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야미도와 도약하는 한국의 수중발굴
도굴범과의 숨바꼭질로 시작된 야미도 수중발굴
우리나라에서 수중문화재 발굴조사는
대부분 어로작업 도중 유물을 발견한 사람이 관계기관에 신고하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해당 해역에 대한 유물 매장여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수중발굴조사를 실시한 군산 야미도의 경우는
이와는 다른 경로로 시작되었다.
현장 검증과 함께 시작된 긴급탐사는 유물 매장 위치를 놓고,
도굴범과 우리 조사단 사이의 숨바꼭질이었다.
도굴범은 방조제 안쪽 내수면 중 배수관로가 묻혀 있던 지점에서
바다 쪽으로 50~100m 사이 해역에서 청자를 도굴했다고 했다.
그 지점을 조사했으나 바다 속은 몽돌 등 자갈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유물 매장 환경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청자 파편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도굴범은 정확한 도굴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조사단은 그들의 거짓말에 맞서,
우리의 경험과 조류, 주변 암초 등 바다상황을 근거로 유물 매장 지역을 찾아내야 했다.
야미도 인근 해역은 원래 조류가 매우 빠르고 바다 속 시야가 거의 확보되지 않는 지역이다.
어려운 수중환경과 함께 도굴범의 지능적인 속임수 속에서 단서를 찾아내야만 했다.
바다 속 고려청자를 확인하였으나!
조류의 흐름과 수심을 측정하여 탐사구역을 설정하는 것으로 탐사의 막이 올랐다.
수중탐사 작업은 해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류를 등지고 조사하는 것이 수월하다.
또한, 수심 10m 내외가 유물 매장 가능성이 높다.
야미도 인근 해역 조류는 방조제를 따라 남북으로 흘렀으며,
내수면 동쪽으로 들어가면 수심이 갑자기 깊어진다.
수심이 깊은 곳을 피해 남북의 조류방향에 맞춰 수심 10m 내외 지역에 200m의 조사범위를 설정하였다.
조사 당시는 밀물 때로 피의자가 제보한 야미도 초입에서보다는
반대쪽인 200m 끝 지점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잠수사가 유물을 확인하면 부이(buoy)를 올려 위치를 표시하기로 했다.
잠수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간 지 10분도 안 되어 부이가 올라왔다. 유물이 있다는 표시였다.
곧이어 청자 몇 점을 가지고 해수면 위로 나타난 잠수사는
바다 속에 청자가 묻혀있다는 소식도 알려 주었다.
유물 매장 여부를 확인한 조사단의 환호성 속에서 도굴범은 표정하나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바다 속에서 그 유물을 봤지만, 질이 떨어져 들고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품질이 떨어진 청자라는 이유였다.
고려청자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소중한 ‘유물’로 보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물건’으로만 보는 도굴범다운 발언이었다.
조사를 계속 진행하기 위해 도굴범을 직접 소형보트에 태워
도굴위치를 다시 확인하여 GPS로 좌표를 기록하고, 피의자와 수사팀은 서울로 돌아갔다.
이후 야미도에 대한 본격적인 수중발굴조사를 진행하였으나,
끝내 도굴범이 주장한 도굴위치에서는 유물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새만금사업’과 야미도
새만금사업은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굴곡진 100km의 해안선을
군산 비응도, 야미도, 신시도, 가력도를 거쳐 변산반도에 이르는 33km의 직선 방조제를 쌓아
내수면을 개발하는 작업이다.
1991년에 착수하여 2009년에 방조제 포장공사를 끝으로 1차 공사를 완료하는 장기 개발계획이다.
방조제가 공사구간별로 완공되면서 만경강과 동진강으로 유입되는 조류의 흐름이 바뀌었고,
바닷속에 매장되어 있던 수중문화재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2년도에는 비안도에서 양질의 고려청자가 다량 발견되었고,
2005년도에는 야미도 유물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야미도 해역에 대해 2005년 긴급탐사를 시작으로,
2006년부터 2009년 6월까지 연차적으로 수중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우리나라에서 수중문화재가 발굴된 지역은,
서해의 빠른 조류 흐름과 섬지역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발굴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야미도 발굴 조사 지역은 방조제 안쪽 내수면에 위치하고 있어, 조류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게다가 조사지역이 방조제로부터 50m 내외의 가까운 거리에 있어
조사단이 접근하기가 쉬워 조사 여건이 양호한 편이었다.
진화하는 수중발굴
수중이라는 특수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수중발굴에서는 조사장비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4년간 3차에 걸쳐 이루어진
야미도 조사는 한 단계씩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우리나라 수중 발굴 조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2006년 1차 발굴조사는 바다 속 갯벌 위로 드러난 유물을 수습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청자대접 등 755점의 유물을 인양하였다.
하지만 조사장비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인근 마을에서 1톤급 조사 선박을 임차하여 사용하였다.
잠수조사용 공기공급장치(후카)와 바다 속 갯벌을 제거하기 위한 제토장비인
고압물분사기는 4×6m 크기의 이동용 바지에 겨우 설치하여 사용하는 수준이었다.
선상 조사원은 앉을 자리도 없어, 하루 종일 서서 인양된 유물을 정리해야만 했다.
2006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2006년 수중탐사 전용선박인 18톤급의‘씨뮤즈호’가 건조되었고,
2007년에는 수중발굴 전담 부서로 수중발굴과가 신설되었다.
인력이나 장비 면에서 보다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조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다 속 환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2006년 4월에 새만금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전 구간에 걸쳐 완공되자 조류의 흐름이 급격히 느려졌다.
