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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홍순민교수님의 강화기행'은
《황해문화》11∼13호(1996년 여름∼겨울)에 연재된 내용입니다.
이 글이 쓰여진 그때와 요즘의 달라진 강화를 비교해보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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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길 140리
서울서 양천(陽川)이 30리, 양천서 김포(金浦)가 40리, 김포서 통진(通津)이 40리, 통진서 강화가 30리, 합하면 서울서 강화는 140리길이다.
요즘 차로는 길만 막히지 않는다면 한 반 시간 정도면 족한 거리다.
자동차가 없던 옛날에도 말 타고 급히 달린다면 한 시간 안에 당도할 수 있었을 것이요, 천천히 가도 한 나절이면 되었다.
걷는다 해도 빠른 걸음이면 하루 해 안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마로 갈 때, 특히 존엄한 인물이 타고 가거나 존귀한 물건을 나를 때는 사정이 달랐다.
1782년(정조 6) 정조는 창덕궁에 설치되어 있던 규장각의 분관―외규장각 (外奎章閣)을 강화에 설치하였다.
규장각을 비롯해 몇 곳에 흩어져 있던 왕실의 중요 문서들을 모아 보관할 목적이었다.
그러고서는 그 첫 사업으로서 자신의 할머니인 당시 왕대비―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와 어머니 혜경궁 (惠敬宮) 홍씨, 그리고 정조 자신의 책보(冊寶) [왕비나 왕세자, 왕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그 경위를 옥이나 대나무 등에 적은 옥책(玉冊), 죽책(竹冊) 등과 그 때 받은 칭호를 새긴 커다란 도장 금보(金寶)]와 선원보략(璿源譜略)[왕실의 족보], 열성지장(列聖誌狀)[역대 왕들의 행적을 적은 글], 어제(御製)[왕들이 지은 글] 등을 봉안하였다.
이 물건들을 화려하게 단장한 가마에 싣고 가는데 그 일행은 규장각의 고위 관료인 직제학 심염조(沈念祖), 검교직각 서정수(徐鼎修)를 최고 책임자로 하여 실무자, 하리배, 군졸 등 도합 수십 명이 되었다.
이 행차가 지나는 경기도와 각 군의 지방관들은 경계까지 나와 예를 갖추어 이를 맞아 들이고, 또 경계까지 나가 배웅을 하였으며 그 때 군인들은 기치창검과 의장을 갖추어 호위하고, 악대는 음악을 연주하였다.
길에는 황토를 깔아 포장을 하였고, 양화진이나 갑곶진에서 물을 건널 때는 배들을 넉넉하게 동원하여 날랐고 포를 쏘아 닻을 올리고 내리는 신호로 삼았다.
각 고을에서 낮에 쉴 때나 혹은 밤에 묵을 때는 가마를 객사(客舍)의 중앙 마루에 모셨다.
객사는 중앙에서 내 려오는 고위 관료들의 숙소로서 가마를 그 중앙 마루에 모셨다는 것은 최고의 예우를 갖추었다는 뜻이다.
행차는 정조 6년 4월 초하루에 출발하여 한 낮(午時)에 양천에 도착하여 잠시 머물렀다가 저녁 무렵(酉時)에 김포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지내고, 이튿날 새벽(寅時)에 김포를 출발하여 통진을 거쳐 점심 무렵 (午時)에 갑곶을 건너 오후(未時)에 외규장각에 봉안하였다.
서울서 강화까지 이틀이 걸린 것이다.
강화는 강도(江都), 심도(沁都) 등의 별칭을 갖고 있었다. '도(都)'자는 도읍이란 뜻이다.
고려 고종 21년(1232) 원나라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의 조정이 이곳으로 천도함으로써 강화는 도읍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 시대 한 때 피난한 도읍지였다면 그 도읍의 의미는 별 것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강화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국가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피난과 항전의 근거지― 보장지지(保障之地) 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 상징적이 시설이 정족산(鼎足山)에 있던 사고(史庫)이다.
실록을 비롯한 국가의 중요한 전적(典籍)들과 선원보략, 열성지장, 어제, 어필 등 왕실의 주요 문서들을 보관하는 전국 험산의 네 군데 사고 가운데 정족산 사고는 그중 으뜸가는 사고였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국가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이곳의 전적을 열람하였다.
강화의 보장지지로서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하여 조선 숙종대에는 김포 땅에서 강화를 건너다보고 있는 문수산성(文殊山城)을 비롯하여 성곽을 축조하는가 하면 해안을 따라가며 관측과 방어를 위한 작은 성―돈대(墩臺)들을 축조하였다.
한편 강화읍의 주산 송악산 기슭, 행궁(行宮)과 유수(留守)의 청사를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있던 구역에 숙종의 어(御眞)을 모시는 별전(別殿)―장령전(長寧殿)을 건립하였다.
영조 연간에는 다시 영조의 어진을 모시는 만령전(萬寧殿)도 건립되었다.
그런 가운데 정조 6년에 이르러 그 옆에 다시 외규장각을 지음으로써 강화읍의 행궁 일대는 왕실의 어진과 주요 문서를 보관하는 기능을 완비하게 되었다. 이로써 강화부는 유수부(留守府), 곧 서울을 호위하는 작은 서울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이제 국방상의 보장지지일 뿐 아니라, 왕실과 국가의 정신적 보장지지가 되었다.
요즈음에는 강화에 갈 때 거의 누구나 48번 국도를 타고 가서 냉큼 강화대교를 건넌다.
48번 국도는 조선시대의 양천, 김포, 통진을 거치는 그 길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옛날 사람들이 다니던 그 길을 오늘날 우리들도 따라 가는 셈이다.
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이 길이 강화로 통하는 외통길이 되어 있는 데 비해 옛날에는 다른 길도 있었다는 점이다.
■ 죽은 조강(祖江)
강화는 섬이다.
섬이면 뭍에서 건너 가자면 의당 배를 타고 가야 한다.
그러나 요즈음 배를 타고 강화로 들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모두 차를 타고 간다. 20여 년 전까지는 차를 타고 가다가도 김포와 강화 사이를 흐르는 해협― 염하(鹽河)를 건널 때는 차를 배로 건넜다. 그러니 차 안에 있던 사람들도 배를 타고 건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 강화는 섬이면서 섬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를 타고 강화로 들어가지 않는다.
차를 탄 채 다리를 건넌다. 이렇게 가면 물론 배를 타고 가는 것보다 한결 편리하다.
하지만 배를 타고 가면서 느끼는 감흥, 섬이 다가오고 선착장이 바라다 보일 때의 설렘은 전혀 느낄 수 없다. 뭍에서 타지를 여행할 때도 그렇지만 섬 여행을 할 때는 특히나 그런 설렘이 없이 시작하면 이미 여행의 맛은 크게 줄어 버린다. 설렘이 없는 여행은 뒷맛도 없다.
교통체증의 확인과 거기서 오는 짜증만이 남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강화를 갔다 온다.
그리고 '나도 강화를 가 봤다, 시시하더라'고 말한다.
만약 강화가 시시하다면 그 중요한 이유는, 좀 엉뚱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한강이 막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요즈음 48번 국도를 4차선으로 확장하고 있지만, 여태까지의 진척 속도로 볼 때 그 공사가 끝나려면 아직도 몇 달, 아니 한 두 해는 더 걸릴지 모른다.
평일 시간대를 잘 잡으면 괜찮지만 보통 사람들이 가기 좋은 날, 다시 말하자면 공휴일에는 어디나 그렇듯 강화 길도 웬간히 막힌다.
그렇게 막힌 길, 가다 서다 하는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란 얼마나 무료하고 지겨운가.
그러니 어떤 때는 가면서 이미, 아니면 돌아오는 길에 대상지에 대한 인상은 구겨지고 망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막히는 차도가 아니라 용산이나 마포, 아니면 서강 쯤에서 돛단배를 잡아타고 한강을 따라 내려간다고 생각해 보라.
멀리 북한산이 멀어져 가고 행주산성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물결에 흔들리면서 가노라면 풍류객이 아니더라도 흥취가 절로 날 것이다.
이렇게 놀이차 가는 것이 사치스럽다면 잔뜩 짐을 실은 짐배라도 좋고 시커먼 연기를 뿜는 철선이라도 좋다.
아무 배에라도 실려 별다른 흥취 없이 그저 한강을 타고 내려가기만 해도 생각이 좀 달라질 것이다.
이 한강 뱃길은 지금은 단지 상상의 길이 되고 말았지만 과거에는 이 길이 강화로 가는 또 다른 중요한 길이었다.
한강이 흘러 내려가다가 왼편으로 통진 땅, 오늘날의 김포군 하성면과 오른편으로 교하(交河) 땅, 오늘날의 파주군 교하면, 실제로는 탄현면 오두산의 통일동산이 마주보는 어귀에 이르러 임진강과 만난다.
그렇게 합수한 두 강은 강화와 개풍 사이를 서북으로 흘러 강화의 서북단에서 다시 개풍과 황해도 연백(延白)의 경계를 이루며 흘러 내려온 예성강(禮成江)과 합수하여 교동(喬桐)을 감싸고 황해로 흘러든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 이후의 강, 옛날의 통진과 풍덕(豊德), 현재 남쪽의 김포군 월곶면(月串面)과 북쪽의 개풍군 임한면(臨漢面) 사이, 강화와 개풍군 사이를 흐르는 그 강, 정확히 말하자면 해협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 물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50,000:1 지도나 25,000:1 지도에는 한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그 부분을 한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면 임진강이 섭섭할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임진강이라고 할 수도 없다. 옛날에는 무어라고 했을까.
기록을 찾아보니 조선시대 우리 지리지(地理志)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조강(祖江)"으로 나와 있다. 그 이후 만들어진 다른 지리지나 지도에도 조강으로 표기되어 있는 예가 많다. 그래서 유심히 보니 요즈음 지도에도 김포군 월곶면에도 조강리(祖江里)라는 지명이 있고, 개풍군 임한면에도 상조강리(上祖江里), 하조강리(下祖江里)라는 지명이 있다.
조강―할아버지 강? 왜 조강이라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조강이 정확한 이름임에 틀림없다.
지금 이 조강은 죽어 있다.
사람들 편에서 보자면 강이든 해협이든 물줄기는 사람이 들어가 배를 타고 다니기도 하고, 물고기를 잡기도 해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조강은 비무장지대―D.M.Z.가 되어 버렸다.
남쪽도 북쪽도 들어가지 못한 채 서로 총부리만 겨누고 있다.
사람편에서 보자면 죽은 그 조강은 거꾸로 물고기 편에서 보자면 살판 났다. 그래 지금 그 조강은 물 반 고기 반이요, 돌을 던지면 한 보름만에 밑바닥에 떨어진다는 소문이 들린다.
물고기들은 살판 났는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조강은 죽었다. 조강이 죽으니 임진강도 죽고, 한강도 죽고, 염하도 죽었다.
■ 염하(鹽河)
조강이 흘러가는 중간에 김포군 월곶면을 왼편으로 감싸고돌면서 강화와 옛날의 통진, 현재의 김포군 사이를 지나 인천 앞바다 영종도로 흘러드는 강, 역시 강이라고 하기보다는 해협이라고 해야 정확할 그 물줄기를 염하(鹽河)라고 한다.
조강도 물길로서 한 몫을 하였지만, 특히 염하는 동해안, 남해안, 서해안에서, 더 멀리 외국에서 황해를 지나 인천 앞바다를 거쳐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 갈 때 어김없이 지나가는 길목이다.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출발한 조운선, 상선들이 이곳을 지나 다녔고, 또 중국, 일본, 서양 여러 나라들에서 온 군함과 무역선들도 이곳을 통과했다.
그러나 지금 이 뱃길에는 조운선도, 상선도, 군함도, 무역선도 다니지 못한다.
유람선조차 뜨지 못하고 다만 새우잡이 목선들이나 몇 척 떠 있고, 인천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조그만 고깃배들 십여 척만 드나들 뿐이다.
그것도 고깃배들은 염하 초입의 김포쪽 대명리를 포구로 삼고 있고, 새우잡이 배들도 염하 상류의 강화 다리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지금 강화 본 섬에 배가 드나드는 포구는 열을 넘지 않는다. 그 가운데 고깃배 몇 척만 드나드는 곳을 제외하면 여객선이 드나드는 곳은 강화 서쪽의 석모도와 통하는 외포리와 교동과 통하는 창후리 두 곳 뿐이다.
강화의 동서남북 네 해안 가운데 조강과 염하가 죽었으니 강화도는 북편과 동편 두 해안은 완전히 죽은 셈이고, 남해안과 서해안이 살아 있는 폭이다.
살아 있다고는 해도 강화 앞 황해 바다에 고기는 줄고 쓰레기만 쌓여 가니 어획고가 쏠쏠할 리 없고, 그렇다고 여객과 물산의 왕래가 빈번한 것도 아니니 그냥저냥 근근히 살아 있다고 해야 할 정도이다.
인천서 자란 40대 이상 되는 분들은 '국민학교'나 중고등학교 시절 월미도나 화수 부두 어디쯤에서 배타고 강화로 소풍간 추억이 있는 분들이 꽤 되실 것이다.
