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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 - 한스 홀바인<영국왕 헨리8세 초상>

Gijuzzang Dream 2009. 8. 25. 12:47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Museo Thyssen-Bornemisza)은

티센가의 개인 미술관이다. 800여 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어

개인 미술 수집품으로 세계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독일 라인-루르 지역에 세계 최대 규모의 제철 및 강철 그룹을 건설한 티센家의

하인리히 티센(Heinrich Thyssen)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미술품을 수집하는데 정열을 쏟아 부었다.

헝가리 여남작 보르네미자 데 카존(Bornemisza de Kászon)과 결혼해

작위를 물려받은 하인리히 티센은

늘어나는 미술품을 로혼츠(Rohoncz, Rechnitz) 성에 보관하고 있었지만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합병을 시도하자

수집품을 가지고 스위스 티치노 주에 있는 카스타놀라(Castagnola)로 옮겼다.

수집품을 관리하던 하인리히 티센의 아들 한스(Hans)가

스위스 루가노 호숫가의 빌라 파보리타(Villa Favorita)에 수집품을 전시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1947년 하인리히가 죽자 상속을 요구하는 소송 때문에 하인리히의 소장품들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스는 아버지의 소장품을 다시 사들이는 데 성공했으며 특히 부족한 현대 미술을 많이 구입했다.

그 이후 한스 하인리히 폰 티센 보르네미자 남작(Baron Hans Heinrich Thyssen-Bornemisza)은

스페인 여성과 카르멘(Carmen)과 결혼하면서 수집품들을 1992년 마드리드로 옮겨

카노바스 델 카스티요 광장(Plaza Canovas del Castillo)에 있는

비야예르모사 궁(Palacio de Villahermosa)에 보관하게 된다.

그 이후 비야예르모사 궁은 미술관으로 개조돼 일반인들에게 티센가의 수집품들이 전시한다.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은

스페인 프라도 국립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이나

소피아 미술관(Centro Arte de Reina Sofia)과 달리 20세기 주요 현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또한 스페인 화가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권위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한스 홀바인의 <영국 왕 헨리 8세의 초상>

 

<영국 왕 헨리 8세의 초상화>

1536~37년경, 나무에 유채, 27×17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의 가장 수작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영국 왕 헨리 8세의 초상(Portrait of Henry VIII)>이다.

  

이 작품은 헨리 8세의 주문대로 통치자의 자신에 찬 모습을 세밀하게 재현하고 있는데

헨리 8세의 넓적한 얼굴과 매서운 눈초리는 그의 독특한 성격을 보여준다.
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이자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 앤이 처형되고

수도원이 해산했을 때였다. 
 
독일인이었던 한스 홀바인은 1532년 영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웠다.

영국에서 그 당시 인물의 세세한 부분까지 탁월하게 표현한 홀바인을 필적할만한 초상화가가 없었다.

홀바인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영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초상화가가 된다.

헨리 8세의 후원으로 홀바인은 영국 최초의 궁정화가가 된다.

헨리 8세는 그에게 초상화를 주문하면서 두 가지 요구사항을 지켜달라고 했다.

자신의 힘과 권위를 강조하는 이미지와 자신의 신부가 될 여인들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헨리 8세가 신부의 초상화를 부탁한 것은 왕가의 결혼은 정치적 동맹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로 다른 왕조와의 결혼은

두 사람만의 개인적인 일을 넘어서 국가의 존폐까지 생각할 정도로 외교상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작품은 헨리 8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홀바인은 왕의 옷과 장신구 등 지극히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정확하게 묘사해

격식을 차려 입은 헨리 8세의 권위가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홀바인은 왕의 옷에 값비싼 금박과 은박을 여러 군데 사용해 왕의 권위를 화려한 옷을 통해 강조했다.

그는 배경을 위해 비싼 물감 푸른색을 사용했으며

배경을 정확한 공간이 아니라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왕의 권위를 암시한다.

