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기로소(耆老所) 입소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는 것(여민동락, 與民同樂)
조선에는 왕의 자문기구인 기로소(耆老所)가 있었다.
왕도 나이가 들면 기로소에 입소했는데, 입소하는 날은 큰 행사로 국가적인 잔치를 열었다.
왕이 무사하고 즐거움을 백성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큰 잔치를 열어 모든 백성과 함께 했던 것이다.
기로소 입소장면을 그린 그림 속 풍경에서 당시의 문화를 엿보도록 하자.
|
태조임금이 6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든 전례를 따라 기로소에 들기를 청하였다.
처음에 사양하던 숙종은 2월 12일 비로소 기로소에 들어갔는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밀창군과 연잉군이
“태조의 성대한 일을 본받지 않으신다면 이 아름다운 자취가 장차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라는 말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이전에 선조도 기로소에 들기를 기다렸으나
그만 60 이전에 수를 다한 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지로 조선시대 27대 동안 기로소에 든 왕은 태조, 숙종, 영조, 고종뿐이었다.
기로소란 임금의 탄일, 설이나 동지 등 절기의 행사,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
모여서 하례를 하거나 중요한 국사에 대한 왕의 자문 등을 맡은 기구였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문, 무신을 가리지 않았으나
중기 이후에는 정2품 이상의 70세에 이상인 문신에 한정하여 들었고
숙종 때는 이들을 기로당상이라 하였으므로 관아서열에서는 으뜸을 차지하였다.
모임 때는 군신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즐겼으며,
특히 왕이 기로소에 들 때는 큰 행사로서 국가적인 잔치를 열었다.
하지만 왕이 기로소에 든 것을 축하하는 잔치는 단지 왕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맹자』「양혜왕」장에서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것이 곧 왕”이라고 하였던 것에 의거하여,
왕이 무사하고 즐거움을 백성과 함께한다는 의미에서 왕은 잔치를 열어 모든 백성과 함께하였던 것이다.
숙종은 비록 20세에 중전인 인경왕후를 병으로 잃고 이후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차례로 중전으로 맞는 등
범상치 않은 가정을 꾸렸지만 정치에서는 그 어느 왕보다 민생에 심혈을 기울였던 왕이다.
역사적으로 18세기의 영·정조대가 조선시대 르네상스로 평가되는 것도
실은 숙종대의 다져진 경제, 사회, 문화적 토대를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숙종은 국가적인 진연(進宴)을 올려 큰 기쁨을 표하고자 한 왕세자와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쳤다.
“백성들의 기근과 역질이 심한데 무슨 마음으로 잔치를 받겠는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로소의 신하들에게는 연향을 베풀어줄 뜻을 비치었다.
신하들은 왕에 대한 진연을 허락하지 않으면 기로신들이 마음 편히 잔치를 받을 수 없다고 주청하였고,
왕은 그 해의 수확과 역질 상황에 따라 가을에 하겠다는 조건으로 진연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2월 12일에 기로소에 들어간 왕은 4월 18일에 기로신들에게 연향을 베풀었고
그해 9월 28일에 진연을 받았다.
궁중에서 잔치(연향)가 있다는 것은 단지 왕이 즐긴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즐거움을 함께한다는 것은 괴로움도 함께한다는 뜻이니 숙종이 기로소에 들자마자
연향을 하지 않은 것도 기근과 역질에 시달리는 백성의 어려움을 생각해서였던 것이다.
결국 왕이 기로소에 든 것을 축하하는 궁중 잔치는
전국의 노인들에게 쌀과 음식을 내려주거나 노인잔치를 열어주기도 하고
세금을 줄여주는 등의 은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어서,
『맹자』에서 강조한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하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기회로 삼는 것이었다.
숙종이 기로소에 든 것을 기념하는 잔치도 임금과 신하가 함께할 수는 있으나
팔도의 모든 백성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음을 반성하여,
여러 도의 세금에서 가장 오래된 1년 치를 탕감해주었다.