그 때 내린 데가 어딘지, 무슨 성인지 절인지도 모르고 그저 김밥 먹고 군것질하고,
보물 찾고, 장난감 한 두 개 얻어 갖는 데만 정신이 팔렸겠지만, 이제라도 다시 들러 보면 그 내린 곳이 초지(草芝)요, 무슨 작은 성같은 곳이 초지진 돈대이고, 절은 전등사라는 깨달음이 기억의 저편에서 스멀스멀 떠올라 오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렇게 초지는 강화 뱃길의 초입으로서 인천과 가까웠다. 근자에 보도를 보니 인천시에서 강화의 역사, 문화 유적지와 해상 관광을 동시에 즐길 수 있도록 올해 안에 월미도와 초지 사이 22km 해상에 유람선을 운항할 계획이라 한다.
여객선사인 원광코스모스 해양관광이 유람선 투입의사를 밝힘에 따라 시험운항을 하는 등 검토 작업에 착수했으며 유람선 취항에 대비, 7억원을 들여 강화 초지리에 선착장 보강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하니 흔히 보는 홍보용 공약은 아닌 듯하다.
뱃길 염하가 다시 열리는 첫 신호인가 싶어 기대가 크다.
강화의 염하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초지 다음에 덕진진(德津鎭), 광성보(廣城堡)가 나란히 이어져 있다. 그 중 광성보가 규모도 크거니와 지세도 자못 험하다.
광성보를 이루고 있는 세 돈대 가운데 용두(龍頭) 돈대는 정히 용의 머리인 양 염하를 향해 불쑥 머리를 내민 지형의 끝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지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염하 해저로 용 이빨처럼 날카로운 바위 맥을 뻗쳐 건너편 김포 땅 덕포진으로 건너간다.
이곳이 손돌목(孫乭項)이다.
손돌목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임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갈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태우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뱃길을 찾아 초지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일부러 험한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들을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죽기 직전 손돌은 자신이 죽은 뒤에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무사히 건널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손돌을 죽이고 왕과 일행은 급한 김에 손돌의 말대로 하여 과연 무사히 물을 건널 수 있었다.
왕은 그제서야 손돌의 충성을 깨닫고 그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죽은 날이 음력 시월 스무날이었으므로 해마다 이 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니 이를 손돌 바람이라고 하고,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여울을 손돌목이라고 하였다.
이 날에는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사람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
전설은 전설이다. 전설은 그저 재미있게 들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고려 시대에 강화로 피난 온 왕이라면 고종이겠는데, 그 고종이 굳이 이곳 손돌목까지 와서 물을 건넜을 리가 없다.
신화나 전설을 그저 재미있게 듣지 않고 굳이 분석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그 해석에 따르면 손돌이 이야기는 해마다 이맘때면 불어오는 계절풍에 대한 민간의 신화적 해석이라는 것이다.
왜 이맘때면 꼭 이렇게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는 걸까.
누군가 원통한 일을 당하였나 보다. 원통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지배 계층일 턱이 없다.
힘없고 가난한 계층, 뱃사공이라야 제격이다. 지배계층의 민중에 대한 불신, 민중의 지배계층에 대한 원한이 이런 전설의 현실적 배경이 되었다.
그런 역사적 경험으로 대표적인 것이 고려 시대 강화 천도이다.
강화 천도가 몽고에 대한 민족적 저항인가.
글쎄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최씨 무인정권을 비롯한 지배 계층의 저항은 될지 모르지만 전 민족, 전 민중의 저항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최근 이 시기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의 해석이다.
이러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이반과 불신이 겨울의 문턱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대한 민중의 신화적 해석과 연결되어 손돌이 전설은 생겨난 것이리라.
손돌목은 삼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뱃길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험지이다.
옛날에는 이곳을 지나가는 것이 최대의 난제였다. 그래서 이 곳을 피하기 위해 조선시대부터 인천 앞바다에서 바로 한강으로 통하는 운하를 뚫자는 논의가 있어 왔다. 그 운하를 뚫자는 이야기는 해방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튀어 나오고 나오고 하더니 지금 다시 진행중에 있다.
이제는 거의 될 것 같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되어야 되나 보다 하겠다. 지금 상황에서 이 운하가 꼭 쓸모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지만, 소박한 생각으로는 운하보다도 염하가 뚫렸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 승천포
염하가 뚫린다는 것은 조강이 살아난다는 뜻이다.
조강이 살아난다는 것은 D.M.Z.가 걷히고 남과 북이 연결되는 것, 통일을 뜻한다.
그 날이 오면 인천서 염하를 지나 오른편으로 돌아 조강을 거슬러 한강을 치달아 서강으로, 마포로, 용산으로 이어지는 뱃길이 열릴 것이다. 인천서 서울 가는 뱃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염하 끝에서 왼편으로 돌면 조강을 타고 내려가는 뱃길도 있다.
조강을 타고 내려가는 뱃길과 함께 조강을 건너는 뱃길도 이리저리 적합 곳을 따라 열려 있었다.
우리는 지금 이 뱃길을 거의 잃어 버렸다. 잃어버린 것만이 아니고 잊어 버렸다.
그 뱃길을 찾으려면 이제는 하는 수 없이 옛 지도들을 뒤져 볼 수밖에 없다.
조강을 끼고 열려 있던 뱃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예성강을 거슬러 연안(延安), 배천(白川), 개성(開城)으로 가는 뱃길이다. 예성강 하구의 벽란 나루(碧瀾渡)는 고려 시대 제일의 국제 무역항이었다.
옛 지도들과 지지(地誌)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한 지명이 번쩍 눈에 띄었다.
강화의 북쪽 해안 가운데쯤에 있는 승천이라는 이름이다.
기록에 따라서는 '昇天'이라고도 하고 '升天'이라고도 되어 있지만 앞의 것이 정확한 이름인 듯하다.
강화읍에서 이십리 되는 승천에는 승천진(昇天津) 또는 승천포(昇天浦)가 있었다.
'진(津)'은 나루요 '포(浦)'는 포구니 결국 같은 뜻, 배 닿는 곳이다. {강화부지(江華府志)}라고 하는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읍지를 보니 양서(兩西), 곧 황해도, 평안도에서 서울로 가는 선박들은 모두 이 곳을 거쳐갔다고 하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꽤 컸던 나루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등 몇 지도에는 그 승천포에서 조강을 건너 맞은편 풍덕 땅에도 같은 이름, 승천포라는 지명이 보인다. 두 승천포는 서로 맞보며 건너다니는 나루였다.
이 승천나루가 고려 시대 개경에서 강화를 잇는 뱃길이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풍덕에서 개성은 사십리 길이다. 그렇게 보면 강화에서 개성은 줄잡아 70리가 못되는 거리이다. 강화에서 서울이 140리니 그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강화에서 인천보다도 가깝다. 이렇게 보니 고려 시대에 개경에서 강화로 온 것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강화의 그 승천포는 지금도 50,000:1 지도에 이름이 살아 있다.
강화군 송해면(松海面) 당산리(堂山里) 박촌말 승천포. 그 곳에는 승천포 돈대도 있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48번 국도를 타고 강화읍을 지나쳐 가다가 송해면 솔정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301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그 끄트머리 조강가에 있다.
반가운 마음에 차를 달려갔다. 그러나 지금 승천포는 없다. 아니 죽은 상태로나마 거기 있겠지만 갈 수가 없었다. 가다가 보니 어딘가 검문소에서 해병대 아저씨들이 길을 막는다. 관계자가 아니면 더 이상 갈 수가 없단다. 왜 갈 수가 없느냐고 대들었더니 여기서부터는 민통선이란다.
민통선.
나는 민통선이 철의 삼각지 철원 어디나 아니면 임진각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그런데만 있는 줄 알았다. 한데 강화에도 민통선은 있다. 이렇게 강화로 통하는 중요한 길, 뱃길들은 콱콱 막혀 있다.
■ 에돌아가는 길
뱃길이 막혀 있으니 하는 수 없이 뱃길을 타는 것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훗날로 뒤로 미루고 다시 육로를 탈 수 밖에 없다.
육로로 가더라도 외통길 48번 국도로 해서 냉큼 강화교를 건너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얀정없는 짓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강화 답사를 할 때 될 수 있으면 48번 국도를 타고 가 바로 강화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 한다. 다른 길로 에둘러 두어 곳을 들러 간다.
서울서 88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행주대교를 지나면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굽는다.
안쪽으로 급하게 돌면 김포공항과 김포읍으로 통하는 길이고 바깥쪽으로 크게 돌면 부천 중동 신도시로 통하는 길이다. 바깥쪽으로 돌아 조금 더 가면 오른 쪽으로 쓰레기 매립장 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길을 한 십여 분 달리면 인천서 서구를 지나 검단으로 가는 305번 지방도로와 만나는데 오른 쪽으로 갈라져 이 도로를 탄다. 가다가 검단을 지나 양곡에서 왼편 우회도로로 해서 서쪽 대명리로 가는 352번 지방 도로로 좌회전하여 달린다. 그 길을 직진하여 끝까지 가면 대명 포구가 나온다.
서울서 쓰레기 매립장 가는 길로 들어서지 않고, 그냥 48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김포읍을 지나 가다가 누산리에서 좌회전하면 352번 지방도로가 나오고, 그 길을 계속 직진하면 마찬가지로 양곡을 지나 대명리에 이른다.
대명은 인천 인근 연안에 살아 있는 거의 유일하다 할 포구다.
소래 지역 등 바다가 죄다 메꾸어지는 요즈음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며 숭어, 망둥이에 병어, 밴댕이 같은 잡어들이 주종이지만 그래도 배에서 갓 내린 고기들을 만날 수 있어 대명리 가는 길은 휴일이면 차들로 가득 메워진다.
조만간 이 곳에 제2의 강화 다리가 놓인다 하니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를 곳이다.
대명 포구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이 초지다.
대명에서 건너다보는 초지와 강화는 그 안에 바로 들어가서 보는 것과는 다른 인상을 준다.
초지 너머로 전등사가 들어 있는 정족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는 마니산이 보인다.
왼편쪽으로는 인천 앞바다, 영종도가 펼쳐져 있고, 오른편으로는 덕진진, 광성보로 염하가 흐른다.
배를 타고 갈 수 없는 염하를 이렇게라도 그 초입에서 한 번 만나는 보고자 하는 것이 대명 포구에 들르는 심사다.
대명 포구에서 한 1Km 쯤 되돌아 나오면 왼쪽으로 꼬부라지는 길이 있다.
그 길로 올라서자마자 다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그 중 왼 쪽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는 농로를 따라 한 참을 쭉 들어가면 덕포진(德浦鎭)이 있다.
제법 넓게 주차장 시설도 해 놓았고, 너무 아담하기는 하지만 김포군에서 건립한 전시관도 있다.
전시관 서편 언덕을 올라서면 염하다.
염하 가를 따라 조성된 둔덕, 사실은 둔덕이 아니라 해안가를 따라 방어용으로 쌓은 토성(土城)이지만, 토성을 따라 포와 총을 쏘는 진지가 만들어져 있다. 그 토성을 따라 끝에 이르면 염하를 향해 돌출한 지형이 나오고 그곳에 웬 커다란 무덤이 하나 있다. 묘비에 이르기를 '손돌장군지묘(孫乭將軍之墓)'. 손돌묘라고 하는 곳이다.
손돌묘에서 건너다보면 바로 광성보요, 그 끝 염하로 돌출한 지형에 만들어진 작은 성이 바로 용두돈대이다. 뱃사공 손돌이 언제 장군이 되었는지, 그보다도 손돌이 실존 인물인지 어떤지도 의문이다.
이런 의문이야 풀 길이 없고, 아무튼 그곳에서 손돌이 전설을 한 번 되새겨 보고, 이 곳이 손돌목이라는 것만 확인하면 그 뿐이다.
더 나아가서 광성보에 가서 광성보를 보는 것보다 이렇게 손돌묘에서 광성보를 건너다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판단되어서 나는 손돌묘를 찾는다.
손돌묘에서 돌아 나와 아까 대명리에서 나오는 길과 만나는 지점에서 양곡 쪽으로 352번 도로를 다시 타지 않고 왼편으로 번호도 없는 길, 석정리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계속가면 오리정이라는 마을에서 다시 48번 국도와 만난다. 누구나 가는 그 길로 죽 가다가 강화 다리가 보이는 곳에서 그냥 강화다리로 들어서지 말고, 다시 오른편으로 꺾는다.
강화 다리가 낡아서 새 다리를 놓는 공사 현장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 버스나 트럭 등 큰 차들은 그 새 다리 공사용으로 놓은 임시 다리로 건너게 되어 있다. 그 임시 새 다리를 건너자는 게 아니라 그 길로 계속 직진한다. 그러면 왼편으로 염하를 끼고 오른 편으로는 꽤 큰 산을 감싸고 돌게 된다.
그 산이 문수산이다. 문수산에는 아까 다리 못미쳐 꼬부라지는 지점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염하 쪽을 바라보고 산성이 쌓여 있다. 문수산성이다.
