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학자의 겨레사랑
1929년 10월 31일 당시의 명망 있는 인사 108인이 발기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한다.
이은상는 “조선인이 조선어를 학습하기 위하여 편찬한 사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취지문을 작성하였고,
이때 사전 편찬의 선행작업이 되는 한글 맞춤법의 표기법은 조선어학회가 제정하기로 하였다.
조선어연구회를 계승하여 “조선어문의 연구와 통일을 목적”으로 결성된 조선어학회는
조선총독부의 철자법개정안을 스스로 수정하여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1933년)한다.
또한 각 도별 인구 비례로 표준말 사정위원을 선정하여 사정안을 공포(1936년)하였으며
사전 편찬을 위한 어휘를 수집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하는 등 언어 규범을 정립하면서
종전의 사전편찬회의 사업을 이관하여 사전 편찬사업을 수행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되면서 1934년에는 조선어학회 주관의 한글강습회가 중단되었고,
1936년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한 시점을 계기로 조선어학회의 대중 집회가 금지되었다.
일제는 각급학교의 조선어과목을 폐지하여 조선어의 금지, 일본어의 상용을 강요하고,
1940년에는 한글 일간지를 폐간시키는 등 우리말글을 말살시키는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러던 중 1942년 8월 함흥 영생고등학교 여학생이 검거되고
이들의 은사였던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이 잡히면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발한다.
그리하여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과 한글 보급에 매진하던 한글학자들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듬해 4월까지 관련 학자 33인이 검거되고, 증인으로 붙잡혀 간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검거와 취조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조선어학회사건에 대한 함흥지방법원의 예심 판결 결정문>, 1944, 한글학회 소장
<조선어학회사건 결정문> 부분
- 결정문 中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 등 이른바 어문운동은 민족운동이며 조선의 독립을 도모한다” 부분
마침내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은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이라는 최종 판결을 받아
11인이 징역을 선고받고 이윤재(李允宰), 한징(韓澄)은 심한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조선표준어 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기념사진>
1935년 맨 앞줄 가운데에 이윤재와 왼쪽 둘째 줄에 한징의 모습이 보인다.
1945년 1월 함경도 함흥재판소의 최종 선고 결과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이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정태진은 복역을 마쳤고, 4명은 광복을 맞아 출소하게 된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수난 당한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1946년 6월 / 한글학회 소장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가운데 왼쪽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부터 민영욱, 박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
한편 이 사건의 증거물로 일제에 압수당한 사전 원고는
1945년 9월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되는데,
함흥에서 서울 고등법원에 신청한
상고(上告 : 원심原審 판결에 불복하여 판결의 재심사를 상급 법원에 신청하는 일)가
기각(棄却 : 소송을 수리한 법원이 소송이 적법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무효를 선고하는 일)되면서
재판의 증거물로 운송되었다가 방치된 것이라고 한다.
1929년부터 시작된 조선어 사전 편찬의 결실인 원고지 2만 6천5백여 장(원고지) 분량의 방대한 원고였다.
이 원고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압수당한 지 3년만에 다시 조선어학회로 돌아온 것이다.
『조선말 큰 사전』이 민족 문화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언급하고
1929년부터 1947년까지의 사전 편찬 과정 중 겪은 조선어학회 회원들의 노고와
일제의 탄압 그리고 각계 인사의 조력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갖은 우여곡절을 겪고, 『조선말 큰 사전』은 1947년 10월 역사적인 첫 권을 세상에 선보이고
1957년 6권이 완간되었다.
『조선말 큰 사전』원고는 현재 국가지정기록물 제1호의 지정을 앞둔 뜻 깊은 민족 유산이다.
