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사찰 사천왕사(四天王寺址)
경주시 배반동 935-2 외
국가지정문화재 / 사적 제8호
사천왕사지 전경(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당나라 침략의 급보를 받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사천왕사.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낭산)과 선덕여왕의 전설이 담긴 선덕여왕릉,
그리고 당나라 사신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조성한 망덕사지 등
1400년 전의 역사를 담고 있는 유적들이 한꺼번에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사천왕사지 발굴조사
조사년도 2006년~
경주 낭산 남쪽에 위치한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1963.1.21지정)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창건내용이 기록되어져 있고,
통일신라시대 사찰건축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방치된 신라 옛 사찰 조사>의 일환에 따라
사천왕사의 명확한 가람구조의 파악과 역사적 가치의 조명을 통해
향후 복원·정비를 위한 기초자료수집을 위한 발굴조사를 2006년 4월부터 현재까지 실시하고 있다.
사천왕사는
1915년 아유카미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916년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서탑지(西塔址)에 대한
발굴을 통해 수습된 “녹유벽전”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수장되어 있고,
1936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경주-울산 철도건설에 따라 사역주변을 조사한 바 있다.
현재 사역은 철도건설에 따라서 북쪽 사역의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며,
발굴조사는 서탑지와 서회랑지 그리고 서익랑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출토된 유물은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때 출토하였던 녹유벽전을 비롯하여
많은 기와들과 벽돌(塼片), 토기 및 자기류 그리고 금속유물 등이다.
기와 중에는 기와등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찍거나 선각한 명문기와가 많이 확인되었고,
‘천왕사(天王寺)’, ‘대길(大吉)’, ‘사천왕사기사년중수와(四天王寺己巳年重修瓦)’, ‘○상사(○上寺)’ 등이
찍히거나 선각된 명문기와도 출토되었다.
사천왕사지의 서쪽 목탑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녹유벽전은
기단의 벽면을 장식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목탑의 기단면석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녹유벽전의 형태는 모두 3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한편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전(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상반신이 확인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서탑지의 기단구조는 가구식전석혼축기단(架構式塼石混築基壇)으로
이전에 발굴조사가 되었던 황룡사 9층 목탑지의 가구식기단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 목탑의 연구에 일조를 할 것으로 기대가 된다.
앞으로 사역 내부에 대한 연차적인 조사를 통해서
쌍탑식가람의 특징적인 변화모습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된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四天王寺)는『삼국유사』에
‘唐과 전쟁을 하던 신라가 문무왕 10년(670)에 唐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신라의 명랑법사(明郞法師)의 건의로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절을 세우고,
밀교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자 갑작스런 풍랑이 일어 당나라의 배가 모두 침몰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호국사찰 뿐만 아니라 밀교사찰의 역할도 했던 것으로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또 그 후(679)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四天王寺)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천왕사는 통일신라 초기인 문무왕 19년(679)에 창건된 사찰로서
2기의 목탑(木塔)이 배치된 쌍탑식(雙塔式)의 전형적인 통일신라 가람모습을 처음으로 보이는 곳이다.
특히 이보다 몇 년 늦은 신문왕 2년(682)에 창건된 감은사 동ㆍ서 삼층석탑과 함께
당시의 건축과 미술은 물론이고, 한국 사찰 구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유적이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실에 전시되어 있는 2점의 녹유전(綠釉塼)은 이 사찰에서 출토된 것이며
당시 최고의 조각가였던 양지(良志)스님의 걸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6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유서 깊은 이 사찰터에 대한 발굴조사에 착수하였으며
현재 서목탑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사천왕사는 <1금당2탑 양식>의 가람배치가 처음 등장하는 사찰로,
사역 내에는 금당지, 동ㆍ서목탑지, 추정 동ㆍ서단석지와 회랑지, 익랑지가 있다.
사역(寺域)의 남쪽에는 머리가 없어진 동ㆍ서귀부(龜趺)와 당간지주 1기가 있다.
금당지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장방형 건물로 중앙에는 불상대좌로 추정되는 판석이 남아 있다.
동ㆍ서목탑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구조로 사방에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탑지(塔址) 중앙에는 방형의 사리공이 있는 심초석이 놓여져 있었다.
추정 동ㆍ서단석지는 금당지를 사이에 두고 동ㆍ서목탑지와 남북으로 대칭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강당지는 동ㆍ서단지의 북쪽에 위치하며
일제강점기에 사역을 가로지르는 철도의 가설로 일부 파괴되었다.
사천왕사지가 있는 낭산 일대에는 선덕여왕릉, 전(傳) 신문왕릉이 있고
국도를 사이에 두고 망덕사지(望德寺址)가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되었고 현재 재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서탑지는
흙과 적당한 크기의 돌을 교대로 쌓아올려서 만든 기단을 파낸 후 내부에 적심을 하고
그 위에 방형 초석과 심초석을 안치한 구조로 밝혀졌다.
기단부에는 당초문이 시문된 벽돌을 쌓아올렸다.
사천왕사 녹유전 출토상태
서쪽계단의 북편에서 녹유전의 일부가 기단석 위에 부착된 채 출토되었다.