문수산성은 조선 숙종 연간에 강화를 외호하는 전진 기지로 쌓은 성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염하 건너편 갑곶에 본진을 둔 프랑스 군에 맞서기 위한 조선군 본진이 들어섰던 곳이요, 이곳에서 한 차례 양군간에 접전도 벌어졌던 곳이다.
문수산을 감싸 도는 그 길을 계속 1.5Km 더 가다보면 오른편으로 성문이 하나 나온다.
문수산성의 북문이다. 문루(門樓)와 성벽이 무너지고 홍예만 간신히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그 문수산성 북문은 별 대단한 것이 없다. 그러나 굳이 그곳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서 문수산성의 한 자락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요, 그보다도 그곳에서 어디를 바라보고자 함이다. 문수산성 북문 문루에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면 거기 염하가 끝나고 조강과 만나는 물길이 보인다.
아까 대명리에서 염하의 초입을 보고, 손돌묘에서 염하의 요충지를 보았으니, 이제 염하의 끝자락을 보고, 조강을 보고, 조강 너머 개풍군 이북 땅을 바라보자는 의도이다.
이렇게 하면 육로로 가면서도 뱃길 염하를 아쉬운대로 더듬어 본 폭이 되지 않겠나 하는 마음이다.
대단히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지금 강화는 사실 시시하다.
거기에는 으리으리한 고층 빌딩도 없고, 어마어마한 공장도 없다. 그윽한 절도 없고, 그렇다고 그럴듯한 궁궐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대단한 절경, 짜릿한 놀이동산, 굉장한 음심점, 끝내주는 유흥장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강화를 보러 많이들 간다. 초등학교 아이들도 가고, 젊은이들도 가고, 중년 부부 가족도 가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간다. 관광버스 타고 줄줄이 가기도 하고, 승용차로 휭 하니 가기도 하고, 배낭 메고 버스 타고 가기도 한다.
무엇을 보러 강화에 가는가.
그저 학교에서 가니까 따라 가기도 하고, 숙제 때문에 가기도 하고, 등산하러 가기도 하고, 데이트하러 가기도 하고, 관광차 가기도 한다. 어떤 목적으로 가든 강화는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크게 실망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면에 크게 감동시키지도 않는 듯싶다.
어느 곳 어떤 대상이나 그것을 볼 때는 그 대상의 성격에 따라 보는 법, 주안점과 마음가짐을 달리 갖게 마련이다.
설악산에 가서는 넉넉한 마음으로 경치를 볼 것이요, 박물관에 가서는 찬찬히 그 유물들의 아름다움과 특성을 관찰할 일이다. 교과서를 볼 때는 정신을 집중해서 그 뜻을 머리 속에 넣을 것이요, 만화책을 볼 때는 슬슬 즐기며 넘기면 될 것이다. 그것을 뒤바꾸면 실패한다.
그렇다면 강화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경치를 볼 수도 있고, 유물 유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강화에서는 무엇보다도 역사를 보는 것이 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화는 우리 역사의 전시장이다.
단군할아버지 때부터, 아니 그 이전 먼 옛날부터 오늘까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고인돌도 있고, 고려시대의 성과 무덤과 궁궐 흔적도 있고, 조선시대의 건물, 성곽도 있으며, 근대사의 격전장이 널려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다.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란 얼핏 보면 그리 대단하지 않다.
관심 없이 지나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현상의 갈피갈피를 뒤적여 옛날의 작은 흔적들을 찾아내고, 시시한 그 흔적들에 녹아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현상만을 보지 않고 현상 속에 녹아 있는 과거의 모습을 보려 애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과연 이것이 제 모습인가, 왜 이렇게 남아 있는가를 따진다.
그러니 역사 공부하는 사람들을 상대하면 마음이 넉넉하지 않을 때가 많고, 힘들고 피곤할 때가 많다. 그냥 주욱 가면 쉬울 길을 이리저리 한 참을 에둘러 가며 사서 고생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 사는 모습, 앞으로 살아야 할 방향을 짚어 낼 수 없는 것을.
그러니 강화에 갈 때는, 대충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답사하러 갈 때는, 강화의 가장 큰 강점인 역사를 공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갈 때는 이미 나 있는 길을 편안히 앉아서 갈 것이 아니라, 살뜰한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길도 기웃거리며 갈 일이다.
■ 나의 답사론
요즈음 강화로 건너가는 다리는 둘이다.
하나는 한 30년 가까이 된 강화대교이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100여 미터쯤 북쪽으로 새 다리를 놓는 공사를 하면서 공사용 차량이 다니기 위해 놓은 임시 다리이다.
원래의 강화대교를 건너 "역사의 현장, 호국의 성지" 강화도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에 갑곶돈대가 있고, 그 옆에 강화 역사관이 있다. 군 단위에서 이런 규모의 역사관을 설치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예로서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답사 인솔을 할 때면 거의 매번 이곳을 그냥 지나쳐 바로 강화읍으로 간다.
그 첫째 이유는 대개의 경우 먼저 강화읍에 가서 몇 곳을 둘러보아야 점심시간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요, 둘째 이유는 강화에 둘러 볼 곳이 많으므로 이곳은 돌아 나올 때 시간이 되면 들르겠다고 미루기 때문이요, 그보다 더 큰 셋째 이유는 굳이 이곳에 먼저 둘러서 어떠한 선입견이랄까 누군가 만들어 놓은 인식을 강요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답사는 밟을 답(踏), 사실할 사(査), 곧 어떤 대상물을 현장에 가서 직접 살펴보는 것이다.
현장에 가서 그 땅을 밟아보는 것이 답사의 첫째 요건이요 생명이다.
사진, 비디오, 영화, 텔레비젼, 콤퓨터 통신 등 각종 시청각 매체가 발달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굳이 현장에 가지 않아도 어떤 지역,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실감나게 접할 수 있다. 기실 집에 앉아서 이런 매체를 통해 보는 것이 현장에 가서 보는 것보다 더 많이, 더 상세히, 더 짜임새 있게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현장에 가지 않으면 답사가 아니다. 그 대상이 놓여 있는 현장에 가서 그곳의 지리적 위치, 주변 산수, 기후, 풍속, 사람들의 생김새와 말투, 인심, 음식 맛 등 자연과 인문 환경을 두루 피부로 느껴보는 것이 답사다.
답사의 둘째 요건은 내가 직접 살펴보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데 있다.
간접 체험은 아무래도 직접 체험을 따라가지 못한다.
각종 매체를 통해 대상지역에 접하는 것은 내가 직접 접하는 것이 아니라, 렌즈가, 그 렌즈를 들이대고 찍은 사람이 접한 것을 내가 얻어 보는 것이다. 현장에 가는 근본 목적은 직접 체험을 하기 위함이다. 답사를 통해 무언가를 느끼는 주체는 나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훌륭한 안내자의 말일지라도 그것은 내 느낌, 내 생각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일 뿐, 내 느낌, 내 생각 자체가 될 수는 없다.
답사를 할 때는 그러므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한 태도를 취해야 할 대상은 안내자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곳곳에 서 있는 안내판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 써있는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안내문을 아무리 잘 쓴다 하더라도 길지 않은 분량에 그 대상물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 쓸 수는 없다. 설령 객관적인 사실은 다 쓸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여러 관점까지 모두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안내문을 쓴 사람의 관점이 배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유적지에서 흔히 보는 안내문들은 이러한 어쩔 수 없는 한계만 안고 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성의 아니면 무지에서 비롯된 분명한 잘못, 명백한 오류가 상당히 많다.
우리말로 된 안내문에서도 맞춤법과 문장이 틀린 예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외국어로 된 안내문은 완전한 것이 드물다.
어떤 이는 '맞춤법이나 문장이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고까지 극언을 할 정도이다.
백보 양보해서 맞춤법이나 문장이 틀린 것은 실수 내지 무성의라고 접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서술 내용에서도 명백한 잘못이 있는 것도 적지 않으니 이런 것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참 답답하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그러한 안내문에다 머리를 박고 열심히 베끼고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보노라면 참 아찔한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머리는 새 종이와 같다.
장난만 치는 것 같아도 마치 사진 찍듯이 빠르고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그러한 머리에 한 번 잘못된 지식이 들어가면 그것을 고치기는 차라리 새로 가르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다.
잘못은 안내문에서 그치지 않는다.
답사의 대상이 되는 유물이나 유적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안내문은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그 잘못을 고칠 수도 있다.
대개 사람들은 어떤 대상물을 볼 때 일단 그것을 인정하고 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대상물 자체가 잘못되어 있을 경우 이를 판별해 낸다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공신력 있는 박물관 전시물 가운데도 진품들 틈에 모조품이 버젓이 끼어 있는 예가 있다. 전시물을 모두 진품으로만 구비하기가 어려우므로 모조품으로 대치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모조품이라고 밝혀야 함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어기고 모조품이라고 밝히지도 않은 채 전시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없지 않으니 문제다. 심지어는 모조품이 아닌 위조품까지도 섞여 있다고 하니 어디 웬만한 안목이 아니고서야 이를 가려낼 수 있겠는가.
훌륭한 작품에는 그것을 만든 작가의 정신과 그 시대의 문화가 깃들어 있다.
그러기에 진품을 보면 감동이 온다. 그러나 가짜에는 그러한 정신과 문화의 무게가 실려 있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미약하다. 그것들에는 그저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필요와 계산만이 승하다. 악의를 가지고 만든 위조품은 물론이거니와 전시장을 짜임새 있게 꾸미기 위한 필요에서 만들어 낸 모조 유물이나 복원된 유적 역시 진품이 아닌 가짜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가짜를 보고서 감동을 받는다면 그 감동도 결국 진솔한 것은 될 수 없다. 이것이 진짜와 가짜를 굳이 가리는 까닭이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답사를 할 때는 이에 더하여 몇 가지 사항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떤 유물이나 유적을 볼 때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누가 왜 저것을 만들었는가를 자꾸 물어 보아야 한다. 오래된 유물이나 유적에는 세월의 무게가 실려 있어 더욱 큰 울림을 받는다.
그렇기에 그것들을 보면서 역사와 문화를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물이나 유적은 오랜 세월을 지내오다 보면 자연적으로, 때로는 역사적인 풍파에 의해 풍화 작용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색이 바래고, 모양이 마모되며, 때로는 깨어지고 무너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후대에 고치거나 혹은 다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면서 크게 변화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현재 시점에서 그것을 보는 우리는 저것이 과연 본래 모습인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중간에 변화한 부분은 없는가, 본래의 모습이 변형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는가 하는 점들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의문을 품지 않고, 있는 그대로만 보아서는 잘못된 인식을 갖기 십상이다.
답사에는 이런 긴장이 필요하다.
그러니 답사를 자주 하다 보면 심성이 너그러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언행이 시비조가 되기 쉽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시비를 따지고 진위를 밝히는 작업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실을 캐낼 수 있고, 진실의 바탕 위에서 얻는 감동이라야 진솔한 감동이 될 수 있다.
강화 답사도 예외는 아니다.
■ 용흥궁과 김상용 순의비
강화읍에 들어가서 대개 처음으로 들르는 곳이 용흥궁(龍興宮)이다.
강화읍으로 들어가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구 버스 터미널을 지나서 두 번째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차도가 고려궁지(高麗宮址) 올라가는 길이다. 그 길로 들어서서 조금 들어가면 첫 번째 골목이 강화경찰서로 통하는 뒷골목이다. 용흥궁은 그 골목 안에 들어 앉아 있다.
용흥궁―용이 일어난 궁이란 뜻일 터인데 여기서 용이란 임금, 곧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을 가리킨다. 1849년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였을 때 원범(元範. 철종의 본명)은 강화에 살고 있었다.
원범은 1831년(순조 31)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셋째 아들로 서울서 태어났다.
원범의 증조할아버지가 사도세자이고, 할아버지는 사도세자와 그 궁녀 사이의 소생 은언군(恩彦君)이었다.
은언군은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 영조의 미움을 받아 제주에 유배되는 등 여러 곡절을 겪었다. 정조 연간에는 이복형이 되는 정조의 끔찍한 비호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순조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결국 죽임을 당했다. 원범의 아버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원범이 11살이 되는 해에 죽었다.
이러한 집안 사정 탓으로 원범은 종실(宗室)이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그 처지가 매우 어려웠다. 특히 14살이 되던 해에는 어떤 역모 사건의 바람을 타서 온가족이 교동을 거쳐 강화에 와서 살게 되었다.
철종의 강화 생활은 반 죄인 상태였던 듯하다.
그의 <행록(行錄)>에 보면 그가 강화에 살적에 동내에 완악하고 패려한 자가 있어 술에 취해 문밖에서 소란을 부리며 언사가 오만하기 그지없었던 적이 있었는데 왕이 되고 나서 하교하기를 '무지한 부류에 대해 지금 문제 삼을 필요가 있는가'하고 놓아두고 묻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당시 강화 유수가 그들을 감시하고 지키기 위해서 법을 집행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여 집안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었는데 왕이 되고 나서 그 사람의 이름이 승지 후보에 올라 있자 그에게 낙점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공식 기록에 이런 이야기를 쓴 저의는 철종이 너그러웠음을 말하고자 하는 데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이를 뒤집어 해석해서 철종의 강화 생활이 매우 곤궁하고 비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원범이 살던 집이 오죽하였겠는가. 그러나 전력이 어찌 되었든 왕은 왕이었고, 초라하든 어쨌든 그가 살던 집은 잠저(潛邸)―왕이 되기 전에 살던 집―가 되었다.
