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 연재를 시작하며
“문명교류 길따라 인류상생 길찾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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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교류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정수일(70) 전 단국대 교수가〈한겨레〉지면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
다음주부터 매주 화요일에 선보일 새 기획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그 마당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5년간 복역한 뒤 2000년 8·15 특사로
풀려난 정 교수가 신문 연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식의 사회 환원은 지식인의 마땅한 본분”이라고 말한 정 교수는 “인간의 앎과 삶을 소통해 주는 문명 교류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과 갈증을 해소하는 데 일조가 되었으면 한다”고 연재의
포부를 밝혔다.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은 이질문명 간의 교류 현장과 사례를 통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타자관(他者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문물교류, 인물의 왕래, 여행기, 탐험기 등 문명 교류의 다양한 형태와 방식이 다루어질 것이다.
교류를 통한 인류 문명의 발달이라는 큰 틀을 보여줌과 아울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이 담당한 진취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킬 참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본의 아니게 ‘은둔의 나라’라는 가당찮은 누명을 강요당해 왔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러려니 하고 안주해 왔죠. 이제 이 연재를 통해 그런 누명을 벗어던지고,
문명 교류에서 우리 겨레가 간직한 저력을 새삼스러이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연재는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게 된다.
1부에서 주로 우리와 유관한 문명 교류사의 국면들을 다루고,
제2부에서는 시야를 넓혀 실크로드 등 교류 현장 답사를 통해
좀 더 현장감 넘치는 문명 교류 기행이 이어질 예정이다.
“실크로드 연구를 비롯한 문명 교류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연구입니다.
현장과 유물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보충되는 현실에서
현장 탐구나 고증이 없는 연구는 탁상공론에 불과하게 되죠.
불행히도 저는 1996년 5월 ‘장보고 대사 해양경영사연구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여
중국과 일본의 관련 현장을 탐방한 이후 아직까지 현장 취재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번 〈한겨레〉 연재를 계기로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픈 게 학자로서 제 간절한 바람입니다.”
199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명 ‘깐수 사건’은
분단시대 지식인의 운명과 관련해 착잡하지만 의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1934년 중국 연변 출신으로 베이징대를 졸업하고 중국 외교부의 촉망받는 인재로 일하던 그는
조국의 북쪽으로 돌아가서 학자로서 활동하다가는 급기야 ‘공작원’의 신분으로 남파된다.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남쪽에 정착한 그는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 결과는 1992년에 낸 방대한 연구서 〈신라·서역 교류사〉로 한 결실을 보았다.
96년 구속 이후 5년에 걸친 옥살이에서도 그의 학자적 정열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는 밥 먹고 운동하는 시간말고는 온종일을 독방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로 보냈다.
교도소에서 파는 관제 편지지를 원고지 삼은 그의 글쓰기는 ‘메모 작업’으로 통용되었지만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분량과 내용에 이르는 것이었다.
감옥 안에서 그는 세계 4대 여행기 중의 하나인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문명 교류사의 첫 고전인 〈중국으로 가는 길〉을 완역했고, 〈씰크로드학〉의 집필을 마쳤으며
〈문명교류사사전〉을 70% 가량 진행했다. 200자 원고지로 쳐서 대략 2만5천장 분량.
2000년 출옥 이후 3년 반 만에 그는 〈고대문명교류사〉〈이슬람 문명〉<문명교류사 연구〉등
5권의 저서와 3권의 역주서, 총 8권의 책을 펴냈다.
모두가 묵직묵직한 책들이거니와, 특히 한 사람이 3가지 외국어로 된 책,
그것도 고전들을 역주한다는 것은 번역사에 드문 일이다.
지난 4월에 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역주서는 그 가장 최근 주자에 해당한다.
남북분단 회환, 동서교류사 정열로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일종의 ‘10개년 집필계획’을 세웠어요.
문명교류사 일반과 우리나라의 대외교류사를 번갈아 가면서 연구하고 책으로 써내려고 했습니다.