또한 북쪽 계단의 동편에서는 녹유전이 당초문전과 함께 무너져 내린 모습이 확인되었다.
목탑의 기단형태는 사방중앙에 계단이 놓이고 그 양쪽으로는 장대석을 놓았으며,
장대석 사이에 얕은 장방형의 홈을 파고
그 안에 탱주(撐柱, 탑 기단부 가운데의 기둥)를 배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의 모서리 부분에는 사방 50㎝의 얕은 단을 만들고, 그 중앙에는 깊이 8㎝ 정도의 홈을 파서
우주(隅柱, 탑 기단부 모서리의 기둥)가 고정되도록 시설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단 바깥쪽에는 방형으로 돌아가는 너비 1.3㎝의 탑구가 만들어져 있다.
기단규모를 복원하면 한 변 최대너비 9.9m에 이른다.
이 탑의 일부였던 녹유전(綠釉塼)이 하반신만 남은 채 전시되어 있는 것이며 전시품을 자세히 살펴보면
악귀를 깔고 앉은 신상(神像)의 생동감 넘치는 인체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갑옷,
악귀의 미묘한 표정과 자세 등이 매우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상반신은 강우방 선생에 의해 추정 복원되었으나
이번 발굴조사에서 형상을 찾아내어 상반신과 함께 완전한 도상(圖像)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새로이 발견된 부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한 날개관을 쓰고 있으며
부릅뜬 눈, 축 늘어진 귀, 익살스러운 이빨 등이 더욱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섬세하게 표현된 갑옷과 화려한 복식, 녹유전의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는 꽃무늬 장식 등은
7세기 조각의 걸작으로 그 품격이 매우 높다.
- 윤형원, 국립중앙박물관 고고관 통일신라실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사천왕사 동목탑터 출토 - 녹유전 편(片)
사천왕사 서목탑터 출토 - 녹유전 편(片)
경주 사천왕사(四天王寺)
낭산(狼山) 기슭 신문왕릉(神文王陵)의 옆,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의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雙塔式伽藍) 배치에 따른 최초의 절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다음 가장 먼저 창건된 사천왕사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 속성과 신라인들의 불교관 및 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이 절터는 본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여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미리 알고 있던 3가지 일(知幾三事) 중 하나로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디인가를 묻자 이곳을 지목하였는데 여왕이 죽은 뒤 30년 뒤에
여왕의 능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지어짐으로써 여왕의 예지능력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신라인들이 낭산을 수미산(須彌山)처럼 여기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74년(문무왕 14) 당나라는 신라가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의 군사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대군으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文武王)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나라의 침입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명랑법사가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도록 권유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의 침입이 급박하여 절을 완공할 시간이 없어
색이 있는 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든 다음
12명의 유가승(瑜伽僧)들에게 비법을 쓰도록 하였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군대의 배가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 뒤 정식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여 5년만에 완공하여 사천왕사라 이름하고 관리하였다.
현재 절은 없어지고, 남북 105m, 동서 73m의 터만 남아 있다.
가람은 금당지를 중심으로 이들 건물을 둘러싸는 회랑터(廻廊址)가 있다.
금당의 앞에 동서로 목탑(木塔)을 세웠으며
탑지의 앞에 중문(中門), 금당지의 북쪽에는 강당지(講堂址)가 있으며
금당의 북쪽 좌우 목탑과 대응되는 곳에는 경루(經樓)-좌경루(左經樓) · 우경루를 두었다.
藤島氏의 「朝鮮建築史論」에 의거한 사천왕사지 가람복원도. (『圓融과 調和』, 도판 127)
금당지(金堂址)는 초석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초석에 의하면 정면 5칸, 측면 3칸 건물이며
건물지의 중간부분에 불좌대의 지대석으로 추정되는 장대석이 남아 있다.
동탑지는 130cm 내외의 높이로 토단이 남아 있으며 사방 3칸으로 초석이 남아 있다.
탑지의 중앙에는 118cm 내외 크기의 심초석(心礎石)이 남아 있는데 사리공(舍利孔)이 있다.
서탑지는 동탑지와 동일한 형태로 심초석의 사리공도 같은 크기이다.
사천왕사 서탑지
1922년 조사 때 스님의 작품으로 생각되는 사천왕상전 아랫부분(국립경주박물관 소장)과
연화문, 보상화문, 쌍조문, 녹유귀면와편, 녹유전편 등의 와전류들이 출토되었는데
탑지(塔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부조된 전은 일부가 복원되었는데
녹유전(綠釉塼)이다. 복원한 바에 의하면
천왕들은 각기 2마리씩의 악귀를 깔고 앉은 생령좌(生靈座)이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알 수 있는 동방지국천왕(東方持國天王)은
보관(寶冠)을 쓰고 왼손에 긴 칼을 들고 있으며
남방증장천왕(南方增長天王)으로 추정되는 천왕상은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 활과 화살을 잡고 있다.