철종은 1853년(철종 4) 5월 '내가 심도(沁都. 강화의 별칭)에 대해 늘 한 번 뜻을 보이려고 하였으나 실천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강화 사람들만 응시할 수 있는 특별 과거를 보이기도 하였고, 8월에는 묵은 세금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하는 등 자신이 살던 강화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해 3월부터 11월까지 강화 유수로 재직하였던 정기세라는 사람이 철종 잠저 주변의 집들을 사들여 새로 꾸몄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일종의 기념관인 셈이다.
철종이 살던 집 자리에는 '철종조잠저구기(哲宗朝潛邸舊基)'라고 새겨진 비석을 세운 조그만 비각을 짓고, 그 주변 일대에 정면 7간 측면 2간의 안채, 정면 6간 측면 2간의 바깥채와 그 행랑채 등을 지었다. 그 후 1903년(광무 7)에 이재순이라는 이가 한 차례 중건한 것이 조금씩 손을 보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용흥궁에 가서 무엇을 볼 것인가.
그곳에는 옛 건물이 있다. 하지만 그리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그 건물에서 문화재로서 가치, 웅장함과 화려함을 찾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곳에서는 곤궁하게 살던 철종의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이 마땅하다.
더 나아가 힘없는 왕 철종과 세도정치기로 부르는 그 시기의 시대상을 그려볼 일이다.
왕의 권한은 미약한 반면, 서울의 몇몇 유력 가문으로 권력의 핵심이 옮겨 가 있던 것이 세도정치의 권력구조였다.
곤궁하기 그지없던 "강화도령"을 불러 들여 왕으로 삼은 이는 당시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였다. 순원왕후는 당시 정치권력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세도 가문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따님이다.
그는 철종을 윤서(倫序)상 순조의 아들로 삼았다. 이는 곧 자신이 철종의 모후(母后)가 된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왕실에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튼튼히 다지고 자신의 친정가 안동 김문의 정치적 기반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용흥궁은 초라함이 그 본질인 바, 용흥궁의 초라함은 바로 세도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용흥궁에서 다시 골목을 나와 오른편으로 고려궁지를 향해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비석 두 개를 모셔놓은 비각이 있다.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충절을 기리는 순의비(殉義碑)들이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왕실을 모시고 강화로 피난와 있다가 청나라 군대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게 되자 순절한 인물이다.
청병이 강화로 들어오는 날 김상용은 강화읍성의 남문에 화약을 쌓아 놓고 그 옆에서 담배를 피우다 화약이 폭발하였다. 이를 놓고 김상용을 높이는 사람들은 담배도 피우지 않던 사람이 담배를 찾은 것은 자폭할 의도였다고 해석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부주의에 의한 실수였다고 평가절하한다.
지금 나로서는 어느 쪽이 진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아무튼 이 때문에 김상용은 척화파로 유명한 그의 동생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충절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고, 이들의 충절은 조선후기 내내 안동 김씨 가문이 성세를 누리는 기반이 되었다.
19세기 세도가의 핵심 인물인 김조순은 김상헌의 7대손이다.
이렇게 볼 때 김상용 순의비는 용흥궁과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세도정치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 고려궁지(?)
김상용 순의비를 지나 북쪽으로 비탈길을 한 오분 걸어 올라가면 사적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른바 "고려궁지"이다. 버스를 대여섯 대 세울 수 있는 주차장이 있고, 그 한 옆에 매표소가 있다.
표를 끊고 고려궁지로 들어가려면 가파른 계단을 30여 단 이상 올라가 승평문(昇平門)이라고 하는 문을 들어서야 한다. 문을 들어서면 중간에 사람 한 길 정도 높이의 축대가 있고, 그 아래 위는 모두 잔디밭으로 가꾸어져 있다.
축대 위 잔디밭에는 그 동편 끝에 꽤 큰 기와집이 한 채 있는데 조선시대 강화 유수부(留守府) 청사였다고 하며,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그 앞을 지나 다시 축대를 내려오면 내려오면서 오른편으로 종각이 하나 있고, 다시 그 남쪽으로 좀 지대가 낮은 곳에 "이방청(吏房廳)"으로 이름이 붙은 건물이 있다.
이것이 고려궁지에서 볼 수 있는 전부다.
어디 한 군데 고려시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근거로 이 곳을 고려시대의 궁궐이 있던 곳―고려궁지라고 하는가.
설령 이곳이 고려궁지라고 하더라도 도대체 고려시대의 궁궐을 짐작이나마 해 볼 수 있는 꼬투리도 하나 없지 않은가. 고려시대의 궁궐터가 이 정도 넓이밖에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궁궐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으며, 궁궐의 기본 요건이 갖추어지겠는가. 이런저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꽃송이같은 신성한 산악(神岳)과 꽃받침같은 영묘한 구릉(靈丘). 그 꽃송이와 꽃받침을 걸쳐 날아가는 듯 솟아 있는 것은 황실(皇室)과 궁궐, 공경(公卿) 사서(士庶)들의 저택.
고려 조정이 강화로 피난해 있던 시절 활약했던 문인 최자(崔滋)가 지은 삼도부(三都賦)라는 글에 나오는 강도(江都)―강화 도읍의 모습이다.
꽃송이같고 꽃받침 같은 산과 구릉에 터를 잡고 있는 궁궐과 저택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강도와 그곳에 있던 궁궐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자료는 찾기 어렵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보아도 정확한 모습은 그려내기 어렵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강도 건설의 모습을 대강 재구성한 것은 있지만, 세세한 부분은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몽골의 침입이 닥치자 고려 조정에서는 1232(고종 19)년 6월 16일 강화로 천도할 것을 결정하였고, 불과 20일 정도 지난 7월 7일 왕이 강화로 이어(移御)하였다. 너무 급한 일정이었기에 왕은 강화의 객관(客館)에 임시로 머물렀고, 궁궐 공사를 서둘러 진행하였다. 군인들과 여러 도의 백성들을 동원한 강도의 건설은 고종 21년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공사는 적어도 몽골의 제3차 침입이 시작되는 고종 22년 이전까지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강도에 새 도읍을 건설하면서 제반 모습을 자신들이 떠나온 서울 ―송도(松都)와 같이 꾸몄다.
강도의 주산 이름을 송악산(松岳山)이라고 하고, 그 자락에 본 궁궐을 앉혔다.
그 밖에 다른 지역에 연경궁(延慶宮), 수창궁(壽昌宮), 용암궁(龍암宮), 여정궁(麗正宮), 서궁(西宮), 금단동궁(今旦洞宮) 등의 별궁들이 있었다.
송악산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자락을 견자산(見子山)이라고 하고 그 일대에 연경궁을 비롯해서 법왕사(法王寺), 어장고(御醬庫), 대상부(太常府), 수양도감(輸養都監) 등의 사찰과 관부를 짓고, 얼마 뒤에는 다시 경령전(景靈殿), 국자감(國子監), 구요당(九曜堂), 태묘(太廟) 등을 지었다.
이 무렵 집정자인 최우(崔禹, 崔怡)도 자신의 저택을 견자산 자락에 지으면서 인원을 6∼7,000명을 동원하여 개경의 목재를 실어오고, 며칠 거리 되는 안양산에서 나무들을 실어다 정원을 꾸몄는데 그 범위가 수십 리에 달했다는 기록이 있다.
최우가 아무리 왕을 능가하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저택을 궁궐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을까, 혹 그렇다 하더라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나게 짓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로 보건대 당시 강도의 궁궐도 궁궐로서 빠지지 않는 규모와 짜임새를 갖고 있었지 지금 고려궁지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그런 작은 규모는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몽골의 침입에 대처하는 고려의 기본 정책은 산성(山城)이나 해도(海島)로 입보(入保)하는 것이었다. 전면전으로는 막강한 몽골을 대적할 수 없었기에 방비가 유리한 지역에 근거를 마련하여 버티어 보자는 뜻이었다. 강화에도 내성, 중성, 외성 등 성벽을 몇 겹으로 쌓아 방어의 근거로 삼았다.
이러한 작전은 일단은 합당한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큰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희생은 지배층이 먼저 담당할 때라야만 일반 백성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강화에 들어 온 고려의 지배층의 생활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송도에서와 별 다름없이 사치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발달한 귀족 문화, 이를테면 청자의 발달이라든가 대장경의 조판 등도 이런 각도에서 보면 다시 해석할 소지가 남는다. 지배층의 이러한 태도에 대하여 일반 백성들은 배신감을 느끼고 이반하였다. 백성들의 폭넓은 지지가 없는 지배층이 막강한 적과 끝까지 버티어 이겨 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고려 조정은 장기간 몽골과 화의 협상을 벌이다가 1270년(원종 11) 8월 강화로 들어간 지 약 40년만에 송도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화의 협상 과정에서 몽골 사신의 감독 하에 내, 외성이 헐려 없어졌고, 강도의 궁궐과 민가는 송도로 환도한 직후 모두 불타 버렸다.
■ 병인양요의 뒤끝
강화가 다시 외침에 대한 보장지지(保障之地)로서 주목을 받은 것은 조선 중기에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부터이다.
효종이 북벌(北伐)을 내세우면서 강화를 주목하였지만, 실제적인 조치는 숙종 연간에 들어와서 이루어졌다.
숙종대에는 강화읍을 둘러싼 송악산, 북산, 남산, 견자산을 빙 둘러 성을 쌓았고, 강화 해안을 따라 가며 봉긋한 봉우리마다 53곳에 돈대(墩臺)―작은 성들을 쌓았다.
강화읍 옛 고려의 궁궐이 있던 송악산 기슭에는 강화 유수부의 청사를 비롯해서 그 하위의 각종 관청들이 들어서고, 혹 왕이 이곳에 왔을 때 머물 행궁(行宮)도 지었다.
특히 숙종 연간에는 왕의 어진을 모셔놓기 위한 장령전(長寧殿)을 행궁 동편에 지었고, 영조 연간에는 그 동편에 다시 만령전(萬靈殿)을 지었으며, 정조 연간에는 왕실의 보물들과 주요 책자들을 보관할 규장외각(奎章外閣, 흔히 外奎章閣이라고 함)을 행궁과 장령전 사이에 지었다.
이로써 이 일대는 강화의 행정 중심지일 뿐 아니라 왕실의 정신적 보장지지로서의 의미를 함께 갖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 일대는 정식 궁궐은 아니지만 외형적인 규모에서나 또는 국가적 위상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다. 그렇던 이곳이 일대 수난을 당한 첫번째 계기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였다.
1866년 7월 7일 주중국불국함대사령관 로즈(Roze)는 조선에서 온 리델(Ridel) 신부로부터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조선에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에 대한 보복 원정을 곧 시행하려고 했으나, 9월 8일 프랑스 해군성장관으로부터 조선원정을 허락받고, 9월 18일 1차 원정길에 올랐다.
해군 함정 두 척을 이끌고 9월 26일 서울 서강에 이르러 만 24시간을 정박하였다가 10월 1일 우리나라를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에 서해안과 한강 일대를 측량하여 지도를 작성하였다.
수도까지 공격할 수는 없으나 강화도를 점령하겠다는 계획을 해군성장관에게 보고하였다.
10월 11일 로즈는 휘하 군함 7척을 이끌고 2차 원정에 나서 그 휘하 육전대가 10월 14일 강화 갑곶진을 점령하였다. 10월 16일 강화읍내로 진군, 강화부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점령한 아문에서 노획한 은괴 19상자와 서적 등을 사영지로 운반하였다.
10월 19일 조선 순무영에서 조선국토를 불법으로 점령하고 서양 종교를 강요하는 행위에 대한 책망과 굴복을 독촉하는 문서를 받았다.
이에 대해 선교사를 살해한 죄를 문책하고 살해의 책임자 세 대신을 처벌할 것과 전권대신을 파견하여 조약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요구, 만일 이에 불응하면 전쟁에서 오는 모든 책임을 조선정부가 져야 할 것이라는 회신을 하였다.
10월 26일 뚜아르(Thouars) 해군대위가 약 70명을 이끌고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는 문수산성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조선군의 기습을 받아, 세 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이 전투 뒤 로즈는 철수를 결심하였다.
11월 9일 조선군대가 정족산성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을 접한 로즈는 육전대 지휘관 올리비에(Olivier) 해군대령을 그곳에 파견하여 정찰케 하였다. 150명의 정찰대는 아침 7시에 사영지를 떠나 11시에 전등사에 도착하자마자 정족산성에 잠복 중이던 조선군의 기습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불군은 약 30명의 부상자를 내고 간신히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사영지로 돌아왔다.
11월 11일을 철수일로 잡고 철수에 앞서 사영지로 사용하던 관사와 남은 병기고를 모두 불사르게 하였다. 물치도(작약도)로 철수한 로즈는 11월 17일 해군장관에게 철수 계획을 통고하는 동시에 노획한 은괴와 서적도 발송하였다. 11월 18일 물치도를 출발, 11월 21일 조선 해안을 떠났다.