이듬해 6월 8일에 숙종은 붕어하여 결국 기로소에 든 것을 경하하는 잔치는
생전의 가장 큰 마지막 연회가 되고 말았다.
숙종이 기로소에 든 것을 축하하는 행사에 대해서는 『숙종기해진연의궤』에 기록되어 있다.
숙종 45년 9월에 왕의 기로소 입소를 경하하여 올린 진연에 대한 기록에는
잔치 준비과정, 잔치에 애쓴 사람들에게 내리는 상, 행사의 절차 등에 대해 소상히 나와 있다.
심지어 음식에 사용되는 재료에서부터 군졸들에게 지급되는 음식의 종류와 수량, 그릇의 수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기록되었고 잔치가 끝난 후에 각 관서에서 빌려 쓴 물건을 돌려주는데
사용하던 중 파손되었다는 내용까지도 기록하였다.
납품받은 재료를 사용하고 남은 것은 다시 돌려보내는 것을 보아 크고 화려한 잔치였지만
매사에 투명하고 계획적으로 치러졌음을 알 수 있다.
잔치에 들어간 비용이나 물품에 대해 투명하고, 각 부서가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것은
이 시기 행정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
|
|
|
숙종이 9월의 진연을 받기 전인 4월 18일에 기로신들에게 베푼 잔치 장면은
『기사계첩』으로 기록되어있다.
오늘날의 기념사진 대신 당시 궁중의 화원들을 동원하여 그림으로 행사장면을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는 행사 당시의 참석인원과 과정에 대한 글, 그리고 참석한 이들의 초상화가 실려있다.
이 그림첩은 모두 12벌을 그려 기로당상들에게 나누어주고 1벌은 기로소에 보관하였다.
당시 기로당상은 영의정 김창집, 영중추부사 이유, 판중추부사 김우항, 행판돈녕부사 최규서,
행사직 이선부·홍만조, 지중추부사 황흠, 한성부판윤 정호, 우찬참 신임, 지중추부사 강현 · 임방 등
11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규서는 이미 낙향한 상태여서 10인만이 경연에 참석하였고 그림에도 10인만이 등장하고 있다.
숙종이 기로소 입소 진연전 기로신들에게 베푼 잔치에 참석한
기로당상 중 홍만조와 강현의 초상이다.
김진여, 장태흥 외, 견본채색, 36x52cm, 보물 639호
경희궁의 편전인 경현당에서 열린 연향에서 왕은 5순배를 돌렸는데,
다섯 번째 술잔을 돌릴 때는 특별히 금으로 '사기로소(賜耆老所)'라 쓴 은잔을 하사하였다.
이에 감복한 김창집은 기로소로 자릴 옮겨 잔치를 계속할 것을 청하였고,
숙종은 남은 음식과 법주 등을 기로소로 보내주었다.
『기사계첩』은 바로 왕과 함께한 잔치와 은잔을 받는 장면,
기로소에 돌아와 다시 벌인 잔치장면으로 크게 나뉜다.
<경현당사연도>는 숙종이 경현당에서 베푼 잔치 장면이다.
경현당사연도 / 견본채색, 43.9x67.6cm
차일이 쳐진 위쪽에 일월오봉병의 일부와 상차림이 보여 그 위쪽에 임금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화병이 좌우로 있는데 청화가 화려한 항아리로 주칠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데
술병 또한 용무늬가 선명한 용준(龍樽)과 작은 백자가 주탁 위에 놓여있다.
당하에는 여러 중신들이 늘어서고 기로당상들이 좌우로 벌려 앉아 임금이 하사한 술잔을 받고 있다.
이들 10인의 기로당상은 모두 은화(恩花)를 꽂고 있는데
독상을 받은 채로 임금이 따른 술잔을 시자에게 전달받고 있다.
중앙에는 무용수 2인이 일무를 추고 하단에는 악대가 정연하게 늘어서 연주하고 있으며
좌우에 시립한 여러 기수의 모습 등 당시 간소하지만 장엄했던 궁중의 행사를 엿볼 수 있다.