이 사천왕상에 대해서 선덕여왕대에 활약하였던 승려 조각가인 양지(良志)가 만들었다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 절에는 경덕왕대에 도솔가(兜率歌), 산화가(散花歌) 등의 향가를 짓고 피리를 잘 불어
달이 가기를 멈출 정도였다고 전하는 월명대사(月明大師)가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절터 내에는 금당지, 동·서목탑지, 추정 경루지가 있으며,
사역 밖에 머리(이수, 螭首)가 없어진 귀부(龜趺) 2기와 비신(碑身),
높이 2.4m의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가 남아 있다.
절의 동편에 남아 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음각 등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무열왕릉의 귀부에 버금가는 뛰어난 것이다.
사천왕사지당간지주(四天王寺址幢竿支柱)
절 입구에 있는 이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일반 사찰의 당간지주와는 달리
고정 공(孔)이 상중하 3곳에 있고
상하의 것은 네모난 방공(方孔)이고 가운데 것만 둥근 원공(圓孔)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상 높이 약 230cm에 달하는 지주는 역시 당간(幢竿)은 없고,
또한 당간을 받쳤던 받침도 보이지 않는다. 지주의 폭은 50cm이다.
■ ■ 사천왕사터 발굴조사
경주낭산 남쪽에 위치한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1963.1.21지정)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창건내용이 기록되어져 있고,
통일신라시대 사찰건축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사천왕사(四天王寺)는『三國史記』 卷 第二 文虎王 法敏條에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므로 당시 당나라에 가 있던 의상(義湘)은
당에 갇혀 있는 김인문(金仁問) · 김양도(金良圖) 등으로부터 사전에 이 내막을 듣고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사태의 긴급함을 문무왕에게 알리게 된다.
당군(唐軍)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행하니 당나라 배들이 갑작스런 풍랑에 침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덕여왕(善德女王, 신라 제27대왕, 재위: 632~647)이
자신을 도리천(忉利天)에 묻어달라는 유언과 관련된 곳으로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긴 지역이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방치된 신라 옛 사찰 조사>의 일환에 따라
사천왕사의 명확한 가람구조의 파악과 역사적 가치의 조명을 통해
향후 복원 · 정비를 위한 기초자료수집을 위한 발굴조사를
2006년 4월 25일 고유제(告由祭)를 지낸 이후 2009년까지 4년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중심사역인 금당지조사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 되었던 서목탑지에 대한 재조사를 시작한다.
이어 연차적으로 추정 경루지에 대한 성격파악, 회랑의 유무, 중문지, 남문지 존재유무 확인조사 등
사역 전체 범위 파악과 사찰 내 부속 건물지에 대한 확인 및 철로 북편 강당지에 대한 조사,
귀부 주변 및 당간지주의 본래 위치를 확인하는 작업도 더불어 진행될 예정이다.
사천왕사는
1915년 아유카미 후사노신(鮎貝房之進), 1916년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서탑지(西塔址)에 대한
발굴을 통해 수습된 “녹유벽전”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수장되어 있고,
1918년 8월 原田淑人, 1922년 5월 小泉顯夫 · 梅原末治 · 藤田亮策, 1929년 藤島亥治郞가 조사하여
각각『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大正十一年度古蹟調査報告』,『朝鮮建築史論』에
조사내용을 발표했다.
1920년대초 諸鹿央雄에 의해 실시된 서탑지 발굴조사에서는
목탑지의 중앙부에 당초문이 양각된 대형 전돌을 깔았고
천조형(千鳥形) 녹유전은 주변 테두리에 일렬로 깔았던 것으로 보고되었다.
1936년 후지다 료사쿠(藤田亮策)가 경주-울산 철도건설에 따라 사역주변을 조사한 바 있다.
현재 사역은 철도건설에 따라서 북쪽 사역의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동탑지를 비롯하여 동ㆍ남 회랑(廻廊)지, 중문지, 추정단석지(불교의례를 행하는 장소)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사천왕사지의 전체적인 가람배치가 명확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조사결과 밝혀진 사천왕사 가람의 구조는 남회랑(南廻廊, 22칸)의 중앙에 중문(中門, 3칸×2칸)이 있고,
이 중문과 금당(金堂, 5칸×3칸), 강당(講堂, 현재 미발굴 상태, 철도로 인해 일부 유실되었을 가능성 있음)
이 남북 일직선상에 위치한다. 금당의 남쪽 동서 양측에 목탑(木塔)이 세워져 있고,
금당과 동서회랑(東西廻廊, 31칸)을 연결한 익랑(翼廊, 9칸)이 갖추어진 형태이다.
특히, 강당의 우측에서 감은사지와 같은 장방형 건물지가 확인되어
관계 연구자의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찰의 중심건물인 금당과 목탑의 기단(基壇) 축조 수법은
강돌(川石)과 토사(土砂)를 한 겹씩 교대로 다져 가면서 쌓은 특이한 구조로
토사만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기단을 조성하는 백제의 판축기법(版築技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서 앞으로 관계 분야의 연구가 기대된다.
사천왕사 익랑지
경주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 발굴조사에서
새롭게 익랑지(翼廊址, 날개처럼 펼쳐진 회랑)가 확인되고
회랑지(回廊址)가 노출되어 주목된다.