이상은 프랑스측 자료를 토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간략히 살펴본 병인양요의 경위다.
아무리 그들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아도 선전포고도 없이 다른 나라에 가서 재물과 서적 등을 약탈한 것은 강도 행위요, 침략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들은 침략 행위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어느 나라를 쳐들어가 점령하고 전리품을 뒤지는 기분,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수확을 올렸을 때의 그 기분만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강화의 정박지, De'roule'de 선상에서
1866. 10. 22.
장관 각하,
본인은 즉시 읍내를 두루 다니고 유수의 관아로 갔는데 아주 우아스러운 이 관아는 국가에 예속된 모든 무병 창고로 둘러싸여 이것만으로도 읍내에서 제2의 도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
강화도가 서울 정부로부터 조선의 군사적 성채로 선택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창고에서 역시 가득한 은괴 18개 상자를 발견하였습니다.
본인은 즉시 위원회를 조직하여 그것을 정확히 소유하기 위해 계산하고, 사영지로 운반케 하였습니다. 위원회는 그것이 195,217 프랑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가까운 기회에 이 상자를 모두 각하에게 보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또한 국가의 고문서고를 발견하였는데 조선의 역사, 전설, 문학에 관해 많은 신비를 설명할 수 있는 대단히 신기한 책들을 확인하였습니다.
본인은 규정에 따라 그 목록을 작성케 하였으며 이 신기한 수집물을 각하에게 보낼 생각인데 각하는 의심없이 국립도서관에 전달할, 유익한 것으로 판단하실 것입니다. …
敬具
사령관 해군소장 G. Roze
그렇게 프랑스로 간 은이나 다른 물건들은 지금은 종적을 알 수 없으나, 책들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책들은 왕실에 주요 행사가 있을 때 그 경위와 소요 물품 등 제반 사항을 상세히 기록한 의궤(儀軌)라는 책들이다. 크기도 매우 크고 장정이 호화롭다.
그렇게 프랑스로 간 의궤 340권 가운데 한 권이 1993년 9월 15일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외규장각 고문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상징적 조치로서 한 권을 우선 먼저 돌려 준 것이다. 고속전철―떼제베(T.G.V.)를 우리나라에 팔기 위한 성의 표시였다. 그러나 성의 표시는 그 한 권으로 끝났다. 떼제베 협상이 끝나자 나머지 책들은 영 돌려 줄 기미가 없다.
■ 남은 자리에 서린 역사
프랑스로 간 의궤들은 그나마 거기 있으니까 다행이라고나 할까.
나머지 책들과 물건들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지금 "고려궁지"에 있는 동종(銅鐘)도 프랑스군이 끌어가다가 못 가져가고 길에 내버린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고려궁지"는 그런 수난의 사연을 품고 있다.
그러나 수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병인양요 5년 뒤에는 미국이 침범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고, 다시 그 5년 뒤에는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이른바 병자수호조약 (丙子修好條約), 말이 수호이지 완전한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외세의 압박 아래서 "근대화"가 진행되었고 근대화 과정에서 고려궁지는 더욱 파괴되었다. 근본적인 파괴는 터가 잘려 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의 "고려궁지" 바로 아래에는 올라가면서 오른 편에 강화 초등학교가 있고, 왼 편에는 천주교 강화성당이 있다. 둘 다 역사가 백년이 넘었다고 할 정도로 오래 되었다. 지형으로 보나 전후 맥락으로 보나 이 학교와 성당은 고려궁지, 곧 조선시대의 행궁 및 관아 터를 잘라 세운 것이다.
또 지금 고려궁지의 뒷쪽 경계는 명위헌이 있는 잔디밭 바로 위 축대를 지나가는 개나리 울타리로 되어 있다. 궁궐은 그만 두더라도 조선시대 관아만 하더라도 이렇게 바투 경계를 지을 리가 없다.
이런 의문을 품고 그 개나리 울타리를 돌아 올라가 보면 꽤 넓은 터가 열리고 어떤 종교단체의 허름한 건물이 길게 차지하고 있다. 미심쩍은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다.
지표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건물이 들어선 터를 받쳐주는 축대가 기다란 돌―장대석으로 되어 있다.
현대식 건물을 지으면서 이런 돌로 축대를 쌓을 리가 없다. 이는 옛날 건물이 들어서 있던 자리라는 징표이고,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행궁과 외규장각, 장령전, 만령전이 있던 터임에 틀림없다.
하긴 지형적으로 관아가 있는 바로 윗 터에 그보다 격이 높은 행궁 등이 아닌 다른 건물이 들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고려궁지"의 앞뒤가 이렇게 잘려 나갔다면 좌우 역시 온전할 리가 없다.
좌측, 곧 동쪽으로는 야트막한 지맥이 흘러내린다. 그런데 최근에 그 지맥을 걸쳐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된 도서관이 들어섰다. 아무리 좁게 잡아도 그 지맥까지는 고려궁지의 터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오른편, 서쪽으로는 경계를 짓기가 더욱 쉽지 않다.
무슨 단서라도 없을까 보니 담장 안에 꽤 오래된 나무가 철책을 두르고 서 있다. 얼핏 보면 아카시아 나무처럼 보이지만, 아카시아와는 달리 가시가 없고 크기도 훨씬 더 커서 한결 기품이 있는 그 나무는 괴목(槐木),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고 하는 나무다.
회화나무는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서술한 {주례}(周禮)라는 책에 의하면 궁궐의 바깥문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조정―외조(外朝) 가운데 세 그루를 심게 되어 있는데 그 아래가 곧 최고 벼슬아치인 삼공(三公)이 앉는 자리이다. 이런 까닭에 회화나무는 삼공을 뜻하게 되었고, 괴신(槐宸) 그러면 궁전, 괴정(槐庭) 그러면 조정 하는 식으로 조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회화나무가 여기 있다니 이곳이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는 심중을 굳혀 준다. 그렇지만 그 나무는 담장 안에 있으니 이 일대의 영역을 짐작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 두리번거려 보니 담장 밖, 길 건너에 있는 적어도 삼, 사백년을 되었음직한 은행나무가 눈에 번쩍 들어온다. 은행나무는 공자님이 그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여 지방의 향교나 서원 등에 흔하기는 하지만 궁궐이나 관아에도 많이 심었던 나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저 은행나무까지는 이곳 행궁과 관아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는 데 무리가 없다. 지금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의 궁궐터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선시대 행궁과 관아 터로도 이렇게 그 영역부터 크게 줄어들어 있는 것이다.
터가 크게 줄어들었으니 그 안의 모습도 온전할 리 없다.
지금 고려궁지 안에 남아 있는 건물이 유수부의 청사였다던 명위헌과 이방의 집무처로 소개되어 있는 이방청이다.
강화는 최초의 이름이 갑비고차(甲比古次)였고,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 신라의 해구(海口), 혈구진(穴口鎭), 고려조에는 혈구현(穴口縣) 등으로 바뀌어 오다가 몽골 침입때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비로소 강화, 심주(沁州)라는 이름이 붙었고, 도읍으로 높여 부르면서 강도(江都)니 심도(沁都)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부(府)에서 도호부(都護府)로, 광해군 때 부윤(府尹)이 맡는 부로, 인조 때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행정 구역이 설치된 초기부터 당연히 그 청사도 세워졌을 것이다.
현재 청사에 관해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병자호란 직후인 1636년(인조 16)에 개건하였다는 것, 그 이름이 이관당(以寬堂), 또는 현윤관(顯允觀)이었다는 것 정도이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이는 건물 전체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가운데 유수의 집무처인 중안 마루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좀 더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조선 숙종에서 영조 연간의 명필 백하 윤순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글씨를 볼 줄 모르는 내가 보아도 오랜 세월 전해 오면서 획이 많이 죽은 듯 하기는 하지만 유연한 흐름의 초서체에 힘이 느껴진다.
명위헌도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지만, 이른바 "이방청"은 이방청이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설명부터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안내판뿐만 아니라 강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이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다.
"이방청"은 온돌방이 8간, 마루방이 12간, 부억이 1간으로 모두 21간이나 되는 'ㄷ'자 형태의 건물이다. 지방 관아에서 이방의 지위가 어떻길래 이렇게 큰 건물을 차지하고 집무를 하였겠는가.
지방 관아에는 벙거지를 쓰고 울긋불긋한 군복을 입은 사또와 염소수염을 하고 간사스런 목소리를 내는 이방만 있었던 것으로 아는 인식의 소치가 아닌가 싶다.
유수부인 강화부에는 품관(品官), 곧 정규 관원만 해도 종2품의 유수가 둘(한 자리는 경기관찰사가 겸임), 그 밑에 종4품의 경력(經歷)이 하나, 종9품의 분교관(分敎官)과 검율(檢律)이 각각 하나씩 모두 다섯 자리가 있었다.
그 밖에 비장(裨將)이 10, 월령(月令) 1, 향소(鄕所) 2, 그리고 이예(吏隸)가 서리(書吏) 40, 청직(廳直) 55, 예(隸) 25, 노(奴) 33, 비(婢) 55 등이 있어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다.
또 각 리(里)에는 풍헌(風憲), 약정(約正), 권농관(勸農官), 서원(書員), 토포장(討捕將) 등이 있어 일선 행정을 도왔다.
이는 일반 행정 계통만을 든 것이고, 장령전, 만령전, 사각(史閣) 등 왕실 관련 기관과 진무영(鎭撫營)을 비롯한 군사기관에는 또 그에 걸맞는 많은 관리자와 군관, 군졸들이 있었다. 한 유수부의 행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데 그 가운데 이방은 별도의 이름조차 없는 서리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런 이방이 이렇게 큰 건물을 차지하고 집무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설명이 정설처럼 굳어졌을까. 이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조금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자료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783년(정조 7) 강화유수였던 김노진(金魯鎭)이라는 분이 펴낸 {강화부지 (江華府志)}라고 하는 책에 들어 있는 강화읍의 약도를 보면 송악 기슭에 행궁(行宮), 규장외각(奎章外閣), 진전(眞殿. 長寧殿), 만령전(萬寧殿)이 한 줄 벌여있고, 그 아래로 상아("上牙"), 객사(客舍), 천추문(千秋門)이 있으며, 객사와 천추문 사이 약간 아래 자리에 이아("二牙")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상아"는 "상아(上衙)"로 표기해야 할 것을 간략한 글자로 바꾼 것으로서 유수의 청사, 곧 오늘날의 명위헌이며, "이아" 역시 "이아(貳衙)"를 간략히 표기한 것으로 지금의 "이방청"으로 설명하는 건물에 해당한다.
위 책의 "이아"를 설명하는 내용은 "객사의 동쪽에 있으며, 경력이 집무하는 곳이다(在客舍東 經歷聽治之所)"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이아는 유수부의 제2인자인 경력의 집무실이며 유수의 집무처 동쪽에 있는 객사보다도 조금 더 동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현재는 위치는 뒤바뀌어 있다. 문을 들어서서 북쪽을 향해 보자면 명위헌은 축대 윗단 동쪽 끝에 있고, 이방청은 아랫단 서쪽 구석에 있다. 동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일제시기, 그리고 해방 이후 이 건물들의 기구한 사연이 서려 있다.
유수의 청사―명위헌은 일제시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이방청"은 강화 등기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언제부터인가 빈 건물로 있다가 1975년에서 77년 사이 복원 수리하면서 그 위치도 바뀌고 모양도 변형된 것이다.
나는 답사를 인솔할 때 말이 많다. 평상시에도 과묵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말은 될 수 있으면 줄이려고 애를 쓰는데 답사를 할 때는 말이 줄지를 않는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보고 짤막짤막하게 말하면서 다니면 답사가 참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아니 보이지 않는 이면이 이렇듯 사연이 구구절절한데 어떻게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찾아다닐 수가 있겠는가.
고려궁지 아닌 고려궁지, 제 모습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조선의 행궁과 관청 터,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끝에 엉뚱한 곳에 가 앉아 있는 건물 두어 채에서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를 떠 올려 보려 남는 것 없이 기를 쓰는 것, 이것이 나의 답사 행태요, 기껏 답사를 하면서 골치 아픈 이야기를 빼버리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병통이다. 말이 그렇다 보니 답사기도 하릴없이 뻑뻑해지고 길어졌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너그러이 접어주시기를 삼가 바란다.
■ 무엇을 볼 것인가 / 강화읍내
강화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모범 답안이란 없다.
제각각 형편에 따라 관심이 끌리는 대로 또 안목만큼 볼뿐이다.
하루 일정으로 강화에 들렀다면 대개 강화읍의 고려궁지, 용흥궁, 하점면 부근리의 고인돌, 길상면 온수리의 전등사, 그리고 염하 연안의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셋 가운데 하나 정도를 휘딱휘딱 보고 온다.
1박 2일 정도면 여기에 더하여 마니산의 정수사를 들르기도 하고, 등산까지 겸할 양이면 마니산 정상에 올라 참성단에 들르거나, 더 시간 여유가 있는 분들은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건너가 보문사를 보고 오는 정도이다.
