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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약초인 향약(鄕藥)을 기반으로 당대 최고의 의약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중국의학의 한계를 넘어선 동의학(東醫學)을 수립하고 사람의 생각과 겉모습을 형태별로 나누어 사상체질의학이라는 새로운 의학의 패러다임을 제창함으로써 독특한 전통의학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한의학은 한때 서양의 물질문명에 압도되고 일제의 한의학 말살정책으로 인하여 존폐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전통과학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의료현장을 지키며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는 보건의료시스템이다.
향약은 오랜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찾아낸 약초의 효용과 익숙하게 경험한 의약지식이 어우러져 이루어낸 우리만의 독자적인 약재응용법을 말한다. 고려 말 몽고의 침입과 대외무역의 단절로 인하여 약재 수급이 어려워지자 개발되기 시작하여,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보건의약 정책의 주력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향약집성방>, 세종 15년(1433) 완성된 종합적인 향약의서
권중화, 권채, 김희선, 황자후, 변계량과 같은 신왕조의 핵심인사들이 사업에 투입되었으며, 유효통, 노중례 같은 경험 많은 의관들이 참여하였다. 향약의 주요 이론적 배경이 된 의토성(宜土性)은 ‘이득지물(易得之物), 이험지술(已驗之術)’이란 말로 대변할 수 있는데, 쉽게 얻을 수 있는 약재를 중심으로 오랜 동안 경험해 안전한 치료기법을 구사한다는 것이 대전제이다.
오늘날 중금속 오염과 잔류농약 등의 폐해로 화학약품과 보존첨가제에 물들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없어져버린 오늘날 타산지석이 될 만한 지혜가 담겨져 있다. 이 책은 또한 조선조 왕업의 통치기반인 『경국대전(經國大典)』같은 법전보다 앞서 제정했던 향약재의 약전(藥典)이라 할 수 있다.
『의방유취(보물 제1234호)』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365권이라는 엄청난 분량의 대규모 의학백과전서이다. 1445년 역사상 가장 현명한 군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집현전 학사와 의관뿐만 아니라 안평대군, 수양대군 같은 왕자들까지도 강독하고 교정하는 일에 참여했을 만큼 총력을 기울여 만든 지식창고였다. 150여종을 상회하는 중국의 고전의학명저와 고려의서들이 집약되었으며, 유사한 처방과 비슷한 내용을 한곳에 모아 압축함으로써 수백 년 누적된 의학정보를 한곳에 집적하였다.
아쉽게도 왜란 중에 대부분 산실되고 약탈된 1질이 전해져 일본 왕실도서관인 궁내성 도서료에 252책만 보존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있는 양만 해도 950여 만자, 5만종 처방이 들어 있다. 역대 중국의 처방을 모두 모아도 12만종 가량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세상에 있는 모든 약 처방을 수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전통지식을 분류하고 체계화하기 위하여 방대한 분량의 전승경험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전통방식의 기술표준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것은 훗날 허준이 전쟁의 와중에서도 혼자서 동의보감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자원이 되었다.
<동의보감>, 선조 30년(1597) 임금의 병과 건강을 돌보는 어의 허준이 선조의 명을 받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의학서적을 하나로 모아 편집에 착수, 광해군 3년(1611)에 완성하고 광해군 5년(1613)간행한 의학서적으로 보물 제1085에 지정되어 있다.
왼쪽 - 동인도(19세기), 경혈과 경락을 표시한 그림으로 필사본이며, 앞면과 뒷면 각각 1장씩 2장으로 구성됨 오른쪽 - 인체의 장기를 그린 장부도 1점.
동의보감 목판인쇄, 기혈순환이 통로를 표현한 신형장부도(身刑臟府圖)
옛 내의원터(창덕궁) 내부에 있는 약절구
2008년 8월 문화재청은 규장각과 장서각 소장 동의보감 초간본을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 고시하였다. 이미 지정되어 있던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보물 제1085호)과 함께 3가지 초간본이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기에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관련 학계와 온 국민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올 3월에는 목활자로 찍은 동의보감 초간본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 신청하였고 국제유네스코의 심의를 거쳐 등재가 확정되면 명실상부 온 인류의 과학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동의보감은 병이 생기기 전에 치료한다는 전통의학의 관념을 확장하여 양생의 개념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동아시아 전통의학의 한 특징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양생 개념의 발전은 질병 증상을 위주로 인체를 단지 치료의 대상으로서만 간주하던 것에서 벗어나 인간의 몸을 중심으로 치미병(治未病)의 사고관을 강조함으로써 예방의학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적절한 것이며, 현대 의학에서 질병이 생겨난 이후 질병 치료에 목적을 두는 것에 반하여 매우 선진적인 의료사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사용된 것이며, 동의보감에도 치통이나 외상에 진통제로 사용하였다. 또 동의보감에는 귀울림(이명증)에 한쪽 귀에 자석을 갖다 대서 치료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는데, 오늘날 핵자기공명장치와 같은 자장을 이용한 다양한 진단법과 치료기법이 개발된 것을 보면 시대를 앞선 기법이 적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동의수세보원>, 이제마의 사상의학설을 집성한 저서로 1921년 김용준이 편집한 것
동무 이제마(1837∼1900)가 창안한 사상체질의학서이다. 그는 서출로 태어나 진정한 무인으로 남고자 했으며, 구한말 도성의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을 지냈으며, 진주현감과 고원군수를 지내면서 환자를 돌보는 등 의학에 뜻을 두었다. 말년에 함흥의 향리에서 평소의 구상을 정리하여 4권4책의 동의수세보원을 집필하였는데, 당시 음양오행설에 집착해 있던 기성의학설에서 벗어나 인간의 체질을 4요소별로 구분하고 인간의 질병이 육신만이 아니라 평소의 마음가짐과 개인을 둘러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갈파하였다. 자기화 된 심성학으로 자리 잡음에 따라 말기(末技)로만 여겼던 의학이 실상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당시 콜레라, 성홍열, 홍역과 장티프스, 페스트 같은 열성전염병이 세계 전역을 휩쓸었으며, 전인구의 5%가 사망에 이르는 전염병의 시대였다. 이제마는 한나라 때 전염병 치료의 기록인 상한론을 깊이 연구하여 각종 질병의 증상이 체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현된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나아가 체질에 따라 장부 기능에 편차가 있고 발생증상의 변화규율이 달라짐을 임상에 적용하여 일찍이 역사상 유례가 없던 체질의학설을 주창하였다. 과연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유전체 연구가 열기를 더하고 맞춤의학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사상체질의학이 현대의학의 맹점을 보완할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사진, 서울약령시 한의약박물관 - 월간문화재사랑, 2008-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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