<조선말 큰 사전>, 조선어학회가 만든 사전,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 사전> 제1권의 머리말 부분
1. 조선 광문회의 말모이 만들기
1910년부터 최남선이 경영해 오던 조선 광문회(光文會, 1910년 설립하여 고전 간행 및 보급,
민족문화와 사상의 기원에 관한 연구모임)에서는
1911년부터 주시경(周時經)과 그의 제자인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모며
말모이(사전)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표제는 없으며 내제는 가로쓰기를 한『ㅁㅏㄹㅁㅗ l』로 되어 있다. 개인소장
<깁더조선말본>
1924년 김두봉이 저술한 국어문법책으로, 큰사전의 편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말모이 편찬사업을 주도했던 인물 중의 하나인 김두봉은
『조선말본(1922)』의 부록 ‘표준말’의 일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서양 각국에는 라텐말로 된 학어를 자긔네 말로 옴기면 돌이혀 어렵음을 끼칠 만큼 자리가 잡혀
그리하거니와 우리는 아직 말모이(사뎐)도 하나 되지못하(한불자뎐이나 한영자뎐이나 조선어사뎐
따위는 표준 잡을 만한 말모이로 볼 수 없음)여 표준말 한 마디도 잡히지 못한 이때에 어느 곧에서
채쪽맞고 뛰는 셈으로 서양말을 한문으로 옴겨 온 그것을 생판 서투르게
우리사람에게는 냄새도 맞지않게 그대로 음만 따서 표준말을 뎡하는 것이야 어찌될 일이리오.”
김두봉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편찬된『조선어사전』을 표준으로 삼을 가치가 없다고 혹평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광문회의 사전편찬 사업은 서너 해 계속되다가 주시경의 작고(1914)와
김두봉의 해외망명으로 인하여 사전 편찬이 지속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원고 카드는 3ㆍ1운동 이후 대부분 분실되었고
이 카드의 나머지 일부는 뒤에 계명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2. 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1927년 1월 박승빈을 중심으로 조직된 계명구락부에서
구 황족 이강 및 사회명사 몇 사람으로부터 일시 원조금을 얻어
최남선, 정인보, 변영로, 임규, 이윤재 등이 조선광문회의 남은 원고를 찾아 사전 편찬을 시작하였다.
계명구락부는 1년간 운영되면서 편찬위원들의 연이은 사퇴로 곤란을 겪었으나
박승빈의 꾸준한 노력과 여러 인사들의 협력으로
총독부가 발간한『조선어 사전』의 어휘들을 모아 주해를 붙이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철자법이나 표준어에 대한 기초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전 편찬의 경비가 부족하여
계명구락부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은 1934년 중지되었다.
3. 조선어사전 편찬회의 결성
조선어연구회는 1921년 창립된 이래
당시 불합리한 시대 환경 속에서 국어 국문의 연구와 정리에 힘쓰는 한편,
사전 제작의 이상을 품었으나 몇 사람의 힘만으로 완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29년 봄에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한글운동을 추진했던 이극로와
독지가 이우식, 김양수, 김도연 등을 비롯한 사회 각계인사의 지지를 구하여
사전 편찬 사업을 민족의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1929년 10월31일 한글날 기념일에
서울 수표동의 조선교육협회회관에 모인 각계 인사 108명은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이은상이 작성했다고 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 결성 취지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혔다.
“한영자전이나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어로 대역한 조선어사전은
모두 외인이 조선어를 학습하기 위하여 평성된 사전이요,
조선인이 조선어를 학습하기 위하여서 편찬한 사전이 아닐뿐더러,
언어와 문자에는 아무 합리적 통일이 서지 못한 사전들이다.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으로는 문화의 기초가 되는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을 편성함에 있는 것이다.”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사전편찬을 결의한 편찬회는
1930년부터 조선어연구회와 업무를 분담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36년 3월20일 사전편찬히 측과 조선어학회 측의 합의하에
종전의 사전편찬회는 발전적 해소를 하는 동시에 사전편찬 사업 일체를 조선어학회가 전담하여
1957년 큰사전 완간까지 업무를 지속하게 된 것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역사관 한글실, 유호선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77회, 제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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