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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경 - 쓸모없고 아름답지 못한 물건

Gijuzzang Dream 2009. 5. 8. 14:36

 

 

 

 

 

 

 쓸모없고 아름답지 못한 물건, 천리경

 

남북전쟁이 끝난 지 이틀 후인 1865년 4월 14일 저녁,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당시 포드 극장에서는 미국 최고의 비극 배우로 평가받고 있던 에드윈 부스가 연기하는

‘우리의 미국인 친척’이라는 작품이 공연되고 있었다.

링컨이 암살 당하던 날

사용했던 오페라글라스 

링컨은 금으로 도금한 독일산 오페라글라스로 배우들의 얼굴 표정까지 살펴보며 연극에 푹 빠져 있었다.

사실 멀리 있는 사람을 몰래 훔쳐보기에 망원경처럼 좋은 물건도 없다. 더구나 오페라글라스는 공연시 배우들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떳떳하게 훔쳐볼 수 있는 공식적인 물품이다.

하지만 링컨의 훔쳐보기는 그것이 생애의 마지막이었다.

공연을 관람하던 링컨은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던 남부의 열렬한

지지자가 쏜 총에 머리를 관통 당해 다음날 아침 사망했다.

그로부터 130여 년이 흐른 2002년 3월 27일

뉴욕 크리스티경매장에서 오페라글라스 한 점이 경매에 붙여졌다. 링컨이 암살당하던 날 사용했던 그 오페라글라스의 낙찰가는 무려 42만4천 달러. 지금껏 팔린 오페라글라스 중 사상 최고가였다.

멀리 있는 사물을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확대해 볼 수 있는 망원경의 발명은 아주 우연히 이루어졌다.

 

1608년 네덜란드 남부 미델부르크시에서 안경점을 하고 있던 한스 리페르세이의 아들은

아버지의 작업실에서 렌즈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렌즈 두 개를 어떻게 맞추었더니

멀리 있는 교회의 첨탑이 마치 가까이 있는 것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아들은 놀라서 큰 소리로 아버지를 불렀고, 한스 리페르세이는 그것에 착안하여 망원경을 만들었다.

 


30년간 독점 생산 권리 요구

한스가 발명한 망원경은 지방 관리를 통해 헤이그의 중앙 정부에 특허권이 청구되었다.

한스의 요구 조건은 망원경을 30년 동안 독점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권리였다.

하지만 네덜란드 중앙 정부는 한스의 발명 특허를 인정할 수 없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그 이유는 한스가 특허권을 신청한 이후 보름도 채 되지 않아

똑같은 발명으로 특허를 청구한 사람이 두 명이나 더 나왔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여기저기서 이 새로운 기구의 개발 소식이 들려와 한스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네덜란드의 한스 리페르세이는

렌즈 두 개를 겹쳐 망원경을 발명했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정부는 한스에게 후한 값을 지불했다. 적진의 동태를 감시할 수 있는 군사용으로 망원경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원경의 실용적 목적에 대한 한스의 견해는 이와 조금 달랐다.

그는 당시 막 태동하여 인기를 끌던 오페라 관람용으로 망원경을 개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스는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쌍안경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정작 망원경의 과학적 용도에 주목한 이는 따로 있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의 발명 소식을 듣고 원리를 연구하여 직접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런 후 갈릴레오는 그 망원경으로 땅에 있는 사물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의 표면이 울퉁불퉁하고 은하수가 별의 모임이며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망원경을 통해 알아낸 그는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유명한 말을 우리에게 남겼다.

망원경이 이처럼 인간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줄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사실 망원경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끌거나 대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물체가 크게 보이기는 해도 배율이 고작 2~3배 정도였고,

그나마 희미한 데다 상이 찌그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망원경을 통해 보는 세상은

진리와는 거리가 먼 환상에 가깝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을까.



100리 밖의 적군을 탐지하는 물건

조선에 망원경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상황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망원경이 처음 전해진 것은

네덜란드 안경점 주인 한스의 발명 이후 23년이 지난 1631년(인조 9) 7월 12일이었다.
그날 인조실록에 의하면 명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돌아와

천문을 관측하고 100리 밖의 적군을 탐지할 수 있는 천리경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리경은 지금의 망원경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여진의 족장 누르하치가 일으킨 후금이 명나라의 북경 근처까지 침범하자

조선은 명나라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정두원을 파견해 국제 정세를 살피게 했다.

그러다 귀국하는 길에 정두원은 산둥반도의 덩저우에서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인 조앙 호드리게스를 만나 망원경을 선물 받았다.

갈릴레오가 만든 망원경 

예수회 선교사인 호드리게스는 조선에도 기독교를 전하고 싶어서 그를 통해 조선 임금에게 신기한 물품을 선물한 것이다.

정두원은 이외에도 화약 심지를 쓰지 않고 돌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 서포와 매시간 종이 저절로 울리는 자명종, 화약 재료인 염초화, 붉은색 목화인 자목화 등의 물품을 함께 가지고 왔다.