사천왕사지 익랑, 회랑 추정복원
1929년에 일본인학자 후지시마 가지오(藤島亥治郞)가 조사하여『朝鮮建築史論』에 기고한 글에는
회랑지의 존재는 추측하고 있지만 익랑지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발굴조사를 진행하기 전에 사역 안에서는 금당지와 동·서목탑지, 추정 경루지,
사역 밖에서는 머리 없는 귀부(龜趺) 2기와 높이 2.4m의 당간지주(幢竿支柱) 1기가 드러나 있었으며,
이번 발굴조사 결과 익랑과 회랑이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새롭게 밝혀진 익랑(翼廊)은
금당 좌우에서 동회랑과 서회랑에 직각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으로 놓인 회랑을 말하는데,
현재 사천왕사지의 서익랑지는 1칸×9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칸거리는 2.6-2.7m로 모두 등간격이며, 동서 길이는 21.0-22.4m이다.
서익랑은 서회랑과 직교하여 동쪽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동쪽 끝은 금당 서측면 중앙에 닿아 있다.
현재 초석은 모두 결실되었고 초석 아래에 있던 적심석만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익랑지의 구조는
1979년 발굴조사했던 감은사(感恩寺)와 거의 동일한 배치를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이번 사천왕사지(문무왕대 창건) 에서는
감은사(신문왕대 창건)보다 이른 시기에 익랑을 배치한 가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회랑지는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전체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익랑지에서 연결되는 부분에 남북방향으로 초석 적심석이 확인된 상태이다.
유물은 사천왕사(四天王寺) 명문이 찍힌 기와와
이전에 알려진 천조형전(千鳥形塼), 녹유 사천왕상전의 부분조각들이 출토되었다.
천조형전(千鳥形塼)
출토된 유물은 일제강점기 발굴조사 때 출토하였던 녹유벽전을 비롯하여
많은 기와들과 벽돌(塼片), 토기 및 자기류 그리고 금속유물 등이다.
기와 중에는 기와등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찍거나 선각한 명문기와가 많이 확인되었고,
‘천왕사(天王寺)’, ‘대길(大吉)’, ‘사천왕사기사년중수와(四天王寺己巳年重修瓦)’, ‘○상사(○上寺)’ 등이
찍히거나 선각된 명문기와도 출토되었다.
또한, 사천왕사지의 서쪽 목탑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녹유벽전은
기단의 벽면을 장식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목탑의 기단면석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녹유벽전의 형태는 모두 3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사천왕사지에서 수습된 섬세하고 생동감 넘치는 인물이 표현된
3종류의 녹유전(綠釉塼)이 서목탑지(2006년 조사)에 이어 동목탑지(東木塔址)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녹유전은 목탑의 기단부(基壇部)를 장식하였던 면석(面石)으로 사용되었으며,
배치순서도 기단의 계단을 중심으로 인물의 얼굴방향에 맞추어
각 면에 6개씩(3상×2조) 모두 24개(4면×6개)가 배치되어
목탑을 사주경계(四周警戒)하는 모습이었음이 밝혀졌다.
한편 일제강점기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녹유사천왕상전(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의 상반신이 확인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서탑지의 기단구조는 가구식전석혼축기단(架構式塼石混築基壇)으로
이전에 발굴조사가 되었던 황룡사 9층 목탑지의 가구식기단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 목탑의 연구에 일조를 할 것으로 기대가 된다.
- 차순철, <사천왕사지 익랑에 대하여>, 「경연고고」(제10호, 2006년 p. 2, 국립경주문화재연굿)
- 일간지 신문기사 종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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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터 ‘수호신상’ … ‘사천왕’ 견해 깨져 7세기 부조상 1300년간 베일속에 / 3가지 상(像)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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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7세기 신라 고찰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불교 수호신의 부조상(신장상)은 이땅의 고대 조각품 가운데 첫손에 꼽는 걸작이다. 신라 조각승 양지가 호국 발원을 담아 녹색 유약 입힌 벽돌판(녹유전) 위에 만든 이 조각상은 꿈틀거리듯 생생한 조형감이 일품이다. 갑옷 차림에 화살, 칼 등을 든 수호신들이 악귀를 짓밟고 불국토 지키는 자태가 근육이 실룩거리는 사실적 묘사로 육박해온다.
‘녹유신장상’으로 불리우는 이 수호신 조각의 정체는 1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국내 미술사학자들은 절 들머리에 흔히 볼 수 있는 사천왕의 일종이란 설과, 사천왕의 부하신 팔부중상이라는 설로 나뉘어 30여 년간 입씨름을 벌여왔다. 그런데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일제시대 녹유전이 출토됐던 절터 동서 목탑터를 다시 발굴해보니 이들 통설은 적잖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서탑터에 이어 올해 동탑터를 조사한 결과, 녹유전 신상은 사천왕상 같은 네가지 상이 아니었다. 단지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가지 상으로만 복원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 들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은 C상의 차례로 탑 기단부 한면마다 2번씩 되풀이해 붙인 형태였다. 곧 6개의 녹유신상이 A-B-C, A-B-C 식으로 배치된 모양임이 드러난 것이다.