또한 배경에 헨리 8세의 그림자가 없는 것은 종교적인 인상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한스 홀바인의 이 작품은

인물의 개성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초시간적 양식과 종교적인 의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물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초상화 의미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Hans Holbein. Portrait of Henry VIII. 1537

 

 

영국 튜더왕조의 두 번째 국왕(재위 1509-1547)이자 아일랜드의 영주(재위 1541-1547)이며,

1509년부터 서거할 때까지(1547) 아일랜드와 프랑스의 왕위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헨리 8세는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에 있던 프라센티아 궁전에서

아버지 헨리 7세와 어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헨리에게는 여섯 명의 형제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겨우 세 명(아서=웨일즈공, 마거릿, 메리)만이 유아기에서 살아남았다.

그의 아버지 헨리 7세의 뒤를 이어 튜더왕가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등극하였다.

 

헨리 8세는 영국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비록 치세 초반기에는

14세기 존 위클리프 이후 활력을 얻기 시작한 종교개혁을 강력히 억압하였지만,

로마교황청과 대립한 왕으로 더 알려졌다.

이 싸움은 결국 헨리 8세가 종교개혁을 단행하여

6세기 이래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를 독립시키고,

로마교황 대신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교회의 우두머리로 자리 잡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록 그가 임종하기까지 얼마간 영국성공회 신자였다고는 하지만,

앞선 생애 대부분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전례와 교리를 지지하는 데 보냈다.

본격적인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6세와 엘리자베스 1세 때부터였다.

자녀는 메리 1세, 헨리 피츠로이, 엘리자베스 1세, 에드워드 6세를 두었다.

 

헨리 8세는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통합을 이끌기도 하였다.

대중문화에서 그는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며 여섯 번이나 결혼한 군주로 유명하다.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1485~1536)/ 앤 불린(1501~1536)/ 제인 시모어(1505~1537)

         클리브즈의 앤(1515~1557)/ 캐서린 하워드(1520~1542)/ 캐서린 파(1508~1548)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는

원래 왕위 계승자였던 요절한 그의 형 아서의 부인으로 아라곤(에스파냐)의 캐서린 왕비이다.

스페인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헨리 17살 때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1509년 6월 24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헨리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헨리 8세 : 1509년 모습

 

헨리 8세(Henry VIII) 

 

 

첫번째 왕비 -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1485~1536)

아라곤왕(에스파냐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딸.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백모.

1501년 헨리 7세의 맏아들 아서와 결혼했으나 결혼 5개월 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1509년 아서의 동생이 헨리 8세로서 즉위하자 그와 재혼하였다.

몇 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딸 메리(메리 1세)만 남고 모두 요절하였다.

헌신적으로 남편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는 것이 원인이 되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1531년 이후 별거 당하고, 1534년 헨리 8세는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이혼하였다.

이혼당하고 암에 걸려 고생하던 캐서린은 헌팅던 킴볼튼성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여러 차례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헨리의 합법적인 왕비라고 주장하였고

죽는 순간까지 헨리 8세를 그리워하며 죽어갔다고 한다.

 

 

왕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자 나라의 안정이라는 똑같은 이유로 이혼을 결심하고,

귀족의 딸인 앤 불린을 두 번째 아내로 맞는다.

 

 

두 번째 왕비 - 앤 불린(Anne Boleyn, 1501~1536)

 천일의 스캔들과 튜더스에 나오는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인 앤 불린.

어릴 적 캐서린의 시녀 일을 하였던 앤은 아주 똑똑하고 하였고,

그녀는 전형적인 미인은 아니지만 검은 머리와 눈, 유머와 재치

그리고 당당함과 패션센스로 궁 안의 남자들을 휘어잡았다.
헨리 8세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고 접근해서 자신의 정부가 되어달라고 하지만

그녀는 정식적인 결혼 전에는 절대 안 된다며 거절했다. 
헨리 8세는 캐서린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카톨릭 교회와 결별하는 등으로 그녀와 결혼한다.
결혼을 하고 앤은 아이를 낳았는데

헨리 8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이 아닌 딸(엘리자베스 여왕)이었다.
헨리는 이에 크게 실망하여 다른 여인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녀는 제인 시모어에게 밀려 간통과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게 된다.

 

 

그런데 1527년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을 하려고 했으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거부했다.

그의 첫번째 대법관이었던 토머스 울지는 1515~27년 동안 헨리의 조력자로서

완벽하게 국정을 이끌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자 결국 쫓겨났다.

