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찾아 떠나고(답사)

강화도

Gijuzzang Dream 2008. 10. 13. 13:55

 

 

 

 

 

 


강화의 풍광은 묘연하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평야가 너르고,

푸근한 산줄기가 적당히 이어져 중심에 들면 섬처럼 보이지 않는다.
강화의 성산인 마니산에 오르면 비로소 들과 바다의 풍광이 한껏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갯벌과 인천바다가 펼쳐지고 평야너머 북쪽으로는 북녘 땅이 어른거린다.

긴장감이 느껴질 만도 한데 어찌된 일인지 평온하기만 하다.

북녘과 마니산 사이의 한껏 아늑하게 펼쳐진 평야 때문이리라.

강화를 말할 때 우리 땅의 유구하고도 아린 역사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강화는 한민족의 긍지와 회한이 함께 묻혀있는 섬이다.

멀리 5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단군이 제단을 쌓고 천제를 지내던 참성단이 이곳에 있으며,

곳곳의 고인돌 유적들은 선사시대의 오랜 인적을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이곳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던 저항의 섬이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에 맞서 수도를 옮겨와

39년간 처절한 장기전이 치러졌으며,

그 때 팔만대장경이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인조에 이르러서는 후금에 의한 정묘호란이 발생하였고

또다시 조정의 피난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어진 병자호란으로 최후의 저항지였던 이곳마저 함락되고

마침내 치욕의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된다.

 

근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함대의 병인양요, 미국 함대의 신미양요, 일본인들의 운요호 사건 등

열강들의 조선침략 발판을 위한 격전지가 되었다.

말 그대로 강화도의 역사는 한국사의 축소판이며

섬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재들은 모두가 격전과 저항의 처연한 흔적들이다.

유난히 붉은 강화도의 노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편 섬 남쪽의 동막리, 여차리 해안은

생태계의 보고(寶庫)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잘 보존된 갯벌로 알려져 있다.

느즈막한 노을풍광은 섬의 서쪽 어느 곳에서 보든지 아름답기 그지없다.

주변의 석모도와 더불어 서울근교의 손꼽히는 낭만주의 여행지로도 각광 받고 있지만

이곳을 찾게 되면 누구든 숙연한 마음 한 자락 지녀볼 일이다.


나라의 풍파와 맞서던 저항의 땅, 강화의 국방유적

강화산성과 고려궁터

 

강화도는 고려시대 39년간의 몽고항쟁이 이루어진 곳이다.

고려궁터(사적 제133호 강화고려궁지)는 몽고를 막아내기 위해

고려왕조가 송도에서 도읍을 옮겨와 세운 궁궐이다.

39년 동안 고려의 중심부가 되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규모는 작지만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졌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인조 때에는 이 곳에 외규장각이 설치되었었는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종종 반환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외규장각 도서가 바로 이곳에서 유실된 것이다.

고려궁터는 현재 외규장각이 복원되었으며 조선시대 관아건물인 유수부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강화산성은 원래 내성과 중성, 외성 등 삼중성으로 쌓았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내성뿐이고 성의 둘레는 약 1.2㎞ 정도다.

1259년 몽고가 화친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이 강화산성을 허무는 것이었다고 하니

이 성의 듬직스러운 견고함을 알만 하다.

조선 초기에 재축조 되었다가 병자호란 때 다시 파괴되었다. 사적 제132호로 지정되어있다.

 


해협을 따라 둘려진 근대 격동기의 유적 - 진과 보, 돈대

 

강화와 김포 사이의 해협은 서울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해협을 지나면 곧바로 한강을 거슬러 서울에 닿았던 것이다.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고려시대부터 수비대가 상주하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군사시설이 들어선 것은

조선 효종과 숙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국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조정은 강화와 김포의 해안 곳곳에

진과 보를 두고 여기에 소속되는 돈대와 포대를 구축했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 사이에 진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갑곶돈대는 1232년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 1270년까지 몽고와의 항쟁을 계속하며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한강을 거슬러 서울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서

몽고를 비롯한 침략군들에게는 꼭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이다.

 

강화해협의 진지들은 근대 격변기에 접어들며 주요 격전의 장이 되었다.

운요호 사건이 이곳에서 있었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치열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

특히 신미양요는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 군사들이 전멸할 정도로 처절했는데,

초지진의 성벽과 나무에는 신미양요 때의 상흔이 아직도 남아있다.

당시 강화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과 8곳의 포대, 8곳의 봉수대 등이 있었으며

현재는 광성보(사적 제227호), 초지진(사적 제225호), 덕진진(사적 제226호)과

소속 돈대와 포대가 남겨져 있다.

 


단군이 제사를 지내던 성산 마니산과 고인돌 유적군

 

마니산(468m)의 원래 이름은 마리산이다.

마리란 머리의 옛 말로 강화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땅,

즉 제일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이 산의 꼭대기에는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참성단(사적 제136호)이 자리하고 있다.