추론해보면, 탑 기단부 사면에 붙은 신장상의 총수는 24개다. 한면에 네 개의 상이 연속된다는 강우방 전 이화여대 교수의 사천왕상설이나, 여덟개 상이 연속된다는 문명대 전 동국대 교수의 팔부중상설이 모두 빗나간 셈이다.
또 동탑 발굴에서는 이들 녹유상 4기가 탑 기단부에 온전히 박힌 모습으로 출토됐고, 상세히 몰랐던 C상의 전모도 알 수 있게 됐다. 발굴 조각들을 모아보니 A상과 B상은 각 6구씩, C상은 9구나 복원이 가능했다.
이런 발굴 성과에 학계는 당혹해하고 있다. 녹유상의 정체는 사천왕일 것이며, 녹유전 또한 탑 1층에 신앙 대상으로 봉안됐을 것이란 통설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확인된 세 가지 수호신상의 정체가 불교신의 원형인 인도의 전통 수호신이 중국의 오방신과 만나 생겨난 중국풍 ‘신왕’이라거나, 팔부중상의 원형이 아니겠느냐는 주장도 내놓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강우방 전 교수는 “신상들의 차림새는 분명 사천왕 포즈인데, 왜 상이 세 개뿐인지 이해가 안 된다”며 “이런 모순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 2008-12-02, 한겨레,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현재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 통일신라의 호국사찰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는
통일신라 초기인 문무왕 19년(679)에 창건된 쌍탑식(雙塔式) 가람으로
2기의 목탑(木塔)이 배치되어 통일신라 사찰가람의 전형을 처음으로 이룬 곳이며
일제강점기에 수습되어 섬세한 조각과 생동감이 넘치는 표현으로 그동안 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녹유전(綠釉塼)편이 2006년 서목탑지(西木塔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확인됨으로써
녹유전이 탑 기단부를 장식하였던 면석(面石)임이 밝혀지게 됐다.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출토된 녹유전(綠釉塼)에 대해 최첨단 3D Scan 장비를 이용한
정밀 실측조사를 추진하고, 관련정보를 획득하였다.
최첨단 3D Scan 장비를 사용하여 정밀 실측을 한 녹유전은
A상과 C상(강우방 교수의 분류에 의함)의 것으로 서목탑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녹유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무렵 사천왕사지에서 수습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관련 편들과 함께 3차원 영상촬영을 시도하여 도상으로 복원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된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전의 모습은 모두 3종류의 도상으로 복원되는데,
대부분이 부분적인 파편형태로만 남아 있어 도상의 형태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나,
이번 작업을 통하여 녹유전의 크기(높이 90cm, 너비 70cm, 두께 7~9cm)와
A상과 C상에 표현된 섬세한 문양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 들고 반가부좌 자세로 앉은 C상
녹유전 A상
주상(主像)이 둥근 천정을 이룬 감실(龕室)에 무릎을 꿇은 좌우 악귀(惡鬼)를 올라타고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왼손에는 긴 칼을 들고 우측면을 비스듬히 응시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머리 장식을 한 흉갑(胸甲)과 작은 소찰로 장식된 요갑(腰甲)을 착용하고 있는 형상이다.
녹유전 B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눈을 부릅 뜨고 화살을 든 정면의 상으로,
갑옷 차림에 두 발로 악귀를 짓밟고 있는 모습이다.
녹유전 C상
그 동안 허리아래의 모습만이 부분적으로 파악된 상태이고, 얼굴 모습을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번에 드러난 C상의 주상 얼굴모습은 둥근 감실 속에서 작은 비늘모양의 소찰(小札)로 구성된
엉성한 투구를 머리에 착용하고, 크게 부릅뜬 두 눈과 넓게 퍼진 큰 코를 가진 화난 얼굴로
좌측면을 노려보는 아주 험상궂은 인상의 상이다.
또한, 오른손을 들어 술이 길게 달린 칼을 쥐고 천의를 휘 날린 채, 두 마리의 악귀에 걸터앉아
왼손은 오른발에 걸린 왼다리의 무릎에 대고 있는 반가부좌(半跏趺坐)하고 있는 신장상의 모습이다.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전의 3차원 스캐닝작업을 통해,
접합가능한 잔편의 가상 접합 및 도상복원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나아가 녹유전의 틀(范)을 추정하여 동일범 제작품여부, 틀과 조상의 차이 등
고고미술사적 관점에서의 연구를 진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 녹유전상에 대한 구분은 강우방교수의 분류를 기준으로 한 것임.
(강우방, 1980,「四天王寺址 出土 彩釉四天王浮彫像의 復元的 考察」「美術資料」25, 國立中央博物館)
※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전에 대한 3D Scanning 작업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경연고고」(제17호, 2008년 7월1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소개되어 있음.
- 문화재청
**** 사천왕(四天王)이란
불교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사방에 머물면서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안정케 하는 수호신이다.
인도에서는 원래 여자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지만 중앙아시아를 거치면서
분노한 얼굴 모습에 육중한 갑옷을 걸치고 손에 무기를 쥔 무장(武將)의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러한 사천왕상은 중국을 거쳐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호법신, 호국신으로서 크게 유행하게 된다.