새로 부임한 토머스 크롬웰은 1532년 영국 교회와 로마의 교회를 분리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1533년 헨리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승락했다.

이후 새로운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롬웰은 헨리의 첫번째 결혼이 무효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일로 헨리는 결국 로마와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설립하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헨리는 왕권을 강화시키며 강력한 전제정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크롬웰, 모어 등과 같은 친구이자 공신들을 비롯, 많은 사람들을 반역죄로 처형하면서 민심을 잃었다.
 
그는 성격적인 결함 등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지만
종교개혁을 하고 군주정치를 구현한 것은 그의 커다란 업적으로 남아 있다.
 
헨리 8세는 앤 불린과의 결혼 이후에도
1536년 앤 불린을 모시던 시녀 제인 시무어(헨리 8세를 계승한 에드워드 6세의 어머니),
1540년 개신교도인 클리브즈백작의 누이인 ,
1540년 앤 불린의 외사촌이었던 캐서린 하워드,
1543년 캐서린 파 와 차례로 결혼하여 모두 6명의 아내를 맞이했다.
 
 

 

세번째 왕비 - 제인 시모어(1505~1537)

앤의 드센 성격에 질린 헨리 8세는 좀 더 여성스럽고 정숙한 여인을 찾는다.
그때 마침 캐서린 여왕의 시녀였던 우아하고 정숙한 제인을 만난 헨리는

앤과 이혼한뒤 제인과 결혼하여 헨리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에드워드 6세)를 낳았다.
하지만 제인 시모어는 아들을 낳고 눈을 뜨지 못하고 죽어 윈저성의 성 조지 교회에 묻히게 된다. 
헨리는 제인의 묘 옆에 자신의 묘자리를 만들어 두었고 나중에 죽어 옆에 묻힌다.

 

 

 

네번째 왕비 - 앤 클레페(Anne of Cleves, 1515~1557)

제인이 죽자 헨리 8세는 독일 클레페 공국의 공주 앤과 결혼하게 된다.
앤의 오빠이자 독일 서부지역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인 클레베스 공작 빌헬름과

정치적 동맹을 결성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539년 로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이 결탁해

프로테스탄트 국가인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는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 위협은 헨리 8세의 측근 각료인 토머스 크롬웰로 하여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원수지간인 루터파와 잉글랜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결혼을 서둘러 주선하게 했다.

1540년 1월 1일 앤은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잉글랜드 땅을 밟았고

5일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헨리 8세는 초상화만을 보고 그녀를 선택하였는데

실제 모습을 본 헨리는 기대했던 것만큼 앤이 세련되지 못하고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며 매력적인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에

몹시 실망, 인사를 마치자 마자 도망갔고 결혼식까지 그녀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상냥하고 유순하고 재치있는 앤의 성격에

헨리는 호감을 가졌지만 합방만은 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녀와 이혼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의 셩격과 인품으로 헨리는 그녀를 친구로서 인정했고

그녀는 궁정 출입이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안나는 죽은 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다섯번째 왕비 - 캐서린 하워드(1520~1542)

앤 불린의 외사촌 여동생으로 명문 하워드 가의 딸이었다.
그녀의 숙부인 하워드 공작은 앤 불린과는 반대로 순종적으로 처신할 것을 교육하였다.
캐서린은 앤왕비의 시녀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헨리의 눈에 띄게 되어

헨리는 앤왕비와 이혼하고 비밀리에 캐서린과 결혼하였다.
하지만 캐서린은 결혼 전 몇몇의 남자와 문란한 행동을 거듭했었는데
결혼 후에도 계속 간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코 정숙한 여자가 아니었다.

헨리는 캐서린이 결혼 전부터 난잡한 생활을 했고 결혼 후에도 여전히 남자와 밀통했다는 이유로

반역죄를 선고해 그녀를 쳐형시킨다.

