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색채에 매료되다
美 보스턴 미술관 소장 작품
미국에서 손꼽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인 보스턴 미술관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876년 개관했다. 보스턴 미술관은 유럽의 미술관처럼 소장의 역사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방대한 소장품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 청동상, 아테네의 화병, 폼페이의 프레스코화 등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품 그리고 오세아니아 지역의 예술품 등 진귀한 유물들과 함께 유럽과 미국, 아시아 예술품까지 소장하고 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값진 아시아 예술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 되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보스턴 미술관의 유럽 회화관에서 독보적인 작품 중 하나인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감상할 수 있다.
고갱은 자신의 천재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아 화가로서 빠르게 성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천재로 인정받기커녕 가난에 시달려 가족들과도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고갱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선택해 찾아간 타히티에서 마찬가지였다. 가난과 병마에 시달인 고갱은 타히티에서 절망에 빠져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 전에 자신의 유언을 그림으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해 이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파노라마처럼 시간의 변화를 담아내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고갱이 그린 작품 중에 가장 큰 대작으로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오른 편에 누워 있는 어린 아기는 우리의 지난 과거이며, 그림 중앙에서 지혜의 과실을 따는 젊은이는 우리의 현재 모습이고, 왼편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닥쳐올 죽음의 고통을 귀로 막고 있는 노인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미래 모습이다. 그의 그림은 마치 심포니의 장대한 악상처럼 인간이 짊어진 삶의 애환이 담겨있어 감동적이다. 첫 번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해당되는 주제가
화면 오른쪽 아래 잠든 아이와 젊은 여자 세 명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뒤로 주홍색의 옷을 입은 인물들은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가운데 쪼그려 앉아 있는 여인은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과일을 따고 있는 남자는 살면서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상징한다. 화면 왼쪽 양팔을 들고 서 있는 신상(神像)은 다가올 세상을 암시하고 있으며 신상은 과일을 먹고 있는 어린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노파는 죽음을 앞에 두고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다. 노파의 발 밑에는 도마뱀을 타고 앉아 있는 흰 새가 있다. 이 작품에서 흰 새는 의미 없는 언어의 공허함을 상징한다. 한 달 동안 제작한 이 작품은 인간의 운명과 다양한 행로를 상징하고 있다. '모두 비례에 어긋나 일그러진 거대한 모습 그리고 의도적으로 들어 올린 두 팔, 두 경악스러움을 응시하며 누가 감히 그들의 운명을 생각하는가'
1897년 12월부터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친구 몽프레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작품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죽기 전에 내 마음에 품어 두었던 대작을 그려 보기로 했네.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또, 이 작품에 관해 모리스에게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적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고갱의 유작은 아니다. 고갱은 자살에 실패해 그림을 더 그리기로 결심한다.
모네의 <오전의 건초더미, 눈의 효과>를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은 1890년과 1891년 사이 제작된 <건초더미> 연작 중의 하나로서 모네는 빛에 따라 모티브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을 포착했다.
이 작품은 낮게 떠 있는 겨울 태양이 건초더미를 비추면서 타원형의 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늦겨울 오전의 차가운 빛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형태의 건초더미는 눈으로 뒤덮인 담청색의 들판 및 청색의 풍경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정직한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발견한 모티브를 빛과 날씨에 따라 연속적으로 거듭 그리는 방식을 택했다. 불필요한 세부는 생략해 소재를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더욱 섬세하게 표현하는 방식을 택했다. 모네가 가까이에서 그린 건초더미의 형태는 단순하고 간결하다. 그러나 대기의 변화를 과학적으로 연구했던 모네는 건초더미 자체를 묘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빛이 비춤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색채가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모티브를 과학적으로 연구해서 그린 최초의 연작으로 구도에서는 비슷하지만 작품마다 그림의 상황은 전혀 다른데 있다. 1891년 뒤랑-뤼엘 화랑에서 총 15점의 <건초더미> 연작만 전시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동료들 사이에서는 모네가 구매자들을 위해 연작을 만든다는 비난이 일었다. 이 시기에 모네는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아 작품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그는 연작은 변화에 대한 철저한 연구에서 나온 것이기에 모네의 최고작이 되었다. - 박희숙 서양화가, 미술 칼럼니스트 - 2009년 06월 02일 [명화산책] -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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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건초더미(노적가리)' 연작
모네는 인상주의를 말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화가이다.
우선 인상주의란 말부터 모네의 작품 제목에서 나온 것이다.
모네는 순간순간 빛에 따라 변하는 물체의 색을 표현했다.
하지만 빛과 공기 위주로 그리다 보니 그리는 대상의 세부가 분명하지 않은 그림이 되었다.
모네는 건초더미, 루잉 대성당과 같은 대상을
같은 자리에서 시간만 달리 하여 여러 장의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같은 그림은 한 장도 없었다.
시간에 따라 빛이 바뀌고, 빛에 따라 물체의 색깔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모네의 회화기법>
1)모네는 붓놀림이 매우 빠른 화가였다.
철저하게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던 모네는
그가 붓질을 시작한 첫 장소에서 무조건 그림을 완성해야 했다.