이러한 곳들이 대체적으로 보아 강화의 볼거리로서 대표적인 곳들이다.
그러나 이런 곳들이 강화의 볼거리의 전부가 아님 또한 자명하다.
강화는 석기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사람이 살아 왔다.
그저 사람들이 살아 왔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사건들, 중요한 일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석기시대의 흔적부터 시작해서 청동기시대의 유적, 고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현대사의 격랑의 자취까지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강화는 자주 그 현장이 되었다.
우리 역사 전시기를 꿰뚫는 야외 학습장으로서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그런 만큼 강화에는 역사 유적으로서 볼거리가 갈피갈피 서려 있다.
어디고 그렇지만 강화는 특히 그 갈피갈피를 샅샅이 헤집는 살뜰한 마음과 눈이 없이는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
어차피 강화에 가서 하루나 이틀 돌아서는 강화가 갖고 있는 그 웅숭깊고 넉넉한 것들을 다 볼 수는 없다. 결국 선택을 할 수밖에 없고, 선택은 각자 관심과 형편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또 몇 가지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어떤 순서로 보는가에 따라서도 느낌이 사뭇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적합한 노정과 일정을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강화가 초행인 분들에게 이렇게 돌면서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시면 어떻겠느냐고 소개하는 것을 이 글의 소임으로 여겨 되는대로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강화까지 가는 노정과 강화읍에 들어가서 우선 보기에는 "고려궁지"와 용흥궁에 대해서는 불비하나마 이미 전전 호와 전호에서 두 차례 이야기한 걸로 때우기로 하고 이번에는 강화읍의 나머지 볼거리와 강화읍에서 출발하여 강화도를 한 바퀴 도는 노정을 따라 가며 이야기를 꾸려 보기로 하겠다.
강화읍의 고려궁지에서는 대부분 적잖이 실망을 하시게 된다.
별 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으로 그냥 읍의 중심가로 내려와 버리면 그 실망감이 가시질 않는다. 자칫하면 기껏 강화를 보러 간 기분을 망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고려궁지에서 나와서는 차를 타고 그것의 왼편-서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뒷산으로 올라가 보시는 것이 좋다.
그곳에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읍성의 진송루(鎭松樓)를 만나게 된다.
고려 고종 때 강화로 천도하면서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서 세 겹으로 성을 쌓았던 바 강화읍성은 그 가운데 내성이다. 조선시대 들어와서는 병자호란 후 강화에 성을 쌓는 과정에서 돌로 개축하였다.
그 강화읍성의 북문이 진송루이다.
그곳에서 진송루를 만났다고 해서 서둘러 감동을 하면 실수하시는 것이 된다.
그 문은 1976년에 복원한 것인데 영 시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 문이 시원치 않음은 그 편액을 보면 안다. 보통 제대로 된 편액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읽는 것이 정상이다. 한문은 그렇게 쓰는 법이다. 그런데 진송루는 오늘날 한글 표기 방식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쓰여 있다.
격에 맞지 않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성벽도 자세히 보면 아랫부분은 원래의 것이나 윗부분은 새로 복원하여 짜깁기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윗부분은 영 아니올시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읍성의 북문에 올라가 보는 이유는 그 문이나 성벽 자체보다는 그 문 밖을 나서서 만나는 풍광을 보기 위함이다.
진송루 문을 나서면 오른편으로는 고려 고종 때 병사들이 성을 쌓느라 고생하는 것을 보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무엇 무엇도 울고 왕도 울어서 다섯이 울었다는 뜻이라는 오읍(五泣) 약수로 가는 길이 나 있다. 곧바로 내려가면 저 아래 동네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그 비탈길을 타고 내려갈 것까지는 없다. 가 보아야 얼마 못 가서 끊긴다.
오읍약수 가는 길로 한 십여 미터 가서 북쪽을 바라보면, 저 아래로 논이 보이고 그 논 너머로 유유히 흐르는 물길이 보인다. 강화와 개풍을 가르는 조강(祖江)이다.
그리고 그 조강 너머가 북한의 개풍 땅이요 그 뒤로 날씨 좋은 날은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산이 개성의 송악산이다. 강화가 개성과 가까움을, 분단의 아픔을 새삼 느끼게 되는 자리이다.
진송루에서 내려오면서 강화읍을 벗어나기 전에 한 군데 더 들러볼 데가 있다.
내려오는 길 중간 지점쯤 김상용 순의비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 버스는 힘들고 승용차는 그럭저럭 올라갈 만한 길을 한 100여 미터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용흥궁의 뒷담이 나오고 왼편으로는 오래된 기와집이 나온다.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1900년에 완공된 이층 건물인데 요즈음 새로 짓는 성당이나 교회들은 물론이거니와 오래되었다는 명동 성당이나 정동 교회는 물론, 덕수궁 옆에 있는 성공회 서울 성당과도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내부는 서양식 성공회 예배당 구조이지만 겉은 한식으로 팔작기와지붕을 하고 있다. 전도 대상 지역의 전통문화와 조화를 이루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강화 읍내를 벗어나기 전에 가 볼만한 곳이 몇 군데 더 있기는 하다.
고려시대의 유적은 찾기 어렵더라도 조선시대에는 유수부였던 강화에 읍내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시설들이 없을 리 없다. 그러나 이런 시설 유적들은 지금은 크게 왜곡되고 훼손되어 굳이 찾아가 본들 실망이 크기 십상이다.
그렇더라도 강화읍성은 조금 더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읍성에는 동서남북 네 군데에 문들이 있었는데, 지금 동문은 없어지고 남문, 서문이 북문과 비슷한 형국으로 복원되어 있다. 그것들을 이으면서 남문에서 서문, 북문을 동문 터 부근까지 강화읍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의 능선을 읍성이 중간 중간 복원된대로 또는 무너지고 헐려진 채로 휘감아 돌고 있다. 이대로 내버려둘 것이 아니라 이를 잘 살린다면 좋은 볼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강화읍의 중심 가로에서 남쪽으로 나가는 길로 꺾어 한 이삼십여 미터 가다가 보면 복원된 성벽이 있는데, 그 오른편 성벽을 타고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남문은 병자호란 당시 김상용이 자폭하였다는 곳이다. 문의 이름이 안파루(晏波樓).
그 편액은 문안에 붙어 있고 바깥쪽에는 강도남문(江都南門)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진송루와는 달리 글씨의 순서는 옛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글씨는 어째 오종종하니 눈에 차지 않아 작게 쓰인 낙관을 확인하여 보니 역시 최근, 그러니까 1976년 어간에 국무총리를 하던 알만한 분이 쓴 것이다.
강화읍의 중심가로에서 서쪽으로 주욱 나가다 보면 역시 성벽이 나오고 길 바로 오른 편에 서문 첨화루(瞻華樓)가 있다. 문의 모습이나 편액은 다시 진송루 꼴이 되었다.
그러나 서문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귀찮더라도 차에서 한 번 내려 둘러볼 필요가 있다.
문 자체나 편액을 보자는 것이 아니라, 그 문안 길 건너에 있는 "연무당 옛터"라는 표지석을 보기 위함이다. 아니 표지석이 아니라 그곳에 있었던 연무당(鍊武堂) 건물과 그곳에서 이루어졌던 이른바 "병자수호조약 (丙子修好條約)" 또는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1876년 일본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불평등 조약,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려 아가리를 벌린 첫 장면을 보기 위함이다.
연무당 건물은 헐려 없어지고 그곳은 잔디밭으로 가꾸어 표지석만 하나 덩그마니 서 있다.
그렇듯 일본의 침략은 점점 세월의 저편으로 잊혀져가고 일본은 다시 말로, 전자 제품으로, 돈으로 우리를 누르고 있다.
■ 호국의 성지 - 안보교육장
강화읍을 출발하여 강화도를 한 바퀴 둘러보고자 할 때 어느 방향으로 돌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렇게나 돌아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 않나 싶다.
내가 세운 원칙은 '해를 따라 가라'는 것이다. 오전에는 강화도의 동쪽을 따라 도는 것이 좋고, 오후면 서쪽을 도는 것이 좋다.
하루 일정이든 이틀 일정이든 아침나절에는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동향이나 남향으로 앉아 햇살을 받는 유적들을 보고, 저녁나절에는 강화의 서쪽 해안을 따라 돌며 황해로 지는 해를 볼 수 있도록 일정을 잡는 것이 좋겠다는 뜻이다. 길을 잡을 때도 버스를 이용할 때는 하는 수 없지만, 승용차를 이용하는 분들은 될 수 있으면 섬의 외곽 도로를 따라가면서 필요에 따라 중심부를 드나드는 방식이 효율적이라 생각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편의상 동쪽으로 301번 지방도를 따라가는 노정을 잡기로 하자.
강화읍을 벗어나 301번 지방도를 따라 한 3km 쯤 가다보면 찬우물이라는 곳 조금 못미쳐 최근에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길이 하나 새로 뚫렸다.
그 길로 접어들어 다시 1km 남짓 들어가면 선원면 선행리에 충렬사(忠烈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호)라는 사우가 하나 나타난다. 선원(仙源) 김상용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41년(인조 19)에 세운 사우로서 강화읍내의 순의비와 짝이 되는 것이다. 충렬사에는 김상용 외에 병자호란 때의 인물들 26위와 1871년 신미양요 때 순절한 어재연 외 1인도 함께 모시고 있다.
충렬사에서 다시 나와 301번 도로를 타고 조금 더 진행하면 찬우물 고개라는 고개가 나오고 그 고개를 넘어서면 바로 외포리로 가는 208번 도로가 오른쪽으로 갈라지는데 그냥 301번 도로를 따라가면 온수리로 이어진다.
거기서 301번 도로를 타고 약 8km쯤 더 가면 길상면 길직리 마귀내라는 곳에서 왼쪽―동쪽으로 220번 도로가 갈라진다. 그 220번 도로를 따라서 염하 연안에 닿을 때까지 직진하면 덕진진을 만나게 되며, 덕진진 조금 못미친 네거리에서 왼쪽―북쪽으로 꺾어 끝까지 한 3km 넘게 달리면 광성보가 나온다.
광성보는 광성돈과 손돌목돈 그리고 원래는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던 용두돈의 세 돈대를 아우르고 있다. 성문인 안해루(按海樓)와 돈대 성벽들이 대부분 1977년에 복원된 것이라 오래된 유적이 주는 그윽한 느낌은 별반 나지 않는다. 광성보에서는 그러므로 유적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맛보다는 그 지형이 주는 느낌에 충실하는 것이 좋다.
특히 건너편 김포땅의 손돌묘를 마주보며 염하로 쑥 내민 지형의 끝에 있는 용두돈에 서면 왜 이곳 손돌목이 문제가 되는지, 왜 이곳에서 신미양요를 비롯한 외국 세력과의 접전이 벌어졌는지 별다른 설명이 없이도 어떤 깨달음이 온다. 손돌목을 소리치며 달려가는 탁한 바닷물의 흐름이 마치 우리 근대사의 격랑을 보는 듯하다.
광성보에서 되짚어 나와 남쪽으로 아까 그 덕진진 들어가던 사거리를 지나 계속 가면 352번 도로를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그곳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염하가를 향해 1km를 채 못 가면 초지진이다. 초지진은 광성보나 덕진진에 비하면 규모가 가장 작지만, 온수리 전등사 쪽에서 오기에 가장 편하고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에 강화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이다.
돈대 위에 올라서면 꽤 넓어진 염하가 바로 눈 아래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에는 대명포구가 보이고 멀리 남쪽으로는 인천까지 내다보이는 곳이다.
초지진에서 가던 방향으로 주욱 가서 길상산을 끼고 강화의 서남단을 감돌아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길은 가지 않은 길을 가보지 않고는 좀이 쑤시는 분들이나, 혹은 한적한 바닷가 길을 가며 별다른 흥취를 맛보고 또는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 있는 작은 포구에서 운 좋게 물때가 맞아 갓 잡은 잡어 맛이라도 보려는 분들이 아니면 가지 않는 게 낫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비해서는 특별한 유적은 없기 때문이다.
흔히는 초지에서 되돌아 나와 352번 도로를 타고 6km 정도 가면 전면에 온수리가 보이는데 온수리 마을로 들어서지 않고 왼편으로 돌아들면 정족산 자락이다.
만약 김포의 손돌묘, 문수산성을 들러 강화읍에서 볼 것 다 보고 중간참까지 빼지 않고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정을 다 밟아 여기까지 왔다면 시각은 이미 밤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강화에서 1박을 하는 분들은 대개 이곳 온수리에서 자게 된다. 1박을 하지 않는 분들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노정을 다 밟아 왔다면 이제 귀가하시기도 바쁘다.
그러지 않으시려면 중간중간 볼 곳을 생략하고 길을 재촉하여 여기쯤에 왔을 때 늦은 점심을 드실 정도라면 이제 나머지 노정을 시간 재가며 조금 더 돌 수 있겠다.
■ 정족산성과 정수사
초지에서 오면서 서편을 바라보면 세 봉우리가 삼각형으로 벌린 산이 보인다.
