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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회적으로 지아비가 세상을 떠나면 평생을 수절하거나 따라죽고, 왜구에게 성폭행을 당하느니 목숨을 끊는 일을 정절(貞節)을 지키는 정도(正道)로 여겼기 때문이다. 전작인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 등을 통해 조선시대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탐구해온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는 최근 펴낸 <열녀의 탄생(돌베개)>에서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열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등장하고 내면화했는지를 추적한다.
남편이 사망할 경우 여성의 재혼에 아무런 사회적 규제가 없었다는 것. “고려시대엔 남편을 잃고 재가하지 않는 여성을 일컫는 ‘절부(節婦)’만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절부는 아내를 잃고 결혼하지 않는 남성을 뜻하는 ‘의부(義夫)’와 조응하는 말이었습니다.” 국가를 ‘가족의 확대’ 형태로 보는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강교수에 따르면 '열녀 문화'는 일종의 담론(discourse)이다. 다시 말해, 열녀 문화는 말과 실천의 복합체로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은 특정 집단의 가치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향이 뚜렷하게 포착된다고 분석한다. <내훈>만 하더라도 성종 때 제작됐으나 읽히지 않다가 부계 친족제도가 확립된 17세기를 전환점으로 "폭발적으로 유통됐다"는 것이다. '절부(節婦)'를 예로 든다. 고려시대에는 남편 사망 시 수절하는 절부가 있었지만 이는 재혼이 허락되는 가운데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반 강제적이었던 조선의 '열녀'와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와 순손(順孫 · 할아버지를 잘 모시는 손자), 절부와 의부를 각각 한 묶음으로 표창했는데 경국대전에선 의부를 그 대상에서 뺐습니다. 여성이 개가할 경우 자녀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고 수절할 경우 수신전(守信田)을 지급하는 등 재가를 금지하고 수절을 장려하는 정책이 생겨나기 시작했지요.” 성종 때 펴낸 <내훈(內訓)> 등을 통한 이데올로기 교육. “중국의 ‘열녀전(列女傳)’과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에 실린 이야기를 편집한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다양한 여성의 사례에서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버리거나 신체를 훼손한 여성들의 얘기만 뽑아 수록했습니다. <내훈>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일상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내용이지요.”
세종 14년(1432)에 편집된 <삼강행실도> 열녀편은 국가에 의해 강력히 보급된 텍스트다. 성종 때 언문축약편이 나왔고 중종 때에는 속편이 나오는 등 대량 보급됐다. 열녀편이 기본으로 한 <열녀전> <고금열녀전> 등에는 남성보다 우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 등 다양한 사례들이 수록되었지만 열녀편에는 오직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실천하기 위해 생명과 신체를 희생한 ‘열녀’만이 채택됐다. 국가가 주도한 텍스트의 대량 생산과 보급은 ‘남성의 하위자’로서 여성을 의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지금도 <삼강행실도>를 민족의 고전으로 보거나 열녀전에서 긍정적 요소를 끌어내려고 하는데, 이런 텍스트들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 같은 과정은 법과 제도의 영역에서 먼저 이뤄졌다. ‘열녀’는 고려말까지 존재하지 않았지만 조선초 <경국대전>에선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여성의 윤리로만 강제했다. 재가(再嫁)를 부도덕한 행위로 몰면서 사족(士族)의 부녀자가 재가하면 자녀의 관직 진출을 제한했다. 반면 수절할 경우 정문(旌門)을 내리거나 경제적 이익을 줬다.