경주의 사천왕사 역시 이러한 사천왕상 신앙을 배경으로 통일 직후 문무왕 19년(679)에 세운
신라 호국사찰로, 지금의 경주 낭산 중턱에 건물터가 남아 있다.
사천왕상이 부조된 이들 사천왕상전(塼)은 일제강점기 때 이 사찰의 두 탑지에서 깨어진 채 수습된 것을 현재의이 상태로 복원한 것으로 원래는 사천왕사 탑의 네 벽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전(塼)은 여러 벌의 틀로 찍어낸 뒤 초벌구이를 한 다음 다시 유약을 발라 구워낸 것이다.
상(像)의 양식은 신체 비례가 적절하여 균형잡힌 몸매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세부까지 구체적으로 묘사된 갑옷표현과 함께
사천왕이 밟고 있는 사귀(邪鬼)의 고통스러운 표정 표현과
뼈대가 튀어나오게 보이는 다리근육의 강렬한 조각, 그리고 탄력성 있는 신체변화 등에서
통일신라 초기의 사실적인 조각양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像 전체에서 서역풍을 강하게 느낄 수 있으며
감은사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의 사천왕상과 함께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 2008-12-10, 문화재청, 국립경주박물관
[고고학자 조유전과 떠나는 한국사 여행] (24)-(25)
사천왕사를 지은 까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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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당나라 횡포 휘둘리던 신라 구국의 뜻을 사찰에 담다
671년 7월26일, 당나라 총관 설인귀(薛仁貴)가 신라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제라도 겸손한 의리를 회복하고 순종한다면 제사와 사직은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 총관 설인귀) 문무왕이 답신을 보낸다.
옛 백제 땅인 웅진(熊津)에 장기주둔한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네. 신라백성들은 계절마다 당나라 군사의 옷을 만들어주었네. 1만명의 당군이 지난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입었으니 당군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와 살은 한결같이 신라에서 기른 것이네. 당의 은혜가 한없다고 하지만 신라의 충정 또한 가련하게 여길 만하네.” 신라를 침공하는 당나라를 맹비난한 것이다. 문무왕의 피를 토하는 한탄이 이어진다. 들짐승(백제와 고구려)이 잡히고 나니 (신라는) 잡아먹히는 박해를 당하도다! 잔학한 백제는 옹치(雍齒)의 상을 받는데, 신라는 도리어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는구나!” 뜻밖에 상급을 받은 인물이다. 반면 정공은 항우의 휘하에 있다가 곤경에 빠진 유방을 구해준 적이 있는데, 훗날 유방을 찾아왔을 때는 “자기 주인(항우)에게 충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즉, 문무왕은 당나라가 ‘옹치’인 백제에게는 은혜를 베풀고, ‘정공’인 신라에게는 칼을 들이댄 것을 비유했다. 우리 신라는 너무도 억울하네. 자,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지닌 (설)총관은 황제의 명령을 집행하면서 죄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을 것으로 믿네. 황제께 우리는 감히 배반하지 않네.”
그런데 양국은 왜 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까. 먼저 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약체였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에 거의 사직을 잃을 처지에 빠진다. 의자왕은 미후성(미후城) 등 신라의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한 달 뒤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대야성(大耶城 · 경남 합천)을 공격한다. 대야성 성주 품석(品釋)은 처자와 함께 항복했다. 하지만 윤충은 품석의 목을 베고 항복한 이들을 모두 죽인다. 신라 백성 1000명을 사로잡은 윤충에게 의자왕은 상급을 내린다. 백제를 멸망시킨 김춘추의 딸 고타사랑(古陀炤女良)이었으니…. 사랑하는 딸의 비참한 최후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피눈물을 흘렸다. 사람이 지나가도 몰랐으며 나중에야 한마디 했다. ‘아아! 내가 반드시 백제를 집어삼키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조) 고구려의 비협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백제는 신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몬다. 신라는 눈길을 당나라에 돌렸다. 진덕왕 2년(648년)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도모하기 위한 나·당 군사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면서 당태종은 김춘추에게 말한다. 신라가 두 나라의 등쌀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 (짐이) 불쌍히 여겨 정벌하는 것이니라.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것이 아니니라.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게 주어서 영원히 편안하게 하리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6월조)
당나라는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정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김유신과 김문영 등이 660년 7월9일 그 유명한 백제 계백장군과의 건곤일척 싸움을 끝내고 당나라 군영에 이르자 소정방(蘇定方)이 불같이 화를 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면서 김문영의 목을 베려 한 것이었다. 그러자 김유신은 비장한 각오로 소리쳤다. 나는 무고하게 치욕 당할 수는 없다. 먼저 (저 무례한) 당나라군과 결전을 벌이고 백제와 맞서 싸우리.” 허리춤에는 보검이 칼집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김유신의 서슬에 놀란 소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정방의 발등을 밟으며 살짝 귀띔했다. 7월18일 의자왕은 태자와 웅진 방령(方領)의 군사들을 이끌고 항복하고 만다. 백제의 678년 사직은 끊기고 만다. 하지만 신라까지 삼키려는 당나라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은밀하게 신라를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우리 왕(문무왕)이 알아차리고 대책을 묻자 신하 다미공(多美公)이 나섰다. ‘신라백성들에게 백제 옷을 입히고 싸우려 한다면 당나라군이 반드시 그들을 공격할 겁니다. 