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전사지(陳田寺址),
바다를 그리는 탑이여 !
아침부터 무더위가 극성이다. 7번 국도를 따라 양양으로 가는 길,
삼팔선 휴게소의 아침 바다는 이미 두터운 햇살에 낚인 날카로운 파도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명주 찢는 소리를 연상케 하는 쨍한 바다, 역광을 받아 빛나는 바위, 바람도 숨을 죽인 아침바다에서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서는 여름을 느낀다. 한 잔 뽑아든 커피를 여유 있게 마실 수 있는 한 평 그늘은
물론 어디를 둘러봐도 볕을 피할 길 없어 가까운 하조대(河趙臺)를 찾아 나무그늘 아래 앉는다.
기암절벽에 오래된 소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그늘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늘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눈이 부시고 한참을 지나고야 내 몸의 열기가 식어짐을 느낄 수가 있었다.
![]() |
◇ 진전사지 가는 길, 7번 국도변 하조대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 들찔레 |
설악산 동편 자락 진전사지를 찾아가는 아침은 이런 더위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땀에 몇 번 몸이 젖고 마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오전이 지났다.
불에 탔던 낙산사의 예쁜 담장 아래에서 말렸던 몸이 홍련암 옆 해당화를 보다가 다시 젖었고
의상대 그늘에서 다시 말랐으며 진전사 가는 도중, 지칭개와 꿀풀같은 들꽃을 본다고 내린 길 위에서
또 땀이 흘렀다. 아무하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풍성하게 먹을 수 없고,
온전히 더위를 온 몸으로 느끼며 땀이 흐르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귀찮다고 생각지 않는 이 시간,
여름을 가로질러 바다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그래서 더 좋은 건지 모른다.
그렇게 그렇게 다가선 진전사 절터는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인근이라고 알려준 이후에도
약 2km를 더 가고서야 나타났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둔전리 설악산 동쪽 기슭에 온 것이다.
언제 내가 바다를 만났냐는 듯이 나를 가로막는 깊은 산중에서는
강원도 특유의 소나무 숲에서 나오는 치톤 향이 코를 찌른다.
마을이 물에 잠길 것 같다는 이름의 작은 개울 물치천(沕淄川)을 건너면서
그 이름 참 시원하다는 생각을 한다.
저 물은 내가 온 길을 따라 거꾸로 흘러가겠지. 이 산의 기운이 동해로 뻗어가겠지.
아무도 없는 한낮의 진전사지에는 푸른 풀과 숲, 그리고 햇볕만이 내 동무다.
진전사는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8세기 말경에 창건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또한 1974∼1979년 사이에 이루어진 발굴에서 '진전(陳田)'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 조각과
연화무늬 수막새, 당초문 암막새, 물고기무늬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됨으로써 절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이 절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선사(道義禪師)가 당나라로 유학 갔다가
821년(헌덕왕 13) 귀국하여 오랫동안 은거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이 사찰에서 염거화상(廉居和尙), 지눌 등이 머물렀으며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스님도 이곳에서 체발득도(剃髮得道)하였다고 전한다.
도의선사는 당에서 선종을 이어받고 귀국하여 설법을 시작하였으나,
당시는 교종만을 중요시하던 때라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 절로 들어와 40년 동안 수도하다가 입적하였다.
![]() |
◇ 진전사지 삼층석탑 ⓒ 들찔레 |
교종이 주류이던 시절 귀족 중심의 종교가 가지는 틀을 깨려했던 선종은 주류에 의해 배척을 당했고
당시 선각자이고 지성이었던 도의선사는 이 산 속에 은거하며 살았다.
불교가 온 백성의 삶에 구원이 되는 역할을 꿈꾸었을 그는
넓은 바다 같은 다른 세상을 그리워했는지 모를 일이다.
현실이 넘지 못할 산이고 교종이라면 바다는 이상이고 선종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전라도 땅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 주석하게 된다.
서기 759년 경, 원표대사가 세운 이 절에서 도의선사는 가지산문의 개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남해 바다를 바라보는 형세의 장흥 땅에서 우리나라에서 선종의 문을 처음 열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곳 진전사에서 도의선사를 추앙했던 염거화상이나 일연도
가지산 보림사에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이는 구선선문이 정립되면서 산문마다
맨 위 어른 스님(祖師)을 따라 그의 학풍을 계승하고 숭상하는 모습 즉,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선풍이 시작되었음을 증명해 준다.