일단 시작한 그림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에겐 내일이 존재하지 않았다.
내일의 빛은 또 다시 어떻게 변할지 모르게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의 붓놀림은 필연적으로 빨라질 수 밖에 없었다.
2)팔레트에서 색을 섞지 않고 캔버스에서 직접 색을 혼합했다.
이는 빠른 속도로 그림을 완선시키기 위한 까닭이기도 하다.
또 색조의 선명한 효과를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기도 했다.
3)풍부한 빛을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햇빛으로부터 생동감을 부여받은 사물의 형태를 표현하기 위해 밝고 풍부한 색감을 사용했다.
“클로드 모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색채의 조화에 대한 탐닉, 사물을 보는 눈과
보는 사람의 주의를 포착하는 방식의 대담성이라는 면에서
그는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다. 앞으로 우리는 반드시 그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비평가 폴 망츠, 살롱 1865, [가제트 데 보자르]에서
지르베니(Giverny)로 거처를 옮긴 모네는 1890년부터 연작시리즈에 몰두한다.
“지금 각기 다른 효과를 내는 연작물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제가 바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한층 더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설픈 솜씨로는 될 성싶지 않습니다.
제 느낌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너무 무력해지지 않고 좀더 오래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 1890년 10월7일,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노적가리(건초더미), 대성당, 포플러 등. 처음으로 제작한 연작은
1890년 여름부터 1891년 겨울까지 30여 점 가량 되는 지베르니(Giverny)의 노적가리 시리즈였다.
이 연작의 제작은 모네에게 있어 빛의 향연과 더불어
경제적 빈곤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한다.
1891년초 부소, 발라통 화랑은 모네의 그림 3점을 각각 3000프랑에 구입했다.
노적가리 연작으로 모네는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미술상 뒤랑 뤼엘과 화해하며
활발한 교류를 나누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월이 되자 노적가리 그림 15점이 뒤랑 뤼엘의 화랑에 모습을 드러내고 3일만에 매진되었다.
'클로드 모네의 최근작' 이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회였다.
이 연작시리즈가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사람들은 오직 모네의 그림만 원한다. 수요만큼 다 그리지도 못할 거다.
모두 <노적가리: 저녁 무렵 인상>에 열광하는 걸 보면 정말 놀랍다.
그리는 족족 4000-6000프랑에 미국으로 팔려 나간다.”
‘클로드 모네의 최근작’이라는 제목의 전시회에서 피사로는 이렇게 격찬했다.
“이 그림들은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 같다. 말할 것도 없이 대가의 작품이다.
색채는 강렬하기보다 오히려 예쁘다는 인상을 주고 밑그림 솜씨도 뛰어나다.
배경 부분에서 다소 옆길로 샌 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단한 화가이다.
대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작품 모두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성공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그의 그림에서는 만족감이 풍겨 나온다.” (1891년 5월5일 피사로)
하루 중 빛의 변화에 따라 물체에서 모네가 느끼는 인상들을 잡아 그린 노적가리 연작은
빛이 바뀌기 전 순식간에 그려내는 게 원칙이다.
아침의 고요함, 한낮의 신록, 오후의 뜨거움, 일몰의 경건함 등 작품들은
한 물체에서 느껴지는 빛의 향연을 그려낸 것이다.
모네의 ‘노적가리’에서의 주인공은 건초더미가 아닌 저 역광의 ‘빛’이다.
모네는 불에 타는 듯한 일몰의 짚단을 그리기 위해 밭 가운데 10여 개의 화가(畵架)를 세우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빛을 쫓아 이 화가(畵架)에서 저 화가(畵架)로 옮겨가며 제작했다는데
빛의 조건이 지속되는 사이에는 무서운 속도로 그렸다 한다.
모네의 그림은 밝고 부드러운 색조 속에도 다른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없는
일종의 비극적인 울림이 있다. 대자연과 대기 현상을 그의 독특한 회화언어로 표출시킨 모네는
이 그림에서 진동하는 듯한 필촉으로 역광효과의 미묘한 뉘앙스를 정확하게 그려냈다.
모네에게 있어서 같은 풍경이라도 같은 순간은 한 번도 없다.
자연이야말로 빛과 색채의 변화를 표현하는 최상의 소재라 생각하며
풍부한 빛과 찬란한 색채를 화폭에 담았다.
자유로운 붓터치와 하늘과 땅이 알맞게 같은 주조색이 녹아 흐르는 통일감이 느껴지는
더 이상 뺄 것이 없는 저 너울거리는 흰빛에서 느껴지는 자유로움.
캔버스에서 캔버스로 이어진 긴 일생을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포착하는데 아낌없이 바쳤던 클로드 모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팔레트를 바꾸어가며 순간을 영원으로 남긴 모네는
1864년 공개한 <인상, 해돋이>로 보수적인 미술평론가들에게는 멸시를 받았지만
천편일률적인 화단에는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던져주었다.
빛에 따라 같은 대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가를 입증한 모네의 그림들은
인상주의의 탄생을 알리는 축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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