 

 

여섯번째 왕비 - 캐서린 파(1508~1548)

캐서린 파는 헨리와 결혼하기 전에  이미 두 번의 결혼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헨리 8세와 햄프턴 코트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헨리 8세의 마지막 결혼식이 된다.
그녀는 헨리의 전 왕비들 소생인 3자녀를 정답게 대했으며, 
헨리가 매독과 관절염으로 고생할 때 헨리를 달래주고 휴식할 수 있게 도와준다.
헨리가 병으로 죽은 뒤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을 하여 딸을 낳았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된다.

 

 

 

 헨리 8세 즉위 500년, 영국이 열광하는 까닭은

“유럽서 신세계로 뱃머리 돌려라” 그의 리더십이 그립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다진 헨리 8세.
대다수 영국인에게 그는 여섯 번 결혼하고 두 명의 부인을 죽인 광기의 군주다.
하지만 저명한 역사학자 데이비드 스타키(64) 박사는 “그때가 더 좋았다”고 주장한다.
물론 튜더 왕조 시대의 교육 제도를 다루다 나온 언급이지만
요즘 영국 쇠퇴의 위기감을 느끼는 영국인에겐 리더십 실종 현상에 대한 일갈로도 들린다.
런던 정경대(LSE) 교수이던 스타기 박사는 최근 일간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헨리 8세가 고든 브라운(영국 총리)보다 더 유능하게 영국을 통치했다”고 말했다.

올해는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른 지 500주년 되는 해다(그는 1509년 6월 24일 즉위했다).
영국 전역에선 이를 기념한 다채로운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가 행한 종교개혁의 의미, 해군 창설, 건축·미술 분야의 문화적 유산을 따라가다 보면
궁정 암투극의 주인공이던 폭군은
어느새 국가 운명을 180도로 바꿔 번영을 가져온 지도자로 탈바꿈한다.

스타키 박사는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에 가려 헨리 8세의 진면목을 잘 볼 수 없었다”며
“그는 로마 가톨릭과의 결별을 통해 대다수 유럽 국가와는 다른 세계로 향한
첫 번째 유럽회의론자(eurosceptic)였다”고 강조했다.
유럽연합(EU) 가입에 소극적인 오늘날 영국의 시각을 반영하는 발언이다.
고립된 섬나라, 별 볼 일 없는 변방에서 도박에 가까운 홀로서기를 하면서
대서양이란 신세계로 뱃머리를 돌려 유럽대륙은 물론 세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5만 명 반란 일어날 때 병력 1000명 불과
 
여성 학자 중에서도 헨리 8세에 대한 도발적인 재조명이 나온다.
옥스퍼드대 출신으로 햄프턴코트 궁의 학예사인 수재너 립스콤(30)은
얼마 전 펴낸 저서 『헨리 8세를 바꾼 1536년』을 통해 그 내면을 이해할 만한 단초를 제공했다.
그는 일간지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1536년 한 해에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점은
예전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일련의 사건들로 헨리 8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고 주장했다.
상냥하고 친근했던 신사가 잔혹하고 비정한 괴물로 변한 데는
1536년의 낙마 사고, 이에 충격 받은 앤 불린 왕비의 유산, 뒤이은 간통 루머, 혼외 아들의 죽음,
수차례 반란들…. 헨리 8세가 이 모든 상처가 축적된 중년의 위기를 영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낙마 사고 후 살이 찌기 시작해 그가 마상 창시합(joust)의 뛰어난 선수였다는 사실은
헨리 8세의 젊은 시절 갑옷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헨리 8세 포스터를 자기 욕실에 붙여 놓았다는 립스콤은
“아내뿐만 아니라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같은 총신까지 단두대로 보낸 역사를 정당화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헨리 8세에게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헨리 8세가 앤 불린에게 정말로 농락당했으며
그 때문에 자신의 성적 능력, 나아가 국가 통치력까지 의심했다는 것이다.
5만여 명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자신이 거느린 군사가 고작 1000명에 불과했다면
그가 받았을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있다.
왕의 치적을 미화하는 선을 넘어 잔혹하고 뒤틀린 성격마저
‘설명’하려 한 립스콤의 분석은 논란을 야기한다.