![]() |
◇ 진전사지 삼층석탑 아래 기단에 새겨진 천인상 ⓒ 들찔레 |
절터 마당에 더위가 가득한 한낮 여름 벌레소리 빼고는 적막인 곳에서 그늘을 찾아 숨을 돌린다.
이곳 진전사지에 온 목적은 국보 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보는 것보다
도의선사의 부도로 추정되는 부도(보물 제 439호)를 보는 것에 있다.
그러나 부도는 먼저 마주하는 탑과 거리를 두고 있기에 검은 빛이 도는 탑 옆에 앉아 전체를 조망한다.
진전사지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탑으로 2중 기단위에 올린 3층의 탑이다.
아래 기단에는 천인상이 위 기단에는 팔부중이 조각되어 있으며 일층 몸돌에는 사방불이 새겨져있다.
천인상은 하늘을 나는 천인(天人)의 모습으로 비천상(飛天像)이라고도 한다.
동종(銅鐘)에서는 많이 찾아볼 수 있으나, 석탑에서는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진전사지 삼층석탑,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등에서 나타나는 것을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석탑의 가장 하부인 하층 기단에 안상을 파고 조식하는 이유는
탑이 하늘세계 혹은 이상적인 불국토 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 ![]() |
◇ 위 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의 모습 ⓒ 들찔레 |
팔부신중을 위 기단에 잘 새기는 이유는 기단 돌 가운데에 탱주 하나를 새김으로써
자연스레 사면이 각각 둘로 분할되어 생기는 8면의 공간을 활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팔부신중은 9세기 초에 건립된 경주 남산리 서삼층석탑의 상층 기단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후,
일반형 석탑의 대표적인 장엄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팔부중도 제법 세련된 것이기는 하나
경주 인근 숭복사지의 것을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것으로 여긴다.
삼국시대의 사방불은 모두 불력(佛力)에 의존해 사방으로 확장해 가는
초기의 영토 관념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이곳 진전사지의 탑에 새겨진 사방불이 그 시초라고들 생각한다.
이렇게 새겨놓은 사방불은 궁극적으로 탑 내에 안치된 사리에 대한 수호불(守護佛)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다른 경우들도 있지만 대개 방위에 따라 새겨 넣는 부처님의 모습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동쪽에는 약사여래불, 서쪽에는 서방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불을 조각한다.
이곳의 불상은 마모가 심하여 그 구분이 어렵다.
![]() ![]() |
◇ 1층 몸돌에 새겨진 사방불 ⓒ 들찔레 |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 가벼운 반전을 두어 경쾌하고 가벼운 느낌을 주며,
밑면에는 5단씩의 층급받침을 두었다.
3층 지붕돌 꼭대기에는 노반만 남아있을 뿐 상륜부의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석질이 매우 단단해 보이지 않아 실제보다 더 오래된 듯 보이는 것이
16세기경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와 어울려 한낮에도 쓸쓸하다.
전설에 따르면, 사회 혼란기에 도적떼가 설악산 권금성(權金城)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신흥사와 진전사를 노략질하여 결국 폐사되었다고 한다.
진전사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예전에 도적굴 이었다는 동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목이 마른 것도 아닌데 괜히 물 한 모금 마셔본다.
귀족 중심의 불교사회였던 신라, 더구나 3국 통일을 이룬 후의 신라는
점차 국교도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귀족들의 내세를 편안히 하고자 했던
개인적이고 화려한 것으로 변질되어 갔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성, 감산사의 조성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구산선문이 성립될 때 까지 무지한 백성들에게 확산되어진 선종은 배척을 받았을 것이고
교종 중심의 절문화가 도의선사로 하여금 이 깊은 산속에 머무르게 하였을 것이다.
![]() |
◇ 진전사지 부도 ⓒ 들찔레 |
여름 폭우를 맞은 산은 푸름을 더하고 결실을 맺듯이 파도가 일고 격랑이 지나면 바다는 고요해진다.
세상의 이치도 꼭 같아서 고이면 썩고, 썩은 것이 없어지면 새로운 것이 생긴다.
이 이치는 이데올로기에서도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그럼으로써 역사는 발전되고 또 윤회한다.