국제 정세 파악은 물론 군사적으로 중요한 물품을 가져온 정두원을 가상히 여긴 인조는 그의 벼슬을 특별히 올려줄 것을 명했다.

하지만 사간원에서 몇 차례나 반대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정두원에 대한 포상은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별로 쓸모없는 물건만 가져왔으니 벼슬을 올려주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이때 정두원이 가져온 책 중에는 ‘원경설(遠鏡設)’이란 서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1626년 아담 샬이라는 독일 예수회 선교사가 한문으로 쓴 이 책에는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천문학적 성과와 함께 망원경의 원리와 구조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에게는 천리경과 더불어 그 책은 별로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고, 그 후 천리경은 관심 속에서 점차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용당포 앞바다에 나타난 낯선 배

그런데 인조는 천리경을 건네준 호드리게스에 대해 꽤 관심을 보인 듯하다.

정두원이 중국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바친 지 약 20여 일 후

인조는 정두원을 따로 불러 중국 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인조는 “육약한(陸若漢 ; 호드리게스의 한자 이름)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정두원은 “그는 도(道)를 터득한 사람 같습니다”라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했다.

기도와 고행을 통해 예수처럼 봉사하는 삶을 지향하는 예수회 선교사의 가치관에다

서양 과학 지식을 겸비한 호드리게스가 정두원의 눈에는 정말 도를 깨우친 이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조선왕조실록에 천리경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1721년(숙종 38) 5월 15일자의 기록에서다.

이날 청나라 총관을 접견하고 돌아온 조정의 관리들은

“총관이 압록강 상류에 이르러 길이 험해 갈 수 없게 되자,

강을 건너 그들의 지경(地境)을 따라 갔으며 늘 천리경을 가지고 산천을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할 때

망원경은 여전히 조선과 무관한 이국의 물건인 양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사람들이 망원경을 구경할 기회는 중국을 경유하는 방법 말고도 또 있었다.

1797년(정조 21) 9월 6일 경상도 관찰사 이형원은 동래 용당포 앞바다에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나라에서 온 배가 표류해 있다는 보고를 급작스럽게 올렸다.

  

그날 인조실록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배 안에는 코가 높고 눈이 파란 사람 50명이 타고 있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들은 머리를 땋아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역관을 시켜 중국어와 몽고어, 일본어, 당시 청나라 언어였던 만주어까지 동원해

국호 및 표류 이유 등을 물었으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붓을 주어서 무슨 말이든 쓰게 해보았더니

그들이 적는 문자는 마치 구름이나 산 같은 모양이어서 역시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이 하는 말 중에서 딱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있었다.

그것은 낭가사기(浪加沙其)라는 말이었는데,

아마 일본의 나가사키로부터 표류하여 이곳에 도착했다는 뜻으로 짐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한 달 후인 1797년(정조 21) 10월 4일 정조는 신하들에게 정무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전에 동래에 표류한 배에 대해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란타(阿蘭沱) 사람인 듯하다고 했는데

아란타는 어느 지방 오랑캐 이름인가”라고 물었다.

프로비던스호의 선장

월리엄 브로이튼 

이에 비변사 당상 이서구는 효종 때에도 일찍이 아란타 배가 와서 정박한 일이 있었는데, 아란타는 서남 지방 오랑캐의 무리로 중국 판도에 소속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아란타'란 지금의 '네덜란드'를 가리키는데,

효종 때 나타난 배는 바로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 상선 스페르붸르호를 일컫는다.

하지만 동래 용당포에 상륙한 배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사실은 영국의 범선 프로비던스호였다.

길이 33미터, 무게 40톤, 포 16문을 장착한 프로비던스호는

영국 해군 월리엄 로버트 브로이튼 선장의 지휘 하에

북태평양을 탐사하던 중 타타르해협으로부터 조선의 영흥만 앞바다를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다가 동래에 상륙한 것이었다.

앞서 조선에 우연히 표착한

박연(얀얀세 벨테브레)이나 하멜 일행의 경우와 달리

프로비던스호는 조선 탐험이란 뚜렷한 목적을 띠고 상륙한 최초의 서양 선박이었다.

그 같은 정황은 브로이튼 선장이 후에 출판한 ‘북태평양 항해탐사기’라는 책에 뚜렷이 적혀 있다.

그 책에서 브로이튼은 “새로운 정보와 교역이 기대될 것으로 생각해 조선 해안을 조사하는 것이

본래 항해 목적 중 하나”라고 밝혔다.


최초로 공무역을 제의한 서양 선박

프로비던스호는 무려 열흘 동안이나 용당포에 정박해 있었는데,

그동안 지방관리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도 무리 지어서 배에 올라 선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구경을 하고 다녔다.