<봉배귀사도>는 임금이 내리신 은잔을 받들고 기로당상들이 기로소로 가는 장면이다.
봉배귀사도 /『기사계첩』중 제8면의 부분, 보물 639호
잔치에 소용되는 모든 물품과 인물들이 함께 자리를 옮기고 있어
무동과 처용무의 무용수, 악사들이 앞서고 사모에 은화를 꽂은 기로당상들이
자리에 호피를 깐 연에 올라 파초선을 드리운 채 자리를 이동하고 있다.
호랑이 가죽은 악귀나 삿된 것의 범접을 막아준다는 의미에서
초행길에 나선 신부의 가마에 덮기도 하였던 벽사의 의미이다.
호랑이 가죽의 무늬를 그대로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사방에 둘렀던 풍속도 바로 벽사의 의미였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의 대명사인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았으니
이들 기로당상은 무궁한 복을 누리는 이들임에 틀림없다.
이 행사를 구경나온 인물들은 자리에 앉아있기도 하고 소를 끌고 가다 멈추어 서기도 하여
대단히 긴 행렬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8면의 구경꾼 중에는 기다란 지팡이에 기댄 노인이 홀로 서있어
기로당상이 갖는 일생 최대의 복을 누리는 이들에 대한 부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음악소리는 거리에 넘치고 영예로운 한때를 이루니
바라보는 사람들도 목이 메어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는 『기사계첩』의 서문이
그르지 않은 정황이었던 것이다.
|
|
|
왕은 다섯 번째 술잔을 돌릴 때는 ‘사기로소’라 쓴 은잔을 하사했다. 붉은 탁자 위에는 은장을 포장했던 붉은 보자기가 보인다. |
당 아래 섬돌에는 청화로 용이 그려진 술독과 흰 백 자항아리가 놓여있다. |
|
기로소에 돌아온 기로당상들이 가진 연회는 <기로사연>으로 그려져 있다.
기사사연도 /『기사계첩』, 김진여, 장태흥 외, 견본채색, 36x52cm
차일을 친 전각 내부의 붉은 탁자 위에 붉은 보자기가 끌러져 있어
임금이 하사한 은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죽 늘어앉은 기로당상들은 술에 취한 듯 부축을 받기도 하는데 모두 임금 앞에 나갔다 온지라
쌍학흉배를 댄 관복을 입고 있다.
이들의 당 아래 섬돌에는 청화로 용이 그려진 술독과 흰 백자항아리가 놓여있고
마당 중앙에는 오방처용무가 한창이다.
담벼락 안에는 구경나온 사람들이 죽 둘러서 있는데,
이들 무리와 달리 무명 바지저고리 차림에 맨발인 두 노인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다.
연회 중에 두 걸인 노인이 나와 춤을 추므로 나이를 물으니 팔십이라 하여
남은 음식과 술을 주었다는 기록 그대로이다.
서민들의 자유로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화가들의 시선도 따뜻하거니와, 모든 이들이 함께하는
‘동락’을 실천하는 임금과 신하들의 잔치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은 신하를 생각하고 신하는 백성을 생각하는 정신이야말로
조선시대 후반의 민생을 풍요롭게 하는 바탕이었던 것이다.
- 조은정/ 미술평론가 겸 미술사학자.
1962년에 서울 生, 이화여대 서양화과 및 동 대학원에서 미술사학과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아르꼬스모미술관 학예사를 거쳐 대원사 기획실장, 한국근대미술사학회 간사로 활동했고
제2회 구상조각회 조각평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한국 조각미의 발견』,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공저) 등이 있으며 현재 한남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경기문화재단 <기전문화예술>
'느끼며(시,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격적이어서 더 재미있는 불화(佛畵) (0) | 2008.11.30 |
---|---|
불교사찰의 지옥도 (0) | 2008.11.30 |
살림농사와 자식농사 (0) | 2008.11.28 |
기생과 기방의 풍경 그림들 (0) | 2008.11.12 |
이인문 -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 (0) | 2008.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