다만 세월을 기다리는 일만 있을 뿐 도의선사는 이미 그런 이치를 깨닫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에게 굳어져 버렸던 틀을 깨부수는 사고와 참선을 통하여 오로지 정진하고 또 정진하여
선종을 전파하려던 마음은 닫힌 곳에서 열린 곳으로,
세상의 비틀어진 것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멀리 동해 바다로 나아가는 마음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새로운 세상이 오고 그에 맞는 인간 구원의 종교적 힘이 빛을 발할 날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진전사지 부도를 오르며 교차하는 생각들을 숲속으로 던지며 부도 앞에 선다.
얼핏 보아도 기단의 구조는 석탑의 그것과 같아서 다른 곳에 있는 부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는 우리나라 석조부도의 첫 출발점이 되며, 세워진 시기는 9세기 중반쯤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도의선사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고 살다 인근 흥법사지에서 입적한 염거화상의 부도는
시대적 맥락으로 보아 우리나라 최초의 팔각원당형 부도로 여긴다.
![]() ![]() |
◇ 진전사지 부도의 탑을 닮은 기단부 ◇ 문비가 새겨진 팔각의 몸돌 ⓒ 들찔레 |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중앙에 우주와 탱주를 새기고,
그 위로 8각의 굄돌을 두었으며 굄돌의 옆면에는 연꽃무늬를 겹으로 조각하여 둘렀다.
탑에서 볼 수 있는 기단에 8각의 기와집 모양을 하고 있는 탑신은 유일한 것이며
탑신은 몸돌의 한쪽 면에만 문짝 모양의 조각을 하였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다.
지붕돌은 밑면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낙수면은 서서히 내려오다 끝에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위로 살짝 들려 있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치밀하게 돌을 다듬고 균형을 맞춘 모습에서 단정함이 느껴지고,
별다르게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과 간결하게 새긴 최소한의 조각들은 깔끔함과 단아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으로 보아 진전사지 부도는 불탑에서 승탑인 부도가 파생되어 발전하는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부도가 없었다면 일반적인 탑의 양식이 부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부도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
또한 도의선사의 부도가 맞는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선풍(禪風)을 고취시킨
노스님의 마지막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사진으로 보았던 이곳 진전사지의 부도는 한겨울의 하얀 눈을 모자처럼 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더운 날, 생모시로 홑옷을 지어 입은 단정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나에게 모습을 드러낸 부도는
말없이 숲 속의 그늘자리에 앉아 땀 흘리며 엉거주춤 서 있는 중생에게
편한 자리 골라 앉아 땀 식히라는 말을 바람에 전해 들려준다.
![]() |
◇ 부도는 푸른 숲 속에 좌정하고 ⓒ 들찔레 |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부도 앞에서 또 물 한 모금 털어 넣는다.
언젠가 흰 눈이 두텁게 쌓인 겨울에 다시 오리라.
마음이 얼음장 같이 차고 머릿속에 날이 서서 불안정한 날들이 오면 온 몸 추위에 동동 얼려서
흰 눈을 모자같이 쓴 이 부도 앞에서 차가운 번민들을 덜어내는 연습을 할 것이다.
나도 같이 흰 눈을 뒤집어 쓴 채 몸은 더욱 차가워져도
마음에는 작은 불하나 지필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이다.
망망대해 푸른 파도가 따스한 볕에 일렁이는 그런 꿈을 꾸면서…….
- 2008. 08.02 데일리안 배강열 칼럼니스트 <들찔레의 편지 232>
- Copyrights ⓒ (주)이비뉴스
통일신라후기 불교계 - 선종의 수용 |
통일신라 후반에 접어들면서 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선종(禪宗)을 받아들인 것이다. 8세기 이후 중국에서 빠른 속도로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선종은 신라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중국에 유학하고 있던 신라 스님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선종이 한반도에도 뿌리를 내리게 됐다. 특히 선종은 지방 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서라벌 중심의 교학을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반도에 처음 선종이 들어온 것을 8세기 이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에서 유학중인 법랑(法郞)스님이 도신(道信, 583~654)스님 문하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 호거산에서 법을 전한 것이 최초라는 주장이다. 법랑스님의 법은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4~779)스님에게 전해졌다. 법랑스님이 입적한 뒤 신행스님은 중국 유학을 다녀왔다. 두 스님은 북종선(北宗禪) 계통이다. 이와 달리 남종선(南宗禪)을 소개한 이는 중국에서 40년간 공부한 뒤 돌아온 도의(道義)스님이다. 스님이 귀국한 해는 821년으로 신라 헌덕왕 13년이다.
