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년산성, 복원된 서쪽 성벽의 모습(남서에서)
삼년산성, 복원된 서쪽 성벽의 모습(북서에서)
성곽(城郭)의 나라
《좌씨전(左氏傳)》에 “거안사위(居安思危)”, “유비무환(有備無患)”
즉, “평안(平安)할 때 위험을 생각을 하고, 평시(平時)에 유사시(有事時)를 대비해 둠으로써,
훗날의 환란(患亂)을 막을 수 있다.”라 하였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성곽(城郭)이었다고 여겨진다.
성곽(城郭)이란 원래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는 두 겹으로 쌓았는데,
안쪽의 것을 성(城), 바깥쪽의 것을 곽(郭)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성곽(城郭)은 고대(古代)에서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전 시기를 통하여
축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유사시를 대비하는 시설로서
성곽 이상의 관방시설(關防施設)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BC 109년에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왕검성(王儉城)에서
한무제(漢武帝)의 군대와 1년여의 전투를 벌인 기록이 보인다.
이렇듯 우리나라의 성곽은 삼국이전부터 삼국시대 그리고 고려,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전술과 무기체계와의 밀접한 관련을 갖고 발전되어 왔다.
특히 지형을 잘 이용한 산성(山城)이 발달하였는데, 특히 삼국시대의 산성은 구조적으로 우수하여,
적은 인원으로 많은 외적을 퇴치할 수 있었다.
최근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지역에만 1,848개소의 성곽유적이 있는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그러나 아직도 파악되지 않은 더 많은 성곽유적이 있다고 보이며,
또한 이 통계는 북한지역이나 고구려와 발해의 전성기 때 경영하였던
만주지역의 성곽은 제외되었다.
이렇게 많은 축성사실에 대하여,
조선초기의 군사전략가인 양성지(梁誠之)는 그의 문집 <눌재집(訥齋集)>에서
『아동방성곽지국야(我東方城郭之國也)』이라 하여, 우리나라를 “성곽의 나라”라 하였다.
군사적 전통 청야입보(淸野入保)
<손자병법(孫子兵法)>에
“백 번 싸워서 백 번을 이긴다 하더라도 그것이 최고의 방법은 아니다.
최상의 방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일이다.”라 하였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은 그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에서
“적병(敵兵)이 정예(精銳)하면 수비(守備)하고, 적병(敵兵)을 해이(解弛)하게 하려면 수비(守備)한다.
방어(防禦) 전략은 적과 정면대결에서 불리함을 인식하고,
견성수비(堅城守備)에 의한 장기전을 취함으로써 적군의 전력을 소모시켜,
종국에는 적을 퇴각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라 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군사적인 전통은 청야입보(淸野入保) 또는 견벽청야(堅壁淸野)의 전술에 의존하였다.
당시에 사용되었던, 개인의 화기(火器)는
소위 오병(五兵)이라 일컬어지는 도(刀), 검(劍), 모(矛), 극(戟), 시(矢) 등이었고,
성곽전(城郭戰)의 공성무기(攻城武器)로 활(弓)보다 강력한 쇠뇌(弩),
고가 사다리인 운제(雲梯), 성문 등을 부수는 기구인 충차(衝車) 등이 보이고,
수성무기(守城武器)로는 성 위에서 돌을 날리는 노포(弩砲),
하천 돌을 준비해 두어 던지는 뇌석(雷石),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마름쇠(鐵 藜) 등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술과 무기체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곽형태가 바로 삼년산성과 같은 성곽이었다.
축성기록이 확실한 유일한 고대산성(古代山城)
삼년산성은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1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삼국이 쟁패한 국경의 요충지로 축성시기와 축성기간,
동원된 인력, 성곽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알려진 유일한 고대산성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자비왕 3년(470)에
“축삼년산성 삼년자 자흥역 시종삼년글공, 고명지(築三年山城三年者自興役始終三年訖功故名之)이라
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는데, 삼년(三年)이라 한 것은 3년이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 하였고,
소지왕 8년(486)에
“배이찬실죽위장군 , 개축삼년굴산이성 징일선계정부삼천”이라 하여,
(拜伊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改築三年屈山二城)
이찬 신분이었던 실죽장군(實竹將軍)이 일선군(一善郡) 경북 선산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고쳐 쌓은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철옹성(鐵甕城)
삼년산성은 둘레가 1,8㎞ 내외로,
오정산(烏頂山)의 계곡을 둘러싸는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산성(包谷式 山城)이다.