참성단은 지름 4.5m의 둥그런 원형기단 위에 사방 2m의 네모난 제단이다.

 

참성단 제사는 삼국시대를 거쳐 조선시대까지도 계속 이어졌으며

지금도 개천절에 단군을 위한 제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참성단의 존재는 먼 고조선 시대로부터 강화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곳의 오랜 역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또 하나의 유적은 강화도 전역에 분포된 고인돌이다.

모두 80여기가 분포되어 있는데

하점면 부근리의 강화지석묘(사적 제137호)와 오상리, 삼거리 고인돌군이 볼만하다.


한편 마니산, 정족산과 더불어 강화의 세 꼭지점으로 불리우는 고려산(436m)은

봄철 진달래 산행과 가을철 억새 산행지로도 유명하다.

낙조봉 정상부에 펼쳐진 드넓은 억새군락과 장엄한 일몰풍광으로 강화 제8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고구려 장수왕때 창건한 적석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고구려 장수인 연개소문이 태어났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강화 제일 사찰 전등사와 문창살이 아름다운 정수사

 

전등사는 온수리 정족산 기슭 삼랑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신라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확실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25대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옥으로 만든 등을 하사했다 해서

전등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군량미를 보관하던 군창터가 남아있는 것을 보아

전시에는 기지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대웅전 추녀 밑에 벌거벗은 나신상이 쪼그리고 앉아

처마를 떠받들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전설이다.
광해군 6년에 전등사에 불이나서 다시 짓게 되었는데

공사를 하던 목수가 아랫마을 주막집 주모를 사랑하게 되었단다.

목수는 날마다 일해 받은 품삯을 그 주모에게 맡겨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돈을 갖고 먼 곳으로 도망을 치고 말았다.

목수는 화가 나서 법당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 채 처마를 떠받드는 여자 모습을 조각해 놓았다.

부처의 좋은 말씀을 듣고 여인이 뉘우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전등사에 비해 작은 사찰인 정수사는 마니산 자락 동쪽 산허리에 숨겨져있다.

신라 선덕여왕 8년(639) 회정선사가 마니산 참성단을 참배한 후 세웠다.

정수사 법당이 보물 제16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꽃무늬가 새겨진 문창살이 특히 아름답다.

남정우

- 월간문재사랑, 2008-10-13 

 

 

 

  

 

강화 나들길

 

고려병사, 소년 철종 … 과거 찾아가는 시간여행

 

1 강화 나들길.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옛말엔 틀린 것이 없다. 나름대로 걷기 좋아하는 ‘워커홀릭(walkerholic)’이라며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는데, 정작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렇게 걷기 좋은 길이 있을 줄이야. 강화도의 나들길 이야기다.

 

제주에 올레가 있고 지리산에 둘레길이 있다면 강화도에는 나들길이 있다.

올레와 둘레길, 나들길 모두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황홀한 길이지만, 강화의 나들길은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도권에서 자동차로 1시간~1시간30분이면 닿는 거리라서

그야말로 언제든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딘가 멀리 걷기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허할 때면 언제라도 봇짐 하나 둘러메고 가볼 수 있는 호젓한 길이 그리웠다.

그래서 강화의 나들길을 만난 반가움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4개 코스의 아름다운 도보여행길

 

강화의 아침은 우렁찬 천둥 번개로 시작했다.

부스스 눈을 뜨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찬찬히 보면서

오늘 걷기는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나겠구나 싶어 아쉽기는 했지만 속상하진 않았다.

여행을 다닐수록 길에서 만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한 순응도는 높아졌으니 말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

‘이번 여행은 나들길과 인연이 아닌가 보다. 다음 주에 다시 와볼까’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접으려는 찰나, 세상을 뒤덮고 있던 회색 구름이 밀려가고

파란 하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인생처럼 여행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나들길 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용흥궁 공원에서 나들길 1코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대를 비롯한 수많은 유적이 있어 ‘노천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강화도. 게다가 생태 갯벌과 아름다운 자연까지 펼쳐져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을 지녔다고 한다.

 

올해 강화도시민연대가 중심이 돼, 강화의 아름다운 도보여행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금씩 강화의 아름다운 걷는 길, 나들길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나들길은 모두 4개 코스인데, 제각기 특징이 있다.

 

1코스는 역사를 따라가는 ‘역사문화의 길’,

2코스는 강화 바닷길을 따라 용당돈대 · 화도돈대 · 초지진 등을 거쳐 가는 ‘바닷가 돈대길’,

3코스는 삼랑성에서 시작해 전등사와 석릉 · 가릉 · 정제두묘까지 가는 ‘고려왕릉 길’,

그리고 건평나루·건평돈대·외포선착장까지 강화 서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 길’이 4코스로,

모두 3~4시간이면 뿌듯한 걷기여행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역사와 함께 걷는 ‘심도로 가는 길’

 

그중에서도 첫 번째 코스인 ‘역사문화의 길’은 시간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근대까지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다. ‘역사문화의 길’은 흔히 ‘심도로 가는 길’이라고도 불리는데

한 세기 전 화남 고재형 선생이 1년 동안 강화도를 걸으면서 남긴 시집 ‘심도기행’에 나온

길이다. 여기에서 ‘심도(沁島)’는 강화의 옛 이름이다.