투옥되는 바람에 계획에 약간 변동이 생기기는 했지만 대체로 그대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중세문명교류사〉 집필을 하고 있고, 이게 끝나면 〈고려 · 서역 교류사〉,
그 다음에는 〈근현대문명교류사〉, 그리고 근현대 우리나라 대외교류사까지를 쓰려고 합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본래 계획에는 없던 건데,
출판사와 함께 ‘문명기행 시리즈’를 기획하다가
기왕이면 우리의 것을 첫권으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역주하게 되었습니다.”
감옥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집필에 쏟는 그의 초인적 공력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새벽 4~5시까지(“남들 다 자는 새벽 시간이 글쓰기에는 좋다”고 그는 말했다)
하루 14, 5시간씩을 자료 조사와 집필에 할애한다.
오전에 일어나 뒷산에서 조깅과 체조(중국 기공 등을 응용해서 그가 나름대로 만든)를 하고,
하루 세 끼 밥 먹고 저녁 텔레비전 뉴스(와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말고는
그야말로 집필에 ‘올인’하는 셈이다.
이번 학기에는 한양대 대학원에 1주일에 세 시간 출강하고,
한달에 서너 번 외부 강연을 다니는 게 그의 단조로운 일상을 흔드는 변수들이다.
“그동안은 문명교류사와 이슬람 등에 관한 강연이 많았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후에는 혜초와 불교에 관한 강연 요청이 부쩍 늘었어요.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혜초는 우리 겨레의 첫 세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국보급 진서이고 세계 4대 여행기의 하나입니다.
그 원전이 지금 프랑스의 한 도서관에 ‘유폐’되어 있는데,
반환운동을 벌여 국보로 등재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려야 합니다.”
문명 교류사의 큰 한 축이 이슬람문명이고 그가〈이슬람 문명〉이라는 저서를 낸 바 있다는
이력을 감안해 이슬람과 중동사태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 보았다.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오해는 대부분 서구문명 중심주의에서 결과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평화적 이념을 지닌 이슬람교를 ‘호전’과 ‘폭력’의 종교로 매도하다 보니
‘한 손에는 꾸르안(코란), 다른 손에는 검’이 마치 이슬람의 징표인 양 인구에 회자되고 있어요.
또 나름의 역사성과 조건부를 띤 일부다처제를 비롯한 이슬람 사회 고유의 현상들이
부정적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거죠.”
중동사태의 핵심이라 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서도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중동사태의 발단은 서방세력의 배후 조정 하에
이스라엘이 아랍 세계의 심장부에 들어선 데서 비롯된 겁니다.
해법이라면 서로가 한 걸음씩, 가해자인 이스라엘이 더 큰 걸음으로 물러서서
공존을 모색하는 데 있겠죠. 이라크 침공과 포로 학대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어요.
목욕할 때도 벗은 몸을 남한테 안 보일 정도로 치부를 중요시하는 무슬림을 발가벗기고 조롱한 것은
패륜과 범죄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 이전에, 합당한 명분도 없이 문명을 악용해 문명을 파괴하고 문명인을 도륙한 전쟁부터가
반문명적·반인륜적 범죄라고 해야겠죠.”
정 교수는 문명교류사에 대한 이해가
상생과 공영이라는 인류사적 화두와도 연결된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했다.
“상생과 공영은 보편 가치이고 인류 공동의 지향점입니다.
그런데 이 지향점을 향해 가는 첩경이 바로 문명 교류죠.
교류를 통해서만 인류는 서로 이해하고 상부상조하며 함께 번영할 수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미래 세계에 대한 이른바 ‘문명대안론’입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1) 장도에 오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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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나먼 서역땅을 향해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 행렬의 복원도.
디지털복원전문가 박진호씨 제공
보라, 비단길 문명이 몸섞고 새 몸 만들어내는…
지금 막 ‘문명교류기행’의 출발선에 서있다. 우리가 따라갈 길은 문명교류의 통로인 실크로드이고,
우리가 거쳐갈 곳은 이 길 연변에서 전개된 문명교류의 현장들이다.
이 현장들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명들이 어떻게 만나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달해 왔으며,
인간은 그속에서 어떤 지혜를 터득해 왔는가 하는 것을 체험하고 탐구하게 될 것이다.
