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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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심(李啓心)’ ‘정약용(丁若鏞)’이 필요한 우리 사회

Gijuzzang Dream 2009. 1. 25. 22:57

 

 

  

 

 ‘이계심(李啓心) ‘정약용(丁若鏞)더 필요하다

 

18세기 조선 정조 시절 곡산 부사 정약용과 농민 이계심 두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일화는,

21세기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종종 인용되는 유명한 사건이다.

‘능동적 시민’의 모범과 올바른 법치를 구현하는 법률가의 모습의 예로 이 사건이 종종 거론된다.

정조는 중앙 요직에 있던 다산이 반대파의 공격을 받자

잠시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1797년 외직인 황해도 곡산 부사직을 제수한다.

 

다산이 부임하기 전 이 지역에는 농민 이계심이 주동한 ‘불법 시위’가 있었다.

군포(軍布) 비리가 만연하던 당시, 관에서 군포 대금을 200냥에서 900냥으로 대폭 올려 징수하자

이계심은 백성 1000여 명을 이끌고 곡산 관아로 달려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폭력적으로 해산되었고, 이계심(李啓心)은 수배자 신세가 된다.

 

부임을 앞둔 다산에게 좌의정 김이소는

이 불법 시위의 주모자는 물론 적극 가담한 자를 잡아 사형에 처하는 등

엄히 다스리고 질서를 회복하라고 말한다.  

당시 개혁파 관료의 우두머리 채제공조차

이계심을 잡아들여 사형시켜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분위기를 짐작할 만하다.

  

 

- 바른 소리에 귀기울인 茶山 -

 

다산의 부임행차가 곡산에 들어섰을 때 웬 사나이가 갑자기 행차 앞길을 가로막았다.

바로 이계심이었다.

그는 백성을 괴롭히는 12가지 병폐에 대한 호소문을 신임 부사에게 전달하려고

투옥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타난 것이었다.

 

관졸들은 그를 당장 포박하고 칼을 씌우려 하였으나

다산은 그를 오랏줄로 묶지 않고 그냥 관아로 따라오게 하였고,

사건을 검토한 후 무죄 판결을 내려 석방시켰다. 

 

이때 다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관소이불명자 민공어모신 불이막범관야 여여자 관당이천금매지야

(官所以不明者 民工於謨身 不以 犯官也 如汝者 官當以千金買之也),

즉 “官이 현명해지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이 제 몸을 꾀하는 데만 재간을 부리고 官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官이 천금을 주고 사야 할 사람이다.”

 
지금 보아서도 놀라운 사상이자 판결이다.

현대식 용어로 말하자면,

불의하고 부패한 권력 앞에서 시민은 움츠리지 말고 권력에 대한 비판을 실천해야 하며,

이러한 시민에게는 형벌이 아니라 상찬(賞讚)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함석헌 선생의 금언(金言), “깨어 있는 씨알이라야 산다”를 선취(先取)하고 있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후퇴, 그리고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키는 정책의 전면화 등 우울한 현실 앞에서

시민이 “제 몸을 꾀하는 데만 재간을 부린”다면, 이러한 현실은 가속도가 더해져 진행될 것이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은 ‘이계심’이 필요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야간 집회 · 시위를 금지한 집시법의 위헌을 제청하였다가

신영철 대법관의 압력성 이메일 파동 이후 사직서를 제출한 서울중앙지법 형사 7단독 박재영 판사,

일반교통방해죄의 위헌을 제청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 제8부의 판사들,

신 대법관의 부당한 재판 간섭을 거부하고 법관의 독립을 지키려는 전국의 단독 판사들과 같은

여러 ‘정약용’들이 꿋꿋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정약용’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이계심’과 ‘정약용’이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의 소명을 다할 때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더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2008.10.22 경향, [오피니언/시론]

 - 2009 06/02   위클리경향 8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