이 틈을 타 당군과 싸운다면 될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 중) 나라가 어려우면 자구책을 만들어야 하는 게 당연합니다.” 소정방을 맞이한 당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작은 나라지만 쉽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소정방) 고구려 정벌전을 치르면서는 신라군을 평양성까지 오라가라 하면서 계속 허탕치게 만들면서 신라의 힘을 뺐다.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보낸 답서를 보자. 군사를 국경지역에 내보냈네. 그런데 아직 당나라 군사가 평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일단 고구려 칠중성(七重城 · 파주 적성)을 쳐서 당군을 위해 길을 열어두려고 했네. 그런데 성이 함락될 무렵, 당나라 사자가 와서 갑자기 ‘신라군은 칠중성을 치지말고 빨리 평양성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라’고 했네. 하지만 우리가 수곡성(水谷城 · 황해 신계)에 이르자 이번에는 당나라 군사가 벌써 돌아갔다고 했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신라군은 (당군의 도움없이) 평양성을 격파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네. 모두들 ‘이번에는 큰 상급을 받겠지’하고 큰 기대를 했는데, 영국공은 ‘신라군의 도착기일이 늦었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을 흘렸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설상가상으로 장안으로 개선한 당군은 “신라에서 공을 세운 자는 아무도 없다”고 떠벌였다. 더구나 당나라는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빼앗아 관리와 백성들까지 이주시킨 비열성(卑列城 · 함남 안변)을 고구려에 돌려주는 이해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당나라는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이에 맞서 신라는 669년부터 옛 백제의 땅을 점령하였고, 고구려 부흥운동을 지원한다. 하지만 신라는 끝까지 외교적 교섭을 포기하지 않았다. 황제가 문책하고 노발대발하여 사자를 계속 억류해버렸다.”(삼국사기 문무왕 10월조)
‘삼국유사 의상전교조(義湘傳敎條)’와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法敏條)’를 보자. 당 고종이 크게 군사를 일으키어 신라를 정벌하려 했다. 고종이 김흠순(혹은 김인문)을 불러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 고구려를 멸하고 우리를 해치려는 이유가 뭐냐’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그를 옥에 가두고서 군사 50만명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빠졌음을 알게 된 의상법사는 서둘러 귀국하여 문무왕에게 이 같은 급보를 전한다. 이 때가 670년의 일이었다.
조유전 토지박물관장과 기자는 폐허만이 남은 어느 사찰 흔적을 더듬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경주시 배반동 낭산 구릉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사천왕사(四天王寺 · 사적 8호)터다. 발굴조사가 한창인 절터를 일제가 부설한 철로가 반으로 뚝 잘라 지나치고 있었다. 저기가 신라시대 때 신이 뛰놀았다는 신유림(神遊林·낭산·사적 163호)이고, 또 저기 맞은 편은 망덕사(사적 7호)라는 곳이고….” 구국의 일념으로 세운 절이지. 전설적인 내용도 가미되었지만 신라는 이 절을 지음으로써 부처님의 힘으로 당나라 침공을 막았어요.”
힘 빌려 唐軍 물리쳐 문무왕의 판타지 같은 방책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문무왕은 요즘으로 치면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소집한다. ‘근래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 비법을 전수해왔으니 그를 불러 물어보십시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그래 불법(佛法)에 기대자.’ 문무왕은 당장 명랑법사를 모셨다.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법사, 이를 어쩌면 좋겠소.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니….” 풀(草)로 오방(五方)의 신상(神像)을 제작했다. 그리고 명랑은 유가(瑜伽)의 명승(明僧) 12명과 함께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을 썼다.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전함들이 모두 침몰하였다. 그후 절을 고쳐 짓고(679년) 이름을 사천왕사라 하였으며, 지금까지 단석(壇席)이 없어지지 않았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어김없이 문두루비법을 써서 당군을 모두 물리쳤다. ![]() 670년 당나라 침략에 맞서려고 급히 세웠던 경주 사천왕사. 2006년부터 실시 중인 발굴조사에서는 녹유사천왕상 벽돌편(위의 오른쪽 사진)을 비롯, 문두루비법 사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단석의 흔적(아래)이 확인됐다. ![]()
“불심에 의존한 신라” 결국 불법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성(城)을 빼앗기고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 구층탑을 세웠다. 경덕왕 12~13년(872~873년) 사이 황룡사 탑을 수리한 뒤 그 경위를 기록한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를 보자. 하직인사를 드리자, 원향이 말했다. ‘내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신라를 보니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의 여러 나라가 항복할 것이다.’ 자장이 돌아와 왕(선덕여왕)에게 알렸고, 645년 탑을 세웠다. ~ 과연 삼한을 통합하여 군신이 안락한 것은 이에 힘입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세운 호국불교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력이 있는 신라였으니 당나라군의 침공소식에 역시 불교의 힘을 빌린 것이다. 게다가 문무왕의 불심은 남달랐다. 문무왕은 생전에 입버릇처럼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한 유언이 있었다. (삼국유사 문무왕 법민조) 아들 신문왕이 감은사를 지은 뒤(682년) 감은사 금당 밑 섬돌을 파서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을 냈는데, 이 구멍으로 용(문무왕)이 들어와 돌아다녔다.” 사천왕사를 ‘낭산(狼山·사적 163호) 남쪽 신유림(神遊林)’에 세울 것을 권했을까.