바다 속에는 퇴적이 진행되면서 40cm 이상의 새로운 갯벌이 쌓여,
그 이전에 드러나 있던 유물이 다시 매립되어 갔다.
2007년 제2차 조사에서는 에어컴프레서를 설치하고,
고압공기를 이용하여 제토하는 방법(에어리프트)을 사용하였다.
이전 고압물분사기로 제토를 하면 조류가 거의 없어 제토 후 시계(視界)를 어둡게 하고,
물이 다시 맑아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려 조사 효율성이 떨어진다.
반면 에어리프트 방법을 사용하면 잠수사가 육안으로 유물의 매장상태를 관찰하면서 제토를 할 수 있으며
이때 일어나는 흙탕물은 조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다른 구역으로 내보낼 수 있다.
보다 안전하게 유물을 수습할 수 있게 된 2차 조사에서는 청자대접 등 1,026점을 인양하였다.
2008년~2009년 제3차 조사는 ‘새만금사업친환경부지매립공사’의 시급성으로 인해
긴급 구제 발굴을 해야 했다. 우리 연구소와 한국농어촌공사 새만금사업단이 공동으로 조사하였다.
발굴 비용과 회계처리는 새만금사업단에서 담당하고, 우리 연구소는 학술 조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청자대접 등 1,183점을 인양하였다.
3차 조사에서는 제토장비를 새로이 개발하여 운용하였다.
바다 속에는 1m 내외의 새로운 갯벌이 쌓여 있어 기존의 방법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제토작업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조사단은 진공펌프와 슬러지펌프를 결합한 제토시스템을 도입하였는데, 이전의 에어리프트 방식보다 2~3배 빠른 작업 진행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압 공기의 흐름때 발생하는 힘으로 작동되는 에어리프트 방식은 수심이 낮으면 공기압도 낮아져 효율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진공펌프시스템은 바로 물과 함께 이물질을 빨아들여 제토하기 때문에 수심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제토 속도가 빨라지고 면적도 넓어지는 시스템이다.
수심이 얕은 야미도 현장 조건 상 진공펌프시스템 사용이 효율적이었다.
이 제토시스템을 운용하기 위해 가로 14m 세로 12m 바지를 제작하고,
제토장비와 30kW 용량의 발전기를 고정시켜 사용하였다.
또한, 3차에서는 수중 조사 전 과정을 기록하는 수중촬영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유물 매장 상태와 발굴 과정을 정확하게 기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잠수사에 의해 유물이 도굴당하는 일을 방지할 수도 있는 체제다.
새로운 제토시스템과 수중촬영시스템의 도입이 순조롭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가의 장비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조사단이 현장에서 헤드 부분을 교체하기도 했다.
또한, 직접 장비를 들고 수중에 들어가는 잠수사들은 익숙한 에어리프트를 고집하면서
새로운 장비 사용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내 새 장비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느끼자
오히려 잠수사들이 사용에 의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야미도 3차 조사의 새로운 제토시스템은
현재 진행 중인 충청남도 태안군 마도 수중발굴현장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앞으로도 해역 환경에 따라 새로운 시스템이나 장비 개발은 계속 진행해 나갈 것이다.
지금까지 야미도 유적에서 고려청자 4,500여점을 인양하였다.
청자는 대접과 접시 등이 주로 나왔고, 품질이 비교적 낮은 생활용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거친 태토에 암갈색의 유약을 사용했다. 구워진 상태가 좋지 않아 유약이 벗겨지고 산화된 것이 많다.
기존에 잘 알려진 전남 강진 등의 가마에서 생산된 양질의 청자와는 다른 모습으로,
12세기경 서남해안에 인접한 지방가마에서 민수용으로 제작된 도자기로 보인다.
수중발굴의 앞날을 위하여!
매년 증가하는 수중문화재 발견·신고 건수만을 놓고 보더라도,
서남해안은 수중문화재의 보고다.
하지만 이들 해역은 빠른 조류,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시계,
조사 시기의 제한 등 그리 녹록한 조건은 아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리나라 수중발굴조사 경험은 꾸준히 축적되어 가고 있으며,
학술적인 조사 체계를 위한 전문 인력과 장비 확보도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수중발굴조사의 발전을 위해서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중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발굴 조사를 하기 때문에,
유물의 효율적인 인양과 조사자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적합한 장비를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유물의 안전한 인양과 보관, 조사장비의 이동, 조사단과 잠수사의 안전을 충분히 보장해 줄 수 있는 대용량의 조사전용선박의 확보가 시급한 실정이다.
고가의 장비들이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우리 연구소의 역량을 키우는 것 역시 중요하다.
2009년 4월에는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제 우리 연구소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배와 유물을 단순히 인양하는 단계를 벗어나
바다와 인간의 관계, 그에 따른 문화유산까지 대상영역을 확장하여
해양문화 역사를 새롭게 밝혀 나가기 위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나아가 국민들로부터 수중문화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 문환석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과장
- 월간문화재사랑, 2009-07-09
'나아가는(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칠머리당 영등굿(중요무형문화재 제71호) (0) | 2009.07.31 |
---|---|
호머 헐버트 -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독립운동가 (0) | 2009.07.31 |
‘순우곤의 治’를 아는가 (0) | 2009.07.31 |
현존 최고(古) 신라비 - 포항 학성리 碑 논쟁 (0) | 2009.07.31 |
지문은 왜 생겼을까 ? (0) | 2009.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