문명의 교류는 서로의 앎을 얻게 하는 현장이다. 인류는 실로 오랫동안 서로를 모르고 살아왔다.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동방에 와 직접 본 여러 가지 문명업적들을 <동방견문록>이란 여행기에
실감나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당대는 물론, 그후 수세기 동안 그 내용을 믿지 않았다.
폴로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영혼의 평화를 위하여 이 견문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회개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폴로는 한숨을 몰아쉬며 회개는커녕
오히려 그가 본 동양의 놀라운 일들을 절반도 기술하지 못했다고 못내 아쉬워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런가 하면 그로부터 5백년이나 지난 뒤,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라고 자부한 철학자 헤겔조차도
‘중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중국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자인하였다.
이렇게 서로가 격폐되어 살아오던 인간이 근세에 와서 비로소 서로의 만남과 나눔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그 결과 오늘과 같은 나름의 공존공생에 이르게 되었다.
문명의 교류는 서로의 삶을 소통시키는 현장이기도 하다.
문명은 그 언제 어디서 창출되든간에, 모방성이란 속성으로 인해 널리 퍼지고 받아들여져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문명의 교류를 떠나서 역사의 발전이나 인간의 생존은 결코 상상할 수가 없다.
바늘로부터 인공위성에 이르기까지, 먹는 낟알로부터 입는 옷가지에 이르기까지,
간단한 춤사위로부터 요란한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것 하나도 교류의 결과물이나 혜택이 아닌 것이 없다.
인류역사의 전 과정이 그러했고, 오늘은 물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흔히들 21세기를 ‘정보화시대’니 ‘국제화시대’니 하고 말한다.
‘정보화시대’란 정보의 주고받음을 통해 선진정보를 공유함으로써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가 실현되는 시대를 말한다.
‘국제화시대’란 서로의 개방과 교류를 통해 범지구적인 인류공동체가 형성되어가는 시대를 말한다.
이러한 시대야말로 교류의 무한한 확산시대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는 서로의 어울림과 주고받음에서만이 생존과 번영의 활로를 보장받을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실감하고 있는 인류는 지금 미래에 대한 바람직한 비전과 대안의 하나로
문명과 그 교류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문명과 그 교류에 대한 담론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 경주 괘릉 앞에 도열한 서역사람들의 무인석상(오른쪽 끝). 한반도까지 이어진 고대 서역교류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
돌이켜보면, 인류의 역사는 인간사회가 제기하는
갖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종교로 선악을 가려내고, 철학으로 의식을 순화하며,
생산으로 부의 축적을 시도해왔다.
말하자면, 선이나 정의, 자유, 평등, 복리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왔다. 그리고 그 논리적 틀로서 수많은 학설과 주의주장이 나왔고,
그 실천방도와 보장책으로서 각종 제도와 규범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다시피, 그 어느것 하나도
서로가 닫혀있는 세계 속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한,
그리고 보편타당한 해법으로는 기능하지 못하였다.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전례없는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은 데다가 엄혹한 냉전까지 겹치더니,
종래의 해법에 대한 회의론이 일면서 새로운 해법과 대안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 유력한 대안이 바로 인류의 공생공영을 담보하는 보편적 가치와 공분모(公分母)인 문명의 교류이다.
이것이 이른바 ‘문명대안론’이다.
사실 이러한 대안론은 지난날 인류가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민족사와 세계사가 여실히 말해주듯이, 가슴을 활짝 펴고 남들과 잘 어울리며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한 민족은 예외없이 번성하고 오래 생존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옹졸하게 문을 걷어잠근 채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아온 민족은
영락없이 후진을 면치못하고 일찍이 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문명의 교류로부터 얻은 인간의 통절한 교훈이다. 교훈은 살려야 값지다.
곡식 한톨서 정치제도까지 문명은 주고받는 것 소통하는 것
한반도~지구촌 이어질 1년 장정
자, 맘준비 됐다면 떠나자 길섶의 문명들과 눈맞추러…
이러한 경험과 교훈을 살리려 우리는 이 ‘문명교류기행’의 장정에 오른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문명교류의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것이 과연 미래의 대안으로 될 수 있는가를 검증해본다.
작금 문명담론을 시대의 화두로 떠올리면서도
그 내용을 엉뚱한 방향으로 오도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문명충돌론’이다.