동래부에서는 프로비던스호 선원들에게 물과 소금, 쌀, 고기, 해초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등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때 동래부사 정상우가 올린 보고에 의하면

프로비던스호에 실린 물건들은 유리병과 천리경, 구멍이 없는 은전 등 모두 서양물산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조정은 프로비던스호가 떠날 때까지 더 이상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조선의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 

그 후 1832년(순조 32) 때 충청도 홍주 고대도(지금의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로리)에서 20여 일간 정박한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상선인 로드 암허스트호는 서양선박 중 최초로 조선과의 공무역을 정식으로 제의했다.

그들은 모직물과 유리그릇 등을 주고 조선의 금ㆍ은ㆍ동과 대황 등의 약재를 사고 싶다고 밝혔다.

더불어 영국 국왕의 이름으로 된 문서와 예물을 조선 국왕에게 전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인 바친 예물 중에는 천리경 2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조정은 중국 황제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통상할 수 없다고 통보하며, 그들에게서 받은 서한과 선물을 되돌려 주었다.

 

영조는 왜 망원경을 깨뜨렸을까


조선이 이처럼 서양문화와의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천리경에 대한 무관심은 나름대로 뚜렷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잘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1744년(영조 20) 천문, 지리, 기후관측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상감의 관원 김태서는

사재를 들여서 천리경 및 천문서적 등을 들여와 영조에게 올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천문서적 중 일부만 관상감에 내려 보내고 천리경 등은 내려 보내지 않았다.

쓸 곳이 있는 물건인 데도 영조가 내려보내지 않자 결국 영의정 김재로가 영조에게 그에 대해 고했다.

그러자 영조는 “이른바 규일영(태양관측용 망원경)이란 것이 비록 일식을 살펴보는 데는

효과가 있으나 곧바로 햇빛을 보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며

“규일영이라 하면 좋지 못한 무리들이 위를 엿보는 모습이 되므로 이미 명하여 깨버렸다”고

대답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신하들은 태양을 관측하는 행위가 불경스럽다며

망원경을 부숴버린 영조에 대해 모두 잘한 일이라며 찬탄했다.



개인이 천문도를 마음대로 소지할 수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태양이 제왕을 상징한다고 믿어왔다.

따라서 망원경으로 태양을 세밀하게 관측하는 것은

정말 영조의 말처럼 임금을 염탐하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태양뿐만 아니라 별자리의 위치를 그린 천문도 자체도 조선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17세기 초 서양 천문도가 들어오기 전에 조선의 유일한 천문도였던 ‘천상열차분야지도’만 해도

개인이 사사로이 탁본을 떠서 소유하거나 제작하는 것 자체가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

지금 전해지는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대부분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왕의 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탁본을 떠 고위관료에게 배포한 것들이다.

 

 

망원경이 조선에서 별로 쓸모없는 물건 취급을 받게 된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천문에 대한 동서양의 해석의 차이에 있었다.

조선시대 천문학의 주류는 천체들의 위치를 측정하고 계산하는 위치천문학이었다.


동양에서는 천문의 변화를 읽어

인간 사회의 변화를 예고했다. 


조선의 천문관원들은 눈을 감고도 별자리를 외울 만큼 숙지하고 있었고, 별자리에서 어떤 변화가 있어나는지에 대해 매우 민감했다.

만약 혜성 같은 뜻밖의 별이 나타날 경우 그에 대응하는 인간 사회의 변화를 예고하는 징조로 천문의 변화가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궁녀를 상징하는 별이 밝게 빛나면 궁녀 중에 임금의 총애를 받는 이가 나타난다는 뜻이고,

임금의 잠자리를 의미하는 별자리에 혜성이 침범하면 나쁜 무리가 임금을 해할 위험이 있다고 해석했다.

즉, 조선에서 ‘천문을 안다’는 것은

별자리들을 모두 꿰고 외올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

망원경을 거기에 갖다 대고 별들의 구체적인 모양이나 현상의 물리적 원인을

탐구할 필요는 없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조선의 천문학에서 망원경은 있으면 좋기는 하되,

그들이 천문학을 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던 셈이다.

동양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음양오행설’은

우리가 가장 자주 대하는 천체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양은 달과 해를 가리키며,

다섯 개의 움직이는 별인 오행은 수성과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망원경의 등장 이후 오행 외에도 행성이 3개나 더 발견되었다.

천왕성과 해왕성을 비롯해 지금은 행성의 자격을 박탈당한 명왕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 행성들의 이름에는 모두 ‘왕(王)’자가 들어가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서양에서 붙여진 명칭을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천왕성(天王星)은 우라노스(Uranus, 하늘의 신), 해왕성(海王星)은 넵튠(Neptune, 바다의 신),

명왕성(冥王星)은 플루토(Pluto, 지옥의 신)의 직역이다.

망원경의 등장 이후 천문학의 주도권을 서양에서 쥐게 된 흔적이

이 3개 행성들의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셈이다.

 

 

- [이야기과학실록] 50, 51

- 2009.05.04 / 05.08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