‘삼국유사 ·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조’를 보자. 유명한 ‘선덕여왕 지기삼사’는 재위 16년 동안 선덕여왕이 앞일을 예측한 세가지 일을 기록한 것이다. 선덕여왕이 스스로의 죽음을 예측하고 무덤을 낭산 남쪽으로 정한 것은 지기삼사 가운데 세번째이다. ‘나는 어떤 해 어떤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게 하라.’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모르자 왕은 ‘그곳이 바로 낭산 남쪽이니라’했다. 그 날에 선덕왕이 죽자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묻었다. 그런 뒤 문무왕이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세웠는데, 불경에서는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선덕여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명랑법사가 황룡사나 금광사 등 기존 사원에 도량을 개설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낭산 아래 신유림’에, 그것도 임시로 절을 세운 것은 선덕여왕의 영험함이 깃든 신성한 곳을 찾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 했던 게지.”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즉, “명랑이 유가 명승 12명을 이끌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비법을 행하자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내용이다. 문두루법(Mundra · 神印法)에 따른 주술(呪術)이에요.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위기에 빠졌을 때 둥근 나무에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놓은 문두루를 가지고 향하는 곳이면 모든 악이 물러난다는 것입니다.”(조유전 관장) 이것은 당나라의 침략이 워낙 화급한 상황으로 빠지자 임시로 절을 짓고, 오방신상을 만들었을 것” 이라고 보았다. 당나라는 2번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저 절도 이 사천왕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요.”(조 관장)
670년과 671년 두 번에 걸쳐 사천왕사에서 행한 문두루기법으로 참패한 당나라 고종이 당나라에 와 있던 신라인 박문준(朴文俊)에게 물었다. 황제의 만수무강을 위해 법석(法席)을 열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만.”(박문준)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로 보내, 사천왕사를 살펴보고 오라고 했다. 당나라가 ‘사천왕사의 진실’을 안다면 보복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사천왕사 남쪽에 가짜로 절을 짓고는 사신을 기다렸다. 이윽고 신라를 방문한 악붕귀가 “황제를 축수한다는 천왕사에 분향하겠다”고 운을 떼자 신라 측은 새롭게 지은 가짜 절로 사신을 인도했다. 하지만 악붕귀는 이 절이 당나라를 속이기 위한 ‘짝퉁’임을 간파하고는 문전에서 버텼다. 못 이기는 척하고 당나라로 되돌아간 악붕귀는 황제에게 “신라가 천왕사를 지어 폐하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습니다”하고 거짓으로 고했다. 이후 신라는 연전연승했고, 당나라는 한반도 경영의 야욕을 완전히 꺾었다. 676년 안동도호부 치소를 평양성에서 랴오둥성으로 옮겨갔다. 790년 무렵, 향가인 도솔가(兜率歌)와 제망매가(祭亡妹歌)를 지은 월명사(月明師)는 사천왕사 앞에서 피리를 잘 불었는데, 얼마나 소리가 좋았는지 달(月)이 월명을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월명사라는 이름도 이때 얻었다. 벽화 속의 개(犬)가 짖었다. 또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졌다.” ‘신라 호국불교의 알파요, 오메가’인 사천왕사 조사에 나섰다. 절터 한가운데를 잘라먹었던 상황. 당시 조사에서는 유명한 녹유전(綠釉塼 · 녹색유약을 바른 벽돌)이 확인된 바 있다. 이 ‘녹유벽돌편(綠釉塼)’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 등에 소장돼 있다. 서탑지에서도 녹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최장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사의 말. 이것을 일제 강점기에 수습된 하반신과 함께 3D 스캔을 해보니까 딱 맞았습니다.” 그 쓰임새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다. 이 건물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방형구조이며, 초석 중앙부에는 지름 22㎝, 깊이 20~22㎝의 원형구멍이 파여 있다. 해석한 바 있다. ‘관정경’에는 문두루비법에 사용하는 원목 크기를 77푼(23.33㎝)이라 했는데, 이 초석의 구멍 지름(20~22㎝)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2008년 발굴에서도 출토된 녹유전 상(像)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녹유전에 그려진 상이 사천왕 혹은 팔부신중(八部神衆)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지만, 그게 아니라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神王)이라는 견해(임영애 경주대 교수)가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사천왕사는 14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도 숱한 이야기거리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의 한반도 야욕을 물리친 역사적 사실에 온갖 판타지를 입힌….”(조유전 관장) -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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