그 주창자들은 있을 수밖에 없는 문명간의 차이를 문명 본연의 충돌로 착각한 나머지
문명간의 관계를 교류나 공존에 의한 상생관계가 아닌, 서로가 서로를 극복하는 상극관계로 보고 있다.
그들대로라면 각이한 문명이 있는 한 충돌과 분란은 불가피하며,
따라서 인류가 그토록 갈구하는 지구촌의 평화는 요원한 일로 되고 만다.
그 진실 여부는 교류의 현장에서 확인될 것이다.
우리의 기행은 우리의 앎과 삶의 터전인 한반도에서 출발하여
멀리 6대주 5대양의 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문명교류의 주요 현장까지 약 1년간 이어질 것이다.
그 행정에서 경주 괘릉을 지켜서있는 괴상한 무인석상의 비밀이 파헤쳐질 것이고,
우리에게 들씌워진 ‘은둔국’이란 누명도 벗겨질 것이다.
더불어 저멀리 지중해 동안의 팔미라에서 발견된 중국 비단의 실체가 밝혀질 것이고,
멕시코만 해저에서 건져낸 금괴의 수수꺼끼가 풀리게 될 것이다.
△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
시대의 요청에 따른 이 ‘문명교류기행’은
문명과 그 교류에 관한 학습과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기행의 현장을 통해 문명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 교류는 왜 일어나며 그 과정은 어떠한가,
또는 그 엄청난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등
문명과 문명교류에 관한 기본지식을 습득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교류의 현장을 대할 때마다 구체적인 환경과 역사적 맥락에서
타문명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문명타자관(他者觀)’을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인류의 문명사를 마음대로 요리하던
‘서구문명중심주의’는 이제 설득력을 잃고 있으며,
‘문명화 사명’을 자처해 오던 서구문명은
더 이상 고압적인 우월주의에 안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 천시되던 ‘주변문명’, ‘저급문명’들이 점차 위상을 되찾으면서 이 ‘문명타자관’이 대두되었다.
다행히도 이를 계기로 문명담론이 활성화되고 문명인식이 점차 균형을 잡아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배타적인 자기중심주의(국수주의)와 허무적인 타중심주의(사대주의)를 철저히 배격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명과 그 교류에 대한 균형감각을 지녀야 할 것이다.
아직도 은연중 ‘선진서양’이니, ‘후진동양’이니 하는 등 우열주의 망령이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의 기행 현장에서도 자칫 이러한 망령에 현혹될 수 있다.
이것은 주로 근세 2백년간 서양의 기술문명이 동양을 앞질러나간 데서 나온 편단이다.
서양이 앞질러나간 것은 일시적으로 물위에 떠올랐다 잠겼다 하는 일종의 부침현상에 불과하다.
거시적으로 보면, 인류 5천년 문명사는
그 활동무대에서 동양과 서양이 서로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면서 만나고 나누는, 즉 문명교류의 역사이다.
이 기행을 함께하는 독자들은 내내 이러한 점들에 유의하면서
전개되는 현장들을 유심히 살핀다면 성공리에 기행의 장정을 완주하게 될 것이다.
- 20045. 06/08, 한겨레신문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정수일 소장
“21세기 인류 공존의 대안, 문명교류 확대서 찾아야”
사단법인 한국문명교류연구소가 최근 서울 옥인동에 문을 열었다.
문명교류와 관련한 국내 최초의 전문연구기관인 이곳은
김정남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사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함께 설립하고
문명교류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정수일씨(74)가 연구소장을 맡았다.
문명교류학은 21세기 들어 새로운 연구 분야로 동 · 서양 학계에서 주목받고 있지만
국내의 사정은 열악하다. 변변한 개설서 하나 없는 데다 몇몇 대학에 교과목이 개설됐으나
동양사 등 비전공자에 의한 강의가 이뤄지고 있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서른 차례 정도 실크로드를 답사했다는 정수일 소장은
지난 10년간 문명교류학의 학문적 정립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번 연구소 개설로 더욱 충실하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21세기는 문명교류의 무한확산시대로 문명교류를 통해 공생공영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하는
그를 지난달 28일 인왕산 밑자락에 자리잡은 연구소에서 만났다.
