 사리지궁의 상황을 대비하고 참고하여
선유사 사리탑 지궁의 시대는 당대보다 빠르지 않다고 하였다.
2.관을 이용하여 사리를 안치하는 제도에 관하여
석관, 금관 혹은 은관을 이용하여 사리를 안치하는 것이 유행되기 시작한 시기와
지궁이 유행되게 축조된 시기와 서로 맞물린다.
무덤의 완전한 예의제도의 내용의 도움을 받아 사리를 봉안한 것은 성당(盛唐)시기에 유행하였다.
선유사 사리탑의 지궁은 탑신 안쪽을 밀봉하였기에 탑을 건립할 당시 한번에 완성된 것이다.
만약 탑을 해체하지 않았다면 천궁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궁에서 출토된 문물의 가장 늦은 시기는 탑의 연대를 대표할 것이다.
천궁에서 출토된 석관은 관의 상부에 장식된 선조의 석류꽃과 인동문,
대좌에 장식된 안상(壺門)의 도안은 모두 당대 비교적 전형적인 장식 도안이다.
금동관에는 금동피(金銅皮)를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관의 네 주위와 뚜껑에는 선조로 유려한 쌍홍문(기러기가 풀을 물고 있는 도안)이 새겨져 있다.
바탕 문양은 연주문이다.
이 기러기 도안은 기본적으로 섬서성 법문사 당대 지궁에서 출토된
도금의 한쌍의 원앙문 대은분(大銀盆)[③] 상부의 원앙도안과 유사하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현존하는 선유사 사리탑의 연대는 당대라고 간주하며
수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3.지궁 및 기타 출토 문물에 대한 토론
지궁은 여러차례 열려졌기 때문에 석문은 이미 파손되었다.
지궁에서 출토된 문물의 연대는 사리탑의 연대를 판단하는 데 기준이 되는 유물은 아니지만
참고할 수는 있다. 지궁에서 출토된 석함과 수대 사리탑하명의 명문을 통해,
수대 선유사에는 사리탑이 1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대 탑은 어떠한 형상이었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수대 탑은 목탑이었을 가능성이 비교적 높다고
추측한다. 왜냐하면 수대에는 30개의 주에 영탑(靈塔)을 건립하였는데 1년만에 준공하였다.
인력, 물력을 통해 보면 전탑이었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목탑만이 전국 각지에 흥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개원 4년에 사리를 다시 꺼내었는데 당시 사리탑을 중수하기 시작하였는지?
개원 4년에서 13년까지 9년간의 시간동안 전탑을 수리하였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본다면 중수할 시간은 비교적 충분하였을 것이다.
지궁에서 발견된 유물 중 년대가 비교적 늦은 문물로는 흑유 향로(黑瓷熏爐)가 있다.
이 유물은 전형적인 요주요(耀州窯)에서 생산된 산물이고
연대는 오대에서 송대에 이르는 시기에 해당된다. 이는 지궁이 최후로 열린 시기에 매납되었을 것이다.
출토 당시 훈로 내부에서는 단향 이외에 두 종류의 향회, 즉 백색과 흑색의 향회가 있었다.
이외에 우리는 탑의 제1층 외벽에서 금대 “大定十九年”의 명문제기를 발견하였다.
제1층 남쪽의 아치형 구멍(券洞) 안쪽에서 송대 “政和年間”의 명문제기를 발견하였는데
이를 통해 송대에 이 탑이 중수되었을 알게 한다.
[②] 撲萬裏, 2004 「, 略論隋代的舍利无埋制度」『, 陝西曆史博物館館刊』11期, 三秦出版社.
[③] 陝西省考古硏究院等, 2007『, 法門寺考古發掘報告』, 文物出版社, p.139.
● 신라 호국의 염원, 사천왕사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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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특별전 "사천왕사" : http://blog.daum.net/gijuzzang/8514548
●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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