“그가 없었다면 위대한 역사를 즐기지 못했을 것”
“영웅은 아니지만 분명 영국에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란 평가도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역대 국왕 인기 순위에서 엘리자베스 1세, 빅토리아 여왕 다음을 차지하는가 하면
심지어 1위에 올린 이도 꽤 됐다.
“왕이 수도원을 해산시킨 다음 그 토지를 귀족에 나눠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예술에 조예가 깊고 잘 교육받은 군주로서 변화를 일으키는 리더십을 발휘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환경 십자군’을 자처하는 찰스 왕세자까지 헨리 8세를 거들고 나섰다.
한 강연에서 “헨리 8세가 말년에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에 관심을 드러냈다.
왕국 최초의 환경주의자였다. 이런 점이 나와 닮았다”고 말했다.
헨리 8세는 당시 배를 만들 때 쓰는 떡갈나무가 고갈될까봐 어린 떡갈나무를 베지 못하게 규제했는데
이는 숲을 보호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한 그루의 떡갈나무를 베면 그 자리에 12그루의 떡갈나무 묘목을 심으라고 명령했다.

찰스 왕세자는 헨리 8세와 또 다른 닮은 꼴을 갖고 있다. 바로 이혼 경력이다.
왕세자는 지난 4월 이혼녀인 커밀라 여사와 함께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만났다.
당시 더 타임스는 “헨리 8세가 1530년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선물받기로
했다”는 오보를 내보냈다.
그 편지에는 ‘형수와의 결혼이 성서에 어긋난다’며 이를 취소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청원이 기각되자 헨리 8세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세워 스스로 수장이 됐다.
교황청은 지난달 이 편지의 사본 200부를 제작해
전 세계 박물관 · 도서관에 각 5만 유로(약 8900만원)에 배포한다고 밝혔다.

 
 
1545년 프랑스와의 교전에서 침몰한 뒤 1982년 인양된 군함(헨리 8세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메리 로즈’ 호)은 튜더 시대의 군인과 뱃사람들의 의복 · 장신구 · 주방기기 등을 고스란히 간직해 ‘튜더 타임캡슐’로 불린다.
2100만 파운드(약 43억원)를 들여 첨단 기술로 재탄생할 '메리 로즈' 호는 2012년 런던 올림픽에 맞춰 선보일 예정이다.

영국인에게 1666년은 런던 대화재와 흑사병이 유행했던 경이로운 해(annus mirabilis)였다.
경제위기를 겪는 올해는 끔찍한 해(annus horribilis)라고 말한다.
 
고통받는 국민은 지도자의 개인사보다 통치의 성과를 원하는 게 아닐까?
헨리 8세가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 국익을 확보했다는 평가들은 강건한 군주의 리더십에 대한 향수를 일으킨다.
왁자지껄한 튜더식 낭만이 피어오르는 것 같은 햄프턴코트 궁 앞으로 적갈색의 템스강이 도도히 흐른다.
- 런던=박정경 자유기고가
olive-me@hanmail.net
- 중앙 SUNDAY 제123호(2009.07.18)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비운의 여섯 왕비들

헨리 8세의 여인들

‘divorced, beheaded, died, divorced, beheaded, survived’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헨리 8세가 가장 좋아했다는 햄프턴코트 궁에서 7~12일 열린 플라워쇼 푯말에 새겨진 글귀다.
이 글귀는 영국 역사상 가장 요란스러운 국왕인 헨리 8세와 여섯 왕비의 운명을 압축한다.

이 푯말과 함께 여섯 왕비를 형상화한 테마 정원을 보러 온 관람객들로
13만㎡에 이르는 궁전 뒤뜰은 연일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행사 기간 무려 17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첫 부인 캐서린 아라곤의 정원은 그녀의 사산(死産)을 상징하는 관이 놓여 있었다.
에스파냐 왕녀로서 헨리 8세의 형에게 시집왔지만 형이 죽자 헨리 8세에게 떠넘겨진 비운의 여인.
결국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그녀의 시녀였던 앤 불린에게 자리를 내 준다.
그러나 그녀 역시 ‘천일’ 동안 아들을 못 낳고 간통 · 근친상간 혐의로 런던탑에서 목이 잘린다(‘nationalarchives.gov.uk’에서 선정적 내용으로 가득한 불린의 재판 기록을 볼 수 있다).
무수한 책이나 영화에서 그려진 이미지답게 정원의 컨셉트도 ‘witch(마녀)’다.
 