강 교수는 무엇보다 ‘열녀 이데올로기’를 여성들에게 내재화하는 텍스트에 주목했다. <소학>, <삼강행실도> 열녀편, <내훈> 등이 이 같은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남녀차별을 정당화하고, 여성의 성적 종속성을 강화하는 열녀 프로젝트는 열녀의 사례와 규범을 다룬 텍스트를 통해 윤리란 이름으로 더욱 효과적으로 확산됐다. 가령 소혜왕후 한씨가 편집한 ‘내훈’은 복종적인 시집살이를 강조하고, ‘삼강행실도’의 열녀편은 보통 사람이 실천하기 어려운 가학적 방법으로 수절을 지키는 사례들을 본받아야 할 미담으로 소개하고 있다. 강 교수는 “내방가사, 규방가사로 불리는 작품들도 여성 교양의 함양이라는 미명 아래 가부장적 논리로 여성의 일상적 행위와 의식을 통제하는 데 일조했다.” 고 지적했다. 가문마다 다종 · 대량으로 쏟아져나온 것은 일상에서 딸과 며느리를 훈육할 새로운 텍스트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당시를 기점으로 유교 국가가 동요하면서 봉건제가 해체된다고 하는 통설과 배치되는 지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여성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낼 만큼 내면화됐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441명의 열녀가 왜구의 강간과 납치에 저항해 목숨을 버리고 병자호란 때 청으로 납치됐다 돌아온 여성들이 ‘성적 오염’의 가능성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나면서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던 건 건국 이후 200여 년 동안 열녀 이데올로기가 공고해졌기 때문이라는 설명.
강교수는 “양란이 끝나고 17세기 중반부터는 혼인제도가 처가살이에서 시집살이로, 남녀 균분 상속의 관습이 장자를 우대하는 불평등 상속으로 바뀌면서 ‘열녀’를 내세운 가부장제 사회가 완성됐다”고 했다.
“<효종실록> 이후의 열녀를 검토해보면 죽음이나 죽음에 필적할 만한 과도한 행위가 있어야 열녀로 인정받을 만큼 열녀의식이 내면화됐다”고 소개하며 “이 책이 현재에 대한 메타포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하지만 남성들의 이러한 시도는 '이중잣대'에 불과할 뿐이라는 지적도 곁들인다. "남성-양반은 열녀를 탄생시키면서 한편으로 그들이 오염된 여성이라고 규정했던 기녀를 존속시켰으며, 이러한 열녀와 기녀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중적 욕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 2009년 5월12일, 연합, 서울, 동아, 경향 등 일간지에서 정리
가문은 왜 열녀와 효부를 원했나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는 사람을 일컫는 열녀. 조선시대에는 수절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죽어서야 열녀정문이 내려올 정도였다.
열녀는 자생적 여성어가 아니고 남성의 종속적 위치에서 파생된 사회적 의미가 강한 절대 여성어다. 남성을 기준점에 두고 그 주변에 열녀와 효부가 놓인다.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시대에 이런 절대 여성어는 보통 여성으로 살기보다는 특별한 여성으로 살아가기를 요구했다. 도서출판 각에서 나온 '역사속에 각인된 제주여성'이다. 외모가 빼어났던 정씨를 안무사나 군관이 취하려 했다. 그러자 정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태종 13년(1413)에 안무사 윤임은 정씨가 친족들의 재가 권유도 끝내 듣지 않고 절개를 지켜 나이 70에 이르렀음을 조정에 알린다. 정씨는 고려 유일의 열녀이지만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 세상에 그 일을 널리 드러내는 정려문이 내려진다. 남편이 23세의 나이로 6·25전쟁에 참가해 순국하자 뒤따라 자결했다. 1956년 당시 모슬포경찰서장이 이를 기려 '양씨는 남편 따라 순명함이 효부의 도리라 하여 남편을 따라 죽었으니 그 절개는 천추에 충과 열이 되므로 단갈(短碣)을 세워 표창하노라'는 내용을 담은 비석을 설치한다. 이는 남성주의 시각에서 남성 작가가 기록한 것이다. 겉으로는 여성의 가치를 높이는 것 같지만 속내는 남성들의 기대치를 드러내고 있다. 집안에 열녀나 효부가 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정려비가 세워지는 등 정표에 따라 조정에서 선물을 내리거나 신분을 상승시켰다. 열녀나 효부를 '만드는'일에 적극적이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1961년부터 시작된 '장한 어머니'상 제정이 열녀 관념의 지속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봤다. 조선시대의 열녀 대열에 낄 수 있는 홀어머니가 가장의 역할을 하면서 이를 보상해 주려는 사회적 분위기로 장한 어머니상이 탄생했다는 견해다. 이 책에서 여성주의 시각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면서 "이제는 '열녀=제도적 희생양'이라는 것에서 벗어나 그 당시 여성들이 왜 자신들의 처지에 순종했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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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이데올로기 차원서 정절 강요”
성리학의 나라, 열녀(烈女)는 희생
강명관 교수 새 저서 ‘열녀(烈女)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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