중국 유학승 귀국하며 확산 / 도의스님 조계종 종조 ‘추존’
도의스님은 중국 강서성 홍주에서 마조스님 제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스님 문하에서 정진했다. 서당스님은 도의스님에게 법을 전하면서 “진실로 법을 전할 만하다면 이런 사람이 아니고 누구에게 전하랴”고 했다고 한다. 또한 백장스님은 “강서의 선맥이 몽땅 동국(東國)으로 가는구나”라고 도의스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도의스님은 설악산 진전사에서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수행에 집중했다. 스님은 조계종 종조(宗祖)로 추존받고 있으며, 종헌에도 명시돼 있다. 하지만 도의스님은 초기에는 선종을 이해하지 못한 세력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사실 도입 초기의 선종은 소수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졌고, 때로는 기존 불교계로부터 배척받으면서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당시에는 산간 오지였던 설악산에 주석처를 삼았던 것도 이같은 배경이 있다. 그러나 도의스님의 선맥은 이후 신라불교는 물론 고려, 조선을 거쳐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내려오며 한국불교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신라 후기에 선종은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갔다. 지방은 물론 중앙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스님과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신라불교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뿌리를 내렸다. 830년 이후 중국에서 남종선을 공부한 스님들이 여러명 귀국하면서 선종의 상황은 크게 바뀌어 나갔다. 그리고 중국 불교계에서 선종 영향력이 증대되는 것이 알려지고 선종에 대한 이해가 점차 확대되면서 관심을 갖는 스님과 불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선사들의 교화력이 증대되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세력들도 이들을 적극 후원하기 시작했다.
|
도의(道義)국사가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선(禪)이 점차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중국에서 귀국한 홍척(洪陟, 826~836)스님도 지리산에 머물며 선을 전파하는 등
다수의 유학승들이 통일신라 후기의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선종(禪宗)은 한국불교의 중심사상으로 성장하는 기초를 놓게 되었다.
이무렵 도의, 홍척스님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스님들이 여럿 있다.
가난한 상인이었던 혜소(惠昭, 774~850)스님,
삭주(지금의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혜철(慧徹, 785~861)스님,
휴암(지금의 황해도 봉산) 출신인 절중(折中, 826~ 900)스님,
웅진(지금의 충남 공주) 태생인 체징(體澄, 804~880) 스님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혜소스님은 서기 804년(애장왕 5년) 당나라에 들어간 후
창주신감(滄州神鑑)스님 문하에서 출가하여 공부했다. 830년 귀국한 스님은 상주 장백사를 거쳐
지리산 화개에서 대중을 지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따르게 되자,
스님은 화개 근처에 옥천사(지금의 쌍계사)를 창건했으며 왕실에서도 관심을 갖고 지원했다.
혜철스님은 중국에서 35년간(814년~849년) 공부한 후 귀국하여 곡성 태안사에서 선법(禪法)을 폈다.
체징스님은 도의스님 제자인 염거(廉居)스님 문하에서 공부한 후 도반들과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스승에게 배운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신라로 돌아와 장흥 보림사에서 선을 선양했는데, 이를 가지산문(迦智山門)이라고 한다.
이들 스님에 비해 절중스님은 중국 유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님은 본래 화엄을 공부하다 도윤스님을 만나 선에 입문했다고 한다.
절중스님은 영월 사자산에 머물며 1000여 명의 제자를 두었다고 전해온다.
803년부터 84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스님들을 중심으로
선(禪)이 신라 사회에 뿌리 내리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님들은 전국 각지에 산문을 열고 대중을 맞이하며 신라불교는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밖에도 지력문(智力聞), 신흥언(新興彦), 용암체(涌岩體), 진구휴(珍丘休), 보리종(菩提宗)으로
알려진 스님들이 선풍(禪風)을 확산시켰다고 한다.
도의스님이 중국에서 귀국할 무렵 기존 불교계의 배척으로
심산유곡인 설악산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만, 점차 영향력이 확대되어
통일신라 후기에는 중심사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당시 선사상은 중국의 마조(馬祖)스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들에게 수행법을 배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선이 뿌리를 내린 것은 같은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 불교신문 2441호, 2443호/ 2008년 7월9일자, 7월16일자
'찾아 떠나고(답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양 선림원지(禪林院址) (0) | 2008.11.23 |
---|---|
강릉 신복사지(神福寺址) (0) | 2008.11.23 |
홍천 물걸리 절터((物傑里寺址) (0) | 2008.11.23 |
도동서원(道東書院) (0) | 2008.11.22 |
전주 전동성당 (0) | 2008.1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