 

‘역사의 길’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1코스의 출발지도 용흥궁이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초가.

‘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이 등극하기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이곳에 빛이 비쳐서

사람들이 ‘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용흥궁’ 이름의 유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출한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2 성공회 강화성당. 3 북문. 4 마을 따라 걷는 길. 5 연미정.

 

왕이 되기 전에 이렇게 소박한 곳에서 살았다니, 과거로 돌아가 젊은 철종을 그려본다.

용흥궁을 둘러보고 돌계단을 올라가니,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건물이 서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이다. 뭐랄까, 한복 입고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아낙네를 본 기분이랄까.

성당인데, 절에 온 듯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강화성당은 한옥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서 만든 성당이다.

마당의 종은 사찰에 있는 범종과 비슷하지만,

내부 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 공간 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1893년 영국성공회 신부 워너가 선교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중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한국형’으로 지은 성당이다. 한동안 성당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을 또 본 적이 있던가,

마음 속에 일어난 울렁임이 쉬 진정되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3분쯤 걸었을까.

고려의 실낱같은 운명을 지켜온 고려궁지가 나왔다.

이곳은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39년간 머물던 궁터.

소박한 궁터를 돌아보면서 이번에는 고려시대로 날아가봤다.

이 궁터에서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짠했다.

고려궁지에서 나오니 수령 680년 된 은행나무가 여행자를 맞았다.

680년이라니, 80세까지 산다 치더라도 8대가 넘는 세대가 이 은행나무와 함께 사라졌겠구나.

 

역사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북문 앞으로 향했다. 북문 앞에는 판화 찍기 체험이 마련돼 있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직접 잉크를 묻혀서 찍은 후 배낭 뒤에 예쁘게 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판화로 찍은 서로의 작품을 달아주며 웃음을 나누는 모습이 상큼했다.

 

 

‘나와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귀한 길

 

북문에 올라 성곽을 따라 넘어가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곳을 만난다.

강화가 발아래에 펼쳐진 시원한 광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여기에서는 누구라도 카메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숲길.

북문에서 꼭대기까지 오르는 약 5분간의 오르막길만 참고 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밤나무를 비롯해서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나무들이 울창한

건강한 숲이 나타난다.

숲 향기를 맡으며 걸어 내려가면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오읍약수터가 이어진다.

오읍약수터의 물은 생수통에 가득 담아왔던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받게 할 정도로 맛이 좋다.

 

이제부터는 슬슬 강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동네에 진입하게 된다.

마을길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알뜰하게 가꾸어놓은 마당에는 가지와 오이와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논밭과 길가의 코스모스는 가을이 왔음을 알려줬다.

잠시 눈을 감고 내리는 햇살을 그대로 맞았다. 한가로운 오후의 작은 평화.

마음이 이렇게 평화로워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데,

순간순간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바람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으로 몸과 마음을 충전하면서 그동안 흩어진 마음을 다독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1코스의 종착지인 연미정에 도착했다.

땀을 바람에 날리면서 연미정 앞에 펼쳐진 강 너머를 쳐다봤다.

연미정에서 본 북쪽 마을은 강북강변로를 달리다 보는 63빌딩보다도 가까웠다.

이렇게 지척에 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바라만 보고 있다니.

역사의 흔적을 돌고 돌아서, 결국 오늘의 현실과 마주했다.

 

나들길 1코스는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니었다.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나섰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우리’를 생각하게 한 귀한 길이었다.

 

[ 여행정보 ]

◎ 강화 나들길 1코스 : 심도로 가는 길(13km, 4시간 소요)
용흥궁 공원(출발) → 용흥궁 → 강화읍 성공회 성당 → 고려궁지 → 은행나무 → 북관제묘 → 한옥마을 → 강화향교 → 은수물 → 북문 → 북장대 → 오읍약수 → 황형장군묘 → 월곶리 갈림길(2.9km) → 연미정(종착지)

 

◎ 강화 나들길에 대한 자세한 정보

 ‘강화 나들길’ 공식카페 http:// cafe.daum.net/flowalongtheroad 참조

◎ 맛집 :

고려궁지 부근에 있는 왕자정(031-933-7807)은 고소한 ‘묵밥’이 유명하다.

김포를 통해 강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한우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는

월곶면사무소 인근의 ‘다하누촌’(031- 984-1170)을 추천할 만하다.

채지형 여행작가 www.traveldesigner.co.kr

-  주간동아,  2009.09.29 705호(p90~91)