- 한국문명교류연구소는 어떻게 발족하게 됐나요.
“2006년 여름 중앙아시아 답사를 계기로 그해 8월 ‘실크로드학교’를 세워서
1년에 4번씩 실크로드를 답사했습니다. 답사를 가기 전에는 매번 관련 강의를 했고요.
이런 식으로 토대가 구축되면서 문명교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를 열게 된 겁니다.
연구소를 열면서 3가지 목표를 잡았어요.
첫째는 문명교류학을 학문적으로 정립하는 것이고
둘째는 문명 교류에 관한 고전들을 독해 · 번역하는 것입니다.
세번째가 지식의 사회적 환원 차원에서 실크로드학교를 계속 운영하면서
문화교육강좌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문명교류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입니다.”
- 문명교류학이란 무엇인가요.
“문명은 늘 움직이고 오가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좋으면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문명교류입니다. 모두들 피부로 느끼고 있지만 학문적으로 정립이 안 됐을 뿐입니다. 사실 문명교류를 연구하려면 여러 분야를 많이 알아야 합니다. 동 · 서양 교류는 중간지대인 서아시아나 아랍 세계를 거치는데 이 중간지대에 관한 연구가 언어부터 걸리다보니 어렵습니다. 물론 동 · 서양 문화교류사라는 게 일찍부터 있었지만 주로 동양사 전공자들이 했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저는 문명교류가 21세기의 화두라고 말해왔습니다.
대학 때 공부한 국제관계사라는 게 사실 정치관계사, 즉 힘의 논리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인류가 당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어요.
인류사는 한마디로 인류가 봉착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19세기 말 서양에서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로 찾은 것이 이성주의였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요. 갈등과 모순만 심화되면서 결국 세계대전이 터졌지요.
이 같은 상황에서 토인비 같은 지성인들은 다른 방도를 찾았습니다.
모든 민족, 국가, 계급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공통분모로 찾아낸 게 문명(civilization)이었어요.
사실 1990년대 냉전이 무너지니까 모두들 평화세계가 올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종교 분쟁, 민족 분쟁이 다발하고 있습니다. 이걸 정치나 경제 이론으론 설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나 독일의 문명공존론 등 문명담론이 하나의 대안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아직 구상 중이지만 문명대안론을 내세웁니다.
교류를 통한 보편적인 문명의 창조가 시대의 화두라는 생각이지요.”
- 최근 발생한 인도 뭄바이 테러 등을 보면
문명교류보다 문명충돌이라는 말이 더 맞는 거 아닌가요.
“역사적 뿌리가 깊다 보니 그 같은 문제가 단시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같은 시각에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주범인데 이 이론의 가장 큰 오류는
문명을 아주 단순화해서 종교가치로 축소해 8개 문명으로 나눴다는 겁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종교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문명 충돌과 분쟁은 숙명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종교를 하나의 문명현상으로 공통분모를 살리는 방향으로 가야지
자꾸만 충돌을 강조해선 안 됩니다. 테러는 이슬람의 본연이 아닙니다.
이슬람은 평화적이고 관용적인 종교예요.
테러는 극소수의 정치적 극단파들이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저지르는 정치적 행태지
종교 문명 행태가 아닙니다. 이라크의 시아파와 수니파 분쟁도 종교 교리에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누가 정권을 잡느냐는 다툼일 뿐입니다.”
- 문명교류 연구에 왜 그렇게 몰두하시는 겁니까.
“실크로드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게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제일 처음 착안했던 게 실크로드의 한반도 연장설로 박사 논문도 ‘신라-서역교류사’였습니다.
저는 답사를 가도 항상 우리와 관계가 있는지를 살폈어요.
제가 연구를 하는 동력이라면 겨레에 대한 관심 같은 민족주의라고 자부합니다.
저는 당당하게 민족주의는 역사의 보편 가치라고 주장합니다.
요즘 민족주의에 대한 이론이 잘못돼서 완전히 고루한 사상으로 지탄받는 게 안타깝습니다.
민족주의를 운동이론이나 정책이념으로만 봐서 그렇습니다.
물론 민족주의를 남용·악용하면 파시즘으로 나갑니다. 히틀러도, 박정희도 그랬습니다.