정족산(鼎足山). 옛날 중국에서부터 왕권의 상징 가운데 하나로 쓰이던 솥은 발이 셋인데 그 발과 같이 봉우리가 셋이라서 붙은 이름인 듯하다. 그 정족산의 봉우리를 잇는 능선을 따라 돌로 된 성―정족산성이 쌓여 있다. 정족산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이라고 하는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에서 유래하는 이름이다. 글쎄 과연 단군과 그 아들 셋이 실재했었는지, 더구나 그 아들들이 이 성을 쌓았는지 나는 모르겠다. 확인할 수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전설은 그저 전설로 웃고 들으면 그뿐이다.
현재의 성벽은 1739년(영조 15)과 1764년(영조 40)에 다시 고쳐 쌓은 것이다.
정문 역할을 하는 남문 종해루(宗海樓)는 예의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족산성, 전등사를 갈 때는 그래서 나는 남문보다는 동문 쪽으로 올라간다.
문루(門樓)가 복원되어 있지 않은 동문쪽이 차라리 좀 더 성의 옛 분위기를 잘 드러내기 때문이 첫째 이유이고, 둘째 이유는 그 동문 안에 "양헌수장군승전비"(경기도유형문화재 제26호)가 있어 병인양요 이야기를 끄집어 낼 화두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염하를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군 순무영의 천총(千摠) 양헌수는 밤중에 자기 휘하 부대를 이끌고 염하를 건너 11월7일 549명이 부대가 정족산성을 점거하였다. 프랑스 군이 강화를 침공한 지 한 달 쯤 뒤의 일이었다.
조선군이 건너가 정족산성에 농성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프랑스함장 로즈는 부하 올리비에 대령에게 정족산성 공격을 명하였다.
11월 9일 올리비에는 160명의 분견대를 이끌고 가벼운 무장으로 정족산성 공격에 나섰다.
정족산성 동문에서 조선군은 프랑스군에 일제히 포격을 가함으로써 6명을 죽이고 60-70명을 부상시켜 물리쳤다.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이에 프랑스군은 11월 11일 강화를 떠났다.
위의 글은 논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강 "양헌수장군승전"의 내용을 정리해 본 것이다.
양헌수는 나중에는 "장군"으로 승진하기는 하였지만 전투 당시에는 오늘날의 영관급쯤 되는 장교 천총이었지 장군은 아니었으며, 그 승전의 내용도 조선군과 프랑스군의 전면전에서 승리라기보다는 측면공격 부대와 정찰대 사이의 국지적 접전이었다. 조선군의 승리, 다시 말하자면 프랑스군의 피해 상황도 프랑스측 기록에는 부상 30명으로 나오는 등 자료에 따라 다르다.
아무튼 그리 크게 평가하기에는 좀 주저되는 바가 있는 승전이지만 이곳에서 조선군과 프랑스군이 접전을 벌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런 점에서 이곳 정족산성이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염하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같은 진보들의 후방 지원 기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전등사(傳燈寺)는 그 정족산성 안에 들어앉아 있다. 삼국시대인 4세기 말 진종사(眞宗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고, 고려 원종 때 중창되었으며, 충렬 8년(1282)에 그의 원비(元妃) 정화궁주(貞和宮主)가 대장경과 옥등잔(玉燈盞)을 헌납함으로써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그 이후 고려시대에 몇 차례 중수하였으며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선조 때 불탄 것을 1621년(광해군 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대웅전과 약사전이 이 때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소박하고 아담하다. 전통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목할 만한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의 눈으로는 기실 그리 볼 것이 없다.
다만 네 귀퉁이 추녀를 쪼그려 앉은 사람이 받치고 있는 조각이 특이하다. 여늬 건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이러한 조각에 대해서 전해 오는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
광해군 당시 이 건물을 다시 지을 때 일을 맡은 도편수가 아래 마을 주막에 거처를 정하고 그 집 주모와 번 돈을 맡길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그 주모가 돈을 갖고 도망을 가 버렸다. 이에 화가 난 도편수가 그 주모에 대해 복수하는 마음으로 발가벗겨 지붕을 받치고 있게 조각을 새겨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 역시 그냥 재미삼아 듣고 치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굳이 사실 여부를 따지자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집을 짓는 책임을 도편수가 갖고 있다고 해도, 신성한 대웅전에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에 따라 감히 발가벗은 사람의 형상을 깎아 넣을 수 있는가. 절의 스님들은 이를 몰랐다는 말인가, 아니면 알고도 묵인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는가.
나의 상식으로는 그럴 수 없다. 그 조각상이 벌거벗은 여인상이라고 하는데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 자세히 보시라. 완전히 벌거벗지도 않았으며 여인상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네 귀퉁이 조각상의 자세도 한 손으로 받친 것도 있고 두 손으로 받친 것도 있는 등 서로 다르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혹시 이것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역사상(力士像)의 유제는 아닐까?
나는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까 책임질 수 없는 이런 추측을 겁 없이 해 볼 따름이다.
전등사는 역사가 오래 되었다고는 하나 대찰(大刹)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가 높은 고승들이 별반 배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조선시대에 불교가 억압을 받아 절들이 대부분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에서 전등사가 국가의 인정을 받으며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절의 역사나 규모, 불심 때문이 아니라, 정족산성에 사고(史庫)가 들어서면서 전등사에 그 사고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등사에 가서 사고는 보지 않고 전등사만 보고 오면 본채는 보지 않고 문간채만 보고 오는 꼴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고란 각 왕대의 <실록(實錄)> 등 역사와 학문에 관련된 주요 서책들, 또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한 왕실의 주요 서책과 보물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원래 춘추관(春秋館)과 충주(忠州), 성주(星州), 전주(全州) 네 곳에 사고(史庫)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통에 모두 타 버리고 천행으로 전주사고의 것만을 보존하였다.
이를 이리저리 옮겨 보존하다가 임란이 끝나자 강화 마니산으로 옮겨 이를 저본으로 하여 네 부를 만들어 강화와 원주 오대산,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등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던 것이다.
정족산 사고는 1660년(현종 1)에 지어 마니산으로부터 서책을 옮겨 왔다.
그 사고에 있던 서책들은 1910년 병합 직후 일제가 제실 재산으로 한 데 모아 총독부에서 관리하다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넘어 갔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존 관리되고 있다.
초행자들은 정족산 사고 자리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전등사 대웅전에서 서쪽 적묵당―선방 앞으로 가면 그 남쪽 끝에 화장실이 있다. 그 화장실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정족산성의 서문 올라가는 골짜기가 나온다. 일단 그 길로 올라서서 한 30여 미터쯤 가다가 오른쪽으로 낮은 등성이를 넘어 서서 조금 올라가면 철책을 둘러 친 빈터 앞에 스테인리스 안내판이 두 개가 서 있다.
하나는 사고, 하나는 선원각(璿源閣) 안내판이다. 1910년 무렵 서책들이 없어진 사고는 그 직후 무너져 버리고 지금은 잡초 속에 주춧돌만 박혀 있다. 그나마 철책을 둘러치고 안내판이라도 서 있어서 찾아보는 이들이 여기가 그 터인줄 짐작이나 하게 해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전등사 대웅전 앞의 대조루(對潮樓), 원래는 강당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기념품을 판매하는 건물에 둘러보면 온갖 기념품들 사이에 "장사각(藏史閣)",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고 하는 나무 편액이 대못으로 꽝꽝 벽에 박혀 있다. 뭘 이런 걸 다 파나, 하고 살펴보니 그것이 바로 사고와 선원각의 현판이다.
참으로 기막힌 보존이다.
정족산성을 내려와 다시 강화를 한 바퀴 도는 여정을 잡으려면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내려오면서 왼쪽, 원래 들어왔던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온수리를 지나게 되고, 온수리 동네 가운데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301번 도로를 타고 도로 강화읍으로 향하게 되고, 그냥 직진하면 301번 도로를 반대 방향으로 타고 강화를 일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일주는 완전한 일주는 아니다.
정족산성을 내려오면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상면에서 화도면으로 건너가는 348번 도로를 타는 것이 완전한 일주가 된다.
348번 도로를 타고 정족산을 돌아가면 꽤 넓은 벌판이 나오는데 이쪽 길상산 산모롱이와 저쪽 마니산 산모롱이가 서로 가까이 손을 내민 듯 가깝게 보는 곳이 있고, 두 곳을 잇는 곧은 둑 위로 차도가 나 있다. 그 둑을 건너간 곳에 정미소를 비롯한 집들이 몇 채 있는 마을―사기리(沙器里) 어귀에 비석들이 대여섯 개 서 있다. 이건창(李建昌), 이시원(李是遠), 민진원(閔鎭遠) 같은 사람들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따위인데 그 가운데 별다른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제목이 선두포축언시말(船頭浦築堰始末)이라고 써 있다. 이곳 선두포에 언(堰), 곧 방조제 둑을 쌓은 자초지종을 적은 비석이라는 뜻일텐데 내용인즉슨 1707년 (숙종33)에 이 둑을 쌓게 된 경위, 길이가 450보(步)에 이르는 둑의 이런저런 규모와 시설, 11만 명에 이르는 역군의 규모 및 소요 물자, 관계자 명단 등이다.
선두포언 이 둑을 쌓음으로서 그 안쪽에 굉장히 넓은 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강화의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지 않다. 그 까닭이 바로 해안을 따라 뺑뺑 돌아가며 이런 간척지들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선두포언은 대단한 유적은 아니지만 그런 간척지들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서 강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선두포언에서 2km 남짓 더 가면 포장도로가 끝나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 1.3km 가량 올라가면 정수사(淨水寺)라는 조그만 절이 있다. 원래는 신라 선덕여왕 8년(639)에 처음 창건되었다 하나, 조선 세종 8년(1426)에 함허대사가 중창하였다.
절이라기보다는 전등사에 딸린 암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직 "대웅보전"만이 오래된 건물로서 자태를 지니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집에 조선후기 어느 때 앞으로 한 칸을 덧달아 내고 그 부분에 죈마루를 놓았다. 부처님 모신 법당에 죈마루가 있는 것은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형태다. 죈마루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가운데 칸 네 짝 분합문은 각각 하나의 화병에서 한 줄기 모란이 올라가고 그 줄기에 핀 꽃들이 만개한 형태를 목각으로 깎아 끼움으로서 창살을 삼았다.
그 창살 앞 죈마루에 걸터앉아 앞을 내다보면 황해 바다가 눈앞에 망망하게 펼쳐진다. 누군가 그러길래 나는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래서 거기 앉아 아무리 앞을 내다보아도 앞산 등성이만 보일 뿐이었다. 바다를 찾으려 마당가로 나서니 동남쪽으로 개펄인지 바다인지가 보이고, 그 너머로는 인천이 보였다. 부처님의 눈을 가져야 저 산등성이 뚫고 망망한 황해 바다를 볼 수 있을까.
정수사 오르던 길로 내처 올라가면 마니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흔히들 가는 상방리에서 참성단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된 길보다는 이 길이 훨씬 산의 정취가 깊다.
이곳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친근감을 인정받는 비결이 있다. 마니산이라 하지 않고 마리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곳 분들은 마니산이 아니라 머리라는 뜻의 마리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식적으로 그렇게 바꾸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지만 중앙지명위원회에는 아직 가결되지 않고 있다. 나로서는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마니산이든 마리산이든 올라가 볼만한 산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마니산 등산은 그 자체 별도의 일정으로 추진할 일이지 강화를 한 바퀴 돌아보는 촉박한 여정의 일부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 강화도 서해안
정수사에서 다시 내려와서 348번 도로를 만났을 때 오른쪽, 포장되지 않은 쪽으로 접어들면 오른편으로 마니산을 끼고 왼편으로 강화의 서남단 해안을 따라 가장 외곽으로 일주하는 길이 된다.
길은 2km 남짓 가다 보면 다시 포장이 되어 있다. 이 길 연변에는 간간이 해안에 봉긋이 솟은 낮은 봉우리마다 돈대들이 대여섯 군데 있을 뿐 특별한 유적은 없다.
그럼에도 이 길을 가는 이유는 가까이는 개펄과 마니산 자락에 안긴 마을들을, 멀리는 바다를 바라다보는 맛이 좋기 때문이다.
정수사 입구에서 남쪽으로 향하던 길이 크게 한 굽이를 돌아 서쪽으로 향하게 되는 지점, 동막리에는 강화에서는 드물게 작으나마 백사장도 있어 만조 때는 해수욕장 모양을 갖추기도 한다.
거기쯤에서 잠시 머물러 바닷바람도 쐬고 내키면 백사장을 넘어 개펄에 발도 디뎌보고 하는 것도 섬이면서도 바다에 직접 닿아 보기 어려운 강화 여행에서 특별한 맛보기가 될 것이다.
길이 마니산을 반바퀴 빙 돌아 정수사 입구에서 12km 쯤 되는 지점에서는 다시 동향으로 방향을 바꾸는데 거기 선수리가 있다. 선수리에는 제법 큰 포구가 있고, 그 포구 주위에는 횟집들이 여럿 있다. 광어, 도다리 같은 고급 횟감들은 이곳에서 잡은 것이 아니지만 숭어니 병어니 밴댕이니 삼식이니 하는 좀 못난 고기들은 이곳에서 잡힌 것들이다.
