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전(麻田)
고려 왕조 위한 사당 ‘숭의전’ 덕에 작은 규모에도 ‘郡’으로 승격 |
1914년 연천군에 편입된 뒤 쇠락 지역 전통음식 · 동식물도 찾아볼 길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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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를 따라 가다 문산 적성 나들목을 지나면 임진강변 ‘마전(麻田)’에 도착한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경기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인 이곳은 한 시절 전만 해도 마전군(郡)이었다.
이 지역이 고구려 때 마전천현(麻田淺縣)으로 불리다 신라시대 들어 임단(臨湍)으로 이름이 바뀐 뒤 ‘마전’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고려 초. 작은 마을이던 마전은 조선 태종 13년 현이 되었고, 문종 2년에 마전군으로 승격됐다.
조선시대 마전이 인접한 연천이나 삭령현보다 더 큰 군으로 승격된 까닭은 이 지역에 있는 사당 ‘숭의전’ 덕분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홍귀달(洪貴達)의 글을 보면 “마전은 본래 작은 현인데, 무엇 때문에 군으로 승격되었느냐, 우리 태조가 하늘 뜻에 순응하여 혁명한 뒤 왕씨(王氏)의 제사가 아주 없어질까 염려하여 여기에다 사당을 짓고 왕씨 시조 이하 몇 대의 제사를 지내게 한 덕이다. 문종조에 와서 왕씨의 후손을 찾아 제사를 주관하게 했고, 사당 이름을 숭의전이라고 했으며, 이로 인해 고을을 군으로 승격했다”고 기록돼 있다.
6·25전쟁 때 집중포화로 피해 커 … 지금은 ‘마전리’로 남아
하지만 군으로 승격됐다고 해서 땅이 더 넓어진 것은 아니어서 마전군의 살림살이는 빠듯했던 모양이다. 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이 먹고 잘 곳도 없고, 이졸(吏卒)이 평상시에도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으며, 학사가 허물어져서 스승과 제자가 머물 곳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군수 아문(衙門)이 사는 곳까지도 초가집에 나무 울타리를 둘러서 관가 같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오죽했으면 지역 사람들이 “이 고을은 없애는 것이 편한데, 그래도 없애지 못하는 이유는 숭의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전해올까?
그 뒤 30여년 동안 ‘마전’은 버려진 듯 있다가 성종 때 군수로 온 정연경이 객사와 향교, 관청을 새로 지으면서 면모를 일신했다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건물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건물이 있던 곳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도 없어서 저마다 다르게 이야기한다. 6·25전쟁 때 사라진 마전향교 터마저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니, 세월이 얼마나 무상한가.
마전군은 1914년 군·면 통폐합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고, 6·25전쟁 당시 집중포화까지 맞아 이제 오가는 길손마저 드문 쓸쓸하고 한적한 마을이 돼버렸다.
인근 전곡면 신답리에는 영평천과 한탄강이 만나서 물이 아우라(러)진다고 해서 ‘아우라지’라는 이름이 붙은 ‘아우라지나루’가 있고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는 미수 허목(許穆)이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살았던 은거당(恩居堂)이라는 마을이 있다. 미수가 1678년 판중추부사를 사퇴하고 귀향해 지내고 있던 중에 숙종이 그의 충절과 덕망을 기려 사우(祠宇)를 하사한 데서 붙은 이름이다. ‘성은을 입은 거소’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이 마을에는 지금도 미수 허목의 사당과 무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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