‘배타적 민족주의’라고들 하는데 민족주의는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체화된 생태적인 생각이나 이념, 감정이 민족주의입니다.
민족주의의 속성은 연대의식과 수호의식, 그리고 발전지향성입니다.
내 민족과 나라를 발전시키자는 겁니다. 그러자면 문을 열고 가슴을 펴고 교류해야 합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교류를 가장 많이 했을 때 강성했습니다. 고구려나 통일신라를 보세요.
진정한 민족주의는 배타나 폐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시류에 영합하는 게 아니라 태생적인 겁니다.
김치나 된장을 좋아하면 다 민족주의입니까.
‘빠다(버터)’를 먹는 사람도 있지 모두 똑같은 걸 먹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가 김치를 발전시키고 또 누가 ‘빠다’를 발전시키고
그것들이 교류되어서 더 좋은 게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최근 실크로드나 중앙아시아 등에 대한 관심이 높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세계화와 관련돼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의 특징은 문명교류의 무한확산시대라는 겁니다.
정보화 시대라는 것도 사실 교류를 전제로 합니다. 이제 교류를 떠난 생존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 실크로드’, ‘철의 실크로드’ 같은 말이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그곳을 알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명분과 실리가 합치된 정책을 써야 합니다.
일방적으로 실리만 챙기고 상대를 무시할 게 아니라 서로가 공존하고 상부상조해야 합니다.”
- 문명교류와 관한 국내 고전이 어느 정도 있습니까.
“연구소에서 앞으로 1년 동안 세계 인식에 대한 우리 고전을 연구하는 작업을 할 건데
자료가 꽤 많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은둔의 나라, 폐쇄적인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게 있습니다. 1402년에 만든 세계 지도인데
미국 콜롬비아대에서 만든 지도학의 역사 표지로 나왔어요.
당시로는 가장 우수한 세계지도였기 때문입니다.
그 지도에는 중앙아시아가 나오고 당시 처음으로 아프리카가 나옵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세계에 관한 여러 가지가 기술돼 있고
최한기의 <지구전요>는 세계백과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자세하게 나옵니다.
그 시절에 그런 세계지도를 만든 걸 보면 우리 역사가 상당히 개방적이고 수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역사를 통시적·수직적으로만 봤지 공시적 · 수평적으로 못 봤어요.
그러다 보니 세계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부분을 제대로 못 본 겁니다.”
- 실크로드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 어디입니까.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요.
“지금까지 실크로드를 30번 가까이 다녀온 것 같습니다. 금년에만 5번 갔다왔고요.
어디가 가장 인상 깊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저는 항상 우리와 관련된 문화유산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와 교류했거나 우리와 비슷한 곳이지요.
투르크메니스탄이나 이란 같은 곳에 가면 물레 같은 농기구가 우리와 똑같습니다.
그런 게 적지 않게 있어요. 올해 몽골에서 시베리아까지 초원로를 갔다왔는데
내년에는 이를 글로 묶는 작업을 할 겁니다.
오아시스길과 초원길을 갔으니 앞으로 해로를 따라가서 실크로드 3대 길을 모두 돌아볼 생각입니다.”
■ 정수일은 누구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흘러간 유랑민의 자손으로 1934년 중국 옌볜에서 태어났다.
중국 베이징대 동방학부를 수석 졸업했으며 국비 장학생으로 이집트 카이로대에서 유학한 뒤
중동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63년 북한으로 가 평양국제관계대 및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교수를 지냈고
튀니지대와 말레이대에서도 연구했다.
84년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들어와 단국대 초빙교수 등으로 활동하다가
96년 간첩 혐의로 검거됐다. 이른바 ‘간첩 깐수 사건’이다.
대법원에서 1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0년 특별사면으로 출소한 뒤
연구와 강연, 집필 활동에 매진해왔다. 동서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중국어 · 일본어 · 영어 · 아랍어 · 위구르어 · 티베트어 · 몽골어 등 12개 언어에 정통하다.
<세계 속의 동과 서> <씰크로드학> <고대문명교류사> <문명교류사연구> <실크로드 문명기행> 등을
썼고 <이븐 바투타 여행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을 번역했다.
- 경향, 2008-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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