산성은 마치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은 천연지세를 이용하면서
이곳에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높게 쌓아, 난공불락의 성곽으로 마련하였다.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절리(節理)가 발달된 점판암으로,
장방형으로 납작하게 가공하여 한 층씩 가로세로 교대로 정교하게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성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다소 높이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성벽은 대개 하부 폭 10m, 상부 폭 8m, 높이는 무려 14~16m에 이르는 구조이다.
또한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유일하게 여장유구까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은 높은 성벽의 엄청난 하중이 성벽의 기저부에 집중되어 성벽의 약화를 막고자
성벽하단에는 덧대어 석축을 한 보축(補築)을 하였다.
이러한 보축시설은 본성(本城)의 축조에 버금가는 물자와 공력을 필요로 하는 보강시설을 하였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세기의 신라인이 이루어 낸,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축성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년산성 발굴 토제돼지, 삼년산성 발굴유물 차관, 토제 말
삼년산성 발굴유물
이형동제품, 납석제 용기, 성문결구용 철제못
성벽이 무너져도 방어가 가능한 성곽
삼년산성의 성벽은 축성된 지 천 육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튼튼한 구조로 남아있다.
비록 일부 성벽이 무너진 곳이 있으나, 무너진 성벽은 점판암의 성돌로 정교하게 축조하여
급경사의 석루(石壘)를 이루고 있어, 비록 성벽이 무너진 구간이라도
다른 성곽의 성벽을 넘는 것보다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오랜 세월로 인해 일부의 성돌이 풍화되어 훼손된 곳이 보인다.
그러나 정교하게 축조한 성벽은 다른 성곽과 달리 부분적으로 탈락한 성돌이 보이나,
성벽은 그대로 유지되는 우수한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년산성(三年山城)의 우수한 성곽구조
삼년산성은 일반적으로 산지에 마련한 편축성(片築城)과는 달리,
협축성(夾築城) 구조여서 성벽을 높게 축조할 수 있었는데,
현재까지 조사된 성곽 중 가장 방어력이 좋은 최고 높이의 수직성벽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문의 구조는 방어력이 좋은 다락문 현문(懸門) 형식의 성문을 마련하였다.
(왼쪽) 삼년산성, 복원된 서쪽 성벽의 모습(남서쪽 곡성)
(오른쪽) <충청좌도각읍지도, 보은>
지금의 충청북도에 해당하는 충청좌도의 12개 군현의 지도를 모은 책으로,
삼년산성은 읍치의 동쪽으로 5리 떨어진 산에 '삼년성'이라 표기해 놓았다.
성문은 각 방향으로 1개소씩 4개소의 성문이 마련되었다.
서문(西門)을 제외한 남문, 동문, 북문 등 3개소의 성문은
높게 축조한 성벽의 중간높이에 통로를 마련한 소위 다락문이라 불리는 현문형식의 성문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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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문형식의 성문으로의 출입은 사다리와 같은 별도의 기구를
마련하지 않으면 출입이 불가능한 구조여서 평상시의 통행은
다소 불편하나 유사시를 대비하는 가장 이상적인 성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문은 예외로 현문이 아닌 평문(平門)구조로 하였다.
이는 평시 병력과 물자의 편리한 출입을 위함이었다.
삼년산성의 서문은 조사결과 성문이 바깥으로 여닫는 구조로 밝혀졌는데,
이는 추정컨대, 당시의 공성무기(攻城)인 충차(衝車)로 성문에 부딪쳐도
쉽사리 문이 열리지 않도록 한 장점을 지닌 구조라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수레바퀴의 홈 자국이 보이는데,
그 폭은 1.66m임을 알 수 있다. 피아(彼我)를 막론하고
출입이 편리한 서문이 마련된 곳은 계곡지역으로,
성문위치가 성 내측으로 휘어져 들어 온 곳에 성문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성문 좌우측의 가까운 곳에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적대(敵臺)시설인 반원형의 곡성(曲城)을 마련함으로써
성문에 접근한 적을 측면에서 퇴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다락문 현문형식이 아닌 상대적으로 취약한 서문을
성문의 보호시설로 보강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성 외벽은 산지에 마련한 성곽이어서 경사진 산성에 오르는 과정이
성벽에 오르는 것과 같은 전투력이 소진되는 구조였다.
또한 성내에는 농성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음수의 확보를 위해
'아미지(蛾眉池)'라는 큰 연지(蓮池)를 마련하여 두었다.
서문에 들어서자마자 연지(蓮池)에 접한 암벽에 '蛾眉池' 라는 아름다운 글씨가 보이는데,
이는 해동서성(海東書聖)으로 불리는 김생(金生)의 글씨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 손영식 문화재위원, 전통건축연구소 소장
- 사진 · 문화재청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국립청주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 월간문화재사랑, 200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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