이쪽 황해 바다가 아무리 오염이 되었더라도 어쩌다 한 번이야 어떠랴.
이름도 시원찮은 잡어들이지만 그 나름의 맛과 싱싱함은 그런대로 매력이 있다.
흔히 많이 가는 마니산 입구에서 벌판을 가로질러 돌아 나오면 온수리에서 오는 301번 도로와 다시 만난다.
그 삼거리에서 한 500m 쯤 가면 능내리라는 마을이다. 능내리(陵內里), 능안 마을이라…
답사를 할 때는 마을 이름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능내리라 하면 능이 부근에 있다는 말이다. 도로변에 가릉(嘉陵)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하나 있다.
거기서 한 5∼600m 마을을 지나 올라가면 큰 무덤이 하나 있다.
고려 원종의 왕비, 충렬왕의 어머니 순경태후의 능이다. 능이라고 하지만 조선 왕이나 왕비에 능에 비하면 상설(象設)제도가 사뭇 썰렁하다. 고려의 능이라서 조선시대 이후 중하게 관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화에는 가릉 외에도 고려 고종의 능인 홍릉(洪陵)을 비롯해서 고려 희종의 능인 석릉(碩陵), 강종의 비 원덕태후의 능인 곤릉(坤陵)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능들은 섬 안쪽에 있고, 꽤 높은 산 중턱에 있어서 해안을 따라 일주하는 여정에서는 특별한 관심이 없는 한 찾아보기 어렵다. 또 찾아보아도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최근에 다시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로서는 유적으로서의 가치를 찾기 어렵다.
가릉에서 나와 301번 도로를 5∼6km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오른쪽 길은 찬우물 고개로 이어지는 208번 도로이고 왼쪽 길이 계속 301번 도로이다.
301번 도로를 따라 다시 5km쯤 가면 외포리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왼쪽으로 접어들어야 외포리 포구이다. 외포리는 강화에서 가장 큰 포구로서 거기서 석모도를 비롯해서 교동도, 볼음도, 아차도, 주문도 등 인근 섬들을 잇는 배들이 나고 든다.
당연히 그에 맞는 포구의 정취가 있다. 갈매기도 끼룩거리고 요것조것 해물들도 있고, 영락없이 횟집도 있고, 요즈음에는 전혀 걸맞지 않는 엄청나게 큰 여관들도 들어섰다.
거기서 배타고 진짜 섬들로 가보면 더 좋겠지만, 그런 여정은 그 자체 별도로 추진해야 할 것이기에 바쁜 우리 일정에서는 이 정도로 줄이고 계속 301번 도로를 타고 강화의 서해안을 달리는 것이 좋겠다.
북으로 달리는 강화 서해안 301번 도로 연변에도 내가면의 고려시대에 만들었다는 커다란 저수지와 그 인근의 고인돌, 조금 더 들어가면 낙조봉의 적석사 등 서너가지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욕심을 줄이고 그저 도로변 해안에 펼쳐진 너른 벌판을 지그시 바라보며 8km 남짓 되는 길을 쉬지 말고 달리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꺾으면 교동도 건너가는 창후리 포구인 바, 그것도 그런 줄이나 알아두고 그냥 오른쪽으로 접어들자.
거기서 다시 2.8km 동북쪽으로 더 가면 또 다시 삼거리. 여기서는 잠시 고민이라도 하자.
301번 도로는 그 방향 그대로 직진하여 조강가에 가 닿지만 거기는 민통선, 그 길을 따라 가 본들 우리는 돌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 도로는 다시 서울서 오는 38번 국도이다.
그 38번 도로를 따라 갈 때는 무조건 달리지 말고 도로변을 살필 필요가 있다.
강화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근리 고인돌을 자칫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한 6km 가면 가는 방향의 왼편, 그러니까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해야 하는 방향에 작은 주차장이 하나 있다.
고인돌 찾는 이들을 위한 주차장이다. 그 주차장으로 들어가서 오른편에 은행나무 묘목 밭을 끼고 걸어서 100여 미터 들어가면 밭 한 켠에 교과서를 비롯해서 책들마다 고인돌의 대표인양 등장하는 그 유명한 부근리 고인돌이 있다.
물론 선수에는 대표 선수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강화에 고인돌이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 흔적만 남아 있는 것 합하면 80 여기의 고인돌이 확인되었다.
부근리 고인돌 부근에도 몇이 확인되는데 그 가운데는 은행나무 묘목밭 가운데 받침돌만 비스듬히 박혀 있는 것이 있다. 스타에게만 박수를 칠 것이 아니라 벤치나 지키고 있는 부상 선수, 물이나 나르는 후보 선수에게도 가끔은 시선을 주어 볼 일이다.
강화에서는 대표적인 신석기인 돌칼과 빗살무늬 토기 등이 몇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네 문외한들이 신석기 시대의 흔적을 강화에서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신석기시대 유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이 아니면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도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훼손되고 개발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보고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유적은 청동기시대의 족장들의 무덤인 고인돌-지석묘이다.
고인돌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발전해가면서 한 집단의 규모가 커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치적인 체제가 성립되었을 때, 그러한 집단의 지배자인 족장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확인하기 위해서 많은 인원을 장기간 동원하여 커다란 돌을 운반해다가 자신의 무덤을 만든 것이다.
지금 고인돌은 앞뒤를 막았던 돌이 없어서 속이 휑하게 빈 모습이다.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시신은 물론 함께 묻었던 부장품들도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과욕을 해가며 자신의 죽은 몸뚱이 치레를 했던 족장이나 그 역사에 동원되어 피땀을 흘렸을 부족원들이나 이제는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고인돌은 그렇게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고 있다.
석양빛에 고인돌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분위기가 저으기 그윽하다.
그렇게 사진 한 장 찍고 나면 악착스럽게 서두를 것도 없다. 어차피 강화를 빠져 나가는 길은 막힌다. 강화다리를 새로 놓는 공사에 통진, 김포로 이어지는 38번 국도 확장 공사가 늘 하긴 하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굼벵이 기어가듯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또 갑곶과 강화역사관은 들러보기 어렵게 된다. 이것도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어 찬찬히 둘러보리라 미루어 두고 강화다리를 건너자. 그러면서 볼거리도 슬쩍슬쩍 빼고 말을 줄이느라 애를 쓰고 했는데도 예정된 원고 분량이 넘은 듯하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마디 하는 폭으로 한 대목 더 붙이자.
■ 강화의 넉넉함
강화에는 문화 유적과 역사의 현장이 풍부하다. 그러나 강화의 풍부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강화는 여러 면에서 넉넉하다. 강화는 섬답지 않게 물산, 특히 농산물이 풍부하다.
요즈음에는 정작 강화 본 바닥에서는 크게 줄고 대신 인근의 김포, 연천, 포천 등지로 확산되어 나갔지만 그래도 여전히 "강화 인삼"은 명성이 높다.
인삼과 함께 강화의 특산물로 꼽히는 것이 화문석이다. 왕골(莞草)이라고 하는 키가 크고 윤기가 나는 식물을 잘게 쪼갠 것으로 짠 돗자리인 화문석은 한 때는 이름이 드높았다.
아직도 강화에서 가내 수공업으로 생산은 되고 있지만 공장 제품이나 특히 싼 값에 밀고 들어오는 중국 제품 때문에 예전만은 못하다는 소식이다.
또 강화의 특산품 아닌 특산품은 쌀이다. 강화는 섬답지 않게 쌀 생산이 많다.
1년 농사 지어 3년 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보장지지로서 높이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 강화에는 이런저런 농산물이 풍부하다.
지금은 그리 큰 장이 아니지만 아직도 강화읍에는 2,7장, 내가면에는 3,8장 5일장이 선다.
그 장은 철에 따라 다르지만 요즈음 같은 가을에는 쌉쌀한 맛이 나는 순무를 비롯해서 각종 농산물과 그리고 인근 바다에서 잡히는 새우젓을 비롯해서 몇 가지 수산물들이 상당히 넉넉한 느낌을 준다.
강화가 이렇게 넉넉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찌 보면 동어 반복일지도 모르겠으나 강화에는 논과 밭이 상당히 넓다. 물론 인근 김포와 비교하면 평야가 좁고 비율도 훨씬 낮겠지만, 강화는 김포와는 달리 섬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다른 섬들에 비해서는 논밭의 비율이 대단히 높은 편이다.
상대적으로 넓은 논밭에서 산물이 넉넉하게 생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논밭이 넓은 까닭은 또 무엇일까?
처음부터 지형이 그렇게 타고난 것일까? 조금은 그런 점도 있지만,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강화도에는 별립산(別立山 400m), 봉천산(奉天山 291m), 고려산 (高麗山 436m), 혈구산(穴口山 466m), 진강산(鎭江山 443m), 길상산(吉祥山 336m), 마니(리)산(摩尼山469m) 등의 산들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면서 주욱 늘어서 있다. 그 산들 사이사이에 비교적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처럼 한라산이 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것보다는 논밭이 넓게 발달할 수 있는 지형을 타고 났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강화의 논밭은, 특히 논은 타고 난 것만은 아니다.
가만히 보면 강화의 넓은 벌판은 주로 해안가에 있다. 그 논들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고려말이래 최근까지 사람들이 바다를 막아 만든 간척논들이다.
강화의 넉넉함에는 사람의 노력도 크게 한몫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크게 보면 간척논을 많이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역시 자연 조건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동해안같이 바다의 경사가 급하고 백사장만 있는 곳에서 무슨 수로 논을 만들겠는가. 강화에 논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해안을 따라 발달한 개펄 덕분이다.
우리는 자연 앞에 겸손해야 한다. 개펄을 메워 논을 만드는 것도 정도 문제다.
그것이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질 때는 문제가 없지만, 그야말로 바다를 메우는 식의 대규모 "개발"은 자연의 재앙을 불러온다. 더구나 논도 아닌 주택이나 공업 "단지"를 만드는 것은 신중히 따지고 따져서 할 일이다. 아니 따지고 따져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개펄은 얼핏 보면 별로 기분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시커먼 뻘흙에 들어가서 놀라고 하면 처음에는 아무도 들어가질 않는다. 그러나 한 명 두 명 들어가서 옷을 버리며 놀다보면 너도나도 들어가 그 뻘흙 속에 살고 있는 게, 조개를 잡느라 정신을 잃는다. 모래자갈이 섞인 곳을 넘어 부드러운 곳으로 나가면 그 촉감도 그리 나쁘지 않다. "개펄은 살아 있다"던 어느 T.V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개펄은 바다 생태계의 출발점으로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펄 너머에는 당연히 바다가 있다. 바다도 강화를 넉넉하게 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강화는 섬이다. 섬은 섬으로서 갖고 있는 자기 얼굴이 있다.
비록 강화에는 커다란 항구는 없다 하더라도 석모도를 비롯한 주문도 등으로 이어지는 외포리와 교동을 잇는 창후리와 같은 포구가 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여나믄 척 고깃배들이 드나드는 작은 포구들도 몇 살아 있다.
그런 점에서 강화는 열린 곳이다.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창구인 이런 포구들은 강화를 넉넉하게 한다. 그러나 1년 농사지어 3년 먹은들 농사는 지을수록 적자라는 농민들의 푸념 앞에서는 이제는 그것이 넉넉함으로 남지 않는다. 아무리 그물질을 해 보아도 쓰레기만 올라오는 인천 앞바다 속사정은 섬으로서 강화를 우울하게 한다.
농촌이라고 어촌이라고 언제까지나 목가적인 낭만의 고향으로 머물 수는 없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농촌 경제를 강화 사정을 개발해야 함은 두말한 나위가 없다.
강화가 인천광역시로 편입되고 나서 이런저런 변화가 있다는 소식이다. 초지와 김포 대명을 잇는 제2강화 다리가 놓일 것이라든가, 영종도에 세워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강화로 연륙교가 놓일 것이라든가, 강화 해안 일주도로가 뚫릴 예정이라든가 하는 소식이 극심한 정체에 시달리는 38번 국도 사정을 생각하면 반갑지 않을 리가 없다.
다만 그러한 개발이 강화의 웅숭깊음과 넉넉함을 대가로 하는 것이 되지 말기를 바란다.
벌써 개발이라 하여 도로변에 무슨무슨 음식점, 모텔들이 번쩍번쩍 들어서고 있다.
행여 해안에 있는 무너져 가는 돈대의 돌들을 불도저로 쉽게쉽게 밀어 내버리지나 않을까, 혹은 또 강화 북문이나 광성보 초지진처럼 일사불란하고 반들반들한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지나 않을까 지레 걱정이 앞선다.
강화의 역사와 문화 그 넉넉함을 잘 보존하여 강화가 통일된 후 교통과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하기를, 함경도에서부터 제주도까지 팔도 각지에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와서 구경하고 공부하고, 인천국제공항을 드나드는 외국인들도 일부러라도 짬을 내서 강화에 들러보지 않으면 한국에 갔다 왔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기를 꿈꾸는 것으로 강화 사람도 아니면서 강화 사람 행세를 하며 아는 체 한 데 대한 변명을 삼는다.
■ 밀리온 알르이흐 로스 <백만송이 장미> / 알라 뿌가쵸바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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