헨리 8세가 제일 사랑했고 왕자를 낳았지만 산욕열로 숨진 셋째 부인 제인 시모어는 차갑고 창백하게,
불륜을 저지르다 덫에 걸린 철부지 캐서린 하워드는 10대 취향으로 정원을 꾸몄다.

헨리 8세의 생애를 뒤덮는 여성의 그림자는 좀체 걷어내기 어렵다.
스타키 박사는 이 남자의 필체에서 또 다른 여성을 읽어 낸다.
바로 그의 어머니와 누이의 그림자다.
 
“왕자들은 대부분 교사나 조언가와 비슷한 필체를 갖고 있는 데 헨리 8세는 어머니한테 글쓰기를 배운 것 같다”고 스타키 박사는 추측했다. 여성 의존적이고 감정적 제어가 어려운 성격도 여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앤 불린에게 보낸 육필 편지(영국 국립도서관에서 전시 중)나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만 보고 간택했다가 실제와 너무 달라 탄식했다는
넷째 부인 앤 클레브즈의 일화 등은 그가 얼마나 사랑 없는 결혼을 혐오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헨리 8세의 개인사들은 국내외 정치 상황과 얽혀 있다.
당시 날로 커 가는 신교 세력과 손잡기 위해 정략결혼을 택했을 가능성이다.
헨리 8세가 늙어서까지 전쟁판에 뛰어들길 주저하지 않았다는 건 타고난 남성성의 발로일 수 있다.
대제독이란 관직을 신설하고 전투군함을 만들어
훗날 영국 해군이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깨는 발판을 구축했다는 건 영국인에게 자긍심 그 자체다.

그에겐 두 여인이 더 있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
 
캐서린 아라곤의 딸인 메리 1세는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해
가톨릭 부흥에 나선 맹렬 여성이었다. 수많은 신교도를 처형해 ‘Blood Mary’라는 악명을 날린다.

반면 아버지의 과업을 이어받아 성공회를 정착시키고 45년간 다스린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추앙받는다.
평생 싱글이던 그녀의 이름을 딴 향수가 플라워쇼 한쪽에서 저자의 코를 자극했다.
- 박정경 자유기고가
- 중앙 Sunday 제123호, 2009.07.18

 

 

 

 

 

 

 

 추상화 발전 가져온 칸딘스키 초기작

 

 

작은 점들로 인물을 표현한 <뮌헨의 장크트루트비히 성당>

▲ <뮌헨의 장크트 루트비히 성당>

1908년, 캔버스에 유채, 67×96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에 독일의 표현주의 다리파와 청기사파의 작품이 많은 것은

티센가가 독일 출신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변화를 직감하고 있던 독일의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규칙과 부르주아 취향, 역사화에서 벗어나

파괴를 통한 생성이라는 니체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감정의 표현을 가장 좋은 미술이라는 개념을 세웠던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가 칸딘스키다.
티센 보르네미자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뮌헨의 장크트 루트비히 성당(St. Ludwig's Church in Munich)>은

칸딘스키가 작업실 근처에 있던 19세기 초 지어진 뮌헨 대학 교회 장크트 루트비히 성당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그의 추상의 발전을 가져온 초기작 중에 주요작품이다.

교회 정문 밖 가운데 아치 아래 화려한 깃발과

노란색의 성직자 복장을 한 신부들 앞으로 많은 화려한 색채의 점들로 표현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서 있다.

깃발과 신부들은 가톨릭 의식 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아치 아래의 어두운 색과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와 점묘주의에 영향을 받은 칸딘스키는

생생한 색채의 작은 점들로 인물들을 단순하게 추상화 시켜 표현했다.

칸딘스키는 이 작품을 제작하던 1908년 뮌헨에 정착해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북부 바이에른 풍경을 탐구하기 시작하면서 추상으로 가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칸딘스키가 추상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모네(Monet)의 <건초더미(Haystacks)>다.

화가는 사실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순수한 색채로만 표현한 모네의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그 이후 작품은 서서히 추상으로 바뀌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09